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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마음이 순수한 자들

마음이 순수한 자들(07)

말씀: 마5:8
요절: 마5:8

산상 수훈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8)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순수한 것들을 추구하고 사랑합니다. 순금, 순은 등 순도가 높을수록 가격이 비싸고 가치가 있습니다. 이는 마음도 마찬가지여서 순수한 동기, 순수한 사랑에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순수’란 말은 우리 마음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계명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1:5). 순수란 거짓과 악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순수한 양심을 지녀야 합니다. “순수한 양심 속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3:9). 불신자들은 모두 악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조폭들도 자기들끼리는 “저 친구, 정말 좋은 놈이야, 저 친구 정말 양심적이야”란 말을 씁니다. 선, 악, 순수...이와같은 개념은 모두 성경을 기준으로 정립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순수한 종교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지 않은 신앙심은(종교는) 이것이니 곧 고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약1:27).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크리스천들의 위선에 환멸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와 교인들이 자신들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과 친구가 되어 순수함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힘은 성도의 수나 돈이나 성도들 간에 있는 정겨운 교제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신앙의 순수함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순수한 지혜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화평하고 부드럽고 대하기 쉬우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과 위선이 없나니](약3:17). 세상 지혜, 마귀의 지혜를 순수한 지혜와 혼동하지 마십시오. 죄와 불의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음모와 술수와 거짓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지혜가 아닙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말씀과 기도대신 교회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지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순수한 mind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건전한 생각(sound mind)의 영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 후서 두 개의 서신을 통해 성도들에게 pure mind을 일깨우고자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두번째 서신을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서신으로 /너희의/ 기억을 되살려 너희의 순수한 마음을 일깨우고자 함은](벧후3:1). 성경을 쓴 목적이 성도들의 기억을 되살려 순수한 마음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혼이 깨어날 것입니다. 말씀의 빛이 임할 때 영적 각성이 일어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적 mind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마음; sound mind(spirit) 딤후1:7= pure mind = the mind of Christ(고전2:16). 그럼 순수한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동기와 목적이 자기(self)의 이익이나 자기와 연관이 있을 때 우리는 불순(不純)하다고 합니다. 반대로 동기와 목적이 자기와 상관이 없이 주님과 형제들을 위한 것일 때 순수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이 순수하다면 주님은 그 사람을 순수하게 대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수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합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시12:6), [주의 말씀은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그것을 사랑하나이다.](시119:140). 순수한 말씀이 우리의 영적 양식이 될 때 우리 영혼은 순수하게 됩니다. 불순물은 몸에 질병을 일으키듯이 부패한 성경은 영적 성장을 방해합니다. 순수한 말씀은 눈을 밝게 합니다.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시19:8). 하나님은 단일한 눈을 좋아하십니다. 비둘기처럼 단일한 눈,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눈을 좋아하십니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에게 임하는 복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순수한 말씀을 통해 눈이 밝아지면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순수한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행20:28)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담의 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는 전혀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순수한 피입니다.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9). 이 피를 통해 우리는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피는 양심을 정결케 하며,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순수한 기름이 있습니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등불에 쓰기 위해 올리브로 찧어 만든 순수한 기름을 네게 가져오게 하고 항상 등불이 타게 할지니라.](출27:20). 기름은 성령을 예표합니다. 성령은 비둘기처럼 순결합니다. 성령은 불처럼 모든 것을 태워 버립니다. 성령은 거룩합니다. 우리 마음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합니다.

