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엡4:11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계속 공부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다섯 번째 직무로서의 은사는 ‘교사’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동안 [주님]이란 칭호보다 ‘선생’이란 칭호를 훨씬 많이 들었습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젊은 관원은 주님을 ‘선한 선생님이여’이라고 불렀고(마19:16), 니고데모 역시 주님을 선생으로 불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주님을 선생님이라고 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르다 역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도 자신이 선생이란 사실을 전혀 어색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자체가 ‘선생’임을 자처한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제자가 자기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완전한 자마다 자기 선생과 같게 되리라.](눅6:40)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과 {주}라 부르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니라. 너희 {주}와 선생인 내가 너희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마땅하니라.](요13:13-1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생과 주님이시며, 주님과 선생님이십니다.
주님은 진리를 가르치시는 선생이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주님의 가르침들이 일목요연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비유로 많은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시며 자신의 가르침으로 그들에게 이르시되,](막4:2). 주님은 쉬는 날도 없이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방학도 휴가도 안식일도 없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안식일에도 주님은 회당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그분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매 많은 사람들이 듣고 깜짝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그가 받은 지혜가 어떠하기에 그의 손으로 이런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느냐?](막6:2). 주님이 사도이시고 주님이 목자이시듯이 주님이 교사이십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을 지라도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이상히 여기시고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막6:6). 주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수강료를 받은 것도 아니고 졸업장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오사 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으므로 불쌍히 여기사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더라.](막6:34).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고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교사를 은사로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진리를 가르치시는 선생이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복음 전도자요, 증인이요, 교사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마2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르치고”란 말은 교사의 직무입니다. 물론 꼭 교사로 임명을 받아야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를 가르치고, 선배는 후배를 가르치고, 동료들은 서로 서로 가르치고 배웁니다. 교사가 아니어도 가르치는 일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특별히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는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것이며, 세움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지역 교회에 교사를 주셨습니다. 성도가 몇 없고 따로 집사도 없는 교회라도 교사는 있습니다. 목자는 교사를 겸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스승이고, 성경이 우리의 교과서라고 말하면서 교회 내에 성경 교사의 존재나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는 일부 신비주의자들은 마치 조용히 기도와 묵상으로만 모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성경 교사를 통한 가르침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이런 부류 중의 또 하나는 은사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펴서 말씀과 말씀을 비교하면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뜨거운 체험이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체험, 경험, 느낄 수 있는 무엇을 추구하다 보니 성경 공부나 성경 교사보다는 은사들이 나타나는 것이 전부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임하면 배우지 않아도 모두 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경 공부를 하지 않아도 신비스럽게 다 깨닫게 되고 풀리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절대 다수는 아니겠지만 이런 가르침을 은연중에 품고 있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기에 주의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가장 애용하는 성경 구절은 요한일서 2:20, 27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여기서 [모든 것]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성도들이 기름부음을 통해 모든 것을 안다면 성경 교사가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우리는 하늘의 천사나 신들이 전혀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많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안다면 성령의 조명이나 계시도 필요치 않을 것이며, 학교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롭게 가르칠 내용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란 말을 오해한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그 기름부음이 성령의 기름부음이시며,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시란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란 것과 참 하나님이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백과사전식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 것, 깨닫게 해 주시는 모든 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란 의미입니다.
