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고전14:22
성령의 은사에 대한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방언 은사는 병 고침의 은사와 더불어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현재 교회들에서 뚜렷하게 찬반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이미 교파와 교단에 관계없이 은사주의, 오순절 신학에 완전히 점령된 상태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언제나 환영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 은사도 있음을 분명히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거짓 대언자가 있고, 거짓 사도들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사가 아닌 거짓 은사들이 교회에 얼마든지 있기에 우리는 늘 주의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방언이란 뜻은 [언어, 외국어]란 뜻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흠정역에는 모두 ‘타언어’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적 의미의 방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국어 사전적으로 방언이란 의미는 “언어/지방어”란 뜻이고, 성경에서는 tongue이라고 말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오늘날 소위 은사주의, 오순절 운동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다음에서 우리가 다루게 될 이 사실들은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것들입니다. 성경적인 방언에 대한 잘못된 지식은 성도들과 교회를 급격히 은사주의, 오순절 운동으로 이끌어 갑니다. 때로 방언을 말하는 것의 기쁨과 축복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이는 감정적인 흥분과 경이로움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령 받은 증거가 방언이란 주장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 가운데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방언을 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면 방언을 못하는 신자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입니까? 성령을 받지 못하면 주님을 믿을 수도 없고, [주/the Lord]로 고백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방언이 교회 사역에 핵심적인 은사였거나 양떼들을 먹이는데 중요한 은사였다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들, 부흥사들은 방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사이비 목사들을 제외한 건전한 근본주의 신앙을 고수한 침례교도들 가운데 방언을 한 종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죠지 휫필드나 잔 웨슬레는 영국과 미국의 부흥을 주도한 위대한 주님의 종들이었지만 방언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디엘 무디 역시 방언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빌리 선데이 역시 방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방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방언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약간과 라틴어 정도였습니다. 이 언어들은 은사가 아니라 성경 연구를 위해서 학교에서 배운 언어들이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언어에 탁월한 능력과 은사를 소유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어를 많이 알았지만 누구도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한 사람은 없습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미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인디언 선교사였지만 그는 인디언 말을 배우지 못해서 늘 통역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버어마의 선교사였던 아도니람 져드슨은 버어마어를 배우는데 전심 전력하였고 모국어인 영어를 잃어 버렸습니다. 중국에 선교사로 일했던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어를 배우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도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선교를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명철을 부어 주셔서 언어적 습득이 빠르고 정확했던 경우는 있어도 결코 방언을 통해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구사한 예는 없습니다. 오늘날 기도원이나 교회에서 몇몇 형제, 자매들이 방언 기도를 한다고 떠드는 그런 기도는 방언이 아니라 [소음(noise) 기도]입니다. 성경에는 목사나 집사의 자격에 방언이 없습니다(딤전 3장; 딛 1장). 만일 방언이 교회 시대 전체에 필요한 은사였다면 분명 본으로써 양무리를 이끄는 자들은 마땅히 이 은사를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방언을 주장하며 이에 대해 설교하는 목사들의 대부분이 자신은 그리 하지 않거나 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 방언의 목적-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
여러분은 먼저 성경을 통해 [방언]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방언은 은사이면서도 동시에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고전14:22a). 방언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 침례나 기름부음도 아닙니다. 방언은 단지 표적입니다. 누구를 위한 표적입니까?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입니다. 신자나 교회를 위한 표적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열매나 은사를 구하지만 표적을 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표적을 통해서 믿는 믿음을 원치 않으시고, 말씀을 통해서 믿게 하셨습니다. 표적은 누가 구합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나](고전1:22). 유대인들은 항상 표적을 요구합니다. 이들은 표적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들에게 충분한 표적을 주셨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 대해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아니하리라.](마12:39). 주님은 마태복음 16:4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방언이나 병고침의 표적을 구한다면 여러분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나 신학 교수들의 견해나 교회의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이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 바리새인들(막8:11), 악한 세대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빽빽이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서 비로소 이르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아니하리니](눅11:29). 여러분은 표적을 구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악한 세대요,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부류요, 자신을 유대인으로 취급하는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방언의 표적이 주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자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고전14:22a). 그렇다면 참으로 좋은 것이 아닙니까?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면 우리는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고, 그들에게 다가올 심판과 다시 오실 주님과 의와 경건과 절제를 선포하여 믿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방언(타언어)으로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성경적 진리를 믿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 사도행전에 실제적인 dP를 보겠습니다. 