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온유한 자들(04)

말씀: 마5:5
요절: 마5:5

산상 수훈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해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듣고 있습니다. 주님이 “복되도다” 선포하신 첫 번째는 영이 가난한 자들이요, 두 번째는 애통하는 자들이요, 세 번째는 온유한 자들입니다. 영이 가난한 것이나 애통하는 것과는 달리 ‘온유’는 성령의 열매로 우리 안에 맺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우리가 충만케 되지 않고는 결코 온유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온유한 자란 성격이 유약하고 언제나 남들에게 양보하고 지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주님의 성품이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9).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온유하사 나귀 위에 앉으시나니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 하라, 하였느니라.](마21:5).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영접할 때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온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는 첫 사람 아담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천성으로 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천성이 온유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후천적으로 수양이나 종교 훈련을 통해서 형성되는 기질도 아닙니다. 온유함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에게만 해당 사항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란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가 날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울 때 드러나는 성품이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점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때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라 가정교육이나 학교 교육이나 예절 교육 등을 통해 나름대로 대인 관계의 기술을 익힘으로 겸손과 온유함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겠지만 그런 바리새적인 위선은 금방 드러나고 맙니다. 오랫동안 남모르게 사람들 앞에서 행세를 해도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고 그 위선을 밝히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자신을 속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온유함이 무엇이고 온유한 자에게 임하는 영적인 복들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영적 어휘들을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기준에 맞추어 규명해서는 안 됩니다. 온유란 무엇인가? 어떤 것을 온유라고 하는가? 이런 것은 철저히 성경을 근거로 정확한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온유란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를 잘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씨앗이 마음 밭에 떨어졌을 때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고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성품입니다. 딱딱하고 굳은 마음에는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도 자랄 수 없습니다. 온유란 물과 같고 바람과 같습니다. 물과 바람은 어떤 형태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전혀 잃지 않고도 그 틀에 정확하게 맞춥니다. 아무리 단단한 쇠라도 녹여 놓으면 어떤 틀이나 형을 만들기가 쉽습니다. 온유함이란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온유한 자들은 진리의 틀, 교리의 틀 속에 정확하게 들어가 맞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지식과 진리의 틀’(롬2:20)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란 주님이 주신 틀로 자신의 가치관을 맞추는 성품입니다. 마음이 온유하지 않으면 때리고, 부수고, 깨고, 깎아서 힘들게 틀에 맞출 수 있을 뿐입니다. 온유한 자들이 복된 것은 진리의 틀에 정확히 자신을 맞추고 그렇게 성품이 형성되고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들은 교리의 틀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하여 준 교리의 틀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고 의의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내게 들은 그 건전한 말씀들의 틀을 굳게 붙들고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네게 맡긴 그 선한 것을 지키라.](딤후1:13-14).