한 구절 더 봅니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 그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하여야 하리라.](요일2:27). 이 두 구절은 잘 못 이해할 경우 성경 교사를 무용지물로 만들 만한 말씀입니다. 성령이 다 가르치시고,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왜 주님은 교회에 교사를 세우시고, 주십니까? 이런 점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과 답을 얻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읽고 배운 진리를 우리 마음속에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경 교사를 통해, 목자를 통해 말씀을 듣고 배울 때 그 말이 우리 귀에 들리지만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깨닫게 하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란 뜻입니다. 주의 기름부음이 없다면 성경의 깊은 진리들을 아무리 여러 번 듣고 보아도 가르침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에 성경 교사를 세우십니다. 이 점을 부정하는 누구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대언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기적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타언어들이니라.](고전12:28). 교사를 세우시는 것은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너는/ 이것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라.](딤전4:11). 모든 전도자는 가르치는 자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교회 내에서 교사는 아닙니다. 교사는 은사로 주신 직분이며, [몇몇]입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교사는 목사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교회 안에 세우시고,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경 교사를 아무나 임명하고, 아무나 맡기는 것은 교회 행정이나 교회 경영일 수는 있어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의 소명이 주님께 있고, 대언자의 기름부음이 주님께 있고, 목사로의 부르심이 주님께 있다면 교사의 세움도 이와 동일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목양을 거부하는 목회자들이 있는가 하면, 목양 받기를 거부하는 양들이 있습니다. 성경대로 가르치기를 거부하는 교사들이 있고, 성경대로 가르치는 교사를 싫어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는 지역 교회들에 만연한 현상입니다. [이는 반역하는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녀들이요, [주]의 법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는 자녀들이니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보지 말라, 하고 대언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들을 대언하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들을 대언하라.](사30:9~10). 이것이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교회 내의 모습입니다. 삶이 지치고 피곤하고 힘드는데 교회에 와서 또 따분한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는가? 또 힘들게 공부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냥 적당히 놀면서 서로 교제하다 가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성경 공부를 배척하다 보니 성경 교사를 배척하는 일도 자연스럽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 똑똑합니다. 공부도 많이 했고, 남이 아는 만큼은 자신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과 성령님만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 뿐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다는 교만이 가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일컬음을 받지 말라. 이는 너희 선생은 한 분이니 곧 그리스도요, 너희는 다 형제이기 때문이라.](마23:8). 이 구절은 성경 교사를 부정하는 듯 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는 자칭 성경 교사를 말합니다. 율법의 선생으로 자처하는 하는 자들을 향해 하는 말씀이지 주님이 성경 교사를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형제들 위에 서기를 좋아하고, 선생 노릇을 자처한다면 그는 그런 자리 대신 낮을 자리를 차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칭 교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틀을 갖춘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의 스승이요, 아기들의 교사라고 확신하는도다.] (롬2:20). 이런 자들은 형제들 위에 권위를 행사하며, 가르침을 베풀려고 하지만 자신들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서기관들은 가르치기를 좋아 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선생 되심을 부정하고 자신들만 진리의 지식의 열쇠가 맡겨진 줄로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지니 이는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알기 때문이라.](약3:1). 선생이 된다는 것은 본을 보일 수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는 만큼 책임도 큽니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자기를 예비하지 아니하고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그 종은 채찍을 많이 맞을 것이로되](눅12:47). 우리는 많이 알고 남을 가르칠 수 있고, 진리를 확신시킬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책임 역시 큽니다.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이 다르면 안 됩니다. 자신이 누구를 가르친 것과 자신이 행동하는 것의 차이를 내면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함부로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성경 교사를 부인하거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여나 이런 몇 개의 성경 구절들에 대한 오해로 인해 성경을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거나 성경 교사로서의 은사를 묻어 두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자녀에게는 성경 교사입니다. 아내에게는 성경 교사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교회 내에서 성경 교사로 세움 받지 못했다 해도 불신자들에게는 성경 교사입니다. 누구를 가르치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들,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타고난 성품이 배우는 것보다는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을 성경 교사로 세우면 열심히 가르칩니다. 열정이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없는 경우에 그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지니라’는 경고에 주의해야 합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이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1:7). 이런 교사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스승, 선생, 교사로 불리는 이 직분은 지역 교회의 성도들을 성경적으로 가르치고 훈육하는 일에 중심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 중고등부 교사 등 교사 직분을 매우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교사야 말로 영적 성숙과 양육을 담당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소중한 직분입니다. 성경 교사는 사도, 대언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은사로 교회에 주신 직분임을 기억하고 ‘은사’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선별해서 세움을 입어야 합니다. 모두가 다 사도일 수 없고, 모두가 대언자일 수 없듯이 모두가 교사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대언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기적을 행하는 자이겠느냐?](고전12:29). 이는 모두가 다 교사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는 가르치는 일을 통해 여러 사람들의 믿음을 세워주고, 잘못된 가치관이나 생각을 고쳐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오류를 바로 잡아 주고, 깨닫게 하는 일을 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플로리다에 계신 한 목사님은 신학교 재학 시절에 성경을 40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40독을 더 했는데 성경을 많이 읽고 안 후에 신학교 교수들이나 성경 교사들을 보니 모두 거짓말쟁이들 같이 보였습니다. 자신은 절대로 성경 교사를 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게에 물건을 사러 들렀는데 가게 주인이 “선생님이시죠?”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번도 선생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선생님이시죠?"란 말을 몇 번 들은 후에 자신이 교사의 은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훌륭한 성경 교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안에 성경 교사의 은사가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복음 전도자의 은사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을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권면하고 섬기는 일도 은사입니다. 믿음도 은사요, 사랑도 은사입니다.
