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애통하는 자들(03)

말씀: 마5:4
요절: 마5:4

산상 수훈에 나오는 복있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온통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 기준이나 가치관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슬픔이 없고, 눈물이 없고, 고통과 근심이 없는 것이 복된 것이지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는 것은 상식을 깨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마음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자들이 복된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슬픔을 당한 자들에게 주는 위로로써는 너무나 형편없는 말 같지만 이는 진실로 위대한 진리입니다. 애통(mourn)이란 말은 “신음하며 고통스럽게 우는 것”을 말합니다. 애곡, 애통은 슬픔을 동반하는 울음입니다. 야고보는 외치기를, [고난을 받으며 애곡하며 슬피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곡으로 너희 기쁨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약4:9)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땅에 임할 재앙, 심판, 고난을 미리 내다보고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정죄를 받아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 갈 때 많은 사람들이 슬피 울며 애통하는 여자들의 무리가 함께 따랐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성과 또 그분으로 인해 슬피 울며 애통하는 여자들의 큰 무리가 그분을 따라오더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몸을/ 돌이켜 그들을 향해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눅23:27~28). 주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십니다.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명령이듯이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는 말씀 역시 주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메마른 눈만으로 십자가를 볼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못 박힌 갈보리 십자가에 높이 달린 주님이 보이지 않는 눈이라면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지 않을 것이며, 설령 눈물이 흐른다 해도 위선과 가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언제 슬픔을 느끼고 애통합니까? 자신이나 가족이 병들었을 때,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실패했을 때, 무엇인가를 빼앗기거나 잃어 버렸을 때 애통해 합니다. 밖으로는 태연해 보여도 이런 어려움을 당하면 속이 상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관련된 어떤 것에 대한 손실, 손해를 볼 때 애통함을 느낍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었을 때 애곡했고,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날 동안 슬피 애곡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죽었을 때 삼십일 동안이나 슬피 애곡했습니다(신34:8). 이는 사람들이 느끼는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주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들”이란 사회적 약자나 빈자들, 죄수들이나 병자들, 고아나 과부, 노약자들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신 것은 틀림없지만 단순히 돈이 없고, 병이 들었고, 가족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욥이 말한 대로 인생이란 고생과 슬픔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나니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5:7). 질병, 파산, 죽음, 이혼, 사별, 전쟁, 사고, 재해 등의 갖가지 일들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칠 때 사람들은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실수나 죄악으로 인해 가족들이나 아는 사람들이 피해를 볼 때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이런 슬픔은 사망을 이룹니다. [세상의 근심(슬픔/sorrow)은 사망을 이루기 때문이니라.](고후7:10b). 주님은 세상의 슬픔을 가진 사람들을 일컬어 복된 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슬픔은 경건한 슬픔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슬픔)은 회개를 이루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고후7:1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없고, 슬픔이 없는 삶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어떤 성도들에게도 그런 약속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임하는 일상의 시험과 고난들을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시련이 없는 삶을 바라고, 구하는 것보다 시련을 극복하고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고난이 없고, 슬픔이 없고, 염려가 없는 그런 삶이 아니라 그런 일련의 삶들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는 영적 능력과 지혜입니다.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는 영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들에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이 세대를 일컬어 애통해 할 줄 모르는 세대라고 진단하셨습니다.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고 우리가 너희를 향해 애곡하여도 너희가 애통하지 아니하였다, 하는 아이들과 같도다.](마11: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영적 반응이 없고, 무감각한 그런 세대입니다. 지옥과 불 못에 대해서 외쳐도 두려움을 느끼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선포해도 감각이 마비된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자신이 죄인이란 것, 잃어버린 자라는 것,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될 자라는 사실을 알고 애통해 할 줄 아는 이는 복된 자들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란 사실은 본능적으로,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왜 그토록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입니까? 죽음 뒤에 있게 될 심판, 죽음 이후의 두렵고 무서운 지옥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란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공포와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서 다양한 이론과 종교와 철학이 총 동원되는 것입니다. 부정, 회피, 외면은 심리적 공포를 이기기 위한 수단일 뿐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음과 죄와 심판, 저주, 정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께서 “복 되도다”라고 선포하신 애통하는 자들은 무엇에 대해 애통하는 것입니까?

