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엡4:11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계속 공부합니다. 지역 교회에 주님이 주신 직분으로서의 은사 중 하나는 목사(PASTOR)입니다. 목양자, 목회자, 목사, 감독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영어로는 pastor/Shepherd입니다. 이곳 미국이나 캐나다, 한국 등은 교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회와 목사들이 많습니다. 이곳 LA 주변에는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흔하고 흔한 것이 목사여서 목사란 직분에 대해서는 달리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지만 이외로 목사란 직분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완전히 무지한 성도들이 더욱 많습니다.
목자의 기본적 임무는 양들을 먹이고 돌보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주는 것이야말로 책무를 맡은 자들의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백성들을 굶기는 통치자를 원하는 백성은 없습니다. 짐승을 굶기는 주인이 없고, 자식을 굶기는 부모가 없습니다.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데 먹을 것이 없는 것만큼 사람을 슬프고 비참하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새들도 새끼를 먹입니다. 짐승들도 먹을 것을 구해서 자기 새끼들을 먹입니다. 먹을 것이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학문도 예술도 어떤 고상한 이상도 허무한 것에 불과합니다. 양떼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모든 양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게 하셨나니](행20:28).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게 하셨나니” 이것이 목사가 해야 할 일의 처음이요 끝입니다. 누구를 먹입니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결코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양떼들입니다. 한 구절 더 봅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기꺼운 마음으로 하며](벧전5:2). 두 구절을 유념해서 보십시오.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양떼가 같은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라! 이것이 교회에 목사를 주신 이유입니다. 목사의 직무는 양떼를 먹이는 것이지 자신의 이름을 내거나 돈을 벌거나 다른 부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란 타이틀을 유지한 채 사회 활동이나 정치 활동을 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는 대신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양떼를 팔아먹고, 잡아먹고, 버려두는 자들은 목자의 직무를 망각한 것입니다. 목자는 더러운 이익을 탐해서도 안 됩니다.
목자는 양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삯군 목자와 선한 목자의 차이는 자신의 생명을 먼저 살피는가? 양떼들의 생명을 먼저 살피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자는 하나님의 양떼를 섬기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양떼들에게 무엇을 먹이는가? 목사를 목자라고 하면 성도들은 양떼들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말씀의 젖, 말씀의 고기로 먹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고기로 먹이지 못하고 젖으로 먹였다는 사실을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고전3:2). 말씀의 젖, 말씀의 고기로 먹이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너무 어려서 고기를 먹이지 못했고, 감당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5:14절에 따르면 고기는 장성한 자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우리는 모든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고 소화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는 양떼들에게 생명의 꼴을 풍성히 나누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요즘은 누구나 신학교를 졸업하면 목자가 되는 것이 관례이지만 목자는 주님이 주신 은사입니다. 목자는 사도, 대언자, 복음 전도자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받아서 주어진 직분입니다. 목사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양떼를 먹이고 돌보라고 부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양들을 아시며, 자신의 양떼들을 먹일 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양떼를 맡기십니다. 아무나 목사를 하는 시대에 목사가 교회라는 작은 점포의 사업자가 된 것처럼 교회를 운영하고, 키우고, 늘리는 것에 온 신경이 가 있는 것이 대부분의 교회 현실입니다. 어떻게 교회를 경영할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잘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잘 이끌 것인가? 그래서 교회의 목사는 마치 회사의 경영자인 것처럼 리더쉽(Leadership)의 강화를 위해 애를 씁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 보면 정말 사회생활에 필수적인 성공학 강좌를 위한 설교 같습니다. 양들을 먹이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으로 먹여야 합니다. 대속과 십자가와 피와 부활과 같은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이 마치 교리의 낡은 구습인양 매도되고 지옥과 하늘과 같은 내세 신앙이 마치 현실을 외면하는 이원론이라는 공격을 받는 것이 현재 교회 강당과 신학교에서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목자가 양떼를 먹을 초장의 풀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양들이 안심하고 마실 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양떼란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무교회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역 교회의 역할이나 의미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교회 건물, 교회 장소, 교회 터를 교회라고 말하는 오류에는 빠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목자들에게 교회 건물을 짓는데 전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는 일은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입니다. 잘 보십시오. 가족이 소중하면 가족이 함께 먹고 살고 잠을 자는 집도 중요합니다. 가정이 중요하지 집이 중요하냐 하면서 집을 더럽히고, 부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집 없는 사람들을 이곳에서는 Homeless라고 하는데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자는 운동이 Habitation 운동입니다. 가정이 있고, 가족이 있지만 집이 없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은 겪어 보지 않는 사람은 모릅니다. 길거리나 공원에서 잠을 자 본 사람들은 집이란 건물이 없는 그 애환을 잘 압니다. 집과 가정의 관계가 오늘날 교회 건물과 교인들의 관계와 같습니다. 가족이 가정을 이루어 사는 집(house)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지역 교회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반대로 교회 건물을 교회의 전부인양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비정상으로 봅니다.
