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육계 (XV)
말씀: 열왕기상 18:46-19:4
요절: 열왕기상 19:4
갈멜산에서 위대한 승리를 쟁취한 엘리야의 기도는 하늘의 문을 열었고, 3년 6개월의 기근을 종결했습니다. 이제 그는 민족적 영웅이요, 그들의 신앙과 정신적 지도자의 추앙을 받을만하였습니다. 엘리야를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내용은 정반대로 맑은 하늘 뒤의 흑암처럼 엘리야의 철저한 실패가 등장합니다. 사람은 가장 위대한 일을 한 뒤에 시험에 든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마귀는 언제 우리를 공격하며, 성도는 언제 시험에 빠지는가?에 대한 성경의 반복적 진리가 엘리야에게도 그대로 임했습니다. 다니엘이 꿈을 해석해 준 뒤에 경배를 받고, 향을 받는 죄를 범했듯이, 엘리야 역시 주님의 능력과 권능을 온 천하에 선포한 후에 두려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좌절과 실의에 빠진 성도가 있다면 이전에 내가 얼마나 신앙이 좋았던가? 기억해 보십시오. 한 때 얼마나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뜨겁게 봉사했고, 주님을 사랑했던가? 그런 아련한 기억이라도 있을 것입니다. 별볼일없는 성도들에게도 한 때가 있었고, 주님을 향한 사랑을 불태우던 시기가 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귀는 그 때 공격하고, 성도는 그때 공격을 받습니다. 그 때 넘어진 뒤로 지금까지 헤매고 있다면, 이제는 일어나십시오. 이제는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느슨해지고, 언제부터 냉랭해졌는가?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그리고 회개하십시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하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네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46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손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예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46). 산에서 기도를 마친 후 엘리야는 앞서가는 아합을 따라잡고, 그 앞에 서 달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먼저 출발했던 마차를 따라잡고 그 앞에 달리는 엘리야의 모습은 종의 모습입니다. 그의 발은 마치 육상 선수가 달리는 것처럼 빨랐습니다. 그는 허리를 동이고 아합이 왕궁에 들어가는 입구까지 앞서 길을 인도했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의 경주를 하는 모습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깊이 머리를 숙이고, 주님께 기도한 후, 주님의 손이 임할 때 달려야 합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진리의 허리 띠를 동여매고 질주하는 것입니다. 주의 손이 임했을 때, 그의 걸음은 아합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앞서 가고 있었습니다. 아합은 이디오피아의 내시와는 달리 엘리야를 마차에 태우거나,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그와 엘리야는 한 배를 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의 손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주의 손은 주의 능력과 역사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주의 손”으로 지었다고 말씀합니다(히1:10). 모세를 책망할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주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아니하는지 보게 되리라, 하시니라.] 때 (민수기11:23). 시편 89:13, [주는 능한 팔을 가지셨으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있나이다.](시89:13). 주의 손은 진노와 심판을 내릴 때도 사용되고, 높이시고 능력과 은혜를 베푸시는데도 사용됩니다. 교회에 주의 손이 임할 때 부흥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더라.](행11:21). 주의 손이 엘리야에게 임함으로 이제 이스라엘은 부흥과 개혁, 다시 제사장의 국가로 우뚝 솟는 일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갈멜산에서 온 백성이 소리쳐,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의 신앙 고백이 땅을 흔들고, 하늘을 찌를듯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갈멜산에서 예스르엘의 평지로 달려가는 엘리야 앞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성도란 주의 손에 잡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겸손히 고개를 숙였을 때 주님은 그에게 능력과 힘을 주시고 달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역사 원칙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릴 때, 주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19:1을 보십시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또한 그가 어떻게 그 모든 대언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고하니](1). 아합 왕은 갈멜산의 일을 고할 것이 아니라 그녀를 쫓아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목격했음을 증거하고, 우상 숭배를 멈추고 요시야 왕과 같은 일련의 후속 개혁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증에는 하나님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합은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심중에는 하나님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알이 얼마나 무능한 신이며, 그들의 대언자들이 불을 내리는데 실패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주 하나님이 불을 내리신 것과 잠시 후에 어떻게 비를 내리셨는가에 대한 말은 전혀 없이 하지 않았습니다. 불신자들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증거에도 믿지 않으려 하며,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합의 모습은 믿음 없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서, 설교와 간증을 듣고, 찬양과 예배를 드리면서 보고들은 이야기를, 집에 가서는 전혀 딴 소리를 하는 거짓 신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집에서, “오늘 예배 어땠어? 은혜 받은 말씀이 뭐예요? 혹시 새롭게 결단한 것이라도...도전 받은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이런 영적인 대화는 온데 간데 없고, 낮에 점심이 맛있었느냐? 반찬이 왜 그 모양이냐? 누구는 옷을 왜 그렇게 입고 왔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쓸데없는 잡담만 잔뜩 늘어놓는 사람들이 바로 아합의 후배들인 것입니다.
