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을 베푸는
자들(06)
말씀: 마5:7
요절: 마5:7
산상 수훈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긍휼(矜恤)을 베푸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을 얻을 것임이요,] (마5:7) *the merciful. 구약에 이 구절과 짝을 이루는 말씀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주께서 주의 긍휼을 보이시고 곧바른 자에게는 주의 곧바르심을 보이시며](시18:25). ‘주의 긍휼’이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은혜와 더불어 죄인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단어입니다. 죄인들은 자신에게 공의가 집행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은혜]가 베풀어지기를 바랍니다. 긍휼은 죄에 대한 심판, 저주, 형벌 등을 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그것이 조건없이, 값없이 면제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긍휼이란 단어가 처음 쓰였고, 적용된 사람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지만 롯은 불신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믿음의 삶을 살거나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롯은 세상과 철저히 동화된 사람의 유형입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에 비유되는 그런 사람이요, 육신적인 성도의 모델입니다. 롯이 살던 도시는 죄악된 세상, 심판과 저주를 받아 불타는 세상의 본보기였습니다. 주의 진노와 심판의 때에 롯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긍휼’입니다. [롯이 망설이매 그 남자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붙잡고 그를 이끌어 내어 그 도시의 밖에 두니 이는 [주]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음이더라.](창19:16). 그들은 불과 유황으로 심판받는 현장에 살고 있었지만 주님의 긍휼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롯은 긍휼을 입은 순간에도 또 긍휼을 구했습니다. [보소서, 이제 종이 주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고 또 주께서 주의 긍휼을 내게 넘치게 하사 내 생명을 구원하심으로 긍휼을 베푸셨나이다. 내가 산으로 도피할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이 나를 덮쳐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창19:19). 주님은 롯이 원하는대로 긍휼을 베푸셨고 구원하셨습니다. 긍휼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은 이집트에서 비참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집트는 세상을 예표하는 나라입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쇠용광로’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용광로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사](신4:20a), [이는 그들이 주께서 쇠 용광로 한가운데서 곧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이며 주의 상속이기 때문이니이다.](왕상8:51). 이집트 땅은 그들에게 지옥과 같이 불타는 곳이요, 모두를 소멸시켜 버리는 그런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쇳물이 녹아나는 그런 용광로에서 완전히 녹아 소멸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긍휼입니다. 세상은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삼켜 버리는 거대한 용광로입니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하여 예비해 두신 것이라.](벧후3:7)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죄인들의 삶은 용광로 속에 있는 삶이란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주의 긍휼]입니다. [주께서 구속(救贖)하신 백성을 주의 긍휼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인도하사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출15:13). 긍휼은 구원의 근거입니다. 구원은 우리 자신의 무엇,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에 따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늘 기억하고 명심하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은 그들에게 의로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듯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 역시 우리의 의로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긍휼과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기다리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그분께서 높임을 받으시리니 이것은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이는 [주]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그분을 기다리는 자들은 다 복이 있도다.](사30:18).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성품입니다.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이 죄인들에게 허락하신 크신 긍휼, 풍성한 긍휼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 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바 확실한 긍휼이니라.](사55:3). 다윗은 율법에 따르면 도저히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그런 죄를 지었습니다. 간음, 살인은 어떤 속죄 제물을 바친다고 해서 용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고백과 회개를 받으시고 다윗을 용서하셨는데 이것을 “확실한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한 바 있는 ‘확실한 긍휼’을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들이 받은 모든 은혜는 ‘확실한 긍휼’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율법이 용서하지 않는 죄와 저주와 심판일지라도 용서받는 것, 희생제와 헌물이 없이 새 언약에 따라 얻는 긍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이 긍휼을 받았기에 우리 역시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수 있고, 베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같이 너희도 긍휼을 베풀라.](눅6:36). 긍휼을 베푸는 자들은 확실한 긍휼, 풍성한 긍휼(엡2:4)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율법에는 정통하고 행위와 의식과 규례를 지키는데는 매우 엄격하면서도 죄인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 줄 몰랐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주님은 죄인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마9:13a). 한 마디로 호세아 6:6 말씀을 읽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계의 지도자들이라고 말하는 이들,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니](마12:7).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면 바리새인들은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희생물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희생물을 잘 드렸습니다. 그러나 긍휼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전에 드리는 헌물, 희생물, 십일조 보다 ‘긍휼’을 더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침으로 죄인들을 회심시키는 일은 모든 율법사들이 의무감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며,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최선을 다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무와 책임을 맡은 자들은 죄인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출회만할 뿐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죄인들을 향한 긍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의로 충만했기에 주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1b-12)라고 감사할 수 있었지만 “주여, 제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구할 줄은 몰랐습니다.
