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말씀: 마5:11-12
요절: 마5:11,12


산상 수훈 열 번째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말씀으로는 마지막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복된 자가 어떤 사람들인가를 선포하셨는데 이는 당시 유대교의 랍비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달랐던 충격적이고도 혁명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물질적 소유, 건강, 원수의 죽음 등이 하나님의 복인 줄로 알았던 이들에게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는 이 말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일관되게 마음, 영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마지막으로 [복이 있나니]라고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거짓되이 온갖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11).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님께서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칭찬할 때에, 나로 인하여 성공할 때에, 승진할 때에, 부자가 될 때에, 권세를 잡을 때에” 간증이 되고, 주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 앞에서 영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믿습니다. 예수 믿는 학생은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직장에서는 좀 더 빨리 인정받다 승진하는 것이 복이 있는 삶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너희들이 잘 되고, 형통하고, 성공하고, 사람들이 너희를 부러워하며 너희를 본받으려 할 때에 복이 있나니”라고 이해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그는 성경을 믿는 성경 신자가 아니라 기독교란 이상한 기복 종교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와 성공과 출세와 행복”을 지향하는 현대인들은 어느 날 교회에 나오고, 침례를 받고, 성경 공부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 가치관이 복음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진정한 거듭남, 생명의 변화가 없이 교회의 종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양심의 순화와 어느 정도의 인성에 영향을 줄 수 있겠지만 ‘살아있고, 날카롭고,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의 칼이 그 마음에 들이쳐 올 때 도피해 버리고 맙니다. “설교가 좋다. 성경 공부가 좋다. 교회의 형제들과 즐기는 교제가 좋다.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이들도 환란과 핍박이 다가오면 그 실체가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돌밭 속에 씨를 받은 자 곧 그 자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이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만 견디는 자니 이는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그가 곧 실족하기 때문이라.] (마13:20~21). 주님은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거짓되이 온갖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단어를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읽고, 읽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10절과 11절은 동일한 말씀입니다. 11절은 10절 말씀을 실증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의로 인하여, 즉 주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이들의 마음 자세, 태도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상에서 어떤 영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얻는 것은 죄의 용서, 구속, 양자됨, 은혜와 믿음 충만, 지혜, 평강 등과 같은 영적인 복들이지 “출세, 성공, 승진, 부자가 되는 것” 등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구약 시대나 교회 시대나 환란 시대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물질적인 복이나 장수, 질병의 고침, 외적을 이기는 등과 같은 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대언자들을 보십시오. 의의 희생물을 드렸던 아벨로부터 성전 제단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모두 핍박과 모욕과 죽임을 당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고 이 땅에 하늘의 왕국이 세워지기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어떤 좋은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비관하거나 거지처럼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며 형통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경험적으로 늘 체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부터 대 환란 때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성도들이 받는 일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1:12, 17절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있기 전에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붙잡아/ 핍박하며 회당과 감옥에 넘겨주며 왕들과 치리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눅21:12). *내 이름으로 인하여. 이는 유대 사회에 한정되는 특수 상황이 아닙니다. 회교도들이나 라마교, 불교, 캐톨릭 등의 이교도 국가에서만 있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이 받은 실제적인 환란과 고난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습니다. 캐톨릭 국가들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역사의 현장에 재현될 것입니다. [또 부모와 형제와 친족과 친구들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 사람을 죽게 할 것이며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눅21:16,17).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가족들이 원수가 되고 나를 죽이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형제들이 나를 넘겨줍니다. 가족의 정, 사랑이 모든 것을 앞선다고 믿는 어리석은 이들도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회교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명예 살인이란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것을 무슨 신성한 의무처럼 여깁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 본성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없다면 부부, 가족, 부자, 친지란 것이 허울 좋은 이름일 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주님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받을 것인가 말씀해 주셨는데 첫째, 욕입니다. 둘째, 미움입니다. 셋째, 핍박입니다. 이는 신체적, 물리적인 고난입니다. 넷째, 거짓되이 하는 온갖 악한 말입니다. 이런 것은 교회 다닌다고 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를 때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악행이나 모난 성격이나 성숙하지 못한 인격, 비도덕성 등으로 인해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 자신의 어떤 문제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욕을 먹고,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고, 거짓 되이 고소를 받는 일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는 교회가 많습니다. 