순수한 향이 있습니다. [또 그가 약제사의 제조법대로 기름부음에 쓸 거룩한 기름을 만들고 또 향기로운 향료로 순수한 향을 만들었더라.](출37:29). 향은 기도를 예표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향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란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누구든지 냄새를 맡으려고 그와 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리라.](출30:38).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필요를 주로 구하다가 보면 기도가 자신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잊어버립니다. 기도는 주님께 드리는 희생물이요, 향임을 기억하고 순수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위의 네 가지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순수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수한 자들을 복주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순수한 자입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그런즉 사람이 하나님과 견주어 의롭다 할 수 있겠느냐? 또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어찌 깨끗할 수 있겠느냐? 심지어 달을 바라보아도 그것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참으로 별들도 그분의 눈앞에서는 순수하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벌레인 사람이야 어떠하겠느냐? 벌레인 사람의 아들이야 어떠하겠느냐?](욥25:4-6)고 합니다. 의인이 단 한 사람도 없듯이 순수한 자 역시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와 허물이 없는 그런 순수한 사람, 깨끗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어찌 깨끗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아담의 후손은 죄를 안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더럽습니다. 부정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소위 말하는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순수하고 의로웠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동일한 사람이요, 죄인이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사람이란 말을 들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술에 취해 곯아 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차례나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욥은 그의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두려워 도망을 쳤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가 성도가 된 후에 자신 안에 죄가 함께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였나니 곧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1). 우리 속에 거하는 악은 완전히 멸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활동력이 없는 무기력한 상태도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가 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늘 일상에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려는 거룩한 소원과 의지가 있지만 동시에 나를 이끄는 강력한 또 다른 힘이 있는데 그것을 일컬어 ‘죄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내 지체 안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 (롬7:23). 성도들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실제 삶은 ‘갈등 충만’한 삶인 경우가 허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지만 육신대로, 세상대로 사는 것은 나를 사로잡는 죄의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고 탄식했습니다. 이는 주님을 만난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눅5:8). *sinful. 주님의 영광을 본 이사야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때에 내가 이르기를, 화로다, 나여! 이는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므로 망하게 되었음이니 곧 내가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면서 내 눈으로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음이라, 하였더라.](사6:5). 욥은 영광의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욥42:6). 다윗은 이르기를, [그러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오니 사람들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멸시거리이니이다.](시22:6)라고 했습니다. 아삽은 이르기를, [내가 이같이 어리석고 무지하므로 주 앞에 짐승 같사오나](시73:22)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것은 누구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온유한 자, 긍휼이 있는 자와 마찬 가지로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란 본래부터 마음이 순수한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격 수련, 종교적 수행이나 예절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인격이 완성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수한 사람이란 주님께서 순수하게 만들어 주신 사람들입니다. 죄와 불법과 더러움이 가득한 우리들 안에 순수한 마음을 창조해 주심으로 순수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영이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 (엡4:23~24).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이 바로 순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순수하게 만드시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 되는 방법을 찾아 보겠습니다.

첫째, 다시 태어남의 씻음으로 마음이 순수해집니다. 마음이 순수해 지는 것은 개혁이나 개선이 아니라 중생입니다. 다시 태어남으로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딛3:5). 사람이 거듭나는 순간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이는 점진적인 과정이나 변화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사건이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아무리 오랫동안 철저하게 율법대로 가르침을 받아 행해도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종교로는 불가능합니다. 철학과 교육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거듭남으로만 가능합니다. 주님은 율법을 맡은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내가 정결한 물을 너희 위에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되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모든 우상으로부터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육신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같이 /연한/ 마음을 줄 것이며] (겔36:25~26).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믿고 새 마음과 새 영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거부한 채 스스로 의롭게 되려거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는 자들은 실패를 거듭할 뿐입니다.

주님을 믿고 영접하는 순간 영은 거듭나고 마음은 눈같이 희어지고, 양털같이 깨끗해집니다. 누구나 자신이 거듭난 순간을 기억한다면 이 시간 새롭게 그 순간을 되돌아보십시오.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했을 때 어떤 더럽고 사악한 죄인이었을지라도 예외 없이 그 순간 자신이 깨끗해지는 그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다시 태어남의 씻음’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순수한 자가 복된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순수함을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자에게는 주의 순수하심을 보이시고 거역하는 자에게는 주의 적대(敵對)하심을 보이시리니](시18:26).

