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7)
말씀: 계19:10 요절: 계19:10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대언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에베소서 4:11에 교회에 주신 다섯 가지 직분 가운데 사도, 대언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대언자는 존재하는가? 란 질문에서부터 이 직분 역시 논란이 많은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많은 이 시대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대언이 무엇이며, 누가 대언자인가? 대언자의 역할과 직무는 무엇인가? 등에 대해서 함께 공부해 보겠습니다.
[대언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고로 대언자란 말씀 사역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라고 보면 가장 정확합니다. 성경은 저와 여러분을 말씀 사역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길지어다.](고전4:1). 이전에는 특별한 몇 사람이 대언자, 왕, 제사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신자라면 누구나 복음 사역자요, 대언자요, 제사장의 직무를 맡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전도자입니다. 우리는 다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구약적 의미의 대언자와는 다릅니다.
구약에서 대언자는 하나님이 임명하시고, 하나님의 영을 주심으로 대언자가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대언은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가능합니다. 주의 영이 임하는 것과 주의 말씀이 임하는 것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입에 담아 주심으로써 말하게 할 때 그는 대언을 할 수 있게 되고, 대언자가 됩니다. 대언자는 단순히 대변인이란 의미로 “대신 말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대변인은 말을 받아서 대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말하는 사람을 대언자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성경적 어휘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모두 ‘선지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언자”라고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대언(prophet)이란 말 속에 예언의 기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대언자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론 역시 대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하나님의 대언자가 아니라 모세의 대언자였습니다(출7:1). “네 대언자”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아론은 모세가 하는 말을 받아서 파라오나 장로들이나 백성들에게 대신 말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오랫동안 궁중 생활과 광야 생활로 말을 잘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말이 능숙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세가 혀가 둔하다는 불평과 고민을 아론이란 대변인(대언자)을 세우심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흔히 오해하는 한 가지는 대언의 은사를 받으면 앞을 예측하는 예지력을 소유하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볼 수 있는 눈이나 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속에 말씀해 주심으로 그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대언입니다. 주님께서 누군가에게 말씀해 주시고 그가 그 말씀을 받아서 말씀해 주시면 그것이 바로 대언이 됩니다.
대언은 표적이 아니라 은사입니다. 목자와 교사도 은사입니다. 이는 병 고침이나 방언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누구든지 대언을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사 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 위에 있는 영을 취해 칠십 명의 장로들에게도 주시니 그 영이 그들 위에 임한 때에 그들이 대언을 하고 멈추지 아니하였더라.](민11:25). 주의 영이 사울에게 임했을 때 사울은 대언을 했습니다. 이것은 [예언]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예언은 미리 앞일을 예측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받아서 말하는 것”, “대신 말하는 것”이란 의미가 아니라 “미래를 미리 알아맞히는 것, 앞을 내다보는 것, 예측하는 것” 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말씀해 주시면 그것이 예언이 됩니다. 하나님이 과거를 말씀해 주시면 그것은 역사가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시면 그것을 받아 말할 때 그 역시 대언자의 직무를 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대언자들은 사회 고발은 물론이고 각 사람들의 죄악을 통렬히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미움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예언가들이 아니라 “대언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셨지만 단순히 미래의 사건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행하는 죄악의 결과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좌우한다는 점을 선포하셨습니다. 대언자들은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다가올 심판과 저주와 재앙을 피하라고 대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앞 날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행한 현재의 사건이 미래의 사건을 초래한다는 점, 주님께서 이들에 대해서 보응하심으로 일어나는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 말씀을 받아 선포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성도들이 예언이라고 말하는 은사적 예언과 성경적 예언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교도들에게도 각 민족마다 고유한 예언서들이 있고,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토정비결이나 정감록이나 이와 비슷한 부류의 예언서들이 많습니다. 몇몇 민족 종교들은 엉터리 예언서를 기초로 생성된 종교입니다. 점쟁이들은 점을 쳐서 앞일을 내다보고 말한다고 하고, 점성술가들은 별을 바라보고 징조를 통해 예언을 합니다.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 보는 것이 미리 보고 피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예언의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날 몇 몇 은사주의 교회에서 예언자들이 성령을 통해 예언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예수 믿는 점쟁이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개인에게 앞날을 미리 내다보는 능력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런 것이 있다는 사람이라면 그는 100% 거짓말쟁이입니다. 아니라면 마귀의 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
첫째, 자기 뒤에 일어날 일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형통하는 날에는 기뻐하되 역경을 당하는 날에는 깊이 생각하라. 또 하나님께서 이것과 저것을 마주보게 두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뒤에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전7:14).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목적입니다. 저는 제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저는 저의 자식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모릅니다. 다만 기도하고 바라며 주님께 인도하심을 구할 분입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 우리는 우리의 길과 등을 비추는 빛과 등불이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내일 걱정, 내일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걱정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일이 내일 닥칠지, 않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일들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걱정할 것 없습니다. 때로는 아는 것이 덕 큰 괴로움입니다.
