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광대한 우주를 상대로 천문학, 천체 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넓고 넓은 광대한 우주 가운데 펼쳐져 있는 빈틈없는 질서와 절묘한 조화에 감탄하고 맙니다. 반대로 생물학이나 더 작은 것들을 파고 드는 분자 생물학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 역시 생명의 신비로움과 더불어 질서와 조화에 놀라고 맙니다. 망원경으로 우주를 보든, 현미경으로 작은 세포를 보든 무엇을 보든지 간에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질서와 조화’란 말로 요약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모든 생물의 엄청난 다양성에 놀라면서도 그 가운데 흐르는 절묘한 질서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주는 혼동의 세계인 것처럼 보여도 결코 혼동이 아니며, 자연계는 혼란이 아니라 질서의 체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흔히 자연 법칙이라고 일컫는 과학적 발견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질서에 대한 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지으신 창조물들을 통해 하나님은 매우 질서 정연하신 분이심을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우리는 창조의 질서가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부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때를 정하시고, 때에 맞추어 일하십니다. 주님은 해와 달을 만드시고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계절을 정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경계를 정하시고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74:17). 해양 공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파도가 육지 근처에 와서 갑자기 힘이 꺾이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해 줍니다. [주께서 경계를 정하사 물들로 하여금 넘어가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104:9).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 때문입니다. 만약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런 질서가 무너진다면 대재앙이란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사고가 터지고 말 것입니다. 하루라도 해가 뜨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 구름이 잠시 가리는 날은 있겠지만 해는 언제나 뜹니다. 주님의 창조 질서는 지으신 그날부터 지금까지 파괴된 적이 없습니다.
질서는 곧 주님의 능력과 지혜와 권위를 모두 드러내 줍니다. 주님은 자연 질서만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질서도 세우셨습니다.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친구 같은 아빠, 애인 같은 남편이 이상적인 가부장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등의 관계가 아니라 권위와 복종, 순복의 관계를 가르칩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은 {주}를 매우 기쁘시게 하는 것이니라.](골3:20). 주님의 질서에 순종할 때 복을 받게 되며, 땅에서 장수하게 됩니다(엡6:3).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결코 동등, 대등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이런 질서는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인격적인 승복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이 정하신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범법이요, 불법이요, 죄악입니다. 자연 법칙과 마찬 가지로 이것은 주님께서 정하신 가정 법칙입니다. 질서는 어떻게 유지됩니까? 스스로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준수하고, 그분의 권위에 순복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여러분이 스스로 지킬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부부 관계나 부자 관계는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자매들은 각별히 스스로 주의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는 에덴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주로 자매들을 공격함으로써 가정을 무너뜨립니다. [오직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딤전2:12).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역행하는 것은 Freeway에서 역 주행하는 것보다 더 무모한 짓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사회의 질서를 정하셨습니다. 신하는 왕의 권세에 순복해야 하며, 종은 주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입니다. [모든 혼들은 위에 있는 권력들에게 복종할지니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권력이 없으며 이미 있는 권력들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력에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거역하는 것이니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정죄를 받으리라.](롬13:1~2). 차를 모는 사람이 교통 질서를 범하면 사고가 나며, 여러 사람이 불편을 겪습니다. 마찬 가지로 주님이 정한 이런 사회 질서를 어길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여러 사람이 고통을 겪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회 질서, 권력 질서를 ‘주께서 정하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너희는 {주}를 위하여 사람의 모든 규례에 복종하되 왕에게는 최고 권위자에게 하듯 하고 총독들에게는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께서 보내신 자들에게 하듯 하라. 그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이것은 너희가 잘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말/을 잠잠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13~15).
주님께서는 교회 내의 질서를 정하셨습니다.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니라.](벧전5:5). 오늘날 시대를 탈 권위 시대라고 말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목사의 권위주의 때문에 억눌림을 호소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권위주의를 청산하자는 목소리가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은 권위주의와 권위는 다른 것입니다.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너희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라. 이는 그들이 너희 혼을 위해 깨어 있기를 마치 자기가 회계 보고할 자인 것같이 하기 때문이니 그들로 하여금 기쁨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교만한 성도들은 주님께서 정해 주신 질서를 무시하거나 자신이 질서를 만들려고 합니다. 순종의 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를 맺는 것이 인격적이라는 인본주의 학자들이 세운 교육학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한 권의 거대한 역사의 파노라마이며, 주님의 계획과 뜻이 예언되고 성취되는 과정을 그려 놓은 책입니다. [[주]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분의 마음의 생각들은 모든 세대에 이르리로다.](시33:11). 주님께서는 무계획적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시고, 모든 세대에 이른 생각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만군의 [주]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대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지며 내가 계획한 대로 이 일이 /굳게/ 서리니](사14:24). 예언의 성취는 모두 주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영적 질서요, 영적 법칙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알아야 하는 이유는 이런 이전의 역사와 앞으로 일어날 세계사적인, 미래적인 일들에 대한 주님의 뜻과 계획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처음부터 결말을 밝히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들을 옛적부터 밝히 알리고 이르기를, 나의 계획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일을 모두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 우리는 일을 할 때 계획서를 세우고, 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정하고, 언제쯤 일이 끝날지 등을 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처음부터 모든 일에 계획을 세우시고, 이루십니다.
