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XII)
말씀: 열왕기상 18:22-29
요절: 열왕기상 18:26
많은 신들이 있고, 많은 주들이 있어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 평범한 진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무시되고 거부되어 왔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오직 한 분이란 사실이 진리로서가 아니라 종교적 견해로 일부에서만 수용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살아 계신 주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불러냄을 받았지만 증거는커녕 오히려 바알 숭배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2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주의 대언자로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대언자는 사백오십명이로다.](22) 불러도 대답없는 백성들, 결단을 요구해도 응답이 없이 머뭇거리는 백성들을 향해 엘리야는 작금의 현실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주의 대언자로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22). 주 하나님의 백성이요, 주님이 친히 불러내 세우신 국가에 어떻게 주의 대언자가 엘리야 혼자만 남게 되었단 말입니까? 거리마다, 동네마다 회당이 있고, 대언자들이 넘쳐 나야할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줄 주의 대언자가 없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는 배교요, 타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대언자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바알의 대언자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오바댜가 숨겨둔 주의 대언자가 100명이나 동굴에 숨어 있지만 아무도 갈멜산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알의 대언자 450명, 아스다롯의 대언자 400명이 있지만 주의 대언자는 오직 엘리야 한 명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진리는 지지하고 따르는 숫자로써 판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편에 선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으며, 그것을 실천하고 담대히 선포하는 사람은 더 소수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대로 믿고 순종하고 선포하는 교회가 몇이나 됩니까? 비록 바알의 편에 서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에 두려워 떨고 있는 100명의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하나님을 증거하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수의 많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용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엘리야 한 명을 필요로 합니다. 증거와 증언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채 숨어 있는 만(萬) 명의 증인이 법정에서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무슨 힘이 있습니까? 짖지 못하는 개가 경비견을 할 수 있으며, 물지 못하는 개가 사냥개로 쓸모가 있겠습니까?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주의 대언자로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대언자는 사백오십명이로다.](22).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법관의 심정이 아니라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도전했습니다. “주의 대언자로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22). 이는 지금이 백성들에게 마지막 기회란 말이기도 합니다. 엘리야마저 없으면 이 땅의 백성에게는 주의 말씀을 증거해 줄 사람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교회의 모든 성도가 이런 엘리야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빕니다.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증거하고 전파하는 말씀이 이 백성들에게는 최후의 음성이 될지 모릅니다. 복음 전파와 증인의 삶에는 너와 내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많고, 종교인도 많지만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점점 더 희귀해 지는 작금의 세대에 우리는 모두 엘리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직장에, 학교에, 가정에 숨어있는 주의 종이 되지 말고, 드러난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소 두 마리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소 하나를 택하여 여러 조각으로 자르고 나무 위에 놓되 그 밑에 불은 붙이지 말게 하라. 나도 다른 소를 준비하여 나무 위에 놓고 그 밑에 불은 붙이지 아니하리라.](23) 말씀으로 돌아서지 않는 백성들 앞에서 엘리야는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자 했습니다. 이런 시도를 한 대언자는 이스라엘 역사에 전무후무했습니다. 그는 가뭄과 기근을 통해서 사역하는 것으로 주의 일을 다했다고 돌아설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과연 이러 일을 할 마음을 가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주의 말씀대로 이 일을 행했습니다. 열왕기상 18:36, [저녁 희생물을 드릴 때에 대언자 엘리야가 가까이 가서 이르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한 것을 이 날 알게 하소서](왕상18:36). 그가 갈멜산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우상으로 눈멀고, 귀가 막히고, 마음이 둔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흔들어 깨어 놓기 위한 극약처방이었습니다. 주의 백성들을 어떻게 하든지 다시 주님께로 돌려놓고자 하는 그의 질투에 불타는 열성이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알 신은 지난 3년간 비는 고사하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못함으로써 다산과 풍작의 신(神)이 아니란 사실이 충분히 드러났지만,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불을 통해 주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입증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바알 신은 태양신으로 숭배 받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녀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습니다(왕하16:3). 엘리야는 불로써 시험함으로 바알이 거짓이요, 바알의 대언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숭배하고, 푹 빠져있는 우상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제시하고, 그들이 버렸던 주 여호와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이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갈멜산의 전투를 계획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 길을 잃은 백성들을 향한 목자의 연민이 엘리야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려놓고야 말겠다는 그의 굳은 결심, 기록된 말씀을 믿는 그의 견고한 믿음,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를 통해 제대로 헌신된 한 명의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정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으시며, 언제나 동일한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문제는 전에 있던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지금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한 너희는 너희 신들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니라, 하니 온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옳은 말씀이니이다, 하니라.](24). 지금 상황은 3년 이상의 계속된 기근으로 인해 비가 급한 때입니다. “비를 내리시는 신! 그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제안하는 대신 “불로 응답하는 신,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니라.”고 제안한 것은 엘리야의 깊은 영적 안목에 기인한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계속되는 중입니다. 엘리야는 백성을 위한 속죄제를 겸하여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는 것 외에는 속죄의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피를 흘리든, 대속물이 피를 흘리든 반드시 율법이 정한대로 집행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의 각을 떠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제단 위에 흐르는 피에 응답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불은 언제나 심판을 나타냅니다. 하늘의 진노의 불이 제단 위의 제물에 쏟아지든지, 백성들 위에 직접 쏟아지든지 양자 결단이 나야 합니다. 주님이 제물을 받으시고, 불로 사른다는 것은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자리에서 기근의 심판이 해제되기 전에 반드시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니라,](22) 구약에 정통한 엘리야가 역사에 수없이 많이 불로서 응답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고, 그것을 믿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본 것도 불이었습니다(출3:2).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여행 중에도 주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주야로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주실 때 주님은 불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18, [시내 산이 온통 연기로 자욱하니 이는 주께서 불 가운데서 그 위로 내려 오셨음이더라. 