둘째, 앞으로 일어날 일들. [이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그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언제 그 일이 있을지 그에게 말할 자가 누구이랴?](전8:7). 만약 1시간 앞에 일어날 일만 알 수 있어도 사고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강도나 상해를 당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시간이 아니라 1분 뒤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 1분 뒤에 있을 일을 압니까? 예를 들어 군대에 가는 군인은 자신의 복무 기간을 알고, 언제 제대할지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무소에 들어가는 죄수는 자신이 언제 출소할지 압니다. 판사가 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은 자신이 언제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될지 압니다. 이런 것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또한 어리석은 자는 말도 넘치게 하거니와 사람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나니 그가 있은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그에게 알려 줄 자가 누구이랴? 어리석은 자들의 수고는 그들을 각각 다 지치게 하나니 이는 그가 어떻게 도시로 들어가는 줄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전10:14-15). 성경은 어떤 특별한 예언의 은사나 재능을 지녀서 다른 사람의 장래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이는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잠27:1)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고 말씀해 주시지 않는 이상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게 됩니다.
셋째, 자기 때를 알지 못한다. [이는 사람 또한 자기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같이 사람들의 아들들도 재난의 때에 일이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면 올무에 걸리느니라.](전9:12). 자기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그러합니다. 때를 아는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욥이 자기에게 임할 재앙에 대해서 알았습니까?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이 옥에 갇히고 이집트에서 총리로 생을 마감할 줄 알았겠습니까? 전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았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내일 볼 시험에서 몇 점을 맞게 될지, 내일 손님이 몇 명이 올지 맞추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넷째, 무슨 재앙이 땅 위에 임할지 알지 못합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몫을 나누어 줄지니 이는 무슨 재앙이 땅 위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전11:2).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모든 철학, 과학, 종교의 한계입니다. 재앙이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평소에 재난 대책을 강구해 둡니다. 가장 흔한 일은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보험은 재앙을 막아 주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만난 후에 일어설 수 있는 자본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람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에 대비합니다. 암 보험, 재해 보험, 생명 보험 등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투자는 보험 회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 [영(靈)의 길이 어떠하며 아이 밴 여자의 태 속에서 뼈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네가 알지 못하는 것같이 모든 것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들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11:5). 사람이 자신의 일도 알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일들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시는 것들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섯째, 어느 것이 잘 될지 알지 못합니다. [/너는/ 아침에 네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네 손을 금하지 말라. 그 까닭은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은 그 둘 다 똑같이 좋을는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전11:6). 이는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잘 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 교회의 든든한 기둥이 되겠다 싶은 사람은 서까래도 되지 못하고, 도무지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끝까지 남아서 교회의 기둥이 되는 예는 교회 생활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교사들은 어느 학생이 잘 될지 수업 태도나 성적을 보고 예측하지만 그 예측이 여지없이 빗나가는 예가 허다합니다. 부모들은 어느 자녀가 잘 될지 모릅니다.
