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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산상수훈 서론

산상수훈 서론(01)

말씀: 마5:1-2
요절: 마5:1-2

오늘부터 여러분과 제가 함께 성경을 탐구하고 은혜를 받고자 시작하는 공부는 흔히 [산상 수훈, 산상 보훈]이라 불리는 마태복음 5:1-7:29까지의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오르셔서 말씀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오매 그분께서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쳐 이르시되,] (마5:1~2). 산상 수훈은 구약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해석되고, 완전해지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던 주님께서(as Lawgiver) 친히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as Law Fulfiller) 자신이 제정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성취”란 말이 18회나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구약의 율법만 읽고 공부한다면 그는 율법의 일부분 밖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사역을 통해서 구약을 볼 때 바른 해석, 바른 이해, 바른 믿음이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때까지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주님 오실 때까지 사람들을 인도하고 훈육하는 선생이었습니다(갈3:25). 산상 수훈에서 주님은 몇 가지 예를 통해 구약의 율법이 어떻게 완성되고,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포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오매 그분께서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쳐 이르시되,] (마5:1~2). 이 부분과 내용이 매우 유사한 가르침이 있는데 누가복음 6:20부터 시작되는 가르침입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말씀이 같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산 위가 아니라 평야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눅6: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야에 서시매 그분의 제자들이 무리를 이루고 또 그분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나온 백성도 큰 무리를 이루었더라.] (눅6:17). 성경의 모순을 논하려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을 부주의하게 읽고 틀린 점이나 차이점을 찾아내어 모순이다, 오류다 등을 논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가르침은 전혀 모순이나 오류가 아닙니다. 마태는 주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무리들을 가르치신 것을 기록한 반면 누가는 주님께서 평야(plain)에 서서 백성들을 가르친 것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입니다. 당대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백성들을 가르친 반면(마23:2) 주님은 산에 앉으시거나 평지에 서서 가르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주님이 올라가 앉으신 산은 시내 산이나 그림심산이나 예루살렘 성전 맞은편에 있는 ‘올리브 산’이 아니고 주위에 있는 평범한 산이었습니다. 주님은 설교하기 위해서 따로 치장을 하고 음향 시설을 갖춘 성가대와 멋진 건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길거리, 산, 바다, 회당, 성전 입구, 광야 등 어디서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마을마다 돌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다음 마을들로 들어가자. 내가 거기서도 선포하리니 이는 내가 이것을 위하여 왔음이라, 하시고](막1:38). 주님의 사역지는 어떤 지역에 건물을 지어 놓고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친히 몸소 마을마다 돌아 다니시는 것이었습니다.

