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말씀: 마5:6
요절: 마5:6
산상 수훈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주님은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해 입을 열어 말씀하시기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복된 사람은 무엇을 줄 수 있는 사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복된 자라고 말씀하신 사람은 돈이나 학문이나 권세나 능력이나 지혜를 갖추어서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직장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전적으로 무익하고 무능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매사에 매 순간에 도움을 받고, 건짐을 받고, 의지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 치욕스럽다고 할 그런 삶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부자가 아니라 영이 가난한 자, 기뻐서 웃는 사람이 아니라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사람, 강하고 힘센 자가 아니라 부드럽고 온유한 자, 먹고 배부른 자가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복이 있나니”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모순과 역설의 진리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 인생들이 평가하는 것과 가치관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이미 앞에서 전한 말씀을 점검해 보고 오늘 본문 말씀을 다루겠습니다. 주님은 첫째로 영이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난] 그 자체에 어떤 복된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이 가난함으로 인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all in all) 되신 주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주님(빌4:19),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고후8:9)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복된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재물을 신뢰하는 부자들은 결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재물의 속임수는 마음속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도록 숨을 막아 버립니다. 영이 가난할 때 사람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능함, 자신 안에는 선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만유를 충만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즉 내 육신 안에 아무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바로 영이 가난한 자들이요, 주님이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 부류입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최대의 복은 ‘하늘의 왕국’입니다.
둘째로 주님이 언급하신 ‘애통하는 자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란 사실을 발견하고 슬피 우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인생은 즐기며 살만한 것이라는 낙관론자들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바 된 비참한 상태임을 알고 죄의 무게와 권능에 눌려 신음하는 사람들입니다.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롬7:25)고 외치는 바울과 같은 그런 사람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친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 [내가 내 자신을 몸시 싫어하나이다]라고 외친 욥과 같은 사람들, [화로다, 나여 이는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므로 망하게 되었음이니](사6:5)라고 울부짖는 이사야 같은 사람들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애통하는 자들이요 위로를 받을 자들입니다. 죄의 속박으로 울어본 이들은 진리를 통해 자유를 누리며 참된 기쁨도 누립니다. 하지만 죄의 권능, 속박에 대해서 무감각한 이들은 자유와 평강, 기쁨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셋째로 주님이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 온유한 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올바르게 반응하고, 바로잡히는 성품을 지닌 사람들로서 이들이기에 복된 것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이 딱딱하지 않기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고 자랄 수 있습니다. 말씀의 틀, 교리의 틀, 진리의 틀, 지식의 틀에 맞게 성품과 인격이 자라나는 사람들이 복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네 번째로 주님께서 언급하신 복된 자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5:6). 처음부터 네 번째 같이 언급된 것은 모두 하나같이 무엇을 행하는 것, 뭔가를 할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난한 것, 애통하는 것, 주리고 목마른 것 등은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복된 자란 일의 결과, 성취, 업적으로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따라 특징 지워집니다.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오.
의에 주렸다는 것은 내면에서 [의에 갈증]을 느끼며, [의를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목마른 자가 샘을 찾는다는 말이 있듯이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그것이 채워질 때까지 만족할 줄 모르며, 찾고 또 찾습니다. 이는 본능입니다. 마음속에 [자기 의]로 충만한 사람들은 그 의를 드러내고 자랑하려 할 뿐 결코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의에 주린 것은 자신에게 아무 [의]가 없다는 사실을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정확이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반드시 필요한 영양소가 없으면 몸에 이상이 오거나 그것을 찾는 그런 증세를 느낍니다. 그것이 필수 영양소라면 음식이든 약이든 그 무엇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몸속으로 들어가야 몸이 안정이 되고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목이 말라 본 적이 있습니까? 물을 찾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주려 본 적이 있습니까? 무엇이든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을 찾으려 합니다. 우리 몸이 그러하듯이 마음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 속사람은 ‘의’가 없으면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의, 거룩, 사랑, 믿음, 소망, 경건과 같은 영적 요소들은 속사람에게는 생존의 필수 요소이며 이것이 없이는 속은 황폐해지고 도무지 살 수가 없습니다. 음식이 몸에 들어가서 각종 필요한 영양분을 만들어 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각종 필요들을 생산해 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우리 몸이 우유와 빵과 고기와 물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의 영은 의와 거룩, 믿음, 사랑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몸이 몸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 깊은 병이 들었거나 죽은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과 혼이 영적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의가 우리 영혼에 미치는 관계는 피와 육신의 관계와 동일합니다. 가솔린차에 기름이 없고, 전기 모터에 전력이 없을 때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사람은 ‘의’가 없을 때 육신은 살아 있어도 영은 산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의가 없다는 말은 죄인이란 뜻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를 보십시오.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사64:6). 그는 자신이 그나마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의가 ‘다 더러운 누더기’ 같음을 보았을 뿐입니다. 자서전을 남기고 기념관이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려지고, 각종 추모제가 열릴 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의 가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의, 영광이란 마르는 풀이요, 시드는 꽃과 같습니다. [이 소리가 이르되, 외치라, 하매 그가 이르기를,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모든 육체는 풀이요, 육체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주]의 영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참으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리라, 하라.] (사40:6~8). 주님은 이 사실을 외치라고 하십니다. [사람으로 말하건대 그의 날들은 풀과 같으며 그의 영화는 들의 꽃과 같도다.](시103:15).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자랑할 만한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롬3:10)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의를 얻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義)가 되리라, 할지니라.](신6:25). *이 모든 명령. 하지만 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류 역사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한’ 이는 없습니다. 율법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지켜 행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이는 율법을 듣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게 될 것임이라.](롬2:13)고 했습니다.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게 되는데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니라.](롬3:20).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육체는 하나도 없느니라.](갈2:16b). 율법은 의롭게 살라, 행하라고 명령할 뿐 의롭게 될 힘을 주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아담의 후손 중에 ‘율법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다윗은 일찍이 이 사실을 알았고 고백하기를, [주의 종과 함께 심판 /자리/에 들어가지 마소서. 이는 산 자 중 주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임이니이다.](시143:2)라고 했습니다. 이는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한들 그 의는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의 의는 영존하는 의요(시119:142), 우리가 입어야 할 의복입니다.