아합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엘리야였고, 바알의 대언자들이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래 지속된 가뭄과 기근이 아합을 회개케 하지 못했듯이,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바알의 대언자들이 죽고, 비가 내리는 주님의 은혜에도 아합은 회심하지 못했습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에 매인 아합의 마음은 지옥 불에 들어가든, 저 하늘에 올라가든 변화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전형적인 졸부였으며, 왕비에게 꼼짝 못하는 꼭두각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엘리야의 증거보다 사악한 왕비 이세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였습니다. 열왕기상 21:25, [한편 아합과 같이 자기 자신을 팔아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이는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를 부추겼음이더라.](왕상 21:25). 오늘날 아합과 이세벨 부부처럼 남편이 집에서 가장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는 가정이 늘어만 갑니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는 교회에 앞서 집에서부터 성경대로 영적 질서가 서 있어야 합니다. 남편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좌지우지되는 가정에서는 영적인 환경이 조성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는 집에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정반대로 행하는데, 주의 역사와 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은 가정을 만드는가? 아합과 이세벨의 가정을 만들어야 하는가?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는 보잘 것 없더라도 영적으로는 명문 가정을 만들어 보십시오.
19:2을 보십시오.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 때에 네 생명을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리고 더욱 더 내리기를 원하노라, 하므로](2). 이세벨의 독살스런 반응은 하나님의 종 엘리야에게 저주와 복수를 맹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은 악인들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게 합니다.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신들께 맹세하지만 결국 처참하게 죽은 사람은 엘리야가 아니라 이세벨 자신이었습니다(왕하 9:30-37). 하나님께 분노하고 그분의 종들을 향해 이를 갈고, 복수를 맹세한다해도 악인의 진노를 종식시키시는 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시편37:12-15, [사악한 자가 의인을 치려고 꾀를 꾸미며 그를 향하여 자기 이를 가는도다.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이는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시기 때문이로다. 사악한 자가 칼을 뽑고 자기 활을 당겨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쓰러뜨리며 행실이 올바른 자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들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심장을 찌르고 그들의 활들은 부러지리로다.](시37:12-15).
19:3을 보십시오. [그가 이것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 종들을 거기에 남겨 두니라.](3). 지금까지 엘리야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슨 일인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명의 위험을 감지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처분을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 했습니다. 엘리야의 눈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를 바라보는 대신 분노와 적의에 가득찬 왕비 이세벨에게 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이요,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반드시 덫에 걸립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려니와 누구든지 주를 신뢰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25). 엘리야는 스스로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추앙 받는 아브라함이 아내를 두 차례나 누이라고 속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창20:11). 이삭이 아버지와 같이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거짓말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창26:7).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음성에 순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15:24). 다윗이 필리스틴으로 도망가 입에 침을 흘리며 미친 짓을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삼상27:1,11). 사울이 자기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선포했으면서도 십자가에 처형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면 반드시 올무에 걸리며, 죄에 떨어집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 하라.](마10:28). 베드로가 주님을 3번이나 배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두려웠고, 자신의 생명을 자신이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 특히 성도가 살고 죽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사실을 신뢰한다면 독기에 찬 이세벨의 말에 놀랄 필요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를 모든 두려움에서 구원해 줍니다. 이사야 12: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로다. 내가 그분을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 여호와께서 나의 능력이시며 나의 노래이시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또한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사12:2). 이사야 26:3, [주께서는 마음으로 주를 굳게 의지하는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사26:3). 주님을 신뢰하는데서 떠나는 순간 평강은 수증기처럼 증발되고, 불안과 두려움이 폭포수처럼 몰려 드는 법입니다. 시편 125:1, [주를 신뢰하는 자들은 시온 산이 움직이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같이 되리로다.], 잠언 16:20, [....누구든지 주를 신뢰하는 자는 행복한 자니라.] 잠언 18:10, [주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로운 자는 거기로 달려가 안전을 얻느니라.]
