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가난한
자(02)
말씀: 마5:3
요절: 마5:3
[영적인 복]에 대해 강의할 때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8가지는
산상수훈 강의 때 하기 위해 따로 남겨 두었습니다. 주님은 산에 올라 앉으시고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해 입을 여신 첫 번째 말씀이 ‘복된 사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복(blessing)은 행복(happy)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복이란 단어는 blood를 어근으로 삼고 있습니다. 반면
행복(happiness)은 happen을 어원으로 삼습니다. 이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논할 때 복과 행복을 교차해서 사용하거나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처였던 레아는 자매였던 라헬과 경쟁적으로 자녀를 낳아 남편 야곱의
사랑을 쟁취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녀는 ‘아셀’을 낳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레아가 이르되, 나는 행복한 자니 이는 딸들이 나를 가리켜
복된 자라 할 것임이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창30:13). 복을 받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떤 이들은
행복을 열심히 추구하면서도 행복의 근원이 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적인 복’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복있는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복이
없는 행복은 기쁨 없는 웃음이나 뿌리없는 나무, 열매 없는 가지처럼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은 거짓 행복에 도취되어 자신을 파멸로 이끕니다.
인생의 목표요 가치가 행복에 있다고 믿을 정도로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이러한 백성은 행복하나니 참으로 [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행복하니이다.](시144:15)라고 합니다. 행복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무신론자들, 불신자들, 이교도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주] 자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행복하도다.](시146:5). 하나님 없는 행복, 하나님의 도움 대신 자신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살면서 성공 수기를 써
내고 자서전을 출판하는 자들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람들의 평가를 받을 수 있어도, 행복하게 살았다는 평을 받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남의
업적이나 일의 성취도, 평판, 권세, 지위, 부 등을 고려해서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어떤 사람의 행복 지수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과 소유로 판단할 수 없음을 누구나 다 알기 때문입니다. 누가 행복한 자입니까?
주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주님의 도움을 받고, 주께 소망을 두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혜의 대왕이라 불리는 솔로몬의 행복론은 그리스
철학의 대가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솔로몬은 행복한 자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지혜를 찾는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행복하나니](잠3:13). [지혜는 그것을 붙잡는 자들에게 생명나무라. 그것을 간직하는 자마다 행복하도다.](잠3:18).
지혜를 찾고 얻고 붙잡고 간직한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지혜는 두 종류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있고, 땅에 속한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에 속한 것이요, 관능(官能)적인 것이요, 마귀에게 속한 것이니 이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부드럽고 대하기 쉬우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과 위선이 없나니] (약3:15~17). 솔로몬이 말한 지혜는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내려왔고,
위로부터 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 (고전1:24). 예수님을 찾고, 얻고, 붙잡고, 간직한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행복을 논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행복하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마귀에게 속은 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자신이
받은 복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까? 복된 사람이라면 그가 감정적으로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감정적 흥분이 아닙니다.
행복은 영적인 복에 기초한 우리의 영적 상태입니다. 저는 행복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의 비결을 말해 주고 싶습니다. 먼저 복된 자가 되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면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복이 뿌리고 행복이 열매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 주님께서 입을 열어 가르치시기를,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가난이 복이 아닙니다. 만약 가난이 복이라면 Homeless나 거리의 부랑아들이 모두 복된 자라고 해야 할 것이지만 가난과 영적 문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경건한 것이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거룩한 것이 아니듯이 가난하다고 해서 복된 것이 아닙니다. 가난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거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랑거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잠언 30장의 아굴은 [헛된 것과 거짓말들을
내게서 아주 멀리 옮기시오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며 오직 알맞은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는 내가 배불러서 주를
부인하며 말하기를, [주]가 누구냐? 할까 염려함이오며 또는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할까 염려함이니이다.](잠30:8-9)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가난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난이 시련이나 성숙이 아니라 시험과 유혹이 된다면
아굴처럼 기도하십시오. 가난하면서도 만족할 줄 알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으로 인해서 오는 시험과
유혹을 이길 수 있어야 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을 통해 믿음이 연단되고, 경건에 이르고, 거룩해지고, 육신의 정욕이 통제된다면
가난한 것이 유익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족함이 있는 경건은 큰 이득이 되나니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딤전6:6~8).