마태가 산에서 말씀을 선포하신 주님을 기록한 것은 몇 가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산에서 올라 앉으신 채 구약의 율법을 바르게 해석해 주시고, 성취하러 오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모세는 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구약 성도에게 준 율법 위에 자신의 몸으로 성취한 완성된 율법을 신약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구약의 율법처럼 돌 판에 기록해서 주시지 않고 말씀 선포를 통해 들려 주셨습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주님은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 오셨고, 모세를 산으로 올라오도록 부르셨습니다. 반면 신약 성경에 기록된 산상 수훈은 주님께서 산으로 오르셨고, 백성들의 대표자가 아니라 누구든지 따르는 자 모두가 와서 들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주님은 천둥과 번개 속에서 말씀하셨고 백성들을 멀리 떨어져 있게 하셨지만 신약에서는 백성들을 가까이 오게 하시고 그들 앞에서 매우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이 하나에서만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성경을 읽는 자들은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진리들일지라도 우리는 매우 주의 깊게 성경을 보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주님이 어디서 설교하셨는가? 란 장소의 문제는 겉 눈질로 넘어가 버릴 수도 있지만 주의해서 볼 때 영적 보화가 숨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3:36절에서 주님은 백성들을 내 보내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무리를 멀리 보내고 집으로 들어가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밭의 가라지 비유를 밝히 말씀해 주옵소서, 하매] (마13:36). 집으로 들어가심으로써 제자들과 더 깊은 친교를 나누시고, 비유의 의미를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평지에 서서 말씀을 전하셨는데(눅6:17), 이는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시고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하게 맞추신 모습을 드러냅니다.마태는 주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산에 오르셔서 변화되셨고(마17),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에게 세상 끝에 있을 일들을 말씀해 주셨던 것을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은밀히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겠사오며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하니] (마24:3). 주님은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산에 오르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기도를 하셨고, 산에서 들림을 받아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다시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오매] (마5:1). 이 무리들은 어떤 무리들입니까? 주님께서 침례인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하고 사탄의 시험을 승리하신 후에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시고,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의 명성이 온 사방에 널리 퍼졌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들에서 가르치시며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온갖 질환과 온갖 질병을 고치시니 그분의 명성이 온 시리아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사람들이 모든 병든 사람 곧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자, 마귀 들린 자, 미친 증세가 있는 자, 마비환자들을 그분께 데려오니 그분께서 그들을 고치시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온 사람들의 큰 무리가 그분을 따르니라.] (마4:23~25). 말라기 대언자 이후로 이스라엘에는 400년 동안 하나님의 대언자나 말씀이 없었습니다. 잠언에 [환상이 없는 곳에서는 백성이 망하려니와](잠29:18a)란 말씀대로 이들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되었고, 율법의 정신과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방황하였고, 황폐했습니다. 침례인 요한이 하나님의 대언자로 등장하고 물로 침례를 주며,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는 메시야의 표적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을 수 없는 이들은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따르고 나왔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 산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사역은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쳐 주시니라.” 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들에서 가르치시고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환과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니라.](마9:35).

산상 수훈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구약 아래 있던 유대인들을 상대로 전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요한의 물 침례를 받은 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 거듭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신약 교회도 없습니다. 신약 성경이 쓰이지도 않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이도 없습니다. 제자들이 나왔지만 아직 12 사도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마10:1-4).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산상 수훈의 가르침을 ‘신약 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자 그대로 교리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산상수훈은 “하늘의 왕국”을 다루지 “하나님의 왕국”을 다루지 않습니다. 산상 수훈은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면 이 시대의 어떤 사람들도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뺄 수도 없고, 손이나 발을 자를 수도 없습니다. *마5:29-30. 만약 교리대로 실천하겠다고 해서 오른 쪽 눈을 빼고 오른 손을 자른다면 교회는 모두 불구자들만 앉아 있을 것입니다. 손을 자른다고 해서 마음속에 있는 죄가 없어지거나 깨끗해지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저는 거듭난 후에도 성경을 여기 저기 아무 곳을 펴서 조금씩 읽었을 뿐 통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 어느 부분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후에 선교회에 가입해서 본격적으로 성경 공부를 하면서 저는 먼저 신약을 일독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 산상수훈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도무지 지킬 수도, 행할 수도 없는 말씀들이 거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은 행위 율법인 구약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마음의 상태,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까지 모두 죄로 다루고 있습니다. 몸으로 행한 행위가 없더라도 마음속에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입니다(마5:28-29). 형제를 향해 까닭 없이 화를 내고 욕을 할 때는 이미 심판의 위험에 놓입니다(마5:21).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결국은 마음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실행 불가능한 명령들이요 가르침이라고 제쳐 두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몇몇 세대주의자들은 이 부분을 천년 왕국의 헌법이요, 왕국 백성들을 위한 것이므로 교회 성도들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간주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내가 비록 그리스도인이긴 하지만 누가 나의 오른 뺨을 때릴 때 다른 뺨을 돌려 대고 싶지 않고, 덧옷을 빼앗으려 할 때 겉옷까지 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빼앗으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십 리를 가며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마5:39~42).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접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실로 거듭난 성도들이라면 산상 수훈의 가르침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 가운데 “예수님 한 분 외에 누가 이 가르침대로 살 수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런 삶을 사셨고, 예수님께서만 이런 삶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죄와 저주와 심판을 당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대신해서 살아 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능히 산상 수훈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핵심은 순종과 헌신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대로 믿고 실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기 위해서 배우는 성경 공부가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먼저 우리는 산상 수훈을 통해 주님이 제시한 천국 백성들의 삶의 표준을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참된 성도의 삶이란 기준을 분명하게 마음 속에 세워 두어야 합니다. 선명한 기준과 도달해야 할 높은 목표가 없다면 그의 삶은 필연적으로 방황과 혼란에 쌓이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산상 수훈을 통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이런 삶을 살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타락한 성품으로는 주님이 말씀하신 거룩한 삶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는 부단한 노력이나 훈련이나 교육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인간 본질의 문제요, 내면의 문제요, 존재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해결책이신 주님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거듭남이 없이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십자가에 나의 옛 사람이 못 박히지 않는 이상 결코 이런 삶을 살 수 없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거하시고, 살아 주시고, 행해 주실 때만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십시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이 삶을 살 수 있습니다(갈2:20).

