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숨은 일꾼(IX)
말씀: 열왕기상 18:1-14
요절: 열왕기상 18:3
하나님은 이 땅에 엘리야 외에도 보이지 않는 곳곳에 주님의 종들을 숨겨 두시고, 일하게 하십니다. 보통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유명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종인 줄로 알지만 지금도 세계 도처에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곳에 묵묵히, 소리 없이 주의 일을 수행하는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로 그곳은 우상 숭배의 본거지인 바빌론의 왕궁일 수도 있고, 악한 왕 아합의 신하 중에 있을 수도 있으며, 로마의 시이저의 가문에 속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는 종들을 곳곳에 배치해 두셨다는 사실을 알 때, 깊은 위로와 힘을 얻게 됩니다. 연변에서 어떤 목사님이 탈북자 한 명을 전도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통해 구원받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북에 두고 온 늙은 어머니와 아내에게도 자신이 들은 복음을 전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시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아내를 불러 놓고 자신이 구원받은 이야기를 간증하며, 어머니와 아내도 믿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와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오늘 비로소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내는 합심하여 그 영혼이 구원받기를 수년동안 기도해 오던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집안 내력을 이야기하면 선대 때부터 예수님을 믿어왔고, 이 동네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하여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를 떠나 문명의 발길이 들어가지 않는 곳의 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리라 마음먹고 어떤 부락에 도착했는데, 이미 거기에는 교회가 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친히 자신의 사역을 이루어 나가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와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새로운 일꾼 오바댜가 나옵니다. 그는 아합의 집을 다스리는 고관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 정도의 높은 지위였습니다. 아합은 악한 왕이요, 왕비는 주의 대언자들을 잡아 죽였지만, 바로 자기 집을 다스리는 오바댜가 하나님의 종이란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만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오바댜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종이란 사실입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셋째 해에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땅 위에 내리리라, 하시니라.](1)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가뭄의 재앙을 선포한 후 3년간의 은둔 생활을 하며, 주님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그릿 시냇가에 숨어 지내다, 다시 이방 땅 시돈의 사르밧에 가서 과부의 집에 기거했습니다. 그 시간들은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으며, 주님의 놀라운 보살핌과 능력, 심지어 죽은 자를 일으키는 체험까지 맛보았습니다. 이제 때가 되자 다시 주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 보다 앞서 주의 일을 하고자 하는 만용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피끓는 젊음과 용기가 나를 몰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언제나 때가 있으며,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엘리야 역시 3년간 아무 것도 안한 것 같지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하는 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셋째 해에...] 주님은 주로 년 수로 세지 않고, 달로 계산하지도 않으시고, 날로 계산합니다. 이는 우리의 매일 매일이 주님 앞에 드려져야 하며, 계산된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암시해 줍니다. 주님은 언제나 제자들에게 날마다(daily)를 강조하셨지, 해마다, 달마다를 강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한번에 한 날을 살며, 일생은 날 수로 계산됩니다. 욥기 14:1,2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of few days)1) 괴로움이 가득하며 꽃과 같이 자라나서 꺾이고 또한 그림자처럼 사라지며 계속해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욥14:1-2). 한 구절 더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 47:8-9, [파라오가 야곱에게 이르되, 그대의 연수가 얼마냐? 하니 // 사람은 년수를 묻는다. // 9. 야곱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내 순례 길의 연수의 날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삶의 햇수의 날이 얼마 못되고 험악하였으며 내 조상들이 순례하던 때에 그들이 누린 삶의 햇수의 날에 미치지 못하나이다.](창47:8,9). 야곱은 계속해서 날로 대답합니다. 시편 90:12, [그런즉 우리에게 우리의 날수 세는 것을 가르치사 우리의 마음을 써서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시90:12). 우리는 늘 오늘이 마지막이요, 오늘이 주님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가운데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니라](17:2,8)는 말씀은 엘리야의 삶의 이정표요, 변화의 순간이며, 믿음의 순종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마리아로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이 반겨 줄리 없고, 왕에게서도 자비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말씀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땅 위에 내리리라, 하시니라.](1) 이제 엘리야는 주의 말씀에 따라 본격적인 공적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권능을 체험한 엘리야는 이제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충만한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엘리야가 힘들고 위험스런 사역의 현장으로 다시 나가기 전에,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요, 모든 사역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주의 은혜를 깊이 맛보고, 큰 체험을 한 후에는 뭔가 된듯한 과대 의욕에 사로잡혀 무작정 밖으로 뛰어 나가고자 