베드로의 복음 선포를 통해 구원받았던 고넬료 가정에서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듣고 믿는 순간 이들의 입에서 [타언어들/ 방언]이 나왔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그들이 들었음이더라. 이에 베드로가 응답하되,](행10:46). 얼마나 놀랍습니까? 복음을 믿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현재 교회 내에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서나 복음 선포 때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방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 앞에서 이들이 성령을 받았음을 증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유대인들 조차도 심지어 베드로 자신도 이방인들은 결코 성령을 받거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과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방언]이란 표적을 통해서 유대인들을 믿게 한 것입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란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도 그들과 성령 안에서,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한 표적이 바로 방언입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이 없는 곳에서는 방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의 목적이요, 이유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악하고 음란하고 육신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방언이란 표적을 행함으로써 당시 믿는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요, [성령을 받은 사람]이란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므로 그들이 타언어들로 말도 하고 대언도 하니](행19:6). 에베소에 있는 어떤 제자들은 요한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몰랐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함을 선포하고 그들의 잘못된 믿음, 불완전한 영적 지식을 바로 잡아 주었습니다. 요한의 물 침례가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게 하자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를 해 주었습니다. 그 때에 놀라운 일이 터졌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고 그들이 타 언어들을 말하고 대언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많은 은사주의 교회들에서 방언을 받기 위한 모범적인 예로 자주 실천되고, 반복적으로 모방되고 있습니다. 에베소의 제자들처럼 성령을 알지도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무리들도 아닌 신자들을 대상으로 위의 예를 흉내 내는 일은 참으로 우습기조차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방언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방언을 받은 것은 이들이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에 대해서 처음 들었고, 자신들이 받은 요한의 침례가 틀렸다는 것을 바울의 설명과 더불어 성령의 표적을 통해서 알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십니다. 그 중에 하나가 타언어들(방언)과 타언어들 통역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들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대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을, 어떤 사람에게는 타언어들 통역함을 주시거니와](고전12:10). 주님은 분명히 어떤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사도들도 있었고, 대언자들도 있었습니다. 기적들을 행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을 주심으로써 갓 태어난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은 각지의 유대 회당에 있는 믿지 않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교리적 독설과 횡포를 막아 낼 수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 나타난 이런 표적들의 은사들은 모두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박해와 조롱과 핍박과 율법주의와 거짓 가르침 등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강력한 복음 전파 수단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언제나 유대인들을 우선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언제나 먼저 유대 회당에 들렸고, 그들에게 증거 했으며, 표적과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표적적인 은사들이 주어진 목적을 잘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가 예외없이 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성령의 은사를 주셨으며, 성령의 기름부음과 인침이 있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셨지만 모든 성도가 다 방언을 말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대언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기적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타언어들이니라.](고전12:28). 주님은 분명 모두를 세우셨다고 하지 않으시고, “몇을 세우셨으니”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방언을 하는 이가 많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도 방언을 말하는 이가 많지 않았습니다. 만약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방언인 성령의 나타나심의 증거라든가 성령 충만의 증거라고 말한다면 성경의 증거와 완전히 반대가 되고 맙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타언어들로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12:30)고 합니다.
☞ 방언은 천상의 언어, 천사의 말이다? 아닙니다. 방언은 인간의 말입니다.
방언이라고 말하는 tongues(언어들)은 성경 전체에서 예외 없이 지상의 언어를 의미합니다. 헬라어로"glossa"란 말은 성경에서 사용될 때 인간의 언어를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여러 차례 인간의 언어라고 말하는 이 용어는 실제로 인간의 정상적 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dialektos”라고 사용된 말은 영어로 “dialect”(방언, 지방어)입니디(행2:6,8). 오순절에서 사도들의 말은 그들의 고유 언어, 그들 지방의 언어로 선포되었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지방에서 사용하는 말인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외치는 그런 종류의 방언은 결코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용된 용어와 고린도전서 12-14장에 사용된 용어는 같습니다. 오순절 교회나 은사주의자들이 “사도행전 2장에서 말하는 방언은 언어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성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10장이나 19장을 보십시오. 여전히 똑같은 용어가 사용되었고, 동일한 의미입니다. 사도행전에 방언이라고 말하는 모든 곳은 정상적인 언어, 지상의 말을 의미합니다. "glossa"란 말이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는 다양한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21에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표적으로 주어진 외국어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사야 28:11과 12을 인용했습니다. [또 그분께서 더듬는 입술과 다른 언어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실 것임이라. 그분께서 이 백성에게 이르시되, 이것이 안식이니 너희가 피곤한 자로 하여금 이 안식으로 안식하게 하라. 이것이 상쾌함이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고자 하지 아니하므로](사28:11-12). 여기서 주목하십시오. “더듬는 입술, 다른 언어”가 오늘날 방언입니다. 주님께서 방언으로 누구에게 말합니까? “이 백성에게...