저명한 한학자로 알려진 한국의 어떤 사람이 T.V 특강에 나와서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며 장래 목사가 되기를 원했는데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이 세 가지 단어에 얽매여 있음을 보고 목사가 되기를 그만두었습니다. 그 세 가지 단어란 '믿어라, 돈 내라, 집(교회) 짓자'입니다"가 전부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교인, 비교인이 모두 공감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목자를 통해 교회 건물을 세우라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영혼을 강건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학교의 시설보다는 학생들의 학업 성취 능력과 진지한 학문적 열정이 더욱 중요하고, 좋은 집이나 큰 집을 사고 꾸미는 것보다 가족의 사랑과 형제간의 우애 등이 훌륭한 가정이라고 말하듯이 교회 건물보다는 경건한 믿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건전한 영적 상태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 건물을 학교라고 말합니다. 학생이 학교 건물이 필요 없다, 책상도 시설도 필요 없다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가족이 있는 그곳이 가정이니까 집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몇몇 교인들 중에는 성도가 있는 그곳이 교회니까 교회 건물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당신의 가족들은 텐트에 살고 당신 집을 나에게 주시오! 라고 말해 보십시오. 아마 죽이려고 덤벼 들 것입니다.
주님은 지역 교회에 목사를 주셨는데 이는 양떼를 먹이라는 임무를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들이 떠날 필요가 없나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매](마14:16). 먹을 것을 주라. 이것은 목자로서의 임무를 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요21:15). 무려 세 번에 걸쳐 주님은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 앞에서 친히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식탁을 차려 놓고 그들에게 먹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땅에 올라와 곧 숯불이 거기 있음을 보니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더라.] (요21:9). 주님은 제자들이 먹을 것들을 친히 준비하시고 먹이시면서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목자가 되기 전에 주님이 물어 보시는 최종 면접시험은 이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주님을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목자의 자격 요건입니다. 주님은 많은 질문을 하지 않으십니다. 믿은지 얼마나 되었느냐? 목회 비전은 무엇이냐? 왜 목사가 되기를 원하느냐? 어느 학교를 졸업했느냐? 안수는 받았느냐? 등은 전혀 질문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한 가지만을 물으시고 대답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으로부터의 부르심과 소명이 목자의 가장 큰 자격입니다. 신학교 졸업장이나 사람들의 평판이나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있어 보이는 것 등이 목사의 은사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를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보여도 목회를 잘만 하고, 반대로 저 사람은 목회를 했으면 싶은 사람은 목회를 잘 못합니다. 목회를 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목회자가 된 사람도 있고, 목회를 하겠다고 자원했다가 망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목사의 기원은 주님이십니다. 목사의 권위 역시 주님에게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 부름받기 전에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대해서 그렇게 우호적이지 못했습니다. 장로교에서 구원받아 선교 단체에 있다가 바른 성경을 바탕으로 한 바른 교회를 찾아 침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했지만 교회 생활은 제 마음의 영적 갈증이나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제가 목회자가 되었지만 목사의 직분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갈수록 절감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도 자주 제 자신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다시 확인하는 일이 잦습니다. 지금 교회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 왜 내가 먹이는 양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는가? 등등 별 문제를 다 고민합니다.
목자는 주님이 교회에 주신 은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목자이십니다. [이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 돌아왔음이니라.](벧전2:25). 이런 점에서 목자는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자신을 일컬어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양들의 큰 목자라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이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이끌어 내신 화평의 하나님께서 영존하는 언약의 피를 통하여](히13:20). 주님은 목자장이기도 하십니다. [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왕관을 받으리라.](벧전5:4).