교회의 감독, 목회자의 자격 요건이 있고 집사의 자격 요건이 있듯이 성경 교사 역시 분명한 자격 요건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주님이 교사를 세우실 때 이 두 가지 경우는 분명히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여자는 안 된다. [오직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딤전2:12). 여자가 누구를 가르치는 경우는 나이든 자매가 어린 자매들의 행실, 옷차림, 남편을 대하는 법, 가정생활 등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연로한 여자들도 이와 같이 거룩함에 합당하게 처신하도록 하며 거짓으로 비난하지 말고 자기를 많은 술에 내어 주지 말며 선한 것들을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서 맑은 정신을 가지며 자기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신중하며 정숙하고 가정을 지키며 선하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2:4~5). 자매들은 교회에서 잠잠하고 조용히 배우는 것이 전부이지만 연로한 자매들 중에 젊은 여자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교리가 아니라 삶에 관한 영적 원리들을 권면하고 가르치는 일은 매우 복된 일입니다.
둘째, 초신자여서는 안된다. [초신자는 아니 되나니 이는 그가 교만으로 높아져서 마귀의 정죄에 빠질까 염려함이라.](딤전3:6). 이 구절은 감독의 자격 요건입니다만 목사, 집사, 교사 등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초신자는 직분을 맡기면 자부심을 가지고 교회에 충성하고, 다른 교회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빨리 빨리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교사를 시키는 일은 자제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섬기는 일을 하게 할 수 있지만 교사는 주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 누가 성경 교사가 되는가? 성경 교사는 주님이 지역 교회에 주신 은사로서 목자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세우시고, 주님이 주신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경 교사는 일단 신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성경 교사는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배우는데 탁월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잘 배운 사람이 가장 잘 가르칩니다.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기 전에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신실한 성도요, 제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고린도 교회의 성경 교사로 임명하여 파송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내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주} 안에서 신실한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나니 내가 모든 곳,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가 너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길들을 기억나게 하리라.](고전4:17). 디모데는 바울이 모든 곳, 모든 교회에서 가르친 대로 성도들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배운 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앵무새처럼 똑 같은 것을 가르친다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정상입니다. 진리는 그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학원 강사를 하든 학교 강사를 하든 20년 이상을 강사를 했던 사람들의 강의를 들어 보아도 했던 강의는 늘 같습니다. 농담이나 표정이나 목소리 톤까지도 거의 같습니다. 마치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같은 내용이어야 합니다. 진리가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 설교 내용이 다르고, 성경 공부 시간에 배운 것이 다르고, 어떤 모임에서 들은 내용이 다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혼란과 무질서만이 가중될 뿐입니다. 단지 교회의 행정이나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또는 소그룹을 많이 만들고 거기에 리더를 세워서 교사와 감독 역할을 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교사는 사람들 가운데 신망 있는 사람 한 명을 뽑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아는 지식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성경 교사가 성경을 가르치고, 진리를 가르치는 대신에 성도들과 화합을 위한 놀이나 유머 감각만 있는 사람을 세우는 일은 지역 교회를 마귀에게 헌납하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일찍이 성경 교사로서 훈련을 받았고, 세움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교육이란 것이 교리 지식의 전수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영적 감화와 신앙 인격의 변화, 성령의 열매를 동반하는 가르침이 아니라면 교만한 바리새인들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선한 행위와 열매가 맺혀지는 가르침이 아니라면 그는 유능한 교사가 아닙니다. 특히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성경의 말씀이 원리요, 법이요, 생명 이상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쳐야만 합니다.