성도들 역시 많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어떤 시대, 어떤 지역보다 더 자유롭고 평화롭게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들이 현실감 있게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때로 자신의 잘못을 주님으로 인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박해 콤플렉스’에 걸린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돌려 몇 개 국가들만 보아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곧 삶의 편리나 안전 등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 생활의 불이익은 물론이요, 생명의 위협에 노출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에 성도들을 욕하고 미워하고 핍박하고 거짓되어 온갖 악한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으면 너희도 핍박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키리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보내신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요15:20~21)고 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인하여.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악하다고 정죄하셨기 때문에 세상은 주님을 미워합니다. 종교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기독교가 다수인 나라에 사는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받는 욕이나 비방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을 수 있고, 회식이나 술자리 등에 어울리지 않는 것 등으로 인해 사회생활을 하는데 좀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박해를 받는 그런 때가 이 나라에도 반드시 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이 땅에서 무슨 대접을 받을지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은 이런 일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고 담대하게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66:5, 요한복음 16:2입니다. 성경은 박해하는 사람들이 주로 누구인가? 를 밝혀 두었습니다. [[주]의 말씀에 떠는 자들아, 너희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고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주]께서 영광을 받으소서, 할지라도 그분께서 나타나사 너희의 기쁨이 되실 것이요,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사66:5). 박해 중에 가장 큰 박해자는 소위 형제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박해입니다. 대언자들이 누구에게 매를 맞고, 죽임을 당했습니까? 이교도들이 아니라 형제라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요, 참으로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생각하리라.] (요16:2).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 줄 압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이들은 로마 캐톨릭을 비롯한 거짓 형제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는다,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 삼위일체를 믿는다.” 기타 등등 기본 교리가 같아 보이지만 동시에 교황의 무오성을 믿는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죄 없음을 믿는다고 합니다. 죽은 성인들의 중보, 마리아의 중보를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그들과 연합하고자 애를 씁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핍박을 받을 터이나](딤후3:12).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그냥 경건하게, 선하게, 의롭게, 거룩하게 살고자 할 때 그는 세상의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다(all) 핍박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이런 핍박을 거뜬히 감당한 성도들이 있었던 반면에 이런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해 타협하거나 동화된 예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율법주의입니다. 갈라디아서 5:11, 6:12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핍박을 받겠느냐? 그렇다면 십자가의 실족하게 하는 것이 그쳤으리라.](갈5:11). 바울이 만약 할례를 선포했다면 그는 전혀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율법주의가 복음을 위험했다면 오늘날은 인본주의, 자본주의가 교회와 복음을 위협합니다. [육신으로 잘 보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받지 아니하려 함뿐이니](갈6:12). 육신으로 잘 보이고자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누구든지 육신을 추구하면 그는 상식이 있는 그리스도인, 양식이 있고 지성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들을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성경적 진리를 따르지 말고 세상의 문화와 조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런 교회를 개혁적인 교회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런 성도들을 의식이 있고, 깨어있는 성도들이라고 칭찬합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니라 동화된 교회, 세상과 일치하는 교회가 되어달라고 말합니다. 육신으로 잘 보이고자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해 기꺼이 세상의 요구를 받아 줍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자! 구호를 내 걸지만 사실은 세상에 의해 교회가 먼저 변질되고 부패해 버린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고난을 피한다고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제자들의 혼을 굳건하게 하고 믿음 안에 거하라 권면하며 또 우리가 반드시 많은 환난을 거쳐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야 하리라 하더라.](행14:22)고 했습니다. *반드시(must). 성도들은 반드시 많은 환란을 거쳐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갑니다. 많은 환란을 거치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입니다. 환란은 주님을 믿는 믿음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는 것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이는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이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라](롬8:17-18).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결코 홀로 감당해야 할 고난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면 영광에도 동일한 참여자가 됩니다. 고난의 동참자들만이 영광의 동참자가 됩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고난이 닥칠 수록 기쁨과 즐거움이 배가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자가 될 수 있습니까? 세상이 그리스도를 욕하고 핍박할 때 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그분의 몸 된 성전이 된 성도들, 그분의 몸의 일부가 된 지체들을 핍박하고 욕하기 때문에 그 대상은 성도들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안에 넘치는 것같이 우리의 안위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기 때문이라](고후1:5). 누구의 고난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 누구 안에? 우리 안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습이 되어](빌3:10). 그의 소원은 부귀영화나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영적 소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촉구하기를,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의 증거와 그분의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따라 복음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딤후1:8)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복음의 고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성도가 될 때 그는 영광을 함께 상속받게 됩니다. 