가난에 처해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은 육신의 본성에 거스르는 것이지만 영적으로 배울 때 가능합니다. 주님이 언제나 나의 모든 필요를 철저히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음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기를
배웠음이라.](빌4:11). 가난을 통해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배웠다면 그는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비롯한 일상적인 생활고에서 완전한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자유는 결코 적은 자유가 아닙니다.
가난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배워야 할 또 한 가지는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진리를 깊이 배웠다면 결코 가난으로
인해 괴로움이나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히13:5). 주님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성품을 거룩하고
경건하게 빚으시기 위해서 질병이나 파산이나 억눌림이나 가난을 활용하십니다. 나의 생활비는 정부 보조금이나 연금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란
진리를 배우면 고단한 일상 생활에서 영적 활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3a). 영이 가난할 때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께서 부요하셨으나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자신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주님께서 우리의 물질적인 소유를 부요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을 부요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영이 가난하지 않다면
주님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습니다. 서머나 교회를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알며 (그러나 네가 부유하도다) 또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 모독을 아노라.] (계2:9). 그들은 물질적으로 매우 궁핍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환난과 궁핍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합니까? [(그러나 네가 부유하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 가난한 자들을 도우시고, 그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진정으로 부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이와는 반대로 라오디케아 교회는 부자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교회를 가난하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가련한 것과 비참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단련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나지 아니하게 하며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 (계3:17~18). 이들의 물질적인 부요함이 곧 영적인 부요함인 줄로 알았습니다. 현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이와같습니다. 자신들의 돈과 재산이 주님이 주신 영적 복의 결과인 줄로 압니다. 사실은 부요함과 경건, 부와 영성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자가 있고, 부자였지만 영적으로는 궁핍한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 복음을 선포하십니까?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음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구원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짓밟힌 자를 자유하게 하며](눅4:18).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짓밟힌 자’들을 위해 주님을 보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음을 들을 때 바로
받아 들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은 주님을 믿음으로 즉시 고침을 받습니다. 죄의 포로된 자들은 그 속박의 무게와 고통을 알기에 복음을 들을 때
믿고 곧 바로 구원을 얻습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비참함, 죄성, 사악함을 참으로 잘 압니다. 다윗이 말한대로, [그러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오니 사람들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멸시거리이니이다.] (시22:6)란 말씀은 우리의 영적 상태의 정확한 주소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벌레같은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영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이같이 어리석고 무지하므로
주 앞에 짐승 같사오나] (시73:22)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배운 것이 없고, 돈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결코
낮추어 보지 않습니다. 세상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세월을 탓할 망정 자신이 형편없는 벌레요, 짐승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렇게
말하면 ‘가진 것 없다고 나를 무시한다’고 분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자신이 그런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선민의식으로 교만해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벌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주] 네 구속자(救贖者),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말하노라.](사41:14). 주님은 그들을 벌레라고 부르셨습니다. 욥기에도 [그런즉 사람이 하나님과 견주어 의롭다 할
수 있겠느냐? 또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어찌 깨끗할 수 있겠느냐? 심지어 달을 바라보아도 그것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참으로 별들도 그분의
눈앞에서는 순수하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벌레인 사람이야 어떠하겠느냐? 벌레인 사람의 아들이야 어떠하겠느냐?] (욥25:4-6)라고