한 가지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법률 지식을 가르쳐서 법전에 정통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투철한 준법정신을 지닌 법 준수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성과 도덕성이 갖추어지지 않는 법률지식은 법률 사기꾼을 만들 뿐입니다. 세무 지식이 세금을 잘 내는 사람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탈세를 할 수 있는 지식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는 모든 지식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지식 역시 선한 양심, 순수한 마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등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아무리 배워도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며, 경건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말쟁이가 되고, 개똥철학과 마귀의 교리를 전파하는 수단이 될 뿐입니다. 지식이란 사람의 손에 쥐어진 칼과 같이 어떤 목적과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칼이 되기도 하고, 죽이는 칼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 지식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식과 겸한 믿음, 지식과 겸한 사랑, 지식과 겸한 건전한 영과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실제로 몇 년을 집중적으로 성경을 가르쳤지만 아무 선한 열매도 맺지 못한 채 부패한 열매를 맺은 경험이 있습니다. 제 자신 역시 무지했던 것은 성경 지식이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고, 열매를 맺게 해 주는 줄로 알았습니다. [지식 본위], [지식 지상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십여 년 이상 저는 철저히 반복되는 패배와 부패한 열매를 맺는 경험을 했을 뿐입니다. 도저히 성경을 배운 사람의 사고방식에서 나올 수 없는 말과 행동이 나오는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더 이상 성경 지식만을 가르쳐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 교사로 세움을 받은 사람은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되 지식 이전에 그 영과 정신을 전수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능한 교사란 지식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과 정신을 부여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크게 실패했습니다. 영이요, 생명을 전하는 지식의 말씀이 아니라 단지 정보만을 전하는 지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교사가 할 일은 성경을 통한 생명의 변화요, 영의 변화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교육의 시대입니다. 교육이 곧 신이요, 우상입니다. 자녀 교육은 부모의 모든 것이 걸린 문제인 듯합니다. 교회 역시 철저히 세상과 발을 맞추어 가고 있습니다. 죽은 고기는 물줄기에 밀려서만 움직일 수 있듯이 살았으나 죽어 있는 이 시대의 교회는 세상에 철저히 떠 밀려서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취향대로 성경을 공부하고, 선생들을 많이 둡니다. 교회마다 선생들은 많이 있습니다. 부흥회도 많고, 행사도 많습니다. 선생들을 쌓아 두는 것이 이 시대의 문화입니다.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딤후4:3).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선생은 많지 않습니다.
신앙은 배우는 것입니다. 잘 배워 야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성경 지식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 학문도 제자들에게 단지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에 앞서 그 정신과 철학을 전하는데 집중합니다. 성경 교육은 더욱 그러합니다. 영적 지식은 하나님의 사랑, 은혜, 긍휼과 같은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교사는 주님의 영을 받아,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사랑으로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사들을 보십시오.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역경의 빵과 고통의 물을 주시나 다시는 네 선생들을 구석진 곳으로 옮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선생들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나는 말을 네 귀가 들으리니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 길로 걸으라, 할 것이며](사30:20~21). 이것이 교사의 직무입니다.
목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감독을 겸해야 하듯이 모든 목사는 교사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세운 에베소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감독으로서 일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자의 일을 했고, 교사의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감독의 자격 요건 중에 하나는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딤전3:2). 가르치는 재능이 없으면 성경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심각한 장애가 됩니다. 진리의 지식은 가르치고 배움으로서 전수되고,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때로 목회자들 중에 설교나 교회 운영 외에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부담스러워하고 회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 교회의 병폐 중 하나가 성경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매우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는 일은 성도들의 의무요, 신성한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교리를 가르치는 것에 마음을 쏟으라.](딤전4:13)고 했습니다. 목사의 직무 중에 가르치는 일, 즉 교사의 은사는 필수적입니다.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선포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경 교육입니다. 목사는 아니지만 잘 가르치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교사로 삼아서 교회의 형제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목사는 교사를 양성하고, 교사를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와 복음 전도자와 교사를 겸하여 일했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이방인들의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느니라.](딤후1:11). 혼자서 1인 3역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내가 /복음/ 선포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하지 아니하노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이방인들의 교사가 되었노라.](딤전2:7). 바울은 유능한 성경 교사였습니다. 바울이 복음 전도자와 교사의 역할을 가장 강력하게 했던 일은 아마 두란노에서 행한 사역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무리 앞에서 이 길을 비방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을 떠나서 제자들을 분리시키고 두란노라 하는 사람의 학교에서 날마다 논쟁하니라. 이 일이 두 해 동안 계속해서 이루어지매 아시아에 거하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다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더라.] (행19:9~10). 그는 여기서 제자들을 분리시키고 2년이나 성경을 가르치고 제자들을 양육했습니다. 바울이 한 곳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친 예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그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들, 거짓 교사들을 대적해서 싸우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의 지식으로 무장한 선생이 필요한 법입니다.
초대 교회 중의 하나였던 안디옥 교회를 보십시오. [이제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어떤 대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의 루기오와 사분영주(四分領主) 헤롯과 함께 양육을 받은 마나엔과 사울이라.](행13:1). 대언자들과 교사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교회 내에 이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고 강성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사를 은사로 주시는 것은 그 은사를 통해 성도들을 세우고 완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다양한 은사를 지닌 사람들로 넘치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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