첫째,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돈이 없어서, 꿈이 깨지고,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해서, 건강이 나빠서 울며 원통해 하는 이들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이들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긍휼을 베푸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라.] (눅18:13). 그는 여리 세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세리였지만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에 대해 인지하고 자신의 죄악 됨으로 인해 울 줄 알았습니다. 그는 시대 탓, 환경 탓을 하며 자신을 변명하며 사람들의 이해나 동정을 구한 것이 아니라 ‘애통’해 했습니다. 주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애통함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에스라를 보십시오. [말하기를, 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 내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의 불법이 많아 우리 머리 위로 넘치고 또 우리의 범법이 커서 하늘에까지 이르렀음이니이다.](스9:6). 죄의 무게, 죄의 삯, 죄의 형벌과 진노를 아는 이들의 울음이야 말로 하나님이 그 눈물을 병에 담으실 수 있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눈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금향로에 담으시고(계5:8, 8:3-4), 성도들의 애통하게 흘리는 눈물을 자신의 병에 담으십니다. 에스라는 자신과 동족들의 죄 문제로 인해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을 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이는 극히 적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해서 주님 앞에서 울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이라면 주님이 주신 은혜에 감격해서 울어 본 적도 없는 이들이 틀림없습니다. 죄로 인해 자신에 대해 깊이 절망하고 낙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다윗은 고백하기를, [이는 셀 수 없이 많은 재앙들이 나를 에워싸고 내 불법들이 나를 붙들므로 내가 위를 볼 수도 없사오며 그것들이 내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시40:12)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주의 복음을 들을 때 복음은 구원의 빛으로 마음 속에 임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 죄인이라는 점에서는 기꺼이 동의하지만 사악하고 더러운 죄인이요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죄인이란 사실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애통해 할 줄 모릅니다. 죄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무거움이나 죄가 쏘는 고통, 죄의 권능, 죄의 삯, 죄의 사슬 등에 대해서는 거의 무감각하며 전혀 애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시적인 죄의 쾌락을 즐기며 삽니다. 죄의 무게에 짓눌려 본 적이 없는 이들은 그 멍에가 벗겨졌을 때의 가벼움도 모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이는 내 불법들이 내 머리를 덮었음이오니 그것들이 무거운 짐 같으므로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나이다.] (시38:4)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 짐에 대해 무게를 느끼고 고통을 당하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우는 자들이 복된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11:28). 죄의 무게를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도록 무겁게 느끼는 이들은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이 귀에 들리고, 마음에 들리는 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이 복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늘 따라다니는 한 가지는 회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죄를 짓지만 누구나 다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애통함은 바로 죄를 깨닫고 애통해 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는 죄를 깨닫지 않고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를 깨닫기 위해서는 말씀의 빛이 마음에 임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마음을 비출 때 우리는 자신의 더러움, 사악함을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이같이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나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계하시매 내가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수소같이 징계를 받았나이다. 주는 [주] 나의 하나님이시오니 나를 돌이키소서. 그리하면 내가 돌아가리이다. 내가 돌이킨 뒤에 확실히 회개하였고 내가 교훈을 받은 뒤에 내 넓적다리를 쳤나이다. 내가 어린 시절의 치욕을 짊어졌으므로 부끄럽고 참으로 당황하기까지 하였나이다, 하였도다.] (렘31:18~19). 주님은 에브라임이 “스스로 이같이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이 내 뱉는 회개의 탄식 소리에 귀 기울이시며 크게 들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들의 눈물을 눈물 병에 담으시며(시56:8) 장차 저 하늘에서 모두 닦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애통해 본 적이 없다면 받을 위로가 없습니다. 흘려 본 눈물이 없다면 주님께서 담아 두신 눈물 병도 없을 것이며, 닦아 주실 일도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그는 사탄의 간계와 능력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이나 용기에 대해서 과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만만했고, 남들은 다 실족할지라도 자신은 실족하지 않을 것이며, 죽기까지 주님을 따를 줄로 알았습니다. 자신에 대한 무지, 육신의 약함 등을 깨닫는 데는 수년이 걸린 것이 아니라 몇 시간으로 충분했습니다. [수탉이 곧 두번째로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이것을 생각하며 슬프게 우니라.](막14:72).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이 기억났을 때 그는 ‘슬프게 울었습니다.’ 