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요3:8
오늘 아침에는 [성령의 상징] 두 번째 시간으로 ‘바람’과 같은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의 상징 중에 흔히 나오는 것이 바람, 숨, 호흡입니다. 성경에는 바람에 대해서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북풍, 회오리바람은 주로 재림을 언급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심판을 드러내는 것이 회오리바람입니다. 동풍은 풀이나 채소를 마르게 하는 바람으로 나옵니다. 거친 바람, 폭풍도 자주 등장하는데 역시 재림과 심판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바람은 하나님이 친히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연 현상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작품이요, 능력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하시니 하늘들에 많은 물이 생기고 그분께서 땅 끝에서부터 수증기가 올라오게 하시며 비와 함께 번개들을 만드시고 자신의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는도다.](렘10:13, 렘51:1). 바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주의 곳간에서’ 나옵니다. 주님이 바람의 출처이십니다. 시편 기자도 말하기를, [그분께서 수증기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고 바람을 자신의 곳간들에서 끌어내시며](시135:7)라고 합니다. 천둥, 번개, 비, 우박, 서리, 이슬, 바람 등 흔히 자연 현상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것들이 주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주시는 것들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자연 속에 스며든 신성을 엿볼 수 있게 되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바람은 시와 수필과 소설, 영화, 노래, 연극 등에 함축적 의미로 많이 등장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란 영화 제목에서 시작해서 ‘바람의 파이터, 바람의 전설, 바람의 ...’와 같은 이름들을 수없이 보고 들었습니다. 바람은 신비한 무엇을 내포합니다. “바람났다, 바람이 들었다, 바람맞았다”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도 자주 쓰입니다. 바람은 상징과 은유로 자주 사용되는 대표적인 어휘입니다. 성경 역시 바람을 자주 언급합니다.
바람은 주님이 만드시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는, 보라, 산들을 짓고 바람을 창조하며 자신의 생각이 어떠한지 사람에게 밝히 알리고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곳을 밟는 분 곧 그분의 이름이, [주] 만군의 하나님, 이기 때문이니라.](암4:13). 바람이 왜 성령의 속성을 예표하는지 절로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바람은 심판의 도구로도 쓰이고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도 쓰입니다.
어떤 바람은 생명에 치명타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덮은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이 바람은 ‘주의 바람’이라고 말합니다(출15:10). 바람을 불게 하심으로 풀을 마르게 하십니다. 멸망의 바람을 보내시면 모두 죽습니다. 주님이 보내신 큰 바람으로 인해 요나가 탄 배는 파선될 뻔 했습니다(욘1:4). 바람을 통해 얼어 있던 것이 녹기도 하고, 젖었던 것이 마르기도 하지만 바람으로 인해 더 꽁꽁 얼어붙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을 향해 ‘찬바람이 돈다’고 말하면 매우 냉정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날씨와 기후를 바꾸는 것이 바람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자신의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들이 흐르는도다.](시147:18).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바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바람이 부느냐? 에 따라서 그 해 사업의 성패가 좌우되기도 합니다. 올해는 복고풍의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 안에 부는 바람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 바람” 때문에 고전했다는 사람도 있고, 톡톡히 한 몫을 챙겼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람은 온도의 변화, 기후, 날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농작물이나 생태계에도 바람이 절대적인 역할을 합니다. 바람이 없으면 농작물의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꽃 역시 피어날 수 없습니다. 벌이나 나비가 꽃씨를 옮기는 것은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거대한 평야, 산과 들에 피는 모든 식물들은 바람을 통해 교배가 이루어지고, 꽃가루가 날려 갑니다. 씨앗이 멀리 날아가서 심겨지기도 합니다. 미국에 있는 복음의 씨앗을 품은 아펜젤러나 언더우드는 비행기로 10시간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으로 날려가 거기에서 정착을 하고 복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수많은 복음의 씨앗들이 지금 전 세계 어느 오지로 날려 가고 있으며 거기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요3:8). 주님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 바람은 마음대로 붑니다.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습니다. 바람은 실체가 없는 것 같지만 뚜렷이 나타나는 능력과 증거가 있습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지만 성령을 통해 생명이 거듭나고 열매가 맺히고 은사들이 드러납니다. 성령의 감화가 있고, 영감과 직관이 주어집니다.