우리 몸에는 채워야 할 고난의 분량이 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바울이 기뻐했던 것-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구체적으로 형제들을 위해 당하는 고난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바울의 몸에는 교회를 위한 고통, 고난이 채워졌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산고(産苦)를 겪노라.](갈4:19). 산고는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에 속하지만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거짓되이 온갖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11)란 이 복을 늘 마음속에 담아 두십시오. 사람들이 욕하고 핍박하고 대적하여 거짓되이 온갖 악한 말을 할 때 낙담하기 쉽습니다.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명쾌하게 해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싶기도 합니다. 이는 이런 일들이 복되다고 생각하지 않고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란 주님의 말씀이 자리 잡으면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할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이는 하늘에서 너희 보상(報償)이 크기 때문이라.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2).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거짓 되이 대적하는 말을 들을 때 취할 태도가 이것입니다. 주목해서 보십시오. 보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하늘에서 너희 보상이 크기 때문이라.” 보상은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입니다. 만약 이 땅에서 어떤 보상을 기대한다면 기복주의 신앙으로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보상은 하늘에서 주어집니다. 믿음의 조상들 역시 땅에서 어떤 보상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스가랴, 하박국, 침례인 요한 등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대언자들은 이 땅에서 모욕과 수치를 받다가 죽은 것이 전부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심한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참으로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으며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시험을 받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궁핍과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으니] (히11:36~37). 우리는 대언자들을 고난의 본으로 삼고 그들이 걸었던 길을 걸어야 합니다.


- 주님께서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은 이런 고난과 핍박에는 하늘에서 큰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히11:6). 사도 요한은 [너희 자신을 살필지니 이로써 우리가 이룬 것들을 우리가 잃지 아니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되리라.](요이1:8)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룬 것들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입니다. 주 안에서 행한 수고입니다. 이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는 자가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고전15:58). 보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우리는 각자 자신이 행한 대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報償)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 행위에 따라 주리라.](계22:12).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성도들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는 주의 사역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수치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주의 일을 하기에 합당한 자는 누구입니까? 신학을 전공하고 어학에 능통하고 교단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수치 당하는 일, 주를 위해 욕을 먹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고 도리어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께 합당한 자들입니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 이유는 영광의 영이 그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벧전4:14).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을 때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고난을 당할 때 다시 성령이 충만해지는 것을 봅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받고 시험을 받을 때 그 순간 영광의 영이 위에 임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그런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그런 순간에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4:16).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 것은 복을 상속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시험을 주시고, 그리스도의 대적자들과 복음의 원수들에게 욕설을 듣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이런 일들을 통해 성도들에게 ‘복을 상속’ 받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축복하라. 이런 일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줄 아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약할 때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하면 약할수록 주님의 강하심이 드러나고 주님의 권능이 머무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 진리를 알았을 때 자신의 연약함을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기 때문이라.](고후12:10). 진리를 위해서는 담대하지만 그 담대함은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옵니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영적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롬5:3~4). 환난을 기뻐하는 것은 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통해 하나님께서 맺으시는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단련되기 때문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라.] (약1:2~3). 여러 가지 시험은 우리를 실족하게 하고 넘어지게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단련의 기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는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시험을 통과할 때 시험은 믿음의 단련이 됩니다. 단련된 믿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금 현실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필요가 있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잠시 근심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 구원을 크게 기뻐하나니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1:6~7).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주님의 수치를 짊어지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데 이것을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그분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로 나아가자.](히13:13).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그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진정으로 성령 충만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닥친 불같은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칠 때에 그런 것들로 인해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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