호세아 6:6에, [이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니 하나님을 아는 것이 번제 헌물보다 나으니라.](호6:6)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 희생물만 드릴 줄 알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모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절기마다 율법에 따라 소나 양을 잡는 것보다 긍휼을 더욱 원하신다고 말씀하심으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며 그들을 구원하고 회개시키는 일은 결코 비난 받을 일도 아니요, 죄는 더욱 아니며 잘못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은 희생물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희생물이 아니라 긍휼이라고 하실만큼 긍휼을 베푸는 자들은 복된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주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임을 전제로 합니다. [너희가 지나간 때에는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긍휼을 얻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긍휼을 얻었느니라.](벧전2:10).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긍휼을 얻은 자들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였다면 긍휼을 베풀 수 없습니다. 그는 베풀 긍휼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수 십 가지 이유와 목적을 열거할 수 있지만 한 가지는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모든 일에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되심이 마땅하니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에서 친히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하여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히2:17). *“긍휼 많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사”- 성육신의 목적중의 하나이다. 주님께서 긍휼 많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구원받았고, 또 언제나 긍휼을 얻기 위해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우리는 시편을 읽으면서 다윗이 한 많은 기도 가운데 가장 자주 반복되는 기도, 가장 간절히 열심히 구한 기도는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주님께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주의 긍휼]이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긍휼과 함께 하며, [의] 역시 긍휼과 함께 합니다. 성막이나 성전 건축에서 이 진리는 더욱 분명하게 계시됩니다. 우리는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놓고 그 위에 [긍휼의 자리]를 놓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자리를 증거궤 위에 덮게 하셨습니다.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긍휼의 자리를 두고](출26:34). 긍휼의 자리는 주님과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그 제단을 증거/판/ 위에 있는 긍휼의 자리 앞 곧 증거궤 옆에 있는 휘장 앞에 둘지니 이 긍휼의 자리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니라.](출30:6). 죄인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긍휼의 자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긍휼의 자리에서 만나 주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죄인들은 모두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긍휼의 자리는 피가 뿌려진 장소입니다. [그는 또 수소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긍휼의 자리 위에 동쪽으로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긍휼의 자리 앞에 일곱 번 뿌릴지니라. 그 뒤에 그는 또 백성을 위한 죄 헌물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그 수소의 피로 행한 것같이 그 피로 행하여 긍휼의 자리 위와 긍휼의 자리 앞에 뿌릴지니](레16:14-15).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긍휼의 자리 위와 앞에 뿌려짐으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온 몸의 모든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피가 있는 곳에 긍휼이 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이 세상의 죄인들을 향한 긍휼이 넘치는 자리입니다. 누구든지 그곳으로 나올 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고, 깨끗하게 씻기지 않는 더러움이란 없습니다.
긍휼은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거룩한 성품입니다.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출34:6). 긍휼은 약하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하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조건 없이 돕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해 가지는 연민입니다. 긍휼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자신이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고 그대로 이웃 형제들에게 드러내는 마음입니다. 복음서에서 사람들을 보는 우리 주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사”란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긍휼이란 말의 다른 표현은 ‘불쌍히 여기사’입니다. 우리 주님의 성품이 가장 자주 표현되는 것 중에 하나는 “불쌍히 여기시니”란 말씀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은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들었던 큰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마9:36a), [예수님께서 나아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니라.](마14: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마15:32a).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 말로 모든 목양의 기본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큰 무리가 나아오면 기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나의 설교를 듣기 위해 이렇게 모였구나! 나도 이제 유명 목사의 반열에 오르는구나! 우리 교회도 드디어 부흥을 했구나!”라고 생각하거나 “이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관리할 것인가?” 등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께서 문둥병자를 보실 때 들었던 마음 역시 “불쌍히 여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할지어다, 하시매](막1:41). 문둥병은 죄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병입니다. 주님은 구역질을 내시거나 혐오감이나 거리낌이 마음속에 생기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화상을 입은 환자, 피부염, 에이즈 등의 환자를 볼 때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성도들이라면 당연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긍휼이란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보실 때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너를 위해 큰 일들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지들에게 고하라, 하시니](막5:19). 시력을 잃은 사람을 향해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니 그들이 즉시 시력을 받게 되어 예수님을 따르니라.](마20:34).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것은 큰 무리들, 병자들, 마귀들린 자들 뿐이 아닙니다. 죽은 아들을 향해 우는 나인성의 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께서 그 여인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7:13). 주님은 빚진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인과 같습니다. [이에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를 풀어 주며 그 빚을 용서해 주었으나](마18:27). 주님은 잃어버린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주님은 강도 만나 다친 사람을 만나 주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을 하다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는 불쌍히 여겨](눅10:33). 그렇다면 이 땅을 사는 성도들은 어떤 마음가짐,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끝으로 너희는 다 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동정하며 형제로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예의바르게 행하라.](벧전3:8). 주님께서 그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인성이나 덕성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과 욕심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주님의 성품, 주님의 마음, 주님의 영이 우리 속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서로를 향해 불쌍히 여기며, 긍휼로 옷 입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긍휼]은 타락하고 죄악된 인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나의 긍휼이 아니라 *주의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 주의 긍휼을 맛보고 새로운 성품이 우리 안에 형성될 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고, 새 마음, 새 성품이 창조되었을 때 우리는 이웃과 형제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육신의 본성은 무정하고 무자비합니다. 지독하게 이기적입니다. 동정을 베푸는 것도 자기를 드러내고 인정받고 존경받고 높임 받기 위한 은밀한 동기가 작용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새 사람은 자신이 전혀 드러나는 것을 도리어 두려워하며 긍휼을 베풀기를 기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될 때 주님이 내게 베푸신 긍휼이 나를 통해 이웃과 형제들에게 주게 됩니다.