그 연기가 화로의 연기같이 위로 올라가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19:18).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의 제단에 드린 희생 제물을 열납하신다는 증거 역시 불이었습니다. 레위기 9:24, [불이 주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 헌물과 기름을 사르매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엎드렸더라.](레9:24). 이런 이유로 불로 응답하시는 신이 바로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니라,] 불은 신적 임재의 증거이며, 죄를 미워하시는 진노의 표징이며, 대속적 희생을 받으신다는 표적이며(레9:24), 신자를 조명하시며, 감동하시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행2:3). 주님은 불신자들을 처리하실 때도 역시 불로써 하십니다. 이 땅에서 모욕과 수치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을 불꽃 가운데 벌 주실 것입니다. 데살로가후서 1:8,9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눈앞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에서 떠나 영존하는 파멸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8,9). 이것은 성경의 엄숙한 경고이며, 사실입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긍정적이고, 사람이 기분에 맞추는 설교만을 하느라 이런 사실을 숨기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이시기 때문이라.](히12:29). 더욱 황당한 것은 성령의 불이라는 말 같지도 않는 말로 그것이 성령의 은사인 것처럼 속이고, 현혹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니라,] (22). 우리는 여기서 엘리야의 시험이 3 가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짐승을 죽여 드리는 희생제사였고 둘째, 기도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었고 셋째,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는가?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물로 드린 대속의 죽음입니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종교는 헛것이며, 신앙 역시 허상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인가? 만일 이게 되지 않는다면 그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상이든지 하늘의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다음은 여러분에게 거룩한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가?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불신자의 상태이며,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로마서 8:9,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오순절에 불같이 갈라진 혀같은 성령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내려와 내주하시며, 거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기에 언제나 우리가 드리는 영적 희생물을 받으십니다. 주님은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롬12:1)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이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communication이 없는 신은 인격이 없는 신이며, 죽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에는 100% 응답하시며, 성취하십니다. 성도는 기도하기 전에 기도보다 더 급하고,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셋은 언제나 점검해 보고 민감해야 합니다.
다시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온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옳은 말씀이니이다, 하니라.](24). 엘리야의 책망과 권면에도 일체 묵묵부답이었던 그들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보다 표적에 더 민감했습니다. 과연 조상 때부터 믿어오던 우리의 신과 지금 믿는 바알 신과의 대결을 보고 난 후 결정하라는 말에는 “옳은 말씀이니이다.”환호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죄악된 인간의 본성은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는 주의 말씀에는 귀머거리처럼 있다가도, 감각에 호소하는 외적인 표적에는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드는 법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도 표적이 필요합니까? 이 교회에는 왜 표적이 없는가? 왜 방언이 없는가?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표적이 아니라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표적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증거와 확신이 있습니다. 그걸로 족하지 않습니까?
2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대언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소 하나를 택하여 준비하고 너희 신들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그 밑에는 불을 붙이지는 말라, 하니](25) 엘리야는 먼저 그들에게 선택권을 줬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기를 치지 못하도록 밑에 불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백성들 몰래 늘 밑에 불을 붙이는 사기극을 벌여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엘리야를 비롯해 수 천명의 눈이 쳐다보고 있었기에 감히 밑에 불을 붙이지 못한 채 오직 자기들의 신을 목놓아 불러야 했습니다. 그동안 해 오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기들의 신들의 이름을 불러야 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2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자기들에게 넘겨준 소를 취하여 준비하고 아침부터 정오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오 바알이여, 우리를 들으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대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만들어 놓은 제단 위에서 껑충 껑충 뛰더라.](26) 450명이나 되는 바알의 대언자들이 합심해서 아침부터 정오까지 “바알이여!, 오 바알이여. 우리를 들으소서,”를 연발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 의식대로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제단 위에서 껑충 껑충 뛰기도 했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지랄발광’하는 것입니다. 시편 115:4-8, [그들의 우상들은 금과 은이요,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그것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도 우상들과 같으며 우상들을 신뢰하는 자들도 다 그와 같도다.](시115:4-8). 괴성을 지르고 팔짝팔짝 뛰는 바알의 대언자들의 소리만 있었지 하늘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단은 차갑고, 연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사탄이 불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욥기 1장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양들과 종들을 태워 없애 버렸습니다(욥1:16). 계시록에서도 사탄은 하늘에서 불을 내립니다. 계시록 13:13, [그가 큰 이적들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의 눈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 위로 내려 오게 하고](계13:13).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바알 신을 지원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번 시험이 누가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인지를 알게 하는 공적 시험의 무대였기에 마귀의 속임수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표적과 거짓 이적으로 온 세상을 속이고, 사람들을 속여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오 바알이여, 우리를 들으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대답하는 자도 없으므로](26) 이 구절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애씀과 수고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있습니다. 대답이 없는 것은 아예 없거나 죽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지금 3시간째 이들은 바알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오 바알이여, 우리를 들으소서”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갈멜산의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메아리쳐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소리가 없고, 맞은 편 산에서 “오 바알이여...오 바알이여”란 음향 효과만이 반복됩니다. 한국의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 김소월은 바알의 대언자 못지 않게 애타게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결코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이 시가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동일한 체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며, 대답이 없습니다. 그의 시 ‘초혼’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 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마치 바알의 대언자들의 심정을 대변한 것 같습니다. 거짓 종교는 결코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물에 불을 내릴 수 없으며, 죄를 씻어 내거나 제거하지 못하며, 성령을 줄 수도 없고, 기도에 응답할 수도 없습니다.
