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마3:16
성령의 상징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성령은 [비둘기]로 예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주님 위에 임한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둘기의 이미지는 보통 새들과 확연히 다른 면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용맹성, 까마귀는 부정함을 상징한다면 비둘기는 순결, 평화, 단일함 등을 상징하는 짐승으로 사용됩니다.
비둘기는 여느 새보다 귀소(歸巢)성이 강한 새입니다. 자신이 본래 있던 곳으로 날아오는 새란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구름같이 날아오며 비둘기가 자기 창문으로 날아가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사60:8)고 노래했습니다. 사실 비둘기의 거처는 바위틈이나 외진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가서 2:4에 보면, [오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아2:14a)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에도 이르기를, [오 모압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도시들을 떠나 바위에 거하며 구멍 어귀 옆에 자기 둥지를 트는 비둘기같이 될지어다.](렘48:28)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도피하는 자들은 도피하여 골짜기의 비둘기같이 산들 위에 거할 것이로되 ...](겔7:16a). 비둘기의 이런 주거 습관, 환경 등은 어떤 조류학자들의 연구 결과보다 정확합니다. 비둘기에 대한 습성들은 성경을 보면 조류 백과사전을 찾는 것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애곡하는 짐승에 비유되어 있기도 합니다. [나는 학이나 제비같이 지저귀고 비둘기같이 애곡하며 내 눈이 쇠하도록 위를 바라보았나이다. 오 [주]여, 내가 학대를 받사오니 나를 위하여 /그것을/ 처리하소서.](사38:14), [우리가 다 곰같이 부르짖고 비둘기같이 몹시 애곡하며 공의를 기다리나 공의가 없고 구원을 기다리나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도다.](사59:11). 비둘기의 소리는 누가 들어도 울음이라고 하지 노래라고 하지 않습니다. 비둘기의 소리는 구슬프게 들립니다. 이런 면에서 비둘기는 고난받는 백성들을 상징하는 새이기도 합니다.
비둘기는 자기의 올 때를 아는 짐승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하늘의 황새는 자기의 정한 때를 알며 산비둘기와 두루미와 제비는 자기의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주]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도다.](렘8:7). 이 점에서 비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훌륭합니다. 때로 짐승들은 우리 인간에게 깊은 영적 교훈을 주는 교재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시며, 자연을 통해서 영적 진리를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태양, 달, 구름, 천둥, 번개에서 담벼락에 자라나는 우슬초 하나까지 배우려 들면 모두 배울 것들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노아의 방주 때부터 등장하는 유명한 새입니다. 노아는 홍수로 지상이 물로 덮이자 비둘기를 내 보내어 물이 줄어들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노아는 비둘기를 내 보내기 전에 먼저 까마귀를 내 보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를 내보내매 까마귀가 물들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여기저기 오갔더라.](창8:7). 까마귀는 물 위에 떠 있는 시체들을 먹느라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이리 저리 돌아 다녔던 것입니다. 까마귀는 불결한 짐승을 예표합니다. 시체를 먹고 더러운 것들 위에 앉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더러운 것들 위에 앉지 않고, 시체를 먹지 않습니다. [그가 또 비둘기를 내보내어 지면에서 물들이 줄어들었는지 알아보려 하였으나 온 지면에 물들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놓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므로 그가 손을 내밀고 비둘기를 붙들어서 자기가 있는 방주 안으로 받아들이고](창8:8-9). 비둘기는 노아가 내 보내었을 때 세상에 자신이 발을 놓을 곳을 찾지 못해서 돌아왔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지 않는 사람들 안에는 임하지 않습니다.
영이 깨끗하게 씻음 받은 사람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깨끗해진 사람들 위에만 성령은 비둘기처럼 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곧 진리의 영이시라.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나니 이는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아나니 이는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임이라.](요14:17)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무소부재하신다고 하지만 불신자들 안에 거하시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알지도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말하기를,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이러한 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이라고 합니다.
