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XVIII)
말씀: 열왕기상 19:13-21
요절: 열왕기상 19:21
세상이 배교로 치닫는 상황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성경적인 믿음을 찾아 볼 수 없고, 순수한 신앙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제 나만 홀로 남았는게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 자신의 백성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만약 이 땅에 하나님이 남겨 두신 백성이 없다면 이 땅은 바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의인(義人)이 없는 곳에 주님의 심판이 집행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엘리야의 항변에 답하시고, 그의 잘못을 고쳐 주시는 장면입니다. 이 땅에 남은 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에 힘을 얻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이 소리를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서 굴의 어귀에 서매, 보라,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 주님의 고요한 작은 음성을 들은 엘리야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은 창조 때부터 모든 것에 스며 들어있고, 신성이 계시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접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들보다 고요한 작은 음성을 통해서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전능하신 능력은 내 마음에 고요하게 속삭이는 작은 음성을 통해 실제적으로 와 닿게 됩니다. 물론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주님의 손길을 깨닫고, 실패를 통해 뉘우치게 되지만 그런 것들로 얼굴을 감싸지는 못합니다.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말씀이 고요한 작은 음성으로 나에게 임할 때 변화받습니다. 예화) 어떤 형제님이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했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어 고민하다, ‘십자가 수련회’를 4박 5일간 다녀왔습니다. 그는 수련회를 가면서 거기서 뜨거운 체험을 하기를 기대했습니다. 표적은 아니더라도 영적 각성이나 큰 은혜가 임하기를 원했지만 아무런 감동도 확신도 없이 수련회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매우 실망한 채 작은 골방으로 들어가 엘리야처럼 하나님께서 아무 응답도 없는 것에 대해 불평을 했습니다. 그 때 고요한 작은 음성이 임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그 형제는 이후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세미한 음성으로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수련회에서 뜨거운 체험을 했다는 간증을 한 형제들이 차례대로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고,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표변(豹變)했지만, 그 형제는 언제나 세미한 음성을 통해 말씀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에서 불과 강한 바람과 지진 같은 표적적인 역사를 구하는 대신 말씀의 사역에 전념한다면 훨씬 더 강한 믿음을 지닌 성도들을 길러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강한 바람과 같은, 바위를 부수는 불, 땅을 쪼개는 지진같은 역사를 통해서 믿음을 갖기 보다 매일 읽는 성경과 묵상, 매주 듣는 설교와 성경 공부를 통해서 조용하지만 깊은 믿음의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불과 강한 바람, 지진 같은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볼 때 이런 것은 대부분 완악한 마음, 회개치 않는 혼들을 다룰 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고요하고 작은 음성은 상하고, 깨어진 혼들에게 임하시는 주님의 사역 방법입니다.
[엘리야가 이 소리를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서 굴의 어귀에 서매, 보라,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13). 주님은 엘리야에게 9절에서 처음 하신 질문을 다시 한번 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13). 주님의 임재를 체험한 엘리야는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처음 호렙산 동굴에 도착해서 주님에게 답한 그대로였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하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아합이나 이세벨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지금 이 자리에 주님을 대면하고 있는 엘리야 혼자였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했느냐?(과거)고 지난 날의 잘못에 대해 추궁하지 않으셨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미래)고 그의 vision에 대해서 물어 보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물음은 모든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자신에게 주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 사역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이런 진지한 답변이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는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14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주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심히 질투하였사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들을 헐며 칼로 주의 대언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제거하려 하나이다.](14). 이것은 주님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될 수 있어도, 주님이 물은 것-[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13)에 대한 답은 될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질문에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을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했던 일과 지금 하는 일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말하지 않아도 이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엘리야의 말에는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14) 이것은 엘리야의 생각입니다. 물론 많은 주의 대언자들이 죽었고, 공적 무대에 나와서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없을지 몰라도 여전히 주의 종들은 남아 있습니다. 지금 이곳 LA에도 주님의 바른 말씀을 갈구하고, 생명의 말씀을 희구하며, 진리에 목말라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다마스커스의 광야로 가고 거기에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시리아의 왕이 되게 하고](15). 주님은 엘리야의 답변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에게 새로이 해야 할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잘못을 범한 성도들을 돌이키시고, 회복하시는 방법입니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왔던 길을 돌아가야 했습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실 때,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하라...](계2:5a). 엘리야는 실패한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가 도망쳐 걸어 왔던 광야의 길로 다시 돌이켜야 했습니다. 이는 성경 전권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주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벧엘에서 주님을 만난 뒤 떠났던 야곱은 결국 다시 벧엘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예레미야 3:12, [주께서 말씀하시되, 타락한 이스라엘아, 너는 돌아오라. 나는 긍휼이 많은 자니 그런즉 나의 분노가 너희 위에 임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나는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느니라.](렘3:12).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 이런 예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처음 부르신 그 곳으로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요21:16)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이는 영혼을 소생시킬 뿐만 아니라 새로이 주님을 섬길 일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번 실패한 사람에게 새로운 일을 다시 맡기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일을 맡기지는 않습니다. 새로이 일을 주셨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크신 사랑의 확증입니다. 주님은 제 2의 기회를 주시는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18:6-7, [주께서 내 편이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리요? 주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과 함께 계시오니 내 소원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보리라.]
