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사(6)-사도

말씀: 엡4:11-12 
요절: 엡4:11-12

성령의 은사에 대한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병 고침과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이 시간은 모두 [사도]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사도의 직분은 분명히 교회에 주신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4:11). 주님께서 주신 사도, 대언자, 복음전도자, 목사와 교사는 교회를 이루는 핵심 사역자들입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엡4:12). 주님이 교회에 사역자들을 주신 것은 첫째,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섬기는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입니다. 모든 은사들이 그러하지만 교회의 사역자들은 이 셋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들을 주시는 이유는 이 세 가지 일을 하도록 하심입니다.

오늘은 먼저 교회에 주신 다섯 가지 직분의 은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문제는 오늘날도 교회에 사도들이 있는가? 점입니다. 현재 어느 지역 교회에서도 [사도]란 명칭을 가지고 그 직무를 수행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도의 직분을 맡았다는 주장을 가진 사람들은 있습니다. 사도란 문자적 의미는 ‘보냄을 받은(sent forth)’란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3:16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요13:16)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정확히 [사도]란 문자적 의미입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도(The Apostle)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도라고 하면 바울 사도나 열 두 사도를 생각하지만 [사도]에 해당하는 분은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3:1).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들의 본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어떠하심은 곧 우리의 어떠함이 되는 근거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라고 불리시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 주님이 사도이시고, 제자들이 사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라면 성도들 역시 모두 부르심을 받았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사도적 직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란 명칭을 쓰지는 않습니다. 주님 당시에는 주님의 제자로 불리는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사도]로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은 자는 12명이 전부였습니다. 사도는 주님이 친히 선정하셨습니다. ‘사도’란 명칭 역시 주님이 친히 부여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입니다. [날이 밝으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의 열둘을 택하시고 또한 사도라 이름하셨으니](눅6:13). 사도는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사역을 부과하셨습니다. 이들에게 사도의 권능들을 부여 해 주셨습니다. 열 둘 중에 한명은 마귀였습니다(요6:7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선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마귀니라, 하시니라.](요6:70). 누구인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짓을 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정체가 마귀였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셨듯이, 가룟 유다는 마귀였다는 말씀입니다. 이 일은 시편에 미리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시편에 기록된바,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그의 감독직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음이라.](행1:20). 베드로는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그들 가운데 하나였던 가룟 유다의 일이 구약에 미리 기록된 사건임을 알았습니다(시69:25,109:8). 여기서 우리는 사도직이 [감독직]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감독직은 타인이 취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가룟 유다의 감독직이 누구에게로 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사도의 자격 요건을 ‘침례인 요한의 침례 때부터 주님의 승천 때까지 자신들과 항상 함께 다니던 사람들로 한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요한의 침례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를 떠나 들려 올라가신 바로 그 날까지 우리 가운데 드나드시던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이 사람들 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세워 우리와 함께 그분의 부활을 증거할 증인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1:20~22). 그래서 뽑힌 사람이 맛디아입니다. 이외에 사도로 택함 받은 사람은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부르시고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행13:2). 이들이 사도란 말은 사도행전 14:14에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두 사도가 이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며 사람들 가운데로 달려들어가 소리 질러](행14:14). 바울이 사도였고, 바나바 역시 사도였습니다. 몇몇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정녕 사도란 점을 무려 19차례나 반복적으로 밝히고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12사도와 같이 직접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사도로 임명된 사람은 없습니다. [각주:1]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사도도 없습니다. 사도들은 죽으면서 또 다른 사도를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후계자를 세우거나 세워주시도록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들에서 죽은 사도를 대신할 사도를 추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사도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는 [사도]란 문자적 의미대로 “보냄을 받은 자”란 정도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런 점에서 선교사들은 모두 사도의 직임을 맡은 사람들이라고 확신합니다. 선교사는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름들 가운데 지역 교회에서 파송을 합니다. 해외 선교를 떠났던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 헌신된 종들입니다. 선교사의 사역이 무엇입니까? 복음 선포입니다. [참으로 내가 복음을 선포하고자 애써 왔으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서는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다른 사람의 기초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것은 기록된바, 그에 대하여 전해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5:20,21).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선교사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고, 복음 선포자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내가 복음 선포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하지 아니하노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이방인들의 교사가 되었노라.](딤전2:7). 이것은 사도 바울이 받은 영적 은사였고, 성령의 선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자칭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짓 사도]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영벌(玲罰)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는 자들이라.](벧후2:1). 베드로는 당대에 거짓 대언자들, 거짓 교사들이 있음을 경고하고 앞으로 역시 그러할 것임을 말해 줍니다. 거짓 대언자가 있다면 거짓 사도가 있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우리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 사도들을 찾아 내는 영적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사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스스로 사도라 말하나 사도가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하는 자들임을 알아낸 것과](계2:2). 자칭 사도들이 교회로 스며들었을 때 그들을 시험하여 거짓말하는 자들임을 알아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영적 분별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 은사주의, 오순절 교회가 전체 교회의 12%가 넘고, 그 신학적 영향에 동조하는 자들은 거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있고, 거짓 대언자가 있습니다. 거짓 교사가 있습니다. 거짓 사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에 활동하던 거짓 사도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러한 자들이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며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후11:13). 거짓 사도들은 거짓 이적들을 행합니다. 이들은 방언이나 병 고침이나 예언을 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유대인들도 아니면서 유대인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거짓 사도들입니다. 이 시대에 거짓 사도들을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시험대 중의 하나는 ‘돈’입니다. 돈을 사랑하고 사역을 돈 벌이에 활용하는 자들은 모두 거짓이라고 보면 확실합니다. 사역은 사역이지 결코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대언자, 부흥사, 목사와 교사 등 그 누구도 성령의 은사를 활용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곳 미국에 와서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 주일 학교 교사 등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모두 돈을 받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교회가 사업 터입니까? 교회가 장사하는 집입니까? 돈 받는 반주자, 돈 받는 성가대 지휘자는 교회가 직장이지 결코 사역지가 아니며 섬김이 아닙니다. 그는 고용된 고용인이지 주님을 섬기거나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일로 인해 생업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하거나 손해를 많이 보아서 어쩔 수 없는 경우나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 사례비를 줄 수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직업은 그대로 있고, 부수입으로 교회에서 돈 벌이를 하는 것은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뿐입니다.