온유란 진리의 말씀으로 쉽게 바로 잡을 수 있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온유는 진리에 뜨겁게 반응하지만 불의와 불법에는 차갑게 굳어 버리는 성품입니다. 우리는 굽은 것을 펴거나 고칠 때 먼저 딱딱한 것을 부드럽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본래 부드러운 것들은 고치기가 매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 말씀을 보내시는데 온유한 자들은 쉽게 바로 잡힙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쉽게 굳어 버리는지 누가 말하기를 태어나서 3살이 되기 전에 바로 잡지 않으면 평생 동안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좀처럼 바로 잡히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을 지적하는 속담입니다. 목이 곧고 완악한 백성들은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경험해도 바로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주의 징계가 임하거나 말씀이 임할 때 쉽게 바로 잡힙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온유함은 영이 뜨거운 마음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차가움, 냉랭함이 아니라 뜨거워진 마음입니다. 이는 친절, 겸손, 부드러움을 다 포함하는 그런 말입니다. 말씀으로 뜨거워진 마음이 온유함입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온유한 자들은 ‘영이 뜨겁고’(행18:25), 기도로 뜨겁게 수고하고(골4:12, 약5:16),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하며(벧전1:22, 벧전4:8) 말씀이 마음 속에서 불 타오르는 사람입니다(렘20:9). 인간적인 열정과 온유함은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혈기로 타오르는 열정은 육신의 행위요,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지만 성령의 열매로서 맺어진 온유함은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임이요,] (마5:5)라고 하십니다. 구약 성도들은 “온유한 자”란 말을 들을 때면 누구나 금방 모세를 떠 올리게 됩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 준 모범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성경에서 처음으로 ‘온유하여’란 말을 들은 사람입니다. [(이때에 이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민12:3). 모세는 자신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을 온유함으로 대했습니다. 모세는 이들을 저주하거나 맞대어 욕하거나 징계하는 대신에 주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온유란 자아가 상하는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온유란 자아가 당하는 수치와 멸시와 천대를 잠잠히 견디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아가 조금이라도 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행여나 설교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들릴 때면 개처럼, 이리처럼 이를 드러내 놓고 으르렁거리거나 뒤에서 수군덕거리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상하는 것, 자신이 모독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했고,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했지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길 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율법의 돌 판을 땅에 던져 깨뜨리며 그들을 엄히 징계했습니다. 온유함이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이 당하는 모독이나 수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지만 주의 이름이 당하는 모독은 참지 못합니다. 이는 종교적 위선자들과는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종교적 위선자들은 정 반대로 행동합니다. 주님이 모독당하고 성경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면서 영화나 연극에서 나오는 내용을 문제 삼으며 기독교를 모독한다고 상영 금지하라고 시위하고 데모를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블레셋의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과 군대를 모독했을 때 자신의 생명을 전혀 돌보지 않고 일어섰습니다. 사울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모든 장병들이 꼼짝을 못한 채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 내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삼상17). 온유함은 약함이 아닙니다. 온유함은 주님이 주신 담대함입니다. 온유함은 겁쟁이나 나약한 자가 아니라 믿는 사람을 남자답고 강하게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이런 용기와 담대함이 육신에서 혈기나 만용이 아니라 주님의 온유함*부드러움)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부드러움)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삼하22:36),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시18:35). 주의 부드러움이 사람을 강하고 크게 만들어 주며 진정한 용사로 빚습니다.

온유한 자들이 복된 것은 먹고 만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먹고 만족할 것이며 [주]를 찾는 자들은 그분을 찬양할 것이요,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리로다.](시22:26). 주님은 온유한 자를 먹이십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먹고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듣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성경 공부를 해도 전혀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교회에서 영적 양식을 얻지 못한 채 사람들과의 만남이 전부라면 이곳은 휴게소이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왜 영적 양식을 먹지 못하는가?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거만하거나 너무 높기 때문에 영적 양식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온유한 자는 주린 배를 채우듯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며, 갈한 목을 축이듯이 말씀을 마십니다. 온유한 자들에게 성경은 읽는 책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양식입니다. 주님은 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으시며 잔이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도가 되었지만 이런 풍성한 식탁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한 분들이라면 주님께 구하십시오.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십니다. 주님은 생명의 빵, 생명의 음료, 풍성한 버터와 꿀, 젖과 고기를 준비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값없이 와서 먹고 마시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께 나아가 양식을 풍성히 얻고 먹기 바랍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들은 먹고 만족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양식은 온유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온유한 자들이 복된 것은 주님의 지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리니 온유한 자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시리로다.](시25:9). 주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무너뜨리시지만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십니다. 온유한 자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주의 제자들은 모태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께 한 가지씩 진리를 배운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고 영적 출생을 했다고 해서 저절로 주의 종이 되고, 주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거듭남이 없이는 아무도 주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은 확실하지만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배우지 않고서는 누구라 할지라도 결코 주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온유하면 배움의 속도가 빠르고, 많은 것을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배우는 마음입니다. 배움을 얻기를 갈망하며, “나를 가르치소서”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를 지도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세상의 기술이나 종교와 철학은 마음보다는 머리가 중요하고, 노력과 열정만 있으면 충분히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노장 사상이나 유학이나 불교 철학을 배우는데 노자나 공자나 석가를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학문을 배우는데 온유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적 진리는 그 어느 한 가지도 머리보다는 마음이 우선이요, 믿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겸손하지 않으면 결코 배울 수가 없고, 온유함이 없이는 익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랑하는 자들의 지혜를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시고, 강한 것들을 무너뜨리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 지혜를 헛것으로 아십니다. 반면 겸손하고 온유한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데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배움의 핵심입니다. [그 시각에 예수님께서 영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여, 이것들을 지혜롭고 분별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기들에게는 드러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과연 그러하옵나이다. 아버지여, 그리하심이 아버지 보시기에 좋았나이다.](눅10:21).