질서의 하나님이란 하나님의 계획과 미리 정하신 뜻에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씀입니다. 질서의 하나님은 예언의 하나님이시며,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주님의 계획을 거절하는 것은 질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성경적인 예를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침례인 요한을 통해 유대에 회개의 물 침례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침례를 받고 안받는 것은 그들의 선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에게서 침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하더라.](눅7:30).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한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하여 넘겨졌거늘 너희가 그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행2:23).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은 다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든지 주의 손과 주의 계획이 미리 작정하사 이루고자 하신 것을 다 행하고자 함이니이다.](행4:28). 지금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믿고 구원 받고, 들림 받고, 유업의 상속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획인데 사도 바울은 이것들을 전파하는데 온 힘을 다 했습니다. [이는 내가 지금까지 회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너희에게 밝히 말하였음이라.](행20:27). [또한 그분 안에서 모든 일을 자신이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상속을 얻었으니](엡1:11).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은 불변합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인간이 마음대로 파괴할 수 없으며, 누구도 수정하거나 변경할 수 없으며, 연기하거나 취소할 수 없고, 무효화 할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불변함을 더욱 풍성히 보여 주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써 확증하셨나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불변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피난처로 도피한 우리로 하여금 큰 안위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6:17?18). 주님께서 계획하시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련의 역사가 바로 영적 질서, 영적 법칙의 핵심입니다.
질서란 곧 법입니다. 질서의 하나님이란 법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이는 [주]가 우리의 심판자시요, [주]가 우리에게 법을 주시는 이시요, [주]가 우리의 왕이시니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33:22). 법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법이 지켜지지 않는 세상을 무법천지라고 하는데, 이는 재앙입니다. 주님은 법을 주시는 하나님이신데 반해 마귀는 범법자요, 법을 어기는 자요, 법을 파괴하는 자입니다. 교통 법규란 곧 교통 질서를 지키는 자란 뜻입니다. 사회 법규는 사회 질서를 지키는 자란 듯입니다. 질서와 법은 일맥상통합니다. 질서의 하나님은 곧 법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모두 법 안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믿음의 법, 의의 법, 성령의 법, 자유의 법, 왕가의 법, 생명의 법, 은혜의 법 아래 있습니다. 사람은 믿음의 법에 순종할 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3:27). 성도의 일생은 믿음의 법에 따라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기에 ‘의의 법’이라고 불립니다. 믿음의 법에 따르지 않으면 의의 법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롬9:31).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성령의 법 아래 있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성도가 서로 짐을 나누어 질 때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됩니다. [너희는 서로 남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왕가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 따라,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왕가의 법을 성취하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2:8). 우리는 모두 자유를 얻었지만 법과 질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자유는 자유의 법 아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2:12).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법의 하나님이십니다. 법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위법자요, 불법자요, 무법자가 됩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대로 산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정해 주신 질서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우승하려고 애쓰는 자가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월계관을 얻지 못하며](딤후2:5).
질서란 곧 가치관입니다. 질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가치관입니다. 질서는 주님의 권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할지니라』(고전14:40)고 명령하십니다. 무질서와 혼동, 혼란은 결코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은 질서 정연하며, 자연스러우며, 진리를 거슬리지 않으며, 조화롭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나 질서 있게 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간단한 몇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1. 질서 있는 예배: [또한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의 기름과 각각의 번제 헌물에 쓸 음료 헌물이 많았더라. 이와 같이 [주]의 집에서 섬기는 일이 질서 있게 이루어지니라.](대하29:35). 주님께서는 무질서한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성전에서 주님을 섬기는 일은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질서는 결코 자유가 아닙니다. 질서 있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영과 몸이 다 자유롭지만 무질서할 때 정신은 혼란스럽고, 몸은 부자연스럽게 됩니다.
2. 질서 있는 기도: 우리는 질서 있게 말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중언부언하거나 횡설수설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분께 드릴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이는 /이치가/ 어두워서 우리가 우리 말을 질서 있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 (욥37:19). 주님은 우리에게 웅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수사학을 동원해서 아첨하는 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말, 이해하는 말로 조리 있게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그러나 교회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만 마디 말을 하느니 차라리 이해하면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내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리라.](고전14:19)고 했는데, 이는 방언 기도가 올바른 기도가 아님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떠들면서 알아 듣지도 못하는 방언 기도는 결코 질서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언어의 한계는 곧 사고의 한계입니다. 말을 횡설수설하는 것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기도할 때 우리는 더욱 정신을 차려서 깨어서 말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을 배워야 하고, 주님의 성품을 배워야 하며,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3. 질서 있는 제자도: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에 있어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는 질서 있게 행함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바라보기 때문이라.](골2:5).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 외의 어떤 것도 다 배척했는데, 특히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붙들지 않고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붙들었습니다. 성경 외의 어떤 것에도 권위를 두지 않고, 주님 안에서 걷고,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는 삶이 바로 질서 있게 행하는 성도의 삶입니다(골2:6?7). 잡탕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도 다니고, 철학 서적도 보고, 다방면을 두루 섭렵하는 것은 질서 있는 제자도가 아니라 무질서한 신앙 생활입니다.