사도의 표적이나 권능은 현재 어느 교회에서도 없습니다. 사도로 임명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도, 대언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가 계속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till we all come to]이로써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長成)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엡4:11~13).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보면 "till we all come to..."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모두 ....이를 때 까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까지 은사들을 주시는가?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1에 언급된 이 은사들은 현재도 진행 중임을 나타냅니다. 저 하늘에서는 사도나 대언자나 복음 전도자나 목사나 교사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런 직분으로서의 은사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주님께서 지역 교회에 주신 은사의 직분들이 무엇이며, 목적 역시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사도와 대언자는 이 시대에 그 직무와 역할만 주어져 있습니다. 사도적 직무는 선교사나 복음 전도자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웁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말해 줌으로써 경고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은사도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모든 은사는 위에선 언급한 세 가지를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첫째,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사도, 대언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를 주신 것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먹이고 감독하여 완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고, 목사나 선교사들의 권위가 전혀 없는 상태라 목사님들은 교회를 운영하거나 경영을 하려고 합니다. 그럼 교회의 목자들이 어떻게 성도들을 완전하게 합니까? 모임을 많이 만들고, 성경 공부 시간을 조직하고, 여러 가지 행사들을 개최하여 정신없이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까? 주로 그런 방식을 선호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덧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니라.](골3:14). 사랑이 없이 행하는 어떤 일도 사람을 완전하게 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사람을 세우고, 완전하게 합니다.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려면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밤낮으로 매우 넘치게 기도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의 믿음에서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살전3:10). *골4:12참조. 사도들은 전도도 열심이었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도 열심이었지만 더욱 열심히 했던 일은 기도였습니다. 이들은 기도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중보 기도는 믿음에서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의 사명을 받았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려면 성경 교육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시간이 필요하고, 제대로 많이 가르쳐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7). 성경을 배우지 않는 성도는 영원히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말씀을 배우지 않는 성도는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이리 저리 흔들리고 요동합니다. 성격이 좋든, 기도를 많이 하든, 자선을 많이 하든, 사람들에게 정직하다는 평을 받아도 여전히 불완전하고 부족합니다.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교회는 안 다니는데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고, 교회는 다니는데 성경은 공부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불완전합니다. 영적 균형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겸한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고백만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선한 행위들을 동반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2:22).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는 선한 행위로 빛을 발해야 합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받은 자들이 맺어야 할 의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선물로 주신 목사와 교사 없이는 성도들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결코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지역 교회에 속하지 않고 믿음이 성장하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귀들의 교리에 속은 것입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혼자서나 가족끼리 캠핑을 떠나면서 자신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만 그들은 성령의 인도함 대신 마귀의 인도함을 따라 넓은 문으로 나아가는 자들일 뿐입니다.