자연 과학에서는 바람을 공기의 흐름이요, 이동이라고 합니다. 기압이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공기가 움직이는 것을 바람이라고 합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풍향이라 합니다. 즉 북쪽에서 남쪽으로 부는 바람은 북풍입니다. 바람에 대한 연구는 현재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풍속, 풍향을 날마다 재어서 날씨를 예측하기도 합니다. 바람이 없으면 우리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날씨가 덥더라도 바람이 계속 불어 주면 불쾌한 느낌이 사라집니다. 보통 우리는 1초에 0.5m이상 바람이 불지 않는 한 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1초에 0.5∼5m바람이 불지 않으면 불쾌해지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렵게 됩니다. 바람 한 점 없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바람은 약하게 불고 있습니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밀폐 공간에 있으면 금방 답답함과 짜증이 나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창을 열고, 문을 엽니다. 에어컨을 켜거나 선풍기를 돌립니다. 바람을 통해서 온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어딘가로 바람이 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우리 안과 밖을 시원하게 해 주며, 상쾌하게 해 주십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성령의 주권을 말합니다. 바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과 속도와 그 힘을 측정하는 정도이지 바람을 조절할 수 없습니다. 이곳으로 오는 바람의 진로를 돌이키거나 소멸시키거나 약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태풍이나 폭풍이 오면 피하는 것이지 돌려보내거나 늦출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바람이 마음대로 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주권에 순종할 수 있을 뿐이지 성령께 명령하거나 주장하거나 무엇을 하라, 어디로 가라 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은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임했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나서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에 가득하며](행2:2). 성령이 바람처럼 임했다는 것은 능력의 임재를 말합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은 바다에서 파도를 일으키고 해일을 일으키며 배를 들어 엎어 버립니다. 토네이도는 자동차와 집을 날려 버립니다. 나무가 뽑히고, 부러집니다. 여기저기 그 흔적이 남습니다. 사도들은 타언어로 말했고,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했으며, 놀라운 이적들이 나타났고, 수천 명이 한 순간에 회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영국과 미국에 부흥의 바람이 불었을 때 온 동네가 회심하고 술집과 여관이 문을 닫았습니다. 극장이 교회로 변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찬양이 흘렀습니다. 죠지 휫필드나 쟌 웨슬레, 디엘 무디, 찰스 피니, 죠나단 에드워즈 등이 가는 곳에 임한 성령의 바람은 잔잔한 미풍이 아니라 언제나 태풍을 동반한 강력한 바람이었습니다.
5,000년 역사 동안 불교와 유교와 기복 종교로 우상을 숭배하던 [조선]이란 한 나라에 1907년 성령이 임했을 때 조선은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저는 1907년 평양 대 부흥에 관한 글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이 글이 그 때 일어났던 부흥의 모든 것을 전해주지는 않지만, 그러나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부흥을 갈망하는 우리가 오늘 날도 동일하게 배워야 할 점들인 것입니다. 이 글은 당시에 중국선교사로 와 있던 캐나다 선교사 스티븐 고포드가 우연히 조선을 방문하여 1907년 대 부흥을 목격하고 기록을 남긴 것을 요약 정리한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의 원본인 "왕의 아이들" (현재의 글로벌 틴)이라는 책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지금도 구하는 중입니다만 아직 원문의 전체 내용을 보지 못한 채 번역된 일부만을 보았습니다.
조선의 부흥은 1906년 9월 서울에서 열린 한 선교사 회합에서 태동되었다. 사실 조선은 1903년부터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국가에 비해 전도의 열매가 훨씬 많은 편이어서 선교사들은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고, 그 이상의 축복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온 하워드 박사가 그 모임에서 당시 인도 카시아 힐에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부흥운동에 대해 말했을 때 선교사들의 눈이 열렸고 마음이 가난해지게 되었다. 그 주에서도 특히 평양에 거주하는 장로교와 감리교 소속 20여명의 선교사들은 조선에서도
카시아 힐에 임한 축복이 임할 때까지 정오에 모여 같이 기도하기로 작정하였다. 이렇게 9월 중순부터 시작된 이 기도회가 한 달이 지나도록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자 한 사람은 너무 많은 시간을 기도에 소모하고 있으니 연합기도회를 중단하고 각자 집에서 기도하자고 제안했지만 대다수는 이 기도회를 계속 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인도에서 허락하신 것을 평양에서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기로 작정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정오에서 오후 4시까지 기도하기로 했으며 원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더 기도하도록 했다.