온유한 자들이 복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들어 올리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온유한 자들은 들어올리시며 사악한 자들은 땅에 던지시는도다.](시147:6). 주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사악한 자를 땅에 던지시지만 온유한 자들은 들어 올리십니다. “들어 올린다”는 것은 명예나 지위나 권세가 커진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일차적으로 휴거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들을 에녹이나 엘리야를 하늘로 들어 올리시듯이 들어 올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온유한 성도들이 무시를 받을 수 있고 더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 현 세상에서 온유한 자들을 높여 주시거나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그 날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이리로 올라 오라”는 음성이 들리는 순간 모두 저 하늘로 들림을 받을 것입니다. 비록 죽어서 땅에 묻혔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모두 ‘들어 올리’십니다. 온유란 말이나 몸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속 사람의 영적 상태입니다. 온유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지위입니다.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온유하신 주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고 계시면 그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하신 주님, 온유의 영을 말로 행위로 드러내는 것은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육신으로 성령을 억누르고(소멸하고) 주님이 아니라 자신의 육신적 성품만을 드러내며 사는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보실 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사실이듯이 온유한 자인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겉모습, 드러나는 행위만을 보고 판단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영적 상태, 속사람을 보십니다. 진정으로 온유한 자인가 아닌가는 그가 온유하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가? 온유의 영을 지니고 있는가? 에 따른 것이지 말의 부드러움, 표정의 부드러움, 매너와 예절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나의 온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유함,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나에게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 비천(卑賤)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해 담대하지만](고후10:1). *그리스도의 온유함, 그리스도의 부드러움.

온유한 자들이 복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일어나셨도다. 셀라.](시76:9), [이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온유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시리로다.](시149:4). 여기서 온유한 자란 모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 이미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받은 자들을 이 땅의 대 환란이란 심판, 재앙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는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없었던 큰 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때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님께서 모두 공중으로 들어 올리심으로써 구원하십니다. *구원의 의미. 우리 몸은 구속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런 몸으로 홀연히 다 변화 받을 것입니다.

대 환란 때 주님을 믿는 환란 성도들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주의 공의를 행한 땅의 모든 온유한 자들아, 너희는 [주]를 찾으며 의를 구하고 온유를 구하라. 너희가 혹시 [주]의 분노의 날에 숨겨지리라.](습2:3). 온유한 자들은 대 환란의 재앙에서 기적적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온유한 자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해하려는 자들을 향해 꾸짖으시고 치십니다. [오직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의롭게 재판하고 땅의 온유한 자를 위하여 공평하게 꾸짖으며 자기 입의 막대기로 땅을 치고 자기 입술의 호흡으로 사악한 자를 죽일 것이며](사11:4). 누가 보아도 이 구절은 적그리스도를 향해 하시는 말씀이요, 대환란의 문맥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환란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온유한 자들은 어느 세대에나 복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들이 얻게 될 최대의 복은 “땅을 상속받는다”는 것입니다(마5:5).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을 동안에 성취될 약속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온유하다고 해서 부동산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상징이나 비유로 하신 말씀인가? 아닙니다. 이 약속은 천년 왕국에서 우리가 받게 될 문자 그대로의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는 것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롬8:17). *if it be so(KJV). 조건문이다. 또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갈3:29)고 말씀합니다. 종은 상속자가 아니지만 자녀라면 공동 상속자입니다.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릴 것이고, 자신이 주를 위해 고난을 받고 수고한 대로 도시들을 다스릴 권세를 얻게 될 것입니다(계1:5, 5:10). 땅을 다스리는 권세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수고한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너희가 상속의 보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이는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기(SERVE) 때문이니라.](골3:24). *믿기 때문이 아니라 섬기기 때문에 받는다. 상속의 보상은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이 주님을 섬길 때 주어지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결정 날 것들입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상속은 보상이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이 둘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자들에게 약속하신 상속의 땅”(마5:5)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도들이 모두 온유하신 주님을 통해 온유함으로 행한다면 그는 분명히 땅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온유함으로 행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온유함으로 잘못에 빠진 형제들을 회복시키라.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도 살펴보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갈6:1). 잘못에 빠진 형제들을 정죄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에 빠질 수 있고, 마귀의 올무에 걸릴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온유의 영으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저는 이 점에서 반복적인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책망하고 꾸짖을 줄만 알았지 온유의 영으로 회복시키는 법을 몰랐습니다. 몇 안되는 성도들은 하나 둘씩 다 떠나 버리고 좁은 교회도 넓게 보이게 시작할 때 쯤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책망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온유의 영으로 회복하는데는 인내와 오래 참음, 겸손과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일에는 주님의 보상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중에 진리를 떠나 잘못하는 자가 있는데 누가 그를 돌아서게 하면 그 죄인을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한 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인즉 그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할지니라.] (약5:19~20).