영적인 삶의 능력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 자신의 힘과 지혜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이루십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 말씀도 아닙니다. 하늘의 왕국에 살게 될 사람들의 삶의 기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산상 수훈을 일컬어 ‘천년 왕국 헌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실 그 왕국의 시민법이란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장차 하늘의 왕국에서 왕과 제사장으로서(계1:5, 5:10) 지위를 갖고 있지만 현재 육신을 입고 사는 이 땅은 악한 현 세상입니다. 우리는 현재 아무도 하늘의 왕국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갔습니다(요3:5,8).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또 사람들이 이르기를, 보라, 여기 있다! 혹은, 보라 저기 있다! 하지도 못하리니 이는, 보라,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니라, 하시고](눅17:21).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이 왕국은 물질적인 왕국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왕국도 아닙니다.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이 아닙니다. 물론 이 왕국이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천년 왕국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왕국은 ‘영적인 왕국, 내적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喜樂)이기 때문이라.](롬14:17).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기 때문이라.](고전4:20). *때로 이 두 왕국을 같은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이들은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못한 결과이며, 진리를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왕국을 주십니다.

산상 수훈은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는 달리 성도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 이교도들에게도 매우 친숙하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일반 종교나 철학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 진리를 많이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 통합론자들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나 불교나 유교의 근본 진리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일컬어 사랑의 종교라고 말할 때 사람들이 아는 한 구절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말씀입니다(마5:44). 이 말씀은 산상 수훈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도 산상 수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마6:3). 그리고 황금률이라고 하며 외치는 구절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니라.](마7:12)란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은 누구든지 환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윤리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피의 속죄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습니다. 죄의 회개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을 통한 구원이란 가르침이 없습니다. 영적 거듭남에 대한 진리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신약 교회의 핵심적 진리들과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불신자들이나 이교도들까지도 산상수훈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산상 수훈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대신 자신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나 가르침과 약간 유사한 점이 있다는 점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나아오매 그분께서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쳐 이르시되,] (마5:1~2).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신 이는 천사들이나 대언자나 제자들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30년 동안 입을 다물고 계셨다가 30세에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어떤 가르침이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주님의 가르침은 놀라운 가르침이었습니다. 당대의 율법 교육을 담당하던 서기관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니 이는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음이더라.](마7:28~29). 주님의 가르침에는 오늘날 신학교나 강단에서 흔히 튀어 나오는 어휘들인 “아마도, 일지 모릅니다, 제 생각에는...학자들은 말하기를, 추측컨대, 고대 사본에는, ..에 따르면...” 등등의 말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나 무리들은 예외 없이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듣는 이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영적 각성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모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미 12세 때 성전에서 박사들과 문답을 통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으셨습니다. [사흘 뒤에 그분을 /성/전에서 발견한즉 그분께서 박사들 한가운데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분께서 깨닫고 답변하시는 것들로 인하여 깜짝 놀라더라.](눅2:46-47). 여러분은 주님으로 인해 깜짝 놀라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설교를 듣고 깜짝 놀랐다든지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없습니까? 만약 그런 적이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말 놀랄 일입니다. 성경을 접할 때 그 말씀 한 절 한 절에 경이로움이 없고, 놀람이 없었다면 말씀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말씀이 마음에 전해 주는 믿음이 없거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란 것은 제대로 들었음을 뜻합니다. 올바른 반응입니다.