말합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볼 수 있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자신을 평가하고 인정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모습을 과대평가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그들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십니다. [내가 내 마음 속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시리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짐승임을 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3:18). 어려운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인생의 역경을 통해서 자신의 바닥까지 다 드러나도록 뒤집어엎어 놓으십니다. 영이
가난한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영이 가난해 질 때 그는 비로소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복을 받고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을 꺾으시고,
더러움을 씻기시는 일은 당사자에게는 매우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이 없이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압을 보십시오. [모압은 어린 시절부터 편안히 지냈고
자기의 술 찌꺼기 위에 자리를 잡았으며 /사람들이/ 모압을 비우려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도 아니하였고 모압이 포로가 되지도
아니하였으므로 그 안에 그 맛이 남아 있고 그 냄새도 변하지 아니하였도다.](렘48:11). 술 찌꺼기 위에 자리를 잡았지만 평안하게
거했고 고난이 없었기 때문에 늘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늘 교만했습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깊이 침전되어 있는 죄와 불법과 사악함과 더러움이
회칠한 무덤과 같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교육과 철학, 직장이나 사회적 지위, 성경 공부나 교회 활동 등의 종교 생활로 자신을 덮어
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는 찌꺼기들을 보시고 흔들어 버리시거나 엎어
버리십니다. 내 안에 가득히 채워져 있던 것들을 모두 튀어 나오도록 쏟아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은 무엇인가 있어야 할
것이 없고 부족한 것입니다. 구하려고 해도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영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말씀입니다. 의입니다. 권능입니다. 지혜입니다.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부족할 뿐 아니라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재물로, 학식으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영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십니다. 구원은 공짜입니다. 성령은 공짜입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이 얻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미리 그렇게 해 두신 것입니다. [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고 와서 포도즙과 젖을
사라.] (사55:1). 만약 자신 안에 선한 것이 있고 뭔가 자랑할 만한 것이 있고, 신뢰할 만한 것이 있다면 값을 치르고 사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들은 아무 것도 값을 치르고 살 수 없습니다. 간단한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지혜”를 값을 치르고 살 수
있습니까? 만약 살 수 있다면 얼마 정도의 값을 치러야 합니까?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찾는가? 명철(明哲)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사람이
그 값을 알지 못하며 산 자들의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깊음이 이르되, 그것이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도 이르되, 그것이 내게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그것은 금으로도 얻지 못하며 은을 달아서도 그 값을 치르지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진귀한 줄마노나 사파이어로도 그
값을 매기지 못하겠고 황금과 수정이라도 그것과 견주지 못하며 정금 장식으로도 바꾸지 못하고 산호나 진주는 말할 필요도 없나니 이는 지혜가
루비보다 더 값지기 때문이라. 이디오피아의 황옥이라도 그것과 견주지 못하며 순금으로도 그 값을 매기지 못하느니라.] (욥28:12~19).
욥이 매긴 지혜의 가격이 얼마입니까? 값을 치르지 못한다, 값을 매길 수 없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은 다 값을 치를 수 없고, 그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귀한 것을 얻을 때 값을 치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는 무엇을 얻을 때 선물로 얻을 생각 뿐입니다. 돈이 없고, 능력이 없고,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선물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정당하게 정상적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기대하는 것이 전부이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의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노력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주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을 받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이, 풍성하게, 빠르게 얻을
뿐 아니라 자신이 받은 선물이 전적인 은혜임을 인지함으로 복된 자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 값없이 주시기 때문에 영이 가난한 자들이
그것을 쉽게 얻습니다.
* 값없이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대속(代贖)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롬3:24). 둘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셋째, 복음입니다.
[그런즉 나의 보상이 무엇이냐? 진실로 내가 복음을 선포할 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값없이 선포하고 복음 안에서 내가 가진 권리를 남용하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9:18). 복음 전도자들이 대가를 받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값없이 준다고 해서 싸구려라거나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값이 없다는 것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지만 우리 힘으로는 얻을 수 없어서 선물로 준다는 것입니다. 넷째, 생명수 즉 성령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다 이루어졌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의 샘에서 값없이 주리라.](계21:6).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하시더라.](계22:17). 영이 가난한 자들은 이 모든 것을 단순히 믿음으로 선물을 받습니다.