이 백성에게” 이 백성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입니다. 믿는 신자들이나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방언으로 말하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 대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고전14:22). 은사주의자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입니다. 신학자들이 무엇이라고 우겨도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방언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교회는 불신자가 아닙니다. 교회는 표적을 구하지 않고 말씀을 통해 믿습니다. 그렇다면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 교회들에게 주신 표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이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믿음이 있거나 능력이 주어지거나 성령 침례의 증거라고 말하는 부류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악한 종창처럼 퍼져나가서 많은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자가 된 후에 방언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상한 방언이 아니라 탁월한 외국어 구사력을 말합니다. 저는 선교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히 이런 은사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의미도 알지 못하는 그런 음향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깨닫는 말로 할 수 있는 그런 언어를 원했습니다. 방언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던 터라 방언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유념히 살펴 보기도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기도 했고, 제 자신도 그런 방언을 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고민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말씀을 통해서 현재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방언이 거짓이요, 마귀의 속임수란 사실을 확연히 알았습니다. 주님은 방언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방언으로 진리의 지식을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방언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방언으로는 혼자 몇 시간이나 기도했다는 보람과 자긍심 외에는 아무 것도 해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은사의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의 믿음과 덕을 세워주는 것이 은사의 고유 목적입니다. 그러나 방언은 어떤 경우에도 이런 목적을 수행하지 못합니다. 유명한 성경 교사였던 쟌 맥아더(Johh MacArthur)는 말하기를, “교회가 탄생한 오순절은 위대한 날입니다.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났고, 불같이 갈라진 혀들이 제자들 위에 임했습니다. 제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방언이란 단어는 헬라어 "glossa"란 단어로 그냥 언어란 말입니다.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 기도를 할 때 무아지경에 빠져 하나님께만 웅얼대는 뜻 모르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말한 방언은 분명히 알려진 언어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믿지 않는 유대인들 모두 놀랐으며, 우리가 듣는 이 말은 우리가 태어난 고유한 언어라고 고백했습니다(8-11). 누가는 이 때 15개 민족이나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듣고 있었음을 기술한 것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방언의 정의와 의미를 가르쳤습니다.
☞ 방언은 성령의 음성이다? 아닙니다.
방언이 성령의 음성이라면 결코 그치거나 폐할 수 없습니다. 일시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방언이 분명히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3:8입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대언은 있다 해도 없어질 것이요, 타언어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도 있다 해도 사라지리니](고전13:8). 성경은 분명히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언어(방언)도 그칠 것이며(Whether there be tongues, they shall cease)"(고전 13:8). 단지 방언이 언제 그칠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히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방언이 언제 그치게 될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먼저 고전 13:8-12를 잘 살펴보십시오. 여기에는 세 가지 임시적인 축복이 나옵니다. 대언, 방언, 지식. 분명히 대언(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대신 말하는 것)도 없어지고 지식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두 동사의 성격상 - 즉 "없어진다"(done away)와 "사라진다"(vanish away) - 대언과 지식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끝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부의 힘이란 바로 "완전한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 오면 대언과 지식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완전한 것"을 신약 성경의 완성으로 보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일 "완전한 것"이 신약성경이라면 대언과 지식은 오래 전에 끝난 것입니다. 9절은 부분적으로 알고 대언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10절은 완전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것이란 틀림없이 부분적인 것의 완성입니다. 성경은 완전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완전합니다. 이제 사도, 대언자, 계시는 그쳤습니다. 지금 말하는 계시는 새로운 성경이나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비추어 지는 계시입니다.
완전한 것은 문맥상 주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지상의 모든 방언은 그치고 한 가지 순수한 언어를 쓰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민족, 다언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방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에서 인류의 언어를 흩으신 것처럼 이제는 하나로 돌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그 백성에게 순수한 말을 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한 마음으로 섬기게 하리니](습3:9). ‘순수한 말’은 히브리어일 것입니다. 모든 방언이 폐해지고 한 가지 언어로 한 입술로 주님을 부르고 섬기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방언을 성령의 음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 모독’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비슷한 언급이나 암시조차 없습니다. 다만 방언하는 사람들이 사사로이 멋대로 그렇게 끼워 맞추어 부르는 것입니다. 관련 구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保)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6).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는 중보 사역이 방언이라면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령께서 중보하시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말할 수 없는 신음’의 중보 기도는 우리가 하는 기도가 형식과 논리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맞지 않는 그런 기도일 때 우리 속 중심을 다 아시는 성령께서 헤아려 그 뜻을 아뢰고 기도해 주신다는 의미이지, 방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 방언을 합리화하는 성경 구절들?