주님은 특정한 누구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셔서 내일 일을 계획하면서 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 대언을 하려고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언의 능력을 사모하고 예언의 은사를 그리워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이런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이는 성경이 [사랑을 따르고 영적 은사를 사모하되 특별히 대언을 하려고 하라.](고전14:1)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언은 말씀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대언하는 것을 사모하고](고전14:39a).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특별히 대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씀은 성도들에게 점쟁이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어 말씀 사역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모세 역시 온 백성이 다 대언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해 시기하는 것이냐? [주]의 온 백성이 대언자가 되어 [주]께서 그들 위에 자신의 영을 두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민11:29). 우리는 누구나 성령으로 충만하고 말씀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특별히 대언을 하려고 하라”는 의미입니다.
- 대언의 은사는 방언과 달리 자신이 아니라 남을 세우는데 유익한 은사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러나 대언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니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나 대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느니라.](고전14:3-4). 대언의 은사의 용도와 목적을 보십시오.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니”입니다. 이 일은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대언]이 무엇인지는 다 알 수 있습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입니다. [대언을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모든 대언자들을 보시면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대언자들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 대언을 하면 듣는 자는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모두가 대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달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고전14:24). 이것이 바로 대언의 은사가 갖는 유익입니다. 말씀의 빛이 죄인의 마음속에 임하면 누구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죄를 책망하십니다.
- 대언은 배움을 얻고 위로받고 세움을 입게 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배우고 위로 받게 하기 위하여 너희가 다 한 사람씩 대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전14:31).
구약에서 대언자들이 있었듯이 신약 교회에서도 대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와 대언자들은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말했기 때문입니다. 대언은 교회를 세웁니다. 대언자들은 방언과 마찬가지로 두 세 사람이 말했습니다. 대언자들이 교회 내에서 대언할 때 듣는 사람들은 가만히 무조건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대언을 판단했습니다. [대언자들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판단할 것이요,](고전14:29). 사사로운 사견이나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하지 않도록 영을 분별하고, 철저히 판단했습니다.
이는 거짓 대언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판단 받는 자칭 대언자들은 기분이 나쁠지 몰라도 그가 참된 대언자라면 시험받는 것이나 판단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가 시험하라. 이는 많은 거짓 대언자들이 나와서 세상에 들어왔음이라.](요일4:1). 오늘날 교회에서 방언이나 대언이나 병 고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성도들이 철저히 시험을 하고, 판단을 한다면 거짓 사도, 거짓 대언자, 거짓 교사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시험(입증)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로 주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살전5:21).
우리는 이 시대에 넘치는 악을 상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는 모두 거룩하고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이리들, 개떼들, 돼지, 울부짖는 사자, 새들, 독수리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영벌(永罰)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는 자들이라.](벧후2:1). 거짓 대언자들, 거짓 교사들이 있습니다. 거짓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교회 내에 왜 거짓 대언자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너희 가운데 대언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 표적이나 이적을 네게 보이고 그가 말한 그 표적과 이적이 이루어질 때에 네게 이르기를, 네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 대언자나 그 꿈꾸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이는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가 너희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시기 때문이니라.] (신13:1~3). 주님은 성도들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거짓 대언자들을 주십니다.