오늘날 교회는 목사, 목양자, 목자란 칭호로 교회내의 직분을 세워서 양들을 먹이는 일을 하게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목사의 권위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거나 또는 반대로 지나치게 낮게 평가함으로써 목사의 정체성이 성경적 지위에서 벗어남으로 양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목자(shepherd)와 목사(pastor-목양자)에 대한 성경적 조명을 통해 바른 지식과 믿음을 얻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고,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목자를 의미합니다(요10:11). 선한 목자란 양들을 알고, 양들 역시 그의 음성을 알며, 그 음성을 듣고 따르는 그런 목자를 말합니다(요10:14). 양들을 인격적으로 알고, 깊은 앎의 관계를 맺지 못하면 감히 선한 목자란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양들의 큰 목자이십니다(히13:20). 양들의 큰 목자는 자신의 피를 통해 양들을 모든 선한 일에서 완전하게 하시고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게 하는 목자를 말합니다(히13:20-21참조). 하나님은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고, 예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혼의 목자입니다(벧전 2:25). 주님은 우리의 혼을 지키시고, 먹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 돌아왔음이니라.](벧전2:25).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나니](히6:19). 이상은 모두 주님 자신에게만 목자(shepherd)란 말이 성립될 수 있는 예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의 어떠하심은 곧 우리의 어떠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큰 목자이시면 우리 역시 목자가 되어야 하며, 주님이 왕 중의 왕이시면 우리 역시 왕이 되며, 주님이 대제사장이면 우리가 영적인 제사장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역 교회의 목사는 shepherd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5:4, [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왕관을 받으리라.] 주님은 목자장입니다. 이는 우리가 목자란 전제하에서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목자였습니다(사63:11). 다윗 역시 목자였습니다(겔34:23, 37:24). 이들의 네발 달린 양떼를 친 목자의 경험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고 인도한 목자였습니다. 목자(shepherd)란 직분의 기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결코 교단이나 신학교나 사람들의 평판이나 자기 확신에서 오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영적인 것이 있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눈에 보이는 실체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몸 된 교회가 있으면, 그 몸 된 교회를 구현하는 지역 교회가 있습니다. 영적인 왕국이 있으면 물질적인 왕국이 있습니다. 영들의 아버지가 있으면 육신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빛 되신 주님이 있으면 보이는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속한 것들, 하늘에 속한 것들은 이 땅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그 밀접한 관련성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자이신 주님과 목자로 세움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광야 교회를 목회하던 ‘목자’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40년을 목자로서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모세의 유언과 같은 간절한 기도는 자신과 같은 목자를 이스라엘 위에 세워 주시도록 구한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그들 앞에 나가고 들어오게 하시며 또 그들을 인도하여 내고 들어오게 하사 [주]의 회중으로 하여금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니라.](민27:17). 이 기도의 응답으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목자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모세와 여호수아, 다윗과 같은 주님의 뜻대로 세움 받은 목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백성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지치고 널리 흩어졌다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지치고 널리 흩어졌음이라](마9:36). 주님은 탄식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 곧 바로 자신을 대신해서 이스라엘 전역으로 제자들을 보내셔서 질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고, 왕국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마10:1-7). 목자장이신 주님은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목자들로 파송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는 오병이어 사건 때 한 번 더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외딴 곳이요, 이제 때가 지났사오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로 들어가 양식을 사게 하소서,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들이 떠날 필요가 없나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매](마14:15~16). 주님은 제자들이 목자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양들을 돌보고 먹이는 것은 목자의 고유한 직무이며, 은사입니다.