둘째, 섬기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양들의 목자장이신 주님께서는 섬김을 받는 대신 섬기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섬김의 본을 보이셨고,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섬기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끼리는 그리 하지 못할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가장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지니라. 이는 사람의 아들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고 왔음이니라.](막10:43-45). 목자는 양들을 섬겨야 하고, 교사는 배우는 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다스리는 자는 멍에 아래 있는 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섬길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받았다는 뜻이며, 섬김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오직 섬김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각각 은사(恩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그 은사를 써서 섬기라.](벧전4:10). 이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은사를 지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를 써서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곧 교회를 말합니다. 사도의 직분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대언자 역시 교회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 건물을 건축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 성도들을 믿음 위에 굳게, 강건하게 세우라는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뛰어난 성경 지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우는 일보다는 허무는 일을 많이 합니다. 믿음과 덕을 세워주는 대신 늘 파괴적인 말만 합니다. 물론 많은 교회들이 성경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일이 주된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수고, 무너뜨리는 일도 결국은 다시 세우는 일을 위한 사전 작업이어야지 때려 부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평생에 한 번도 세우는 일은 못하고 무너뜨리고, 부수고, 헐뜯고, 비판하는 일에 전념하는 그런 성도들도 있습니다. 배운 지식을 가지고 형제들을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세워주어야 할 사람들이 자꾸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허물어뜨립니다. 할 줄 아는게 무너뜨리는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산적인 일, 건설적인 일은 아예 배운 적이 없고 소모적이고 논쟁적인 일들과 넘어뜨리는 일들만 해대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합니다. 교회란 사람들이 함부로 욕하고 비판하고 찧고 까부는 대상이 아닙니다. 구약은 유대 민족을 공동체로 묶어서 말씀하신 주님께서 신약에서는 교회를 공동체로 묶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에게 말씀하시고, 교회를 먹이시고,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종은 곧 교회의 종입니다(롬16:1). 하나님의 사역자는 교회의 사역자입니다(고후8:23). 오늘날 교회를 멸시하는 일을 두려움 없이 하면서 주님을 섬긴다는 신자들은 교회를 멸시하는 일이 주님을 멸시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사역자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일곱 교회의 천사들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교회의 말(마18:17), 교회의 귀(행11:22), 교회의 전송(행15:3) 등 주님은 교회를 하나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주님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란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지 교회를 무너뜨리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와 상관없이 혼자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던 간에 마귀의 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말만큼 확실한 거짓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우리 주위에도 많이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교회를 세우는 일을 전혀 할 줄도 모르고, 전혀 할 의사도 없는 주제에 성경을 많이 공부했다느니, 지금도 하고 있다느니 자랑하는 몇몇 거짓말쟁이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절대 세우지 말자!” 를 표어로 삼은 사람들처럼 교회를 비방하고, 목회자들을 욕하고, 불순종하면서 성경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불순종과 교만과 반역을 [교회 개혁]이란 주장으로 덮어 버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어느 때라도 개혁을 필요로 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회개이지 개혁이나 개선이 아닙니다. 교회 개혁, 교회 갱생이란 말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자들이야말로 정말 마귀 들린 자들입니다. 성경을 배우고 공부하는 일은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영적인 은사들에 열심이 있은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하라.](고전14:12).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십시오. 목사, 교사, 집사, 부흥사, 선교사 등 무슨 직분을 맡았든 직분이 전혀 없던 간에 해야 할 일은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기 위해 은사들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교회를 세우는 일에 쓰이지 않는 은사라면 그는 은사를 오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역량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신자들 가운데 때로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의 결여로 말미암아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해를 끼치고 악을 행하는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얼마나 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도 있고, 교회는 적당히 취미 생활 정도나 종교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로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마치 학생이 학원을 선택하고, 소비자가 가게를 선택하듯이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대한 애정이나 교회관이 자주 가는 영화관이나 음식점 중의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와 가정, 교회와 학교, 교회와 국가, 교회와 직장, 교회와 대인 관계 등 교회를 둘러싼 가치관이 충돌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와 가정이 선택의 문제가 되고, 교회와 직장이 선택의 문제가 되고, 교회와 학교가 선택의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저는 가정이 교회보다 소중합니다.”라고 합니다. 가정을 세울 줄도 모르고, 영적 제사장의 역할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가족을 위해서는 교회 정도는 우습게 여긴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성경적으로 아내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 자녀를 양육할 줄도 모르는 분들이 이런 말을 할 때면 듣는 사람도 황당하지만 이들이 교회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가정을 핑계 삼아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고, 교회를 나오기 싫어하는 훌륭한 변명 거리라도 발견한 것처럼 뒤에 숨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저는 학업이 교회보다 중요합니다.”고 말하고, 월급쟁이는 “저는 일터가 교회보다 중요합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정치인이 “저는 국가가 교회보다 소중합니다.”란 말이나 영업 사원이 “저는 고객이 교회보다 소중합니다.”란 말이나 뭐가 다릅니까? 운동선수가 “저는 운동이 교회보다 중요합니다.”라고 말하고, 피아노 반주자는 “저는 음악이 교회보다 중요합니다.”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 같지도 않는 이상한 말을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런 말을 주절주절 대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의 핵심은 “제가 가진 것, 제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보다 중요합니다.”란 말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이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라도 된다거나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는 일이 되거나 가정에 큰 손실을 끼치는 듯한 느낌을 가지거나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아직 [교회]가 뭔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할 때 가정이 세워집니다. 저는 이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형제· 자매님들로 인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그런 자들보다 가정을 덜 소중히 여겨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까? 그들에게는 직장이 소중하지 않고, 이웃이 소중하지 않고, 친구가 소중하지 않고, 학업이 소중하지 않아서 그것들을 버렸습니까? 가정, 교회, 국가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조직입니다. 그러나 이 중에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입니다. 교회만이 거룩합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국가를 세우라, 가정을 세우라”는 명령을 하지 않으셨지만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이 어떤 애국자들보다 더 열렬한 애국자들이며, 어떤 가족주의자들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통해 국가가 세워지고, 가정이 세워집니다. 가족은 때로 복음의 원수도 되고, 대적도 됩니다. 국가는 때로 교회를 핍박합니다. 가족과 교회의 가치가 충돌하면 마땅히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카타콤의 순교자들이 가정의 평안과 가족을 위해 카타콤이란 동굴에서 생활했습니까? 직장이 소중하고, 꿈이 소중해서 그들이 카타콤으로 갔습니까? 초대 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세상과 대적에 의해 '왈덴시안', '도나티스트', '알비겐스', '바울파', '보고밀파', '페트로브루시안', '아놀드파', '후스파', '연합형제단', '모라비안', '롤라드파' 등으로 불린 참된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참된 성경이 전수되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고, 참된 교회의 맥을 잇고자 했습니다.