2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정오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이는 그가 신이기 때문이니라. 그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거나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혹은 잠들어 있으니 반드시 깨워야하리라, 하매](27) 시간이 정오라면 태양이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백성들은 여전히 한 말도 없습니다. 침묵 가운데 있던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했습니다. 우상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다 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한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조롱하실 것이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편 2:4, [하늘들에 앉으신 이께서 웃으시며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4). 바알의 대언자들은 엘리야의 조롱을 충고로 알아들었는지, 정말 더 큰 소리로 부르고, 자기 신을 깨우려 자학까지 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에 큰 소리로 부르고 자기들의 규례에 따라 피가 철철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더라.](28) 바알 종교의 규례에는 신체를 자학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는 이교도들의 특징입니다. 불교에서도 인신공양이란게 있습니다. 사탄 숭배의 종착역은 인간의 몸과 혼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 몸을 베지 말며...](신14:1)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에 빠진 자들의 종교적 열심과 그들의 헌신은 가히 초인적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한낮이 지났을 때에 그들이 대언을 시작하여 저녁 희생물을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대답하는 자나 주목하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29) 오전 9시부터 시작된 바알의 대언자들은 정오를 넘어서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고, 대답하는 자나 주목하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이것보다 우상의 실체를 더 잘 보여 주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우상은 평소에는 문제가 없지만 인간이 결정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무기력합니다. 정녕 도움이 필요할 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우상을 섬기고 있다면 오늘 바알의 대언자들만큼이나 헛된 자들이요, 무용한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배가 신인 사람은 언젠가 먹고 마시는 일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부질없는 삶이었는가? 처절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돈이 자신의 우상인 사람은 멀지 않아 자신이 모은 돈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쓸모없는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관심은 뒤로 미룬 채 돈을 버는 일에 매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평소에는 뿌듯한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가겠지만 반드시 그것이 미친 짓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쾌락이 우상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언젠가 반드시 쾌락의 잔에 깔려 있는 쓰디쓴 찌꺼기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상과 우상 숭배자는 동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도 우상들과 같으며 우상들을 신뢰하는 자들도 다 그와 같도다.](시115:8). 우상들은 갈멜산에서도 불을 내리지 못했고, 지금 이 시간에도 불을 내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영적 교훈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열정과 열성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서 그것이 참되고 선한 것이란 증거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알의 우상 숭배자들은 오늘날의 어떤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보다 더 열심이며, 철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적 열정과 열심이 경건과 영성의 척도라고 생각하며, 성경적 건전한 교리와 영적 지식을 경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성경 공부를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저 무엇이든 몸으로 열심히 때우기만 하면 그만이란 사고는 매우 위험하고도 천박한 것입니다. ‘차갑고 냉랭한 성경 지식 위주의 사역보다는, 깊이 있는 말씀은 없을지라도, 좋은 설교는 없을지라도 가슴이 훈훈한, 생명과 감정이 넘치는 그런 곳을 내게 주시오’라고 외치는 목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건전한 생명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고, 다른 무엇으로 가슴이 뜨거워 진다면 그 사역은 잘못된 사역입니다. 영적 지식으로 내가 새로워지고, 변화받지 않고, 다른 무엇으로 변화받았다면 그 사역은 실패한 것입니다. 바알의 대언자들도 진지한 열심과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대상이 잘못되었으므로 하늘에서 아무 것도 내려오게 하지 못했습니다. “열정은 있다, 그러나 기본이 없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칭 부흥하는 교회들입니다. 부흥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와야 합니다. 백성들과 같이 표적에 민감하지 말고, 오직 말씀에 청종하여 말씀의 인도를 받고, 감정이나 흥분에 호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확히 받기만 하면 감정적인 것은 풍성하게 뒤따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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