물론 주님으로 인해 깜짝 놀랐다고 해서 모두 바른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주님으로 인해 깜짝 놀라긴 했지만 믿지는 않았습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 있는 일들이 어디에서 났느냐?](마13:54). 그들은 회당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으로 인해 실족해 버렸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실족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대언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거기서 능력 있는 일들을 많이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마13:57~58).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무리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더라.](마22:23). 제자들은 부자가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자가 심히 적고 재물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할 때 깜짝 놀랐습니다(막10:24). 이런 말씀들은 그들의 상식이나 지식, 신앙관을 정면으로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놀라기 시작하면 그는 주님을 두려워합니다. [서기관들과 수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그분을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 그분을 두려워하였음이더라.](막11:18).

왜 놀랐습니까? 주님의 가르침에 놀랄만한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운 성경 해석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이나 관습에 따른 가르침이 아니라 율법을 제정해 주신 분의 살아있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부터 시작된 복에 대한 개념부터가 유대인들에게는 혁명적이고 놀랍기만 했습니다. 관습과 전통으로 형성되어온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 넘는 가르침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저주’라고 생각할만한 것들을 주님은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먼저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형제와의 화해가 우선이라고 하셨습니다(마5:23-24). 이것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정 반대였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출21:24, 레24:20, 신19:20)라는 “동일 등가 보복의 법칙” 대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말한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마5:38~39). 아무리 성경을 몰라도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상식처럼 알고 있는 말씀들이 일거에 바뀌어 버렸습니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가르침이 일반적인 구약 성경 해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에 걸쳐 “옛 사람들이 말한바...너희가 들었으나”(마5:21, 27, 33)란 익숙한 구약 성경 구절들에 대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파괴하거나 거스른 가르침이 아니라 온전히 옛 사람들이 전한 바 말씀을 성취하는 그런 가르침이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의 글/을 폐(廢)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마5:17).

둘째,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란 권세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영어로는 'AUTHORITY'입니다. *author. 권위란 힘(권능)을 통제하거나 복종케 하고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어서 하늘이나 땅이나 바다나 풍랑이나 마귀들까지도 다 복종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이며 동시에 권위가 있습니다. [관원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요7:26). 주님의 겉모습은 평범한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런 권능과 권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권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을 때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백부장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지붕 아래로 오심을 내가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오직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 이는 나도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들이 있으니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기 때문이니이다, 하매] (마8:8~9). 그는 ‘권위’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이 있었기에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로 일해 주실 것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위에 있는 권위(권세)에 복종하는 법을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경의 인간 관계는 상호 평등이나 상호 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모두 상호 복종의 관계입니다.

셋째, 주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이 다 심히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 어찌된 일이냐? 이 얼마나 새로운 가르침이냐? 이는 그가 권위로 명령한즉 부정한 영들조차 순종하기 때문이라, 하더라.](막1:27). 주님의 가르침은 단지 교리 해석이나 말이 아니라 권능이 있었습니다. 말씀이 곧 능력이었습니다. 말씀이 곧 실제를 이루는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었고, 권능이 있습니다(히4:12). 주님의 가르침은 권능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니 이는 그분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음이더라.](눅4:32). 주님의 말씀으로 병자들의 병이 나았고, 마귀들이 쫓겨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그 누구에게도 이런 가르침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말은 아무리 옳아도 단지 말일 뿐이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은혜롭고 즐거웠습니다. [모두가 그분을 증거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더라.] (눅4:22). [왕은 사람들의 자녀들보다 더욱 아름다우시니 왕의 입술에 은혜가 넘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왕을 영원히 복되게 하셨나이다.](시45:2).

우리는 이 산상 수훈을 듣고 배우면서 놀랍고, 새롭고, 권세가 있고, 은혜롭고,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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