구약에서는 거짓 대언자들은 죽이도록 했습니다. [그 대언자나 그 꿈꾸는 자는 죽일지니 그 까닭은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너희로 하여금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고 속박의 집에서 구속(救贖)하신 [주] 너희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며 또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걸으라 명령하신 길에서 너를 밀어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네 안에서 악을 제거할지니라.](신13:5). 그렇다면 어떻게 거짓 대언자를 구분합니까? 그 구별법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전적으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등의 교리가 그런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대언자가 주의 이름으로 말한 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대언자가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그 일이 뒤따라 일어나지도 않고 성취되지도 않으면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대언자가 자기 뜻대로 말한 것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18:22). 이런 기준으로 시험해 보면 하나님의 대언자인지 거짓 대언자인지 우리는 확연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교회, 어느 교회에 대언자들이 있는가? 여러분도 알다시피 대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일은 있을지라도 대언자로 인정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사로이 대언자 흉내를 내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도 차마 자신이 대언자라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대언은 성경의 완성으로 그쳤습니다. 초기 교회에는 사도와 대언자가 필요했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이나 율법사들이 아닌 사도들과 대언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계시가 주어지고, 교회의 기초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대언자나 영적인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들이 {주}의 명령인 줄 알지니라.](고전14:37)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이 대언자라고 생각된다면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보다 앞서서 성경이 주의 명령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성경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하며, 성경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대언자라고 하면 그에게 신비의 지혜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지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대언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는 성경 아래 말씀의 권위에 순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언자들의 영은 대언자들에게 통제를 받나니](고전14:32). 누가 교회 내에서 대언자라고 한다면 그는 대언자들에게 통제를 받습니다. 이는 구약의 대언자들, 신약의 사도들과 같은 성경 말씀에 통제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대언자들이 성경과 다른 말을 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대언이 아닙니다.
☞ 대언자는 누구인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대언자라고 언급되어 있는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창20). 그러나 이전에도 대언을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에녹’입니다. 에녹은 주님의 심판과 재림을 대언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일곱번째 사람인 에녹도 이들에 대하여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數萬)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유1:14). 노아 역시 대언자였습니다. 노아는 세상의 멸망을 대언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대언했습니다. 성경은 대언의 책입니다. 대언의 책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그가 진정으로 대언자입니다. [이 대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계1:3). 성경을 읽고 깨달으십시오. 주의 성령께서 성경을 가르쳐 주시고, 조명해 주시도록 기도하십니다. 성경은 대언자들의 책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대언자들이 대언을 받아 말한 대언의 말씀들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더라.](계22:7). 우리는 대언자가 되기 전에 대언의 말씀들을 읽고, 듣고, 기록된 것들을 지켜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가 대언의 은사를 지녔거나 대언의 영을 지녔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거룩한 대언자들이 받아 말한 성경 말씀을 소홀히 여기거나 멸시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대언자를 자처하는 자들이 성경의 가치나 권위를 업신여기고 ‘성령’만 외친다면 그는 분명 거짓 대언자요, 마귀의 사역자들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눈을 뜨고, 그 말씀을 사랑하며, 읽고 지키는 자들이야말로 어떤 대언자들보다 확실한 대언의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감동, 하나님의 영이 그대로 들어 있는 말씀을 내 마음 속에 거하게 하는 것이 대언의 영을 받는 길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난 것이 없나니 이는 대언이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아 말하였음이라.](벧후1:20-21). 성경 말씀은 그 자체가 대언이요, 대언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대언의 영을 받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말씀을 풍성히 속에 거하게 함으로써 믿는 신자라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대언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증거가 대언의 영이기 때문이라, 하더라.](계19:10b). 예수님이 주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자는 그 입으로 이미 성령님을 대신해 말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말하는 대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언자는 없을지라도 대언의 직무는 모든 신자들에게 유효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왕, 제사장, 대언자의 직무는 신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직무입니다. 다만 구약 시대와 같은 왕이나 제사장이나 대언자가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신약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영적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의 대언자들이 신약에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일반화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때에는 대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런 대언자들은 교회 내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언자로 불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대언자들은 점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 말한 것이 전부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을 말씀해 줌으로써 대언자의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대언의 은사는 예언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란 점이 핵심입니다. 대언의 말씀, 대언의 영은 결국 성경과 성령을 통한 사역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항상 주목하고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말씀을 통해 대언자의 직무, 사역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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