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다마스커스의 광야로 가고 거기에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시리아의 왕이 되게 하고](15). 주님은 사무엘이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신 것처럼 엘리야에게 그런 영예를 주셨습니다. 이전까지 엘리야는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양육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일보다 한 명의 제대로 된 제자를 양육하는 것이 더 크고 위대한 일입니다. 엘리야는 이제 하늘을 닫고 여는 큰 일보다 사람을 세우고, 후계자를 세우는 일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관심은 일보다 사람입니다.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사역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유다나 이스라엘이 아닌 시리아의 왕도 세우십니다. 잠언 8:15-16, [나를 통해 왕들이 통치하며 통치자들이 정의를 공포하고 나를 통해 통치자들과 귀족들 곧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오늘날과 같이 투표를 통해 통치자들을 뽑는 이런 시대에도 성경이 정한 이 진리는 변함없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조국 대한민국에 바른 통치자가 나올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대로 된 통치자를 세워 주시도록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악한 통치자는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징계요, 심판입니다. 하사엘은 엘리야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다고 하지만 결코 훌륭한 왕이 아닙니다. 그는 후에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사용되었습니다(왕하8:12,28,29; 10:32,33; 12:17,18; 13:3,22).
16절을 보겠습니다.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출신의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대언자가 되게 하라.](16). 주님은 엘리야가 그토록 무서워 도망쳤던 아합과 이세벨의 종말을 고했습니다. 주님은 엘리야 자신의 손으로 아합의 뒤를 이을 왕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예후는 아합과 그의 아들 요람 왕의 군대 장관이었으나(왕하8:28) 아합 왕가를 치리하라는 명령을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합 왕의 가문을 완전히 멸했습니다. 주의 대언자들을 죽이고, 엘리야마저 죽이려고 했던 이세벨은 예후에 의해 궁궐 창 밖으로 던져짐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며, 그녀의 시체는개들이 먹어 치웠습니다. 주님은 엘리야의 원망 섞인 아합과 이세벨의 악행에 대해 어떻게 심판하실지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열왕기하 10:36, [그들이 돌아와 그에게 고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것은 주께서 자신의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예스르엘 땅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니라.](왕하10:36). 하나님의 사역을 보십시오. 역사에 수레바퀴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합 왕가를 멸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이런 일이 주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매 사건마다 이미 앞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를 대신한 대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엘리야가 자기 혼자만 남아 있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했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생각처럼 하나님의 대언자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다른 종들을 불러 엘리야를 대신할 수 있고, 엘리야가 다 이루지 못한 구원 사역을 지속시킬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 것은 이스라엘에서의 구원 사역이 하나님의 손 아래서 중단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손으로 자신을 대신할 대언자를 세움으로 대언자의 직분에서 해고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은 엄청난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내가 아니어도 주님의 사역을 할 사람이 얼마든지 세우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아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갈수록 경건한 말씀의 사역자가 줄어들고, 그 뒤를 이을 자들을 거의 양육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거대한 신학교에서 성경적인 지도자를 양육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곳의 작은 2층 골방에서 여러분들은 소리 없이 소문 없이 양육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앞의 사역자들을 대신할 엘리사가 될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17). 이스라엘은 이제 엘리야대신 엘리야가 기름부은 각기 다른 세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땅에 차례대로 심판을 베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신경쓰고 걱정한 것보다 훨씬 더 자신의 영광과 존귀함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주님은 원수들이 언제까지 승리하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택하신 세 사람을 보십시오. 시리아의 왕 하사엘, 난폭한 장군 예후, 젊은 농부 엘리사! 완전히 다른 세 사람을 주님께서 부르셔서 당시 우상 숭배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련된 일을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주님께서 준비하시고, 주님께서 택하시는 것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직업에 관계없이, 그 사람의 교육 수준과 관계없이, 그 사람의 인성과 관계없이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저는 학원 강사를 하다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무디 목사는 구두 수선공을 하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쟌 뉴튼을 부르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좀 도둑 생활을 하다 감옥에 갇혔던 죠지 뮬러를 부르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며, 각기 부름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목적대로 쓰임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2:20-21, [그런데 이제 지체는 많으나 오직 한 몸이라. 눈이 손에게 이르기를,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에게 이르기를,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하지 못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주권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사엘은 주님께 왕이 되리라는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두꺼운 이불에 물을 묻혀 왕을 질식사 시켜 왕이 되었습니다(왕하8:15). 