누가는 이 부분을 [밖에 나가 몹시 슬프게 우니라.](눅22:62)고 기록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와 죄에 대해서 애통하고 애곡할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하는 대신 슬프게 울었던 것입니다. ‘슬프게 우니라’-이런 자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들이 복된 것은 그 애통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새롭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역전의 기회를 보장해 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는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가까이 하시며 통회(痛悔)하는 영을 가진 자들을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무엇으로 마음이 상해 있습니까? 죄와 불법으로 인해 마음이 상해 있는 자들을 주님은 가까이 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며 싸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147:3).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치 않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약도 기름도 싸매야 할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은 죄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주님은 큰일을 하고 업적을 남긴 사람들 곁으로 가까이 오시지 않고 ‘상한 마음, 통회하는 영’을 가진 자들을 가까이 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소생시키시고, 보살피는 이들은 상한 마음, 통회하는 영을 지닌 이들입니다. [이는 높고 높으시며 영원히 거하시고 이름이 거룩이신 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고 또한 통회(痛悔)하며 겸손한 영을 지닌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것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들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 [이는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기 때문이라. 그것들이 지금까지 존재해 왔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오직 가난하고 영으로 통회하며 내 말에 떠는 자는 내가 보살피느니라.](사66:2). 하나님은 상한 마음, 상한 영을 지닌 자들과 함께 하시며 소생시키시고 돌보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들을 복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셋째, 세상을 향해 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은 멸망을 눈앞에 둔 침몰 직전의 파선한 배와 같습니다. 이 세상은 곧 불이 붙여질 용광로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이 세상은 점점 좋아질 것이다, 발전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자”고 외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은 불 타 없어질 것이란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죄로 인해 멸망당할 사람들을 위해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그 도시를 보시고 슬피 우시며] (눅19:41). 자신의 안위와 영달, 꿈을 이루지 못해 우는 것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 아래 놓인 세상을 향해 애통해 하는 자가 되십시오. 우리는 잃어버린 세상, 잃어버린 혼들을 향해 애통해 하는 마음이 있는가? 이 문제는 자신의 영적 상태와 그대로 직결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롯조차도 세상의 불법으로 인해 혼이 괴로움을 당하고 마음이 상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사악한 자들의 더러운 행실로 인하여 괴로움을 받던 의로운 롯을 구해 내셨으니 (이는 이 의로운 사람이 그들 가운데 거하여 그들의 불법 행위를 보고 들으면서 날마다 자기의 의로운 혼을 괴롭게 하였음이라.)](벧후2:7~8). 성도들이 세상에서 혼이 상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그로 인해 애통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이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같이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세상을 위해 울지 않고, 세상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면 롯보다 못한 영적 상태에 놓여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롯의 부인과 같은 상태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동족들의 불신과 회개치 않는 마음으로 인해 애통해 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 큰 근심이 있고 계속해서 슬픔이 있으니] (롬9:2). 어떤 이는 세상과 동족은 고사하고 가족들이나 친지들, 동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전혀 근심과 슬픔을 가지고 있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저는 몇 년 동안이나 열심히 성경 공부를 나오면서도 함께 사는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한 번도 기도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죄를 회개할 필요를 못 느낄 만큼 마음이 굳어 버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 문제는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저에게 크나큰 회의와 절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울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울 줄 모르는 사람들!! 애통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결코 복된 자들이 아닙니다. 저 역시 장인, 장모님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는데 이들을 위해 얼마나 애통하게 울었는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마음에 애통함을 가지고 눈물로 기도하며 사랑으로 다가서서 전하지 않으면 여전히 향불을 피워놓고 이미 죽어 지옥에 간 조상들에게 복을 빌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통해 하며 울어야할 순간에 마음이 굳어져 있는 자신의 완악함에 대해 회개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신의 세상, 죄로 인해 죽음 앞에 절망하는 사람들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며 주님께서는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요11:35).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불신입니다.