4개월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기도했고, 기도 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장로교, 감리교를 잊어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무릎으로 되어진 참된 교회 연합이었으며 하나님을 지극히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1907년 정월, 드디어 4개월 간의 기도가 끝나는 마지막 주간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 주간에 있는 평양 중앙 장로교회의 부흥집회에 놀랍게 축복하실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날 저녁 집회에는 1,000여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국 교회의 지도자인 길선주 장로가 일어나서 자기의 죄를 고백했다. “저는 아간 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때문에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나는 1년 전 내 친구가 임종하면서 맡긴 재산을 관리하면서 그 미망인의 돈 100불을 가로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로막았습니다.” 그 순간 장애물이 걷혀졌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인식되었다. 곧이어 죄의 자각이 모든 신자들을 휩쓸었다. 그날 저녁 예배는 새벽 2시가 되어도 끝이 나지 않았다. 수십 명이 울면서 그들의 죄를 고백할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뚜껑을 열어놓은 것 같았다. 이 집회를 기점으로 조선에서는 회개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기간에 있었던 회개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거의 완전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존경을 받던 한 집사는 부흥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안절부절 하다가 드디어는 교회 구제기금을 훔친 것을 자백했다. 모든 사람들은 놀라면서 그를 용서하고 다시 평안을 되찾기를 바랬지만 그는 더 큰 불안에 떨었고 결국 자기가 지금도 도적질을 하고 있음을 고백했다. 한 여인은 며칠간을 지옥의 고뇌를 통과하는 것 같았다가 어느 저녁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간음의 죄를 고백했다. 그 모임을 인도하던 선교사는 너무나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이 거기에 있었으므로 그녀를 조선의 법대로 죽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남편은 눈물로 걸어 나와서 범죄한 그의 아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녀를 용서했다. 이러한 놀라운 사건들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교회는 사람들로 들끓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기 위해 교회에 왔다가 두려움 중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한 도둑 두목은 호기심으로 왔다가 죄를 깨닫고 자기를 감옥에 넣어 달라고 간청했다. 깜짝 놀란 경찰관은 그를 고소하는 사람도 없고 증거도 없으므로 체포할 수 없다고 맞섰고 그는 결국 풀려났다. 이 부흥의 때에 평양을 맡고 있던 일본 관리가 있었다. 그는 서구의 불가지론에 물들어 신자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모른 어떤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이 이상한 변화를 조사하기 위해 그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도 결국 주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되었다.
참으로 기도하기 위해 보낸 몇 달의 대가는 충분한 것이었다. 성령이 오셨을 때에 선교사 모두가 반년 동안에 할 수 있었던 일을 반나절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흥의 운동은 평양에서 출발하여 조선 전역에 넘쳤고 시간이 지나가도 계속되었다. 1910년 10월 어느 한주의 평양 교회 통계를 보면 그 주에만 4,000명이 침례를 받았고, 수천 명이 새로 교회에 등록했다. 1916년 동해안을 방문하고 온 한 선교사는 어느 마을에서 저녁예배를 드린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한 교회에 2,500명이 모이고 다른 교회에 500명이 모였는데 그 마을의 전체 인구수가 3,000명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자 시골 곳곳에도 많은 교회가 생겨났고 심지어는 선교사나 전도자가 방문한 적도 없는 곳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어떤 사람이 도시에서 복음을 듣고는 고향으로 성경을 가지고 돌아가 그것을 이웃에게 계속하여 읽어주었고 결국 그 마을에서 50명이 넘는 사람이 믿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교회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으나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고민하다가 신약성경에서 교회의 시작이 물세례라고 추측하고는 각자 집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다시 모여 교회를 설립했다. 하나님이 틀림없이 기뻐하셨을 것이다.
구주의 공로를 알리려고 하는 불타는 열망이 오순절 교회의 특징이었다. 조선 교회도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만주에 있는 한 선교사가 부흥운동에 관한 진상을 알고 싶어 두 전도사를 평양에 파송했다. 그들이 돌아 왔을 때 그는 선교사들이 거리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전도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자마다 거리의 전도자였습니다. 상인들은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항상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전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집을 팔아 신자가 없는 곳으로 가기도 했다. 한 학생은 매일 적어도 6명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을 했는데 9개월이 끝날 무렵 그는 3,000명에게 전도했다. 8-9세 되는 초등학교 어린이들도 학교를 파하면 거리에 나와서 지나가는 행인의 옷소매를 잡고는 구주 예수께 순종 하도록 눈물로 간청했고 그것에 마음이 찔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오게 되었다. 신자들은 도서지방까지 전도한 후에 곧바로 국외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1907년 9월 장로교 총회에서는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보내도록 결정하고 두 사람을 선정하였다. 한국 교인들은 뜨거운 감사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였으며 또한 그것을 값없이 나누었다.