노아가 언제 비둘기를 내어 보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의 죄악을 종결한 후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집행되고, 하나님의 화평이 임한 때입니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보라, 그 입에 잡아뜯은 올리브 잎사귀가 있더라. 이에 노아가 땅에서 물들이 줄어든 줄 알았으며](창8:11). 하나님은 언제 성령을 내려 보내십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주님 위에 임한 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평 헌물로 삼으시고 화해한 후에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사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롬3:25).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화해 헌물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은즉 화해하게 된 자로서 더욱더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임이라.](롬5:10). 하나님과 화해! 갈보리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케 한 것이며, 하나님과 죄인들을 화해케 한 것입니다. 화해는 주님의 죽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또 십자가로 그 원수 되게 하는 것을 멸하사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6). 성령이 임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서 성령이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화해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화해, 화평, 평강의 상징인 성령을 비둘기처럼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화해를 거부하면 하나님과 본래 원수지간이었던 사이가 더욱 멀어지고, 더욱 주님의 분노를 끓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음이니라.](골1:20). 깃발이나 로고에 그려진 올리브 잎을 물고 있는 비둘기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상징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나온 의미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화해, 화평, 평화를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을 받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화평 헌물인 주님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대속의 심판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는 그분께서 죽음을 통하여 자기 육체의 몸으로 너희를 화해하게 하사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아버지/의 눈앞에 드리고자 하셨으니](골1:22).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한 때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법적으로 화평의 관계를 맺으려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 외적인 안녕과 화평을 얻을지 몰라도 내적인 평안, 영적인 평강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할 때 주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강력하게 내 안에 자리 잡습니다. 사람들은 평화의 상징으로 비둘기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고 전통적으로,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비둘기 그림이나 로고는 성령을 의미하며, 성령의 임재를 통한 화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임하는 평화만이 참된 평화입니다.
비둘기는 순결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 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리고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시더니](마3:16). 성령은 비둘기같이 내려왔다고 말합니다. 비둘기는 순결의 상징입니다. 주님 위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신 것은 주님께서 순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와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4:15). 순결이란 죄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고 순결한 것처럼 성령 역시 그러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성령은 주님 위에 내려 오셨습니다. 이는 [성령 충만]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받기 전에도 이미 침례인 요한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물론이요, 주님과 동시에 살던 사람 가운데도 성령 충만했던 사람은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주께서/ 아직 성령님을 주시지 아니하셨음이더라.)](요7:39).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은 오순절에 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성령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받은 성령이 아니라 증거의 사역을 위해 주님이 충만케 하신 것입니다.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했던 것이 아니라 모태로부터 이미 성령 충만했습니다. 사가랴, 엘리사벳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증거와 사역을 위해서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비둘기처럼 임하게 했다고 기록된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주님 한 분만이 순결하시며,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비둘기같이 몸의 형태로 그분 위에 내려오시며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3:22). 주님 위에 임한 성령은 [비둘기같이] 내려왔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비둘기같이 몸의 형태]로 주님 위에 내려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누군가가 볼 수 있는 모습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임한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침례인 요한은 주님 위에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그분 위에 머물렀더라.](요1:32).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모습과는 매우 다릅니다. 우리는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 위에 임하는 성령의 모습도 볼 수 없고, 다른 신자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모습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위에 성령이 임할 때는 분명히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오순절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할 때도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더불어 [불의 혀같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는 표적적 증거를 위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단 한번 있었던 유일한 예입니다.