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통치자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죽음은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넷째, 간구하며 울라. 우리는 성경에서 기도하며 울었던 예들을 수없이 많이 봅니다. 우리말로 “울부짖으며”(cry)라고 번역된 말은 모두 울며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도는 마치 몰상식하고 광신적이며 교양과 품위가 없는 기도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런 기도야 말로 올바른 기도, 응답받는 기도, 능력 있는 기도의 전형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떻게 기도하셨는가?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는 동안에 자기를 죽음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 주셨느니라.](히5:7).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우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셨습니다. 주님은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주님이 웃으셨다는 기술은 단 한 줄도 볼 수 없지만 이렇게 우신 장면은 분명히 있습니다. 늘 메마른 눈으로 건성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라면 이 시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내 마음을 상하게 하고, 애통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는 영이 가난한 상태도 아니고, 통회하는 성도도 아닙니다.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마음은 바리새인처럼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나를 보십시오. [한나가 혼이 괴로운 가운데 [주]께 기도하고 심히 통곡하며](삼상1:10). 그녀는 남편에게 통곡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괴롭히는 ‘브닌나’에게 하소연한 것도 아닙니다. 한나는 혼이 괴로운 가운데 주님께 기도했고, 심히 통곡했습니다. 한나는 애통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사무엘을 주심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기도하며 애통해 했던 또 한명의 대표적인 인물은 히스기야입니다. [이에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주]께 기도하여 이르되, 오 [주]여, 간청하오니 내가 진실함과 완전한 마음으로 주 앞에서 걸었으며 또 주의 눈앞에서 선한 것을 행하였음을 이제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왕하20:2~3). 히스기야는 자신이 죽게 된다는 말에 얼굴을 벽으로 대고 심히 통곡했습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흘리는 눈물을 보셨습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대장 히스기야에게 말하기를, [주] 곧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셋째 날에 [주]의 집에 올라가겠고](왕하20:5).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함께 흘리는 그 눈물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이 기도하기를, [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시39:12a)한 대로 주님은 들으시고, 보십니다. 기도할 때 상한 마음, 애통함으로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눈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셨다면 우리의 영적 상태는 그만큼 복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섯째, 섬김의 눈물이 필요하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도 눈물이 필요합니다. [그분 뒤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발 곁에 서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 시작하여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으니](눅7:38). 예수님을 사랑했던 한 여인이 주님을 섬긴 방식입니다. 바리새인이었던 시몬은 주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고,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주님을 손님으로 접대했지 섬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인이었던 한 여자는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씻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으며](눅7:44). 주님을 섬기는데는 많은 눈물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곧 온전히 겸손한 마음과 많은 눈물로 {주}를 섬기며 또 숨어서 나를 덮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시험을 받으면서도 {주}를 섬기고](행20:19)라고 했습니다.

전도를 하는 일도 눈물이 필요합니다. 수분이 부족하면 씨앗이 자라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귀중한 씨를 가지고 울며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뻐하며 자기의 /곡식/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126:5~6). 바울의 사역은 눈물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그는 눈물로 씨를 뿌렸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습니다. 사역자들은 성도들로 인해 늘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로 인해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이 사역자들입니다. [내가 마음이 몹시 괴롭고 아파서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근심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에게 더욱 넘치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2:4).

이렇게 애통한 자들은 주님께 위로를 받는 복이 있습니다. 주님은 마음에 평강을 주심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은 위로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긍휼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어떤 고난 중에 있는 자라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분이시로다.](고후1:3-4). 주님은 평강으로 위로해 주시고, 기쁨으로 위로해 주시고, 열매로 위로해 주시고, 유업의 보상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주님은 풍성한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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