4. 질서 있는 일상 생활: 일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질서 없이 행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일을 해야 합니다. [6이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너희에게 명령하노니 너희는 질서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들에게서 떠나라. 7이는 어떻게 우리를 따라야 할지 너희가 스스로 알기 때문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질서 없이 행하지 아니하고…11이는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질서 없이 행하며 전혀 일하지 아니하고 참견하기만 좋아하는 자들이 있다 하기 때문이라.](살후3:6?7,11). 성도들은 땀 흘려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령하기를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였으니](살후3:10). 이것은 명령입니다. [또 우리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같이 조용히 지내고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11).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요,』(고전15:23). ‘각 사람이 자기 차례 대로’ 란 말씀은 주님이 정하신 질서대로란 말씀입니다. 주님은 경계를 정하시고, 차례를 정하심으로 혼란과 혼동이 없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질서를 부여하시며, 때에 따라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순서대로, 차례대로”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주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잘 드러낸 말씀들입니다. 교회 내에서 의견을 제시할 때도 순서대로, 차례대로 해야 합니다. 말을 할 때나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은 주님의 성품을 많이 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이는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이시기 때문이라.](고전14:33)고 합니다. 질서가 없는 곳에는 화평이 없습니다. 질서는 화평, 평안, 조화의 핵심입니다.
질서의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혼동 가운데 빠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말에나 행동에나 마음 가짐이 늘 정돈되고, 급하지 않게 되고, 냉철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신뢰할 때 질서는 혼동으로 바뀝니다. 평안이 깨어지고, 무질서해 집니다. [그러므로 파라오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이집트의 그늘을 신뢰함이 너희의 혼동이 되리니](사30:3).
우상들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돌과 나무로 형상을 새기는 우상을 만들지 않았더라도 마음 가운데 갖가지 우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골3:5). 돈, 교육, 자녀, 명예, 출세욕 등의 우상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을 만들 때 부끄러움을 당하고, 혼동에 빠집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또 모두 당황하며 다 같이 혼동에 빠질 것이로되](사45:16).
주님께 범죄하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는 모든 질서를 다 파괴합니다. 아담은 주님께 범죄하고 불순종한 후에 혼동에 빠졌습니다. 다윗은 범죄한 후에 열심히 머리를 썼지만 점점 더 깊은 죄악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사울은 범죄한 후에 그의 이성과 감성은 완전히 혼동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는 성도가 범죄하고 불순종할 때 공통적으로 체험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혼동이 우리를 덮겠사오니 이는 우리 곧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이 날에 이르기까지 [주]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주] 우리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렘3:25).
주님의 분노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대신 주님의 분노를 일으킬 때 혼동에 빠집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들이 /과연/ 나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냐? 그들 스스로가 자기 얼굴에 혼동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냐?](렘7:19).
주의 종을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오나 [주]는 강하고 두려운 분 같으사 나와 함께 계시므로 나를 핍박하는 자들이 걸려 넘어져 이기지 못하고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리니 이는 그들이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니이다. 그들의 혼동은 영존하여 결코 잊혀지지 아니하리이다.](렘20:11). 하나님의 종을 핍박하는 일은 곧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던 국가, 민족, 사회가 융성해 본 예가 없습니다. 이는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성도들을 거칠게 비판하며, 욕하고, 교회를 성토하는 불신자들의 결말이 좋은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혼미한 영에 이끌림을 받습니다.
시기와 다툼 때문입니다. [이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약3:16). 시기심은 사람의 건전한 정신을 완전히 마비시켜 버림으로써 혼란을 불러 일으킵니다. 사울은 시기심으로 인해 전쟁을 하다가 다윗을 잡으러 갔습니다(삼상24:1?2). 그는 판단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기는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레위 지파의 고라는 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여 일어났습니까? [이때에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의 자손들 곧 엘리압의 아들들 다단과 아비람과 블렛의 아들 온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어떤 자들과 함께 모세 앞에서 일어나니 이들은 회중 안에서 유명하여 명성이 있는 자들이요, 그 집회에 속한 이백오십 명의 통치자들이더라.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려고 함께 모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넘치게 행하는도다. 온 회중 곧 그들 각 사람이 거룩하고 [주]께서도 그들 가운데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 자신을 [주]의 회중보다 높이려 하느냐? 하니](민16:1~3). 이들의 반역 사건의 원인을 후에 시편 기자는 시기심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진영에서 모세와 [주]의 성도 아론을 시기하매 땅이 열려 다단을 삼키고 아비람의 무리를 덮었으며 그들의 무리 속에 불이 붙어 불꽃이 사악한 자들을 태웠도다.](시106:17~18). 시기심은 자신들의 혼을 혼란에 빠뜨리며, 몸을 지옥에 불태웠습니다.
우리는 질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뜻대로, 계획대로, 주님의 time table에 맞추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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