저는 이곳 이민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이들과 비슷한 정도의 믿음이나 헌신을 요구하는 일은 제가 미친 놈이 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라도 그와 비슷한 신앙 노선과 가치관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교회보다 중요합니다’ 와 같은 미친 개 소리를 [진리]처럼 쏟아내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비뚤어졌던 가정, 엉망인 가정이 건전한 가정이 되고, 바른 가정이 됩니다. 육신적인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되고,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가 됩니다. 성경적인 지역 교회를 통해서 개인과 가정이 세움을 입고, 그런 개인과 가정이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꾸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가정이나 가족을 핑계로 삼아 지역 교회를 멸시하는 일들을 수 없이 보아 왔고, 들어왔고 겪어 보았습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되리이까? 하매] (마19:27). 이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 이름으로 인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자마다 백 배를 받고 또 영존하는 생명을 상속받으리라.](마19:29). 주님은 “가족이 우선이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정과 욕심에 이끌려서 행하지 말고 늘 진리로 행하라고 하십니다.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받은 성령의 은사는 가정을 세우거나 회사를 세우거나 국가를 세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회를 세우고, 형제들을 세워 주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아니지만 사도들의 신앙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들이 지녔던 믿음은 우리와 동일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낯선 자도 아니요, 외국인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더불어 동료 시민이요, 하나님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며 또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자들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으뜸 모퉁이돌이 되시나니](엡2:19-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기초(고전3:11)이십니다.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기초란 이들이 믿었던 믿음의 주(Lord)가 우리의 믿음의 바탕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는 대언자들이 주님을 증거했고, 신약에서는 사도들이 그러했는데 이들이 전수했던 믿음의 반석 위에 우리가 세워진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었던 믿음이나 우리가 믿는 믿음은 동일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믿음을 따라 교회를 세우는 일에 더욱 힘쓴 성도들이 되기를 빕니다.

헌신과 결단의 시간: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1. 성경에 바울과 바나바 외에 사도가 없다는 말이 아님. 바울과 바나바 외에도 사도들이 존재했다. "오늘날"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사도가 없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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