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초월이란 전능 초월이란 전능, 전지, 무소부재, 무한하심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제한이 없고, 한계가 없는 것, 구속받지 않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전혀 부족과 부작용이 없는 것을 초월이라고 합니다. 이성과 상상의 범주를 완전히 넘어서지만 혼란과 무질서가 조금도 야기되지 않는 것이 초월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문이나 벽을 부수고 나가는 것은 초월이 아닙니다. 그러나 혼란과 무질서의 야기 없이 그대로 문을 통과하고, 벽을 통과한다면 그것은 초월입니다. 움직임이 있으되 흔적이 남지 않고, 가만히 계시지만 모든 것을 움직이며, 존재하시지만 없는 것 같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가 바로 초월자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마귀도 초월자이며, 천사들도 초월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자들이 결코 초월자가 아닙니다. 초월은 자신 위에 넘을 수 없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한 결코 초월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서 예민한 청각과 후각을 가졌다고 한다면 그는 야수 같은 본능을 지닌 정도이며, 짐승의 감각을 지닌 것이지 초월자라 할 수 없습니다. 삼손이나 헤라클레스처럼 사자를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역발산의 힘을 지녔다 해도 그것은 힘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강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신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힘입니다. T.V나 영화에 보면 염력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초능력자들이 나와서 숟가락을 굽히거나 이빨로 트럭을 당기는 등의 놀라운 일을 보여 주는 예가 있는데 이들 역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더 무거운 것은 들지 못하며, 끌지 못합니다. 그들의 탁월한 능력은 흔치 않는 것일 수 있고, 자연인들 보다 상대적 우위에 있는 것이지 힘을 초월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높은 권위, 권세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면 그는 어떤 놀라운 이적과 능력을 일으킬 수 있다 해도 초월자라 할 수 없습니다.

늘 한계 상황에서 좌절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초월 의지를 가지고 초월자가 되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궁극 목표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부지런히 초인 의지를 불태우며, 수행에 수행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초인이 되어야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더 낮추고, 낮아져 죽음에 이르러야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맛볼 수 있으며,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오욕칠정과 옛 본성이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금욕이나 수행을 통한 각성, 해탈, 자아 발견, 학문의 정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육신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오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는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할 때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가 되며,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이 정해 주신 분량 밖으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인간의 잠재된 본성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성경에 따르면, 신(神)이 되고 싶어 하는 욕구로 인해 여자는 에덴에서 유혹을 받았고 결과는 신(神)이 아니라 죄성을 지닌 타락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욥은 일찍이 인간의 죄성과 그 한계를 깊이 통찰하였습니다. [누가 정결한 것을 부정한 것 가운데서 가져올 수 있나이까? 아무도 없나이다. 그의 날들이 정하여졌고 그의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주께서 그의 한계를 정하사 그로 하여금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욥14:4-5). 주님은 우리에게 날 수와 달수를 정하사 분명한 한계를 정하셨기에 누구도 그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때로 과학의 발전, 의학의 발전 등이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한계를 넘어설 것 같이 광고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여, 내 종말과 내 날들의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 보소서, 주께서 내 날들을 한 뼘만큼 되게 하셨사오니 내 시대가 주 앞에는 아무것도 아닌 듯 하오며 참으로 사람은 최선의 상태에서도 다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34:4-5)고 했습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상태, 최고의 경지가 헛되다면 평범한 일생의 나날을 달리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여러분 생애 최고의 기쁜 날, 가장 즐거웠던 날, 전성기를 구가하는 그런 상태에서도 헛될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지위가 낮은 자들은 헛되며 지위가 높은 자들은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그들을 다 더해도 허무보다 가볍도다.](시62:9).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아야 하며,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정하셨다는 사실과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초인 의지, 초월 의지는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빚어낸 종교와 철학, 교육의 가르침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이 되고자 했던 에덴의 여자나 하나님처럼 자신을 높였던 루시퍼의 종말을 보십시오. 루시퍼가 왜 망했습니까? [이는 네가 네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서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사