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해도 속으로는 영적 자부심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마땅히 일을 해야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봉사의 기회, 사역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조급함을 억누르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준비되었다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때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큰 신앙 체험을 한 후에 극심한 시험에 빠지고, 실족하는 예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며, 그 약속을 믿어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창세기 16장에서 그는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10년이란 긴 시간을 실족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그런 은혜와 체험을 누렸지만 베드로는 곧바로 “여기서 초막을 짓자”는 육신적인 시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큰 체험을 하면 할수록 그것을 소화해야 할 날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준비가 갖추어질수록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과 신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땅 위에 내리리라](1) 엘리야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할 때만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일어나고, 떠나고, 머물고, 가야 합니다. 마치 군대에 처음 간 사병들이 ‘제식 훈련’을 받듯이, 하나님의 종들은 이런 영적 제식 훈련을 통해 연단되고, 빚어집니다. 엘리야는 3년을 지내면서 한참을 혼자 지냈으며, 시돈에 와서는 과부 1명, 주일학교 학생 1명을 성도로 두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작은 사역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느린 것 같아도 반드시 찾아옵니다. 3년의 날들이 지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아합에게 보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비를 땅 위에 내리리라.] 주님은 이 우주의 자연 현상을 다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3년간 비도 이슬도 없는 극심한 가뭄을 끝내시고,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비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알은 비를 내리는 기상신(氣像神)으로 알려졌지만 지난 3년 동안 그의 무능력은 천하 만민에게 알려졌으며, 수치를 당했습니다. 우상은 위기의 때에, 정작 필요로 할 때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비를 내리는 것과 내리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14:22, [이방인들의 헛된 것들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것이 있나이까? 하늘들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그리하실 이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런즉 우리가 주를 바라오리니 이는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렘14:22). 아합 왕과 온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모든 성도들 역시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상 기온, 오존층, 생태계 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고 우습게 생각됩니다. 그들은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생각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에 동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레미야 10:13, [그분께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하시니 하늘들에 많은 물이 생기고 그분께서 땅 끝에서부터 수증기가 올라오게 하시며 비와 번개들을 만드시고 자신의 곳간에 바람을 내시는도다.](렘10:13).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엘리야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주님의 말씀대로 아합에게 보이려고 갔습니다. 북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는 3년의 기근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회개했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 이 난국을 타개해 보겠다는 어리석음과 고집을 보십시오. 5절,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땅으로 가되 모든 물의 근원과 모든 시내로 가라. 혹시 우리가 풀을 찾으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그리하면 짐승을 다 잃지 아니하게 되리라, 하고](5). 이 구절은 사마리아의 기근이 얼마나 심한지를 단적으로 보여 줄 뿐 아니라 아합 왕이 어떤 부류의 인물인지를 매우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이나 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고, 오로지 물 근원과 시내와 풀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과 심판을 겸허하게 받지 않을 때 그것은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5:3, [오 주여, 주의 눈이 진리 위에 있지 아니하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으나 그들이 근심하지 아니하였고, 주께서 그들을 소멸시키셨으나 자기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고 돌아오기를 거부하였나이다.](렘5:3). 참으로 특이한 현상은 죄인들은 어떤 징계와 심판을 받아도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보다 더 큰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마치 파라오가 10번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끝내 멸망당했던 것처럼, 죄인들은 지옥에 가는 그 순간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16:10,11 [다섯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짐승의 자리 위에 쏟아 부으매 그의 왕국이 어둠으로 가득하고 사람들이 아픔으로 인하여 자기 혀를 깨물며 또 자기의 아픔과 헌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기 행실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계16:10,11). 죄인들은 지옥 불에 타면서도 자신을 회개하지 않습니다. 다만 거기서 분노하며 이를 갈고 있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이 시간 구원받아서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된 일이며, 감사한 일입니까?