조선교회는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기도에 전혀 힘쓰는 교회였다. 선교사들도 한국 교인들이 기도에서는 그들을 능가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밤의 절반을 기도로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는 보통 있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새벽 훨씬 전에 그들은 기도를 위해 일어난다. 한 선교사가 어느 지방에 갔을 때 새벽에 기도집회가 있음을 듣고 참석을 위해 5시에 나가보니 세 사람이 무릎 꿇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기도회는 그가 오기 전에 끝났던 것이다. 몇몇 사람은 출석하기 위하여 산을 넘었다고 했다. 조선 교회의 새벽기도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907년 9월 길선주 장로가 평양중앙교회의 목사가 된 후에 시작되었다. 그는 매일 아침 4시 30분에 모여서 기도할 것을 제안했는데 다음날 새벽 2시부터 400명의 신자가 밖에서 기도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매일 700명이 모여 기도회를 하고 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하워드 박사로부터 카시아 힐에 임했던 성령에 대해 듣는 바로 그 장소에 간계에서 온 한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는 고향 교회로 돌아가 신자들에게 성령만이 주 예수의 복음사역을 완성할 수 있는데 그 성령님은 하나님이 다른 은사처럼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쳤다. 그들은 그때부터 6개월 동안이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 5시에 교회에 모여 부흥을 주실 성령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왔다고 한다. 풍성한 너그러움, 이것이 초대 교회의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조선의 신자들 역시 풍성했다. 어떤 곳에서 한 선교사가 나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너무 많이 내놓기 때문에 그는 감히 돈에 대해서 말을 못한다고 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그들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바쳤다. 남자들은 시계를 끌렀고, 부인들은 패물을 내놓았다. 다른 이들은 땅문서를 바쳤다. 그들은 가진 모든 것을 내 놓았고, 더 바칠 것이 없어서 울었다.
교회 헌당식에 참석한 한 신자는 교회에 아직 50불의 부채가 있음을 듣고 자기가 다음 주에 50불을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선교사는 그가 매우 가난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만류했지만 그는 다음 주일 50불을 가지고 왔다. 몇 주간 후 그 선교사는 그 지역을 시찰하는 중에 그의 밭에 가보니 노인은 쟁기를 잡고 아들은 쟁기를 끌고 있었다. 선교사는 놀라서 소를 어떻게 했냐고 묻자 그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불신자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청산하기 위하여 소를 팔았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초대교회를 인도했던 바로 그 성령의 인도를 조선교회가 받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그들의 열심이다. 조선교회가 그렇게 강한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경공부에 있다. 신자들은 누구나 성경을 배웠다. 한 해에 1400여 회의 사경회가 열리며 9만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는 가정예배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출교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가정에서도 성경에 열심이었다. 사업에 따라 여행하는 신자는 성경을 들고 다니며 거리에서나 숙소에서 펼쳐 읽었다. 한국의 목사, 전도사, 집사들은 일본사람들에 의해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되면 그들은 불평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고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감옥에서 여러 번 성경을 통독하고 나오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성경을 없앨 것을 대비해서 성경을 한 권씩 통째로 암송하기도 했다.
한 선교사는 어느 마을에서 25명에게 침례를 베푸는데 첫 번 지원자에게 성경구절을 암송할 수 있는가 하고 묻자 "예" 하고 시작했는데 선교사는 그가 100절을 외웠을 때 중단시켰다. 하지만 다음 사람들은 자신이 침례를 받지 못할까 두려워 중단된 그 부분부터 이어서 암송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25명 모두 100절 이상씩 암송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초대 교회 때 성도들은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을 즐거워했다. 똑같은 정신이 조선교회의 특징이다. 질투의 악마가 일본인들을 자극하여 조선 교회를 괴롭히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선천 지방의 신자들이 데라우치 총독을 살해하고자 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씌워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몇몇 신자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고문하였다. 일본인들이 자기가 원하는 말을 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잔인하게 고문 하는지에 대해서는 악명이 나있다. 그들은 신자를 엄지 손가락만으로 매달았고 뜨거운 다리미로 살을 태웠다. 어떤 사람은 일곱 번이나 졸도를 했으나 그들은 믿음을 지켰고 결국 법정에서는 무죄라고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신앙을 고백하다가 친족들에게 집과 가정을 빼앗긴 사람도 법에 호소하지 않고 온유하게 모욕과 핍박을 참았으며 모든 친족이 회개하고 돌이킬때 까지 그리스도를 전했다. 어떤 신자는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러 그의 고향에 갔다가 그의 친척들에게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그는 실낱같은 목숨이 붙어있는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성경을 나누어주며 구주에 대해 전했고 삼년 후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를 죽이려고 했던 그 불신지역에 11개의 교회가 서게 되었다.