예후 역시 주님의 말슴에 순종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열왕기하 10:31, [그러나 예후가 주의를 기울여 자기의 온 마음으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걸으려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의 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음이더라.] 이는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고, 쓰임받는 자체가 그 사람의 영성과 경건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엄숙히 경고해 줍니다. 우리 주위에는 몇 만명, 몇 십만명의 양떼를 먹이는 위대한 목사님이나 설교자, 수 십권의 책을 쓰고, 훌륭한 기독교 사업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았고,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사실일 수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름부음과 그 부르심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그 사람이 위대한 의인이요, 거룩한 사람이라는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는 하사엘이나 예후가 결코 의인이 아니었던 것과 같습니다. 만명의 성도를 가진 목사라고 해서 10명의 성도를 가진 목사보다 결코 더 위대한 것도 아니며, 목사나 부흥사라는 직책이 소위 말하는 평신도들보다 더 거룩하고 의롭다는 것을 담보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비록 기름부음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항상 자기를 돌아보고, 말씀으로 씻음을 받고, 더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17). 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엄숙한 경고요, 무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을 참으시지 아니하시고 칼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근이나 가뭄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심판입니다. 잠언 29:1,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굳게 하는 자는 갑자기 멸망을 당하되 구할 것이 없으리라.](잠29:1). 엘리야를 통해 수없이 반복된 주님의 말씀과 크신 권능에도 불구하고 마음으로부터의 회개와 변화를 받지 못했기에 하나님은 칼을 보내십니다. 이는 오늘날 모든 나라의 위정자들과 백성들이 받아야 할 교훈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칼로 심판하십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회개하지 않을 때,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자연스럽게 찾아드는 심판들이 있을 것입니다. 질병이나 사고는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주님의 심판 중에 정말 무서운 것은 나를 대적할 사람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친구 중에서나, 때로는 가족 중에서, 교회 내에서 나를 대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때 주님께 돌아가서 회개하십시오.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칠천명을 남겨 두었나니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모두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들이라, 하시니라.](18). 주님은 우상 숭배로 얼룩진 백성들 가운데 칠천명의 의인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들이 드러나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상한 심령으로 기도하고, 의로운 혼이 고통받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는 2000년 교회사를 통해서도 생생하게 증거됩니다. 중세 유럽은 모두 다 로마 가톨릭이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지만 단 한번도 맥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을 보존하셨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들어가 기독교는 더 이상 없는 것 같았던 러시아나 중국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암흑의 시기를 묵묵히 견디고 믿음을 전수해 주었다는 사실이 이 같은 본문의 말씀을 입증해 줍니다. 주님은 남은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주님은 다수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자들을 보존하시고, 남겨 두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이에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리 소들을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의 곁을 지나가며 겉옷을 그 위에 던졌더니](19). 엘리야는 호렙산의 동굴을 떠나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호렙의 동굴에서 받은 말씀을 순종해야 할 때였습니다. 겉 옷을 던진다는 것은 대언자의 직분을 수여한다는 표시입니다. 이는 후계자 계승에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바울이 디모데에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사역을 계승하는 것은 교회 존속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초의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힘으로써 사역을 계승하는 예를 압니다. 엘리야로서는 참으로 섭섭한 일일 것입니다. 아직도 한 참 일할 나이요, 앞날이 창창한데 자신을 도울 대언자가 아니라 자신을 대신할 대언자를 세워야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로서는 지금까지 행한 모든 주님의 사역보다 이 한 가지 사역이 가장 중요한 사역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겉옷을 던져 주는 일은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행위입니다. 엘리사는 농사를 짓고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가뭄의 피해를 많이 본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자신을 부를 때, 이스라엘의 사정은 대언자들을 잡아죽이는 그런 험악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농장의 주인이 되기 보다 주의 대언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귀한 교훈은 부름 받을 때의 상태입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생업인 농토에서 땅을 갈다 부름 받았습니다. 모세는 양떼를 치다가 부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밀을 타작하다 부름 받았습니다(삿6:11-16). 다윗 역시 베들레헴에서 양떼를 돌보는 중에 부름 받았습니다. 아모스 역시 양떼를 치다 부름 받았습니다(암7:6).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고기를 잡다가 부름 받았습니다. 한국에는 사역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신학을 공부한 뒤 백수 건달로 놀고먹다가 목회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학교를 나오는 것은 자기 마음이겠지만 신학교를 나온 뒤에는 부지런히 일상 생활로 돌아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생업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소들을 남겨 두고 엘리야를 따라 달려가서 이르되, 원하건대 나로 하여금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뒤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하니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무슨 일을 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부름받았을 때 곧바로 그물을 던져 놓고 주님을 따른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마4:20). 