첫째, 아합 왕은 주님의 심판을 심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분명히 [내가 서서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노니...](17:1)라며 가뭄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말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가뭄의 원인이 바로 자신의 죄에 있으며,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때문이란 사실을 끝까지 부정했습니다. 그는 이 재앙이 순전히 엘리야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찾아 죽이겠다는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10절을 참고할 것). 아합은 이 3년의 가뭄을 이상 재해, 엘니뇨 현상으로 보아 넘기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손길을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이해했다 해도, 회개하기보다는 반항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종은 무엇이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까? 18절, [...이는 당신들이 주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니이다.](18b). 우리는 자신이 죄의 대가를 지옥에서 달게 받겠다고 공언하는 죄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죄를 정확하게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둘째, 아합 왕은 백성들의 영혼보다 물질 확보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전쟁을 대비해 많은 병거들을 수입했습니다. 이것들은 아합 왕의 경제력과 국방력을 상징하는 것이며, 왕권 확립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말들이 죽어 버리면 병거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말들이 먹을 물과 풀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할 때에 그는 말이 먹을 물과 풀을 찾는데 정력을 쏟았습니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아픔과 어려움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합처럼 재물을 추구하고,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란 문제에만 혈안이 되어 하나님을 찾는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잃어버린 혼들을 찾아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길을 나서지는 않습니까? 이는 자신의 영혼을 극도로 황폐화시키는 길이며, 형통할 수 없는 길입니다.
이 세상의 혼들은 복음을 알지 못해, 또는 알면서도 믿지 않음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점점 물량제일주의를 추구하고, 부흥이란 명목아래 교인의 수만 추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먹고 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다면, 우리가 아합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영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항상 하나님을 찾는 일관된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요, 죽은 자들과 방불할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합이 자기 집을 다스리는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이제 이 오바댜는 크게 주를 두려워하는 자더라.)](3) 오바댜는 흔히 근본주의자들로부터 타협주의자 또는 두 주인을 섬긴 자란 평을 받으며,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가 “크게 주를 두려워하는 자”라고 평가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주석이나 평가를 끊어버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 그가 어떤 인물인지,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바랍니다. 오바댜는 아합 왕의 궁정 대신으로서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단지 그 사실 하나만으로 오뱌다를 타협의 인물, 이중 인격자로 몰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첫째, 오바댜는 어릴 적부터 주님을 섬겼습니다(12). 사무엘이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주님을 섬겼듯이 오바댜 역시 그러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누군가가 신앙으로 양육했음을 말합니다. 신약의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습니다(딤후3:15). 그는 외조모와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배웠고, 성경을 배웠습니다. 어릴 때의 신앙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린 자녀들의 영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교육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지역 교회를 통해서, 좋은 신앙 선배나 친구를 통해서 말씀을 가르치실 수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부모님입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말로나 행동으로나 믿음의 본이 되셔서 어린 시절부터 주님을 가르치기를 바랍니다. 어릴 때 배운 신앙은 평생토록 떠나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신앙을 가졌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는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계속해서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71:17, [오 하나님이여, 나의 어린 시절부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지금까지 내가 주의 놀라운 일들을 밝히 드러내었나이다.](시71:17). 오바댜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의 종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주님을 안 그날부터 오늘까지 변함없는 신실함, 그것이 바로 칭찬과 존귀를 받을 귀한 성품인 것입니다. 지속성의 결여는 불신앙입니다. 사도행전 26:22,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이날까지(this day) 계속해서 작은 자와 큰 자에게 증거하는 것은....](행26:22). “믿는 날부터 이날까지 계속해서...” 이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오바댜는 역경 속에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배교와 우상 숭배로 타락한 아합 왕을 섬기고, 왕궁에서의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왜 거기서 나오지 않고 타협했느냐?”고 몰아 부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이든지 하나님의 인도로 주어진 곳이라면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오바댜가 강직한 성품과 믿음으로 아합 왕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거기서 죽거나 떠나버렸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는 그런 성품의 소유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거부하고 파라오의 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파라오의 궁에서 총리대신을 했고, 다니엘 역시 느부갓네살의 궁중에서 자문관이 되었습니다. 모르드개, 느헤미야 모두 이방 왕궁에서 왕을 섬기는 충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하의 임무를 다하면서도 훌륭하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신앙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바댜는 그런 위인들의 믿음에는 따라가지 못하지만, 역경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수호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성도들이 있을 것 같지 않는 그런 곳에 심어 두심으로 성도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돕는 손길로 사용하십니다.