성령은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했던 것과 똑같이 조선서도 우리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다. 이 동양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했던 일은 안일한 우리 기독교회에 큰 도전이 된다.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힘이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된다. 그들은 이 거룩한 일을 위해 모든 겸손으로 자신을 주 예수께 드렸고 하나님의 충만은 바로 그들을 통로로 하여 넘쳐 흘렀다. 하나님은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고자 기다리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큰 구원을 주시는 분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받을 저주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은혜의 역사는 성령의 강력한 바람이 임한 오순절 다락방의 사건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역사였습니다. 지금은 부흥이 사라지고, 이런 성령의 역사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런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고 기도하고 사모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람이 부는 날이면 어김없이 성령께서 저희 교회 위로 이런 신선한 능력의 바람, 생명의 바람을 일으켜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성도들 안에 주의 능력이 임재하기를 원합니다. 작은 불꽃이라도 바람이 불면 강력한 불덩어리가 됩니다. 바람이 불면 지푸라기는 날려가고, 알곡은 남습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바람에게 대언하라. 바람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숨아, /사방의/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죽임 당한 자들 위에 숨을 불어 그들로 하여금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37:9). 성령의 바람이 불면 죽은 골짜기의 뼈들도 살아납니다. 우리는 성령의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자체적인 동력이 없습니다. 노를 저어서 작은 강을 건널 수는 있어도 대양을 건널 수는 없습니다. 바람이 불 때 배는 절로 앞으로 갑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바람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매우 쉬운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거기에는 생명의 역사, 변화의 역사,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도들 안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내적, 영적 부흥이 필요합니다. 초대 교회에 있었던 그런 성령의 부어 주심이 필요하고, 성령의 능력과 권세가 필요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은 바람처럼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바람처럼 임하시며, 바람처럼 강력합니다. 바람이 구름을 몰아오면 날씨가 바뀝니다. 바람이 없으면 꽃도, 벼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있어도 바람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바람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바람 같으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강한 바람처럼 우리 안에 임해 주시기를 빕시다. 요즘 말씀 침례 교회는 기도의 바람이 불었다, 성경 읽기 바람이 불었다, 예배의 바람이 불었다, 부흥의 바람이 불었다는 말이 소문날 정도로 성령의 바람이 불어 주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바람이 부는가? 여기에 주목합니다. 갑작스런 등장과 출현을 돌풍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찻잔 속의 미풍이 돌풍이 되고, 그것이 태풍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바람]이란 말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돌려놓고 사로잡을 때 사용합니다. 신문을 펴서 몇 장만 뒤적여도 바람이란 말이 수 없이 등장합니다. ‘혁신의 바람, 춤바람, 칼 바람, 멀티 바람...’ 온통 바람이란 말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령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루아하"입니다. 이 말의 뜻은 공기의 움직임 즉 바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바람, 폭풍, 호흡, 생명력(vitality)]등의 뜻으로 번역합니다. 바람, 숨, 생명력, 영, 정서, 의지력 등이 모두 한 단어에서 갈래로 나온 말입니다. "루아하"가 바람의 뜻으로 사용될 때도 공기 자체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만 쓰여 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활동의 한 도구로서 쓰인다는 것이 구약의 일반적인 특성입니다. 주님이 바람으로 행한 사역에 주목해 보십시오. 바람으로 홍수를 마르게 하시고, 바람으로 메뚜기를 몰아오게 하시고, 바람으로 홍해를 갈라지게 하시고,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람을 일종의 사역자로 쓰셨습니다. 바람은 하나님이 친히 내신 것이요, 주님의 권세요. 강력한 권능입니다. 바람 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마른 뼈들을 살립니다.
저는 바람을 일으키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바람에 실려 움직이는 법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고 거기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저는 신앙 생활이 윈드 써핑이라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윈드 써핑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파도 타기나 그와 비슷한 것도 아직 해 보지 못했지만 바람을 가르며 파도를 타는 모습을 보며 영적 생활이란 저런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매와 결혼할 때 ‘나와 결혼하면 윈드 써핑을 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람과 물이란 단단하지 않는 것, 불안정해 보이는 것 위를 타고 달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끈은 배에 묶여 있고, 즐기는 자들은 한없는 기쁨을 바다 위를 누빕니다. 반면 즐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공포입니다. 땅과 달리 바다는 언제나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으키는 파도, 하나님이 일으키는 바람을 이용하면 사람이 바다 위를 가로 지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람을 만들 수 없고, 파도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바람이 없으면 요트를 탈 수 없습니다. 바람이 없으면 연을 날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람을 타고 나르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해서 마음껏 일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지금도 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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