그는 황소 24마리(12겨리)를 부리는 부농(富農)의 아들이었고, 황소 2마리를 잡아 잔치에 내어놓을 수 있는 경제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 상속을 단념하고 가족들과 떠나 대언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결단입니다. 그러나 자연스런 육신의 정(情)을 먼저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누가복음 9:59-62,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거늘 그가 이르되, 주여, 먼저 내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허락하옵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오직 너는 가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라, 하시니라.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먼저 가서 내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게 하옵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엘리야는 즉각 엘리사에게 냉정한 답을 했습니다. [돌아가라. 내가 네게 무슨 일을 하였느냐? 하니라.](20). 주님께서 육신의 정에 메이는 제자들을 거부하셨듯이 엘리야 역시 엘리사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 말에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제자가 되지 못했던 사람들과 달리 엘리사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리의 소들을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니 그들이 먹으매 이에 그가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 가며 그를 섬겼더라.](21). 엘리사는 돌아가라는 엘리야의 말에 부르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주님만을 섬길 것을 가족들과 이웃들을 불러 잔치를 열어서 선포했습니다. 그가 소를 잡고, 농기구를 불살랐다는 것은 더 이상 농부로 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 준 것이며, 자신의 헌신을 돌이키지 않겠다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가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 삶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공공연히 엘리야를 잡아죽이겠다고 이미 현상 수배를 한 상황이었고, 엘리사 역시 그런 위험과 핍박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주의 기름 부음을 받고, 대언자가 되었다고 존경을 받거나 권세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한 일은 엘리야의 수종을 드는 일이었으며, 엘리야가 손을 씻을 때 물을 부어주는 천한 일이었습니다. 열왕기하 3:11, [여호사밧은 이르되, 우리가 주께 여쭈어 볼 만한 주의 대언자가 여기에 없느냐? 하니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거늘](왕하3:11). 엘리사의 사역은 엘리야의 몸종 노릇하는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나이로 태어나 주의 부름을 받았으면 뭔가 세상을 뒤흔들만한 일을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겸손과 섬김은 진정으로 위대한 자의 표시였습니다. 주님 역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을 서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요13:4-5). 가장 크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낮아져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가장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지니라.](막10:44).
[그가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 가며 그를 섬겼더라.](21). 엘리야를 따라가며 그를 섬기는 것이 바로 제자의 도리입니다. 어떤 형제들은 이렇게 큰소리칩니다. "나는 하나님 한 분만 섬기지 결코 사람을 따르거나 섬기지 않는다." 이 말은 매우 옳은 말인 것 같지만 교만과 자기 의가 충만한 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서로가 서로를 섬기도록 명하셨습니다. 섬기는 것은 결코 낮아진 증거이거나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증거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의 표징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성경적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이 가장 사람을 잘 섬깁니다. 마가복음 10:45, [이는 사람의 아들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누구를 ? 죄인된 사람들을),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음이니라.]
오늘 말씀이 주는 교훈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고요하고 작은 음성으로 말씀해 주셨고, 제 2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강한 바람과 불이나 지진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 속에서 홀연히 마음 속 깊은 곳에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나, 영혼 깊은 곳을 파고드는 강단의 설교나 묵상의 시간에 받는 교훈이나 일하다가 깨닫게 되는 말씀들을 통해 주님의 고요하고도 작은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마음을 새롭게 하고, 삶의 전기가 마련됩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말씀을 주심과 동시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말씀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말씀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이 바로 소명입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실패한 사람은 처음 자리로 돌아가는 회개에서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기름받고 세움을 입었다고 해서 그런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거룩하고 의롭게 하지는 않습니다. 하사엘과 예후를 보십시오.
엘리야는 일하는 엘리사에게 지나가며 겉옷을 던졌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곁을 지나가시며 “나를 따르라”부르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엘리사처럼 자신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일을 하지 않는 자를 주님은 결코 부르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여러분들의 농기구를 다 불태웠습니까? 여러분이 부름을 받으면 따라 다니며 남의 발을 씻기고, 손에 물을 부어 주는 일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섬김의 준비가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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