다시 3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것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 종들을 거기에 남겨 두니라.](3). 엘리야가 본 이것이 무엇입니까? 엘리야는 자신의 사역이 실패한 것을 보았습니다. 갈멜산에서 보여준 백성들의 반응은 평지에서 그대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왕궁으로 달려가 이세벨을 몰아내고, 바알의 산당과 제단을 무너뜨리는 일련의 후속 조처가 전혀 없었습니다. 큰 기대를 안고 달려서 내려왔건만 그가 본 것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냉혹한 현실이었습니다. 이 때 사람은 절망합니다. 힘들게 수고해서 열매를 거두려할 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걷지 않고, 보는 것으로 걷는 것은 실패와 좌절의 길입니다.
엘리야가 본 것은 이세벨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고, 아합 역시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450명의 바알의 대언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이세벨이 두려워하고 기가 꺾여야 하는데, 도리어 기세 등등하게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맹세를 하니 엘리야는 겁에 질려 버렸습니다. 악인이 던지는 위협적인 말에 엘리야는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주의 손이 임하여 신나게 달려왔던 그 걸음걸이로 이제는 정신없이 도망가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도가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성령을 주실 때뿐이다’란 사실을 절감합니다. 전에 엘리야가 보여준 믿음과 담대함은 엘리야 자신의 성품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산물이란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 진리를 향한 큰 열심과 용기를 지닌 사람도 그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두면 연약하고 겁 많은 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John Gilles).
[그가 이것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 종들을 거기에 남겨 두니라.](3). 엘리야는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홀로 남아 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이 말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 이미 백성들 앞에서도 언급했고, 주님을 만날 때마다 동일한 말을 반복했습니다. 주님께서 엘리야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시기까지 하셔야 했습니다. <아니니라. 7000명이나 있느니라.> 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오늘날도 자신의 희소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이 없으면 교회가 망할 것 같아, 교회를 기반에 올려놓고 떠난다”는 말 같지도 않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교회가 문을 닫을 것 같아 ...어쩌구 저쩌구...” 해대는 오만은 교회마다 있습니다. 자기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역이 부도라도 날 줄 아는 사람들의 몰지각함은 정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주님이 친히 주관하시고, 경영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시선이 십자가의 주님, 부활의 주님,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사람들의 얼굴이 보여지기 시작하면 갖가지 부작용과 잠복되어 있던 영적 질병들이 다 튀어나오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는데서 눈을 돌리면 내일 이맘 때 있게 될 일들에 대한 염려로 오늘 즉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십자가를 보는 눈이 흘려질 때, 누구라도 영적 판단력은 흐려지게 됩니다. 천하의 엘리야라 할지라도 그는 속절없이 도망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북왕국을 떠나 유다의 브엘세바까지 달렸던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위대한 승리를 쟁취한 엘리야가 산에서 내려온 당일에 바로 도망을 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승리의 달음질과 패배의 도주길이 한 날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사역을 과대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평지에 내려와서도 악의 세력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에서 무혈입성이란 없습니다. 엘리야는 마귀의 역습을 당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서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큰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작은 싸움에서 저절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마치고,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엡6:13). 그는 협박을 받고 나서 믿음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의 협박과 도전을 받았으면, 주님 앞에 그 문제를 기도하고 뜻을 구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 탈주를 결정해 버렸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믿음에서 떨어지고, 기도의 사람이 기도를 하지 않는 이런 역설적이고도 모순적인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성도의 기도에 크게 응답하셨을 때 성도는 우쭐대거나 교만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편 2:11, [주를 두려워하고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11).