가난한 자는 신뢰할 만한 재물이 없습니다.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주님께 맡깁니다. [가난한 자가 자기를 주께 맡기나니 주는 아버지 없는 자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10:14b).
가난으로 인해 마음이 겸손해지고 낮아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재물을 신뢰함으로써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막10:24).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딤전6:10).
우리가 신뢰해야 할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네가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들에게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확실치 않은 재물을
신뢰하지도 말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곧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을 신뢰하게 하며](딤전6: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하지 말아야 재물을 좀 신뢰하기 위해 주님께 ‘재물’을 달라고 기도하고 울부짖고, 철야하고, 금식하는 성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이는 자살골 넣겠다고 근육을 단련하는 선수와 같은 것입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자기를 주께 맡깁니다. 우리가 주님께 맡겨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이 주제에 대해서 여러 차례 다루었습니다. 첫째, 짐입니다.
[네 짐을 [주]께 던져서 맡기라. 그분께서 항상 너를 붙드시고 의로운 자의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둘째, 일입니다.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리라.](잠16:3).
셋째, 원수 갚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된바, 원수갚는 일이 내게 속하였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롬12:19).
넷째, 모든 염려입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벧전5:7). 다섯째, 길입니다.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시고](시37:5).
여섯째, 우리 자신입니다. [가난한 자가 자기를 주께 맡기나니 주는 아버지 없는 자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10:14b).
이것을 우리는 헌신이라고 합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주님께 맡기는 일이 쉽습니다. 모든 것을 맡기지만 자신을 맡길 수 없고, 자신을 주님께
드릴 수 없다면 아직 불완전합니다.
저는 자기 자녀들을 친척 집에 맡기는 경우는 물론이고 고아원이나
보육원에 맡기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남모르게 남의 집 대문 앞이나 절이나 교회나 수녀원 앞에 놓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연인즉 그 사람들이
지독하게 사악하거나 인간 말종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나 가난해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
아끼는 것도 맡겨 버립니다. 너무 가난해서 자신의 몸을 맡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상대가 생기면 도리어 맡아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길, 여러분의 짐, 여러분의 염려, 여러분의 일을 누구에게 기꺼이 맡길 수 있습니까? 영이 가난한 자들은 기꺼이
주님께 맡깁니다.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전혀 감당할 수 없는 자란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안고 있어보아야 힘만 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모두 해결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영이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맡길 때
주님은 맡아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는 평강, 기쁨, 자유, 안식, 즐거움이 찾아 옵니다.
영이 가난한 자는 다른 이들을 부요하게 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다.](고후6:10).
사도 바울은 영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로 많은 영적인 복을 소유했고, 나누어줄 영적 선물들이 많았습니다. 다윗 역시 영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가난하고 궁핍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상처를 입었음이니이다.] (시109:22).
이 모든 것보다 영이 가난한 자들이 누리는 진정한 복은 주님이
말씀하신바 “하늘의 왕국”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늘의 왕국이 영이 가난한 자들의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왕국은 정치력이나 경제력,
군사력이 강한 자들의 것이지만 하늘의 왕국은 그런 것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고, 영이 가난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친히
세우실 공평과 정의가 물같이 흐르는 ‘천년 왕국’은 영이 가난한 자들이 얻게 됩니다.
실제로 왕국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 영이 가난한 자들은 침례인
요한에게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반면 영이 교만하고 거만한 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에게서 침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하더라.](눅7:30).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했습니다. 하늘의 왕국의 도래를
원치 않았고, 주님께서 통치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눅19:27). 영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주님께 긍휼을 구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긍휼을 베푸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라.](눅18:13). 이런 사람들은 모두 주님께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왕국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하늘의 왕국을 차지할 것입니다. 영이 가난함으로 얻는 참된
복입니다. 우리는 내적인 것, 영적인 것, 정신 영역이나 비물질적인 것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이 땅에 세워질 하늘의 왕국 역시
소유하게 됩니다.
다 같이 3절 말씀을 암송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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