성령께서 많고 많은 새들 중에 비둘기의 모습을 한 것은 비둘기가 순결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부정한 짐승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린 양과 더불어 헌물로 받으시는 짐승이 비둘기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마리아는 집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성전으로 가서 헌물을 드렸습니다. 성도들은 순결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선뜻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죄들에 가담하지 말며 네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라.](딤전5:22). 죄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는 일은 저와 여러분의 일입니다. 거름과 똥은 똥파리를 부르고, 꽃은 나비를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더러우면 마귀들이 찾아 오고, 정결하고 거룩하면 주의 영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탐욕과 죄와 세상의 더러운 것과 우상 숭배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성령을 힘입어 깨끗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순결한 신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 이것은 내가 너희를 한 남편에게 정혼시켜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고자 함이라.](고후11:2). ‘순결한 처녀’가 교회의 모습이요, 성도의 모습입니다. 아가서 6:9에 [나의 비둘기, 나의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는 오직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그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녀를 낳은 여인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딸들이 그녀를 보고 축복하니 참으로 왕비들과 후궁들도 그녀를 칭찬하는구나.] (아6:9)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더러운 것보다 깨끗한 옷을 좋아하고, 헌 것보다는 새 것을 좋아합니다. 부정한 것보다는 정결한 것을 좋아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십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 죄인들아, 너희 손을 정결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순결하게 하라.](약4:8)고 말합니다. 우리는 몸과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늘 말씀의 물로 씻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순결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요일3:3). 이는 전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더럽히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의 증거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비둘기는 해를 끼치지 않는 유순한 동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해를 끼치지 말라.](마10:16)고 하십니다. 우리는 비둘기를 닮아야 합니다.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사랑은 성령의 은사이며, 성령의 첫 번째 가는 열매입니다. 흔히 기독교인들이 사회를 혼란케 하고, 사람들의 기분을 잡쳐 놓는 사람들이란 평을 듣는 것은 그들 속에 있는 죄의식, 죄책감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죄에 대해 책망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책망하는 것은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를 입히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를 통해 정결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을 갖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비둘기는 단일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일한 눈이란 음탕한 눈, 악한 눈, 흘겨보는 눈과 달리 한 번에 한 가지만을 바르게 보는 눈입니다. 비둘기는 동물들 중에 눈이 가장 맑고, 알맞은 자리에 박혀 있는 새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눈이 비둘기의 눈에 비유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그분의 눈은 강가에 사는 비둘기의 눈 같아서 젖으로 씻은 것 같고 알맞게 박혔도다.](아5:12). 눈은 신체의 모든 부분 중에서 빛을 인식하고 몸 안에 받아들이는 유일한 기관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습니다. 눈은 몸의 창이요, 등불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런즉 네 눈이 단일(單一)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요,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리니 그런즉 네 안에 있는 등불이 어둡게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마6:22-23). 사람들이 생각 없이 이것저것 보다가 온 몸이 어둡게 됩니다. 성경은 눈이 어둡게 되면 네 안에 있는 등불(영)이 어둡게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는 눈과 세상 잡지나 소설을 보는 눈은 눈의 문제가 아니라 그 영의 밝기에 차이를 내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악한 눈입니다.
비둘기는 한 번에 한 가지만을 볼 수 있습니다. 비둘기의 눈은 단일한 눈(single eye)입니다. 단일한(single) 눈이란 말은 한결같은, 외길의 눈입니다. 그러니까 눈이 여기저기로 방향을 틀거나 다른 것에 이끌림을 받지 않는 눈입니다. 처음부터 바라보던 것만 바라봅니다. 이런 눈을 비둘기 눈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눈이 비둘기 눈이듯이 성도들 역시 비둘기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내 사랑아, 보라, 네가 어여쁘구나. 보라, 네가 참으로 어여쁘며 비둘기 눈을 가졌구나.](아1:15). 주님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을 사랑하십니다. [네 눈이 나를 사로잡으니 내게서 그 눈을 돌려 다오. 네 머리털은 길르앗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염소떼 같고](아6:5).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성경을 보십시오. 주의 법은 눈을 밝게 하는 안약입니다(시19:8).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시19:8). 주님은 눈을 밝혀 주시는 분이십니다. 온 몸을 빛으로 채우는가? 어둠으로 가득한가? 는 전적으로 눈에 달려 있습니다. 캄캄한 영화관에서 화면을 바라보는 눈은 자신의 몸을 어둠으로 가득 채우는 눈입니다. 이런 눈을 악한 눈이라고 합니다. 눈이 악하면 주님이 하시는 일, 주님의 말씀도 어긋나 보이고, 불만스럽고, 부당해 보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일에 불평을 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난단 말이냐?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한 것이냐?](마20:15). 이들의 눈은 비둘기의 눈이 아니라 악한 자의 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과는 같이 식사도 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너는 악한 눈을 가진 자의 음식을 먹지 말고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내지 말지니](잠23:6).