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가 스스로 광야에 들어가 하룻길쯤 가고 로뎀나무에 이르러 그 밑에 앉아 죽기를 스스로 구하여 이르되, 오 주여, 이제 충분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여 주시옵소서. 이는 내가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기 때문이니이다, 하고](4).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그렇게 신속하게 도망을 갔던 엘리야가 지금은 죽여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불신과 두려움은 영혼의 평안이 없고, 일관성이 없고, 정신이 없는 법입니다. 주님께 자신을 죽여달라고 기도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민수기 11:14,15, [이 일이 심히 무거워 나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대하실진대 원하옵나니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었거든 즉시 나룰 죽여 나로 하여금 내 비참한 모습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그는 사역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지쳤던 것입니다. 요나 역시 죽기를 기도했습니다. 요나서4:3, [오 주여, 그러므로 이제 주께 간청하건대 내게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기 때문이니이다, 하니라.] 주의 일을 수행하다 지치고 힘들어 다 때려치우고 싶은 목사들이 어디 한 두 명이겠습니까? 죽기를 구하지는 않더라고 멀리 도망이라도 가 버리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시편 55:6,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 내게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내가 멀리 날아가 안식하리로다.](시55:6). 제 친구 목사들 중에서도 이런 고충을 자주 토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로 저도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수가 적으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똑 부러진 ‘소수 정예의 성도’라도 되어야 하는데, 성경도 들고 오지 않고, 기도 모임도 오지 않고, 자기의 작은 일상사보다도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리는 설교와 예배를 볼 때면 내가 지금 사역하고 있는지, 교회 놀이하고 있는지 분간이 안갈 때도 있습니다. 바닥을 기어도 이렇게 바닥을 길 수가 있나? 생각하면 돌아버릴 지경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셔야 위로가 되고 힘을 얻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불쌍히 여길 때 마음이 어두워지고, 세상이 원망스럽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지며,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언제나 죽음이 곁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적이 없습니까? 로뎀 나무 아래에서 지나간 날들의 한(恨)을 돌이키며 곱씹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매 순간,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소서,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주께서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구합시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광야에 들어가 하룻길쯤 가고 로뎀나무에 이르러 그 밑에 앉아 죽기를 스스로 구하여 이르되, 오 주여, 이제 충분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여 주시옵소서. 이는 내가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기 때문이니이다, 하고](4). 엘리야의 기도는 처절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가뭄을 선포하고, 불을 내리고, 다시 비를 내리는 이런 일로도 이스라엘의 부흥에 실패했음을 보고, 이전에 대언자들도 하지 못한 일이라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기대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엘리야는 계속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반복함으로써(10,14)절 더 이상 대언자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해고 통지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그는 회개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반복했습니다. 주님은 16절에서 [...또 아벨므흘라 출신의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대언자가 되게하라.](16). 엘리야는 대언자로서의 사역을 접어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엘리야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대언자를 세울 수 있으시며, 생명이 죽는 것이 싫다고 하면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 다른 종을 세우실 것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내가 잘나서 주님의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도망자 엘리야와 달리 엘리사는 아람 왕이 자기를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을 때도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열왕기하 6:15,16, [하나님의 사람의 종이 일찍 일어나서 나가보니, 보라, 군대가 말과 병거와 함께 그 도시를 에워쌌으므로 그의 종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아아 슬프다 내 선생님이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우리와 함께한 자들이 그들과 함께한 자들보다 많기 때문이니라, 하고] 크리소스톰은 유독시아 여왕이 종을 보내 자기를 위협했을 때, “가서 나는 오직 죄만을 두려워할 뿐이라고 그녀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황제의 소환을 받았을 때, “그 도시에 있는 모든 집의 기와가 마귀라 할지라도 나는 단념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주의 일을 신실하게,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해서 백성들이 그를 인정하고 존귀하게 여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공적 무대에서 사라지게 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손실이었으며, 재앙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주님의 사역자를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엘리야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 앞에서 엘리야가 계속 사역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를 인간적인 두려움에서 구원하는 것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뿐입니다. 두려움을 진정시키는 길은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성령의 인도함과 성경을 펴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 1:8,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니 너는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가 말하노라, 하시고], 베드로전서 3:14,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행복한 자니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며] 엘리야가 스스로 결정하고 도망간 브엘세바는 결코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지 않는 길은 어디라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은 아합의 딸과 결혼한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22:4,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으며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나이다 하고](왕상22:4b). 엘리야는 국제 경찰에게 잡혀 본국으로 소환될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광야로 더 도망가야 했습니다. 광야는 빵과 물이 없는 곳이며, 갈수록 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영육간에 힘이 다 떨어진 후에 로뎀 나무 아래서 주저앉아 죽기를 구했습니다. 이것이 갈멜산에서 내려와 엘리야가 한 처음 기도입니다. 그는 죽음을 갈구할 만큼 철저히 소진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삶 가운데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습니까? 영적으로 도망병은 극단주의로 흐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역시 힘들 때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20:9, 18,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그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분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같아서 내 뼈 속에 사무치니 내가 참기에 지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노라.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수고와 슬픔을 보며 내 날들을 부끄러움으로 소진하는가?] 어떤 성도는 내 평생에 다시 기도하지 않겠다, 다시 교회 가지 않겠다고 주님께 분노와 적개심을 드러내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주님으로부터의 도피는 결국 자기로부터의 도피로 이어지고 곧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도망자를 다루시는 주님의 손길을 다 같이 상고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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