셋째, 오바댜는 자신의 특권과 지위를 주님의 일에 사용했습니다. 오뱌다는 자신의 재물과 지위를 이용해서 주의 대언자들을 50명씩 데려다가 100명이나 굴에 숨겨두고 먹였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이세벨이 주의 대언자들을 끊어 버릴 때에 오바댜가 대언자 백 명을 데려다가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빵과 물을 먹였음이더라.](4,13참조). 이것은 큰 위험을 무릅쓴 선행이었으며, 주의 종들을 보존하려는 믿음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용할 수 있는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그런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뱌다는 그 점에서 칭찬 받을만한 인물이었으며,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넷째, 오바댜는 엘리야의 사역을 돕는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아합과 엘리야를 자연스럽게 만나도록 주선했고, 갈멜산의 대결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비록 오바댜가 갈멜산의 전투를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엘리야가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와 시돈 땅에 두신 동시에 오바댜를 아합의 왕궁에 두셨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서로 만남으로 주님의 사역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며,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나매 오바댜가 그를 알아보고 얼굴을 대고 엎으려 이르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하니](7). 오바댜는 주의 종 엘리야를 만났을 때 얼굴을 대고 엎드려 맞이할 만큼, 각별한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3년 전 아합 왕 앞에서 담대히 가뭄의 재앙을 선포하던 엘리야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가 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오바댜와 같은 성품의 신앙과 주를 위해 남모르게 하는 헌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오바댜는 인간적인 약점들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야를 반갑게 맞았지만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 하라.](8). 오바댜는 아합 왕이 엘리야에 대해서 얼마나 분노가 불타 올랐는지를 잘 압니다. 혹시 엘리야가 있다고 고했다가 엘리야가 지난 번처럼 사라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9절은 그의 두려움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주어 죽게 하려 하시나이까?](9). 두려움은 확신과 신뢰의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 자신이 행한 공로, 자신의 선행을 내 세웠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세벨이 주의 대언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주의 대언자들 중에서 백명을 취하여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빵과 물로 먹인 일을 내 주께서 듣지 아니하였나이까?](13) 이 일은 이미 앞서 증거 되었습니다. 자신의 입을 통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하나님은 알고 계시며, 인정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위해 은밀히 행한 선한 일을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본인의 입을 통해 밝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간증은 자신에게 전혀 유익하지 못합니다. 그는 주의 대언자들을 100명씩이나 숨겨두고 보살폈지만, 세상에 드러난 하나님의 종 엘리야 한 명을 위해서는 선뜻 순종하고 봉사할 수 없었습니다. 오바댜는 아합 왕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9,12,14)함으로써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노출하고 말았습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한 법인데, 오바댜는 그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오바댜와 같이 각기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절름발이 신앙 생활을 영위할 때가 많습니다. 오바댜는 모든 점에서 본이 되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육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약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그릇에 맞게 다 적재적소에 배치하시고, 합당하게 사용하십니다.
여섯째, 오바댜는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는 자란 칭찬을 받았습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합이 자기 집을 다스리는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이제 이 오바댜는 크게 주를 두려워하는 자더라.)](3). 주를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오바댜는 분명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였고, 아합 왕을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속에 나타난 위대한 믿음의 종들이 모두 오바댜와 같이 한 가지 이상씩 허물과 약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기드온, 삼손, 다윗, 여호수아, 베드로, 바울 누구하나 약점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은 심지어 롯까지 의인이라고 평가하십니다. 사람들은 남의 허물과 약점들을 유난히 부각하고 붙잡고 늘어지는 습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통해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거룩하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죄와 허물과 불신을 칭찬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작은 믿음, 삶에서 실천하는 살아있는 신앙, 주님을 의식함으로 행한 선행을 기뻐하시고, 몇 백 배로 칭찬해 주십니다.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한그릇 대접한 것까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성도된 저와 여러분도 형제들의 어두운 면보다 그들에게 밝게 비쳤던 믿음의 시간들, 그들의 작은 선행 하나라도 기억하였다가 칭찬해 주고, 격력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4,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서로 격려하되](히10:24). <말씀 정리,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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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f few days--“생애가 짧고”로 의역되어 있으나 “날수가 적고”로 직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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