비둘기의 눈과 악한 자의 눈을 구분하는 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은 비둘기의 눈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히12:2a). 주님이 보라는 것을 바라보는 눈은 비둘기 눈입니다. 저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아브라함처럼 하늘의 뭇별들을 바라보고, 동서남북을 멀리 펼쳐진 땅을 바라보십시오. Vision을 가진 눈이야 말로 아름다운 눈입니다. [눈의 밝은 빛은 마음을 기쁘게 하며 좋은 소식은 뼈를 기름지게 하느니라.](잠15:30). 반면 급히 부자가 되려는 자는 악한 눈을 가진 자입니다. [급히 부자가 되려 하는 자는 악한 눈을 가졌나니](잠28:22a). 악한 눈을 가진 자들은 세상을 쳐다 보고 마음이 끌립니다. 눈을 조심해야 합니다. 에덴에서 하와는 귀로 듣고 악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롯 역시 소돔을 보며 악한 눈을 떴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가져온 패물을 본 게하시 역시 악한 눈을 떴습니다. 탐욕에 눈이 멀었던 것이 아니라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아간 역시 눈이 문제였습니다. 다윗 역시 눈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면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보면 안될 것들을 볼 때 그는 악한 눈의 소유자가 되며, 몸이 어두워지고, 영이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주님의 말씀이나 일도 부정적으로 생각되고, 불평이 나옵니다. 욥은 늘 단일한 눈을 뜬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눈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맺었거늘 어찌 처녀를 생각하랴?](욥31:1).
이 시대는 visual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사람의 눈을 끌기 위해 총력을 다합니다. 15-30초짜리 광고를 통해 사람의 눈을 끕니다. 선정적인 표어나 사진, 그림을 통해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으려 합니다. 신문을 보십시오. 읽는 신문의 시대가 아니라 보는 신문이라고 합니다. 사전도 읽는 사전이 아니라 보는 사전이라고 합니다. 영화, 연극, 뮤지컬 같은 것은 약과입니다. 인터넷은 더욱 그렇습니다. 음탕한 눈(사3:16), 교만한 눈, 거만한 눈, 악한 눈 등이 성경에 나오는 악인들의 눈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 눈을 점검하고 맑고, 단일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어두침침한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눈을 밝게 해 주시기를 다윗처럼 기도합시다. 소경의 눈을 열어 주신 주님,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신 주님, 하갈의 눈을 열어 우물을 발견하게 하시고, 삼손의 눈을 열어 엔학고레의 물을 보게 하시고, 발람의 눈을 열어 주의 천사를 보게 하시고, 게하시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적 군대를 보게 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의 법에서 나오는 놀라운 것들을 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내 눈을 여사 나로 하여금 주의 법에서 나오는 놀라운 것들을 보게 하소서.](시119:18). 비둘기의 눈이 성령의 깊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소식을 가져다주는 새입니다. 비둘기는 통신용 전서구(傳書鳩) 새입니다. 비둘기는 먼 곳에서도 자기 둥지로 돌아오는 귀소성이 잘 발달된 새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통신 전달용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1분 동안에 1km나 날 수 있답니다. 멀리 날 때는 무려 3,000 Km 까지도 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소식을 전달해 주는 우편용으로 비둘기보다 나은 새가 없습니다. 노아에게 올리브 잎을 물어다 준 것처럼 비둘기는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복음의 전령을 예표합니다. [먼 나라에서 오는 좋은 소식은 목마른 혼(魂)에게 냉수 같으니라.](잠25:25). 성령이 비둘기처럼 주님 위에 임했을 때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성도들은 주님이 약속하신 위로자를 보내 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의 소식을 저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알려 주고 계시며 하나님의 뜻을 우리 안에 알려 주는 통신용 전서구 역할을 합니다. 성령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모든 죄인들의 가슴 속에 전하고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 새 예루살렘 등에 대한 소식을 우리 안에 전달해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우리 속에 계시해 주십니다. 