의가 필요한데 의를 얻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의]는 영적 생활 뿐 아니라 영적 생명, 생존에 필수 요건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배고프거나 배부르거나 일체의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자족하도록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기를 배웠음이라.](빌4:11)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만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은 생명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족함이 있는 경건은 큰 이득이 되나니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딤전6:6~8). 만족은 경건에 큰 유익이 됩니다. 우리의 육신적 필요와 소유에 대해서는 만족을 배워야 하지만 영적 필요, 의, 거룩, 경건, 지혜 등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갈망하고 헐떡이고 추구하는 불만족 상태가 정상적인 성도의 자세입니다. 삶에서 일체의 만족하는 비결을 배웠던 사도 바울이지만 영적으로는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알고자 했고,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이미 도달했다 함도 아니요, 이미 완전하다 함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나도 붙잡으려고 따라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빌3:12~14). 바울 개인의 영적 야심이나 욕망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영적 성취를 이루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거하시며 일하시는 능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했습니다. 그는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했고, 달려 갈 길을 마치고자 했고, 부르심의 상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미 자족해 버린 상태가 아니라 평생을 추구하며 달려갔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와 같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육신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는데 거의 모든 시간과 정력을 써 버립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들에 갈증을 느낍니다. 지혜의 왕이라 불리는 솔로몬은 말하기를,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이루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들어도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1:8),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도 소출로 만족하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헛된 것을 찾아 갈증을 느끼고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외치지 않습니까? 승리에 대한 갈망, 승진에 대한 갈망, 권력에 대한 갈망, 학문이나 명예에 대한 갈망, 재물에 대한 갈망 등등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 하고 있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이란 복된 자들입니다. [오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仁慈)를 계속해서 /베푸시며/ 마음이 올바른 자들에게 주의 의(義)를 계속해서 /베푸소서/.](시36:10). 주의 의는 영속적인 것입니다. [주의 의는 영존하는 의요, 주의 법은 진리이니이다.](시119:142).
다윗은 [내가 주의 명령들을 사모하므로 내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시119:131)라고 합니다. 말씀에 대한 이런 타는 목마름과 갈증이야 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진정으로 복된 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또 고백하기를, [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기에 목이 타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보이리요?](시42:1-2)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미 어릴 때 사무엘로부터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여전히 영적 갈증과 주림의 연속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약간의 성경 지식이나 신앙 경력으로 자족하고 일어 선 줄로 알고 있다면 영적으로 실족할 위기에 놓여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주린 자들은 먹을 것을 목마른 자들은 마실 것을 찾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정도에 비례해서 찾는 열정과 강도 역시 증가합니다. 먹을 것이 없고, 물이 없어 보십시오. 그는 미칠 지경이 되고 맙니다. 의에 주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먼저 의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성경에는 각각 두 종류씩 두 개의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입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릅니다. 율법에서 난 의와 믿음에서 난 의가 있습니다. 이 둘 역시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께서 복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의]는 ‘하나님의 의’요,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로마서 10:3-4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면서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 (롬10:3~4).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를 썼지만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행위, 업적, 결과, 성취, 상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이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what)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who)의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의를 추구하긴 했지만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성경에는 자기(자아)란 말이 붙어서 좋은 말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뿐입니다. 자기 영광, 자기 의, 자기 자랑, 자기 사랑, 자기 확신, 자기 만족 등 무슨 말이 붙어도 가증스런 것입니다. 자아는 부인되어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대상일 뿐이지 아무 자랑할 것도 신뢰할 것도 없습니다. 율법에서 난 행위로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는 망할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의, 율법에서 난 의를 추구하다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으니 곧 율법과 대언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십니다.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십니다. 의란 어떤 상태나 결과가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주님 자신임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聖別)과 구속(救贖)이 되셨으니] (고전1:30).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마음 속에 믿고 영접할 때 그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증거를 함께 찾아 보겠습니다. [하늘들아, 너희는 위에서부터 의를 내리며 창공은 /의를/ 내려 부을지니라. 땅은 열려서 구원을 내게 하고 의도 함께 솟아나게 할지어다. 나 [주]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사45:8). 