성도란 무엇을 줌으로써 주께 받는 사람들이 아니고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이웃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든 긍휼이든 그 무엇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 복음이든 은사든 받은 것을 전하여 주는 것이 청지기입니다. [이는 나 역시 전해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니](고전15:3a).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를 끼치고, 사랑을 받았으면 뜨겁게 사랑하고, 은사를 받았으면 그것으로 섬기고, 능력을 받았으면 돕고, 재물을 받았으면 널리 흩어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풍성한 긍휼을 받았으면 베풀어 주라고 하십니다. [사악한 자는 빌리고 갚지 아니하나 의로운 자는 긍휼을 베풀고 주는도다.](시37:21). [그가 항상 긍휼을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씨가 복을 받는도다.](시37:26).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을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을 조건 없이 용서하고 그들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도록 돌보아 주었습니다(창50:15-21). 모세를 보십시오. 자신을 대적해서 반역한 아론과 미리암을 향해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모세가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이제 그녀를 고쳐 주옵소서, 하니라.] (민12:13). 이것이 모세 안에 있던 긍휼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 왕이 그를 죽이기 위해서 줄기차게 군대를 보내고, 추격했습니다. 다윗은 그를 죽일 완벽한 기회가 자신의 손 안에 왔을 때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냈습니다(삼상24,26장). 이들은 긍휼이 무엇인가를 이론이나 교리나 말이 아니라 실제 삶과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악한 자들은 어떠합니까? 긍휼을 베풀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긍휼 베풀기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핍박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죽이기까지 하였음이니이다. 그가 저주하기를 사랑하였은즉 그 저주가 그에게 임하게 하시고 그가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였은즉 그 복이 그를 멀리 떠나게 하소서.] (시109:16~17). 긍휼을 베푸는 자들은 복된 자들입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들은 사악한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어떻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롬12:8b). 긍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은 자발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즐거움’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죄를 짓는 자로되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는 행복한 자니라.](잠14:21). 즐거움으로 긍휼을 베풀기 때문에 그는 행복한 자입니다. 구제 헌금이나 도움을 줄 때도 ‘즐거이 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마다 자기 마음 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가난한 자를 보살필 때, 누군가를 섬길 때 손해 의식이나 피해 의식이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즐거움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도움을 주었다, 선을 행했다, 동정을 베풀었다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임을 기억하십시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이를 모욕하는 자로되 가난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자니라.](잠14:31). 긍휼을 베푸는 자들은 긍휼을 얻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은 성경적 진리입니다. 갈라디아서 6:7, 야고보서 2:13입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갈6:7), [이는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가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것임이니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기뻐하느니라.](약2:13).
긍휼을 베푸는 일은 자신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자기 혼에게 선을 행하나 잔인한 자는 자기 육체를 괴롭게 하느니라.] (잠11:17).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좋은 것은 운동이든지, 음식이든지, 약이든지 무엇을 찾아서 열심히 챙기지만 정작 자신의 혼에게 좋은 것(선한 것)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라고 해서 책을 읽는 것이 혼을 살찌우는 것인 정도만 압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 혼에게 선을 행하는 것임을 알고 긍휼을 베푸십시오.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그는 몸에 좋은 것이 혼에 좋은 것이요, 소유가 많은 것이 혼에도 좋은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이 부자의 철학이나 가치관, 경제관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과 흡사합니다. [또 내 혼에게 말하기를, 혼아,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편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하리라, 하였느니라.](눅12:19).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혼과 소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유와 생명의 관계는 비례하지 않습니다. 긍휼과 생명은 비례합니다. [의와 긍휼을 따르는 자는 생명과 의와 명예를 얻느니라.](잠21:21).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고 싶다면 의이신 주님을 찾고,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의 은혜와 더불어 주의 긍휼을 필요로 합니다. 제게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란 기도는 주님 만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긍휼(矜恤)을 베푸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을 얻을 것임이요,] (마5:7).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산상수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평케 하는 자들 (0) | 2007.01.11 |
---|---|
마음이 순수한 자들 (0) | 2007.01.09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0) | 2007.01.04 |
[산상수훈_04] 온유한 자들 (0) | 2007.01.03 |
애통하는 자들 (0) | 2007.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