둘째, 말씀의 물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물이 사람의 몸을 씻기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씻깁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제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요15:3)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특별한 어떤 일을 해서 깨끗하게 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은 마음을 씻기는 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엡5:26). 교회 건물을 단장하고 장식을 해서 깨끗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페인트칠을 하고, 담장을 보수하고, 헌 것은 새 것으로 갈고, 청소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를 구성하는 살아 있는 돌들, 즉 성도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 선포와 성경 공부를 통해서 늘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씻음 받는 그런 시간이 있어야만 합니다. 유기체로서의 몸된 교회는 말씀을 통해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한 것은 말씀의 물로 씻음 받은 자들의 복입니다. 날마다 말씀의 물로 더럽혀진 마음을 씻을 때 순수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잠겼다가 나왔을 때 문둥병이 사라지고 새살이 돋았듯이 여러분이 말씀의 물에 늘 잠긴다면 여러분의 마음에는 깨끗한 새살이 돋아 날 것입니다. 마음이 순순한 자가 얻는 복이 무엇입니까?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자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순수하며 헛된 것을 향하여 자기 혼(魂)을 들지 아니하고 속임수로 맹세하지 아니한 자로다. 그가 [주]께 복을 받고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받으리니](시24:3~5).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순수한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구약에서부터 줄기차게 선포해 온 진리입니다.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赦免)이 없느니라.](히9:22).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기 때문이니라.](레17:11). 피는 육체의 생명인 동시에 혼을 속죄합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로 더럽혀진 양심과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양심은 마음의 일부이며, 작용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4).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고, 양심을 깨끗하게 합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흐른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마음속에 흐르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예수님의 피는 우리 마음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모든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계1:5). *계7:14 참조. 내 안에 흐르는 아담의 피로는 마음이 순수해 질 수 없습니다. 이는 생물학적인 문제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이는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점없고 흠없는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 마음을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란 어린 양의 피를 마음에 믿은 자들을 말합니다. 마음이 순수할 때 얻는 복은 왕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순수함을 사랑하는 자는 그 입술의 은혜로 인하여 왕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22:11).

넷째,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마음은 순수하게 됩니다.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 순종은 믿음과 동의어입니다. 때로 “믿음은 마음의 문제이고, 순종은 행함의 문제이다”라고 하지만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진리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통해 입증됩니다.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혼은 깨끗하게 되며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순종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순종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무엇이 되는지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분께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로우시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거부한 그 돌이 되셨느니라.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걸림돌과 실족하게 하는 바위가 되었나니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여 말씀에 걸려 넘어지고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하여졌느니라.](벧전2:7-8). 믿는 너희...불순종하는 자들. 댓구의 관계를 살펴보라. 주님은 불신을 불순종으로 보시고 계심에 주목하십시오. 믿음과 순종은 동의어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란 주님에게 순종하는 자입니다. 주의 말씀을 믿는 자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께서 아들이실지라도 고난받으신 일들로 말미암아 순종하기를 배우사 완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고](히5:8-9).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불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사무엘은 말하기를,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라고 합니다.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하는 자들을 주님은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하는 자들’이란 말씀입니다. 진리에 순종할 때 주님의 그의 벗이 되어 주십니다. 이것이 순수한 자들이 누리를 복입니다.

다섯째, 빛 가운데 걸을 때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 됩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어떤 일보다 중요합니다. 빛 가운데 걸으면 주님과의 사귐이 있습니다. 빛 가운데 걸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 빛 가운데 걷는다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 전혀 없으나](요일2:9-10).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이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의입니다. 사람들의 견해나 주석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바 빛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오 야곱의 집이여,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걷자.](사2:5). 주의 빛 안에서 걷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걸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없다면 내겐 빛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알지만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그 역시 그 안에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까닭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 (사8:20).

여섯째, 자백하고 회개할 때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 됩니다. 다윗은 죄를 범한 후에 그것을 숨긴 채 살았습니다. 후에 대언자 나단을 통해 죄를 지적받았을 때 그는 변명하는 대신 회개했습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들에서 가리시고 내 모든 불법을 지워 주소서.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51:9~10).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써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깨끗하게 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 (시51:7). 우슬초가 무엇입니까? 최초의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를 때 사용된 것입니다. 율법의 제단에 피를 뿌릴 때도 역시 우슬초가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이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은 어린 양의 피를 자신 위에 뿌려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장차 다가올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번제 헌물이나 속죄제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속죄의 피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믿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회개를 통한 주의 긍휼과 용서를 확신했습니다. 요한은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합니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역사상 하나님의 얼굴을 그대로 본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의 천사를 보거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이 전부입니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이는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기 때문이니라.] (고후4:6). 주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고후3:18). 주의 얼굴을 보는 것은 하늘에 들림을 받은 후입니다. 장차 우리는 주님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볼 것이요,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나도 알게 될 것임이라.] (고전13:12). 부활한 몸을 입고, 영광스럽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육신의 눈으로 주님을 보게 되면 그는 죽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순수하지 않으면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다 같이 본문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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