목자의 정체성은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들은 적이 있는가? 없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목자, 목사, 목양자 등의 용어에 신경을 예민하게 쓸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목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요21:15,16,17)에서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내 양들을 먹이라], [내 양들을 먹이라.]는 직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목자들의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놓았고, 받을 상급에 대해서도 밝혀 놓았습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기꺼운 마음으로 하며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떼에게 본이 되라.](벧전5:2~3). 이렇게 목자의 직분을 수행한다면 목자장이신 주님이 오실 때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의 제사장이 되시고, 우리의 교사가 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사실은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목사가 필요없고, 교사가 필요없다는 식의 가르침은 이단이요, 마귀의 교리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은사로 교회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은 세우신 목자를 통해서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십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이 말씀은 너무나 아름다운 싯구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히 암송될 귀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자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이 자신들 앞에 세운 목자가 아니라 엉뚱한데서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주는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이여, 주는 빛을 비추소서.](시80:1). 주님이 인도하시고, 빛을 비추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사무엘이나 다윗과 같은 목자를 보내시고, 교사들을 주셔서 지식과 명철로 먹이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또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明哲)로 너희를 먹이리라.](렘3:15).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주리니]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이 목사의 정체성이며, 소명입니다. 목사는 직분으로, 은사로 교회에 주시는 것입니다. pastor(목사)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단 한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직분은 하나님이 지역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pastors)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흠정역에서는 이 단어를 이곳에만 목사로 번역했고, 나머지는 모두 목양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교회에 목자의 직분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목사를 주십니다. 교회마다 새로운 목사를 청빙하다, 초청 한다, 목사를 세운다 등의 말을 하지만 목사는 스스로 자원해서 서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의 초청이나 추천으로 세움 받는 것도 아니며, 교단에서 임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목사는 주님이 교회에 주시는 것입니다. 목사는 주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목사 고시를 통해서 배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그들을 먹일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부족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23:4). 목자란 말에는 항상 “먹이다”라는 말이 함께 합니다. 이는 목자의 직분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목자를 세우시고, 그들을 먹이게 하십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을 먹이게 하리니 그는 곧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되리라.](겔34:23). 주님은 목자를 [세우시고, 먹이시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목사들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구절들을 살펴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론이나 견해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목사에게 무엇을 기대합니까? 어떤 성도들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성도들은 목사님들에게 모든 것을 기대합니다. 아들 돌잔치에 와 달라는 일부터 시작해서 자기 집 경조사에 모두 초청하고 오라고 합니다. 안 오면 매우 섭섭해 합니다. 자신이 병원에 가는데 차로 데려달라는 일이나 공항에 친척이 오는데 시간 나시는 분은 목사님 밖에 없어서 차로 좀 데려 와 달라는 말도 다반사입니다. 이곳 미국 이민 교회는 목사가 성도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이 허다한 것으로 압니다. 목사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는 목사의 정체성을 성경적으로 정확히 이해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비극이나 타락의 원인을 분석하는 일이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목자들의 타락에 있습니다. 목자들은 성경에서 자신들이 받은 소명과 역할과 임무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일에만 매진하면 그만입니다. 다른 일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어떤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목자 직분을 그만 두어서도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집안의 자손으로 대언자로 부름 받았지만 그의 직분은 목양자(목사)였습니다. 그는 매우 힘든 상황에서 목자직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목자 직분을 그만두는 일은 없었습니다. [나로 말하건대 나는 서둘러서 목양자 /직분을/ 그만두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사오니 /이것은/ 주께서 아시는 바니이다.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바로 주 앞에 있었나이다.](렘17:16). 목자와 대언자와 교사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양들이라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줄기차게 사역을 지속했습니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복음 선포자의 역할을 하고,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교사의 역할을 겸하며, 양들을 돌보는 일에서 감독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집회의 스승들이 굳게 박은 못들 같으니 이 말씀들은 한 목자께서 주신 것이니라.](전12:11). 목자이신 주님으로부터 받아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목자입니다.
목양자(목사)가 이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엄한 경고와 심판을 주실 것임을 여러 번 밝히셨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망한 것도 이들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먹이는 목양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가 내 양떼를 흩으며 그들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으니, 보라, 내가 너희의 악한 행위에 대하여 너희를 징벌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23:2). 여기서 목양자의 임무가 다시 한 번 나와 있습니다. 1. 백성들을 먹인다. 2. 백성들을 돌본다. 에베소서 4:11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pastors)와 교사로 주셨으니] 목양자와 교사는 겸직입니다. “그분께서....주셨으니”란 말로 우리는 목사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셔야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부름 받은 목양자들은 양들을 부지런히 먹이고, 돌보아야만 합니다.
본래 목양자의 임무는 주님의 말씀을 양들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내가 또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明哲)로 너희를 먹이리라.](렘3:15). 주님이 주신 목자들, 주님의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선물로 얻는 것은 지역 교회의 크나큰 선물입니다. 목자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로 아는 것이 성경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바른 목자,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목자를 주시도록 다 같이 기도하시고, 그런 목자에게 양식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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