둘째, 온유함으로 행하라.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엡4:2). 무슨 일을 행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믿음에서 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롬14:23).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2)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한 가지는 겸손과 온유함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으로 행할 때 주님은 땅을 상속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온유함으로 옷 입으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골3:12). 온유함으로 옷을 입는 방법은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편리하고 예쁜 옷이라도 사람의 겉모습을 가려주고 보여줄 뿐입니다. 몸의 옷은 몸을 가리고 보호해 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 우리의 속을 보호해 주고 나타내 줍니다. 온유함으로 옷 입으면 당연히 온유함이 드러나 보이게 됩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옷을 입었는가? 살펴보십시오.

넷째, 온유를 추구하라. [그러나, 오 하나님의 사람아, 너는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딤전6:11). 하나님의 사람들이 피할 것이 있고, 추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와 더불어 ‘온유’입니다.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다섯째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라. [자기 자신을 대적하여 행동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그리하면/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딤후2:25). 성도들이 대적해야할 대상은 원수 마귀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약4:7, 벧전5:9). 그러나 놀랍게도 대적해야 할 마귀는 신경도 쓰지 않고 형제가 형제들을 대적하는 일이 교회 내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자녀들을 키워 본 분이라면 어릴 때 형제들은 싸우면서 크는 것을 볼 것입니다. 남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형제 간에 싸웁니다. 어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형제들은 마귀와 싸울 줄 모릅니다. 대신 형제들 간에 싸우고, 물어 뜯고, 험담하고, 비방합니다. 그런 때에 같이 싸우는 것은 같은 수준이란 뜻입니다. 좀 성숙한 형제라면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에게 분을 품거나 언제 한번 손 봐줘야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합니다.

여섯째, 온유함을 보이라.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딛3:2). [너희 중에 지혜와 지식을 갖춘 자가 누구냐? 그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행위들을 보일지니라.](약3:13). 성도들은 온유함을 속에 묻어둘 것이 아니라 언행으로, 삶으로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믿음 역시 행위로 보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보이지 않으면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면 빛이 아닙니다.

일곱째,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으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 말씀을 들을 때 온유함으로 받으십니다.

여덟째, 온유의 영으로 장식하라. [오직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으로 하되 썩지 아니하는 것 곧 온유하고 조용한 영(靈)의 장식으로 할지니 이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니라.](벧전3:4). 금은보화는 겉 사람을 장식하는 보석이지만 온유는 영을 장식하는 보석입니다.

아홉째, 온유함으로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벧전3:15).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유함으로 행할 때 주님은 복된 자라고 말씀하시며,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저 하늘에서만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천년 동안 이 땅에서도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영광스럽게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현 세상이 아니라 장차 앞으로 올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오심으로 성취될 하늘의 왕국에서 우리는 약속으로 주어진 모든 말씀이 현실이 되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는 대신 자기 배를 섬기는 성도들은 주님이 주신 영광스런 약속들을 모두 거부한 어리석은 자들로 판명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는 믿었지만 하늘에 보화를 쌓아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재의 안위와 복락만을 추구하는 그런 신앙 생활로 일관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좀 더 주님을 위해 일하지 못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온유하신 주님 안에 뿌리 내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걸으시도록 주인됨을 인정할 때 온유한 자들로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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