또 우리 안에 있는 마음 속 깊은 것들까지도 늘 감찰하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중보해 주십니다. 왜 비둘기가 성령의 예표로 쓰이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비둘기는 정결례를 위한 속죄에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 마리아 역시 정결례를 위한 속죄 헌물로 비둘기를 성전으로 가져갔습니다. [만일 그가 어린양을 가져올 능력이 없거든 자기가 범한 범법으로 인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주]께 가져오되 하나는 죄 헌물로 삼고 다른 하나는 번제 헌물로 삼아](레5:7). 비둘기는 양을 가져올 능력이 없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속죄 헌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양 대신 비둘기를 받으셨습니다. 어린 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비둘기가 성령을 예표 합니다. 우리는 어린 양의 피와 성령으로 정결케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둘기는 영광을 상징합니다. 이 땅에서 비둘기는 그렇게 힘이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발톱이나 부리도 매섭지 않고, 사냥을 하는 육식 동물이 아닙니다. 비둘기는 연약한 새입니다. 다윗은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모습을 산비둘기에 비유했습니다. [오 주의 산비둘기의 혼을 사악한 자들의 무리에게 넘겨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들의 회중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시74:19). 이는 현재 이 땅을 살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요, 교회의 모습입니다. 새들의 우두머리는 독수리이지만 독수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영광이 비둘기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둘기에 비유하면서 이들이 장차 입게 될 영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희가 솥들 사이에 누워 지냈을지라도 은으로 덮인 비둘기의 날개와 그 비둘기의 황금 깃털같이 되리로다.](시68:13).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은빛 날개의 비둘기, 황금 깃털의 비둘기는 마치 동화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 같지만 그 출처의 기원이 성경입니다. 이는 장차 성도와 교회가 얻게 될 영광이며, 천년 왕국 때에 민족들의 머리가 될 이스라엘이 얻게 될 영광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영광스럽게 변화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후3:18). 성령은 변화의 능력자이시며, 주체자이십니다.
장차 변화될 우리의 몸은 은빛 날개와 금빛 깃털과 비교해도 충분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사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게 하시리라.](빌3:21). 사도 바울은 이 영광을 생각하면 현재 우리가 받는 고난은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이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라.](롬8:18). 별로 아름다움이 없는 비둘기의 날개와 깃털입니다. 공작새처럼 찬란하지도 않고, 독수리나 수꿩[장끼]처럼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은빛 날개, 금빛 깃털을 갖추게 되는데 이것이 변화될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비둘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비둘기는 신부를 예표합니다. [오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하여금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이는 네 목소리가 달콤하며 네 얼굴이 아름답기 때문이로다.](아2:14). 하나님은 성도들을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십니다. 교회는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 성령은 교회인 신부를 단장해 줍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상징 [비둘기]에 대해서 성경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받은 바 은혜의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제별(글) > 성령을 알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상징(08)-과일(열매) (0) | 2007.01.03 |
---|---|
성령의 상징(07)-도장(인) (0) | 2007.01.02 |
성령의 상징(05)-기름 (0) | 2006.12.30 |
성령의 상징(04)-불 (0) | 2006.12.28 |
성령의 상징(03)-호흡(숨) (0) | 2006.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