이 구절에서 앞 부분은 재림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뒷 부분은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넘겨지셨으며 우리의 칭의(稱義)를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느니라.](롬4:25)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마음 속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자들아, 너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까이 가져올 것인즉 그것이 멀리 있지 아니할 것이요,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나의 영광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두리라.] (사46:12~13).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두 팔이 만백성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바라며 내 팔을 의지하리로다.] (사51:5),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공의를 지키며 정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이르렀고 나의 의가 곧 나타날 것임이라, 하시는도다.] (사56:1). 우리는 계속해서 의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보고 있습니다. “나의 의”란 다름 아닌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요, 한 왕이 통치하고 형통하여 땅에서 공의와 정의를 집행할 것이며](렘23:5). *의로운 가지=예수 그리스도. 이로써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의’란 전적으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란 곧 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기에 갈급한 자들을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의이신 주님이 전파되고 증거 될 때 얼른 그것을 받아먹고 마시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된 것입니다. 의에 주린 자들은 의가 전파될 때 주저 없이 주님을 영접함으로 의롭게 됩니다. 의에 주린 자들은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더 이상 주림이 없게 됩니다. 의에 목마른 자들은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더 이상 목마름이 없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생명의 빵이요, 음료가 되심으로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배부르게 하십니다. 주님을 먹고 마신 적이 있습니까? 이 경험이 없다면 아직도 갈증은 해결되지 못한 채 기갈이 들린 교회 생활, 종교 생활을 하는 성도들일 것입니다. 생수의 샘, 생수의 강은 고사하고 메마른 광야를 지나가는 듯이 혼이 메마르고 야윈 그런 영적 생활을 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이는 교리적 지식을 쌓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러 권의 신학 서적을 잃고, 금식이나 철야 기도를 하고 많은 일들을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갈증을 지닌 상태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해결됩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물을 길러 왔지만 사실 그녀의 진정한 갈증은 야곱의 우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밥 지을 물, 마실 물, 씻을 물을 길러 우물로 나왔지만 주님은 그 물을 마셔도 갈증이 풀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구든지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요4:13).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물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 (요4:14). 주님께 나올 때 주님은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그 명절의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요7:37~38). 목마른 자들을 어디로 오라고 하십니까? 어디 어디란 장소가 아니라 “내게로”라고 하십니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주님께 와서 주님을 마시면 그 배에서 성령이 흘러나옵니다. 의에 주린 자요, 목마른 자들은 누구나 이 물을 마시려 하는 자들이요, 이 물을 줄 때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갈증과 주림이 완전히 해결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마지막 세대에 이와는 전혀 다른 한 가지 갈증과 주림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요,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떠돌아다니며 [주]의 말씀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달음질하여도 그것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氣盡)하리라.] (암8:11~13). 오늘날은 유치원에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지만 영혼의 만족을 주는 지식이나 지혜를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갈증과 불만족, 불평, 불안, 무미건조함 등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한 데서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때 사람들은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하게 됩니다. 성경이 아닌 다른 무엇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과학적 탐구, 고고학적, 역사적 자료를 찾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대신 전 세계의 박물관이나 중동의 깊은 골짜기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니며 구하려고 이리저리 달음질해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과 입에 심히 가까이 있으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이 계시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우리의 의가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됩니다. [...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8-9). 하나님의 의이신 주님을 우리가 믿을 때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어 주십니다. [그의 날들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안전히 거할 것이요, 그의 이름 곧 그를 일컬을 이름은 이것이니 곧 [주 우리의 의]라.](렘23:6). 하나님의 의는 성도들이 믿을 때 ‘주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그 날들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은 안전히 거할 것이요, 예루살렘을 부를 이름은 이러하니 곧, [주] 우리의 의라, 하리라.](렘33:1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의이신 주님을 믿을 때 그는 배부르게 되고, 배가 부르게 되면 배에서 생수의 샘이 솟아나 강처럼 흐르게 됩니다. 이는 의의 전파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르게 게 될 때 그는 의를 노래합니다. [그들이 주의 큰 선하심에 대한 추억을 풍성히 말하며 주의 의로우심을 노래하리이다.](시145:7). [오 하나님이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크게 노래하리이다.](시51:14).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옵니다. [내가 주의 의와 구원을 측량할 수 없으므로 그것들을 내 입으로 종일토록 보이리이다. 내가 {주} [하나님]의 힘으로 나아가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께 속한 그 의만을 말하리이다.](시71:15-16). 의를 선포합니다. [내가 주의 의를 내 마음 속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신실하심과 주의 구원을 밝히 드러내었으며 주의 인자(仁慈)와 주의 진리를 큰 회중에게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시40:10). 지금 여러분은 배부르게 되었습니까?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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