성경에는 분명히 방언을 권장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들을 외치는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대표적인 구절로 고린도전서 14:5과 29절입니다. 방언을 하시는 분들은 이런 구절에서 힘을 얻을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다 타언어들로 말하기를 원하되 특별히 대언하기를 원하노니 이는 타언어들로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로 하여금 세움을 받게 하지 아니하면 대언하는 자가 더 낫기 때문이니라.](고전14:5).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모두 ‘타언어들’(방언)로 말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방언은 물론 외국어입니다. 모든 사람이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은사를 받았다면 좋은 일입니다. 특히 이곳 LA 지역은 50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등은 엄청나게 유용한 언어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나 여러분들이 이런 언어를 다 할 줄 안다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 이런 말을 하면 황당합니다. 알아듣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친 사람 취급 받기 딱 좋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타언어를 할 때는 규칙이 있어습니다. [만일 누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순서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 안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니라.] (고전14:27~28). 차례대로 말할 것이며, 반드시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 안에서는 입을 닫아야 합니다. 제가 만약 미국 교회나 멕시칸 교회나 중국인 교회에 갔습니다. 그 교회는 아무도 제가 하는 한국어를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 교회에서 입을 닫아야 합니다. 공개적인 회중 기도를 할 수도 없고, 간증이나 설교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교회 밖에서나 차 안에서나 골방에서 조용히 한국어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제가 아무리 신비의 지식을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통역이 없으면 그들 교회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는 히브리어로, 헬라인들에게는 헬라어로, 아람어를 쓰는 자들에게는 아람어로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언어들로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타언어들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대언이나 교리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고전14:6). 방언(타언어)만으로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또 한 구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대언하는 것을 사모하고 타언어들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전14:39). 성경은 분명히 방언을 말하고 막지 말라고 했다!! 고로 방언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 속해 있는 유대인들과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활동하는 율법주의자들로 인해서 ‘표적으로서의 타언어(방어)’를 금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 신자들은 표적을 금지할 때 더 큰 혼란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겠다면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하고, 통역을 세우라. 그렇지 않으면 교회 내에서는 조용하라고 말합니다. 특히 여자는 교회 내에서 잠잠하게 함으로써 오늘날 방언을 자랑하는 오순절 교회가 완전히 가짜라는 사실을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방언을 합리화하는 구절들을 아무리 열심히 찾는다 해도 그 구절들은 방언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방언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 영이 기도하거니와
“방언 기도는 영이 하는 기도이다. 고로 신령한 기도이다.”란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차피 영이 하는 기도이기에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이는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14-15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지각(知覺)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면 어찌하리요?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지각으로도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노래하고 또 지각으로도 노래하리라.](고전14:14-15). 전에 저희 선교 단체에서는 선교의 밤이란 행사를 합니다. 수련회를 가면 자신이 선교지로 가고 싶은 곳의 언어를 몇 개 배워서 인사를 하기도 하고, “함께 배워 봅시다”하면서 모두 따라하게 합니다. 저는 그 때 스와힐리어로 몇 마디 인사말을 배운 적도 있고, 아랍어와 러시아어, 중국어로 몇 마디 인사말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소리만 흉내 내어서 서로 인사를 하면서 웃고 즐겼습니다. 그런데 아예 타언어로 기도문을 적어서 기도하거나 설교를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로 청년들을 데리고 해외 단기 선교를 떠날 때 그들에게 해당 외국어를 몇 마디 가르쳐서 인사도 하게하고, 전도를 하게 합니다. 앵무새처럼 몇 마디만 달달 외우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지를 나누어 줄 때 반복적으로 한 두 마디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상대는 알아듣는다.”는 식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전하는 사람의 지각이 열매를 맺겠습니까? 전혀 맺지 못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외워서 한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하는 기도, 알지 못하는 언어로 하는 방언이란 이와 같습니다.
저는 예전에 선교 단체에 있었는데 이런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해당 국가에 대한 Vision을 갖기 위해서 그 나라 말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이 있었는데 영은 열매를 맺습니다. 영은 무슨 의도와 의미로 하려는지 다 압니다. 설령 문장이 말이 되지 않고, 문법적으로 틀리고, 잘못 된 말이라 해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깊은 의도와 의미를 알고 하기 때문에 상관없습니다만 지각은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과 지각이 일치하도록 알지 못하는 방언이 아니라 자신이 잘 알고 익숙한 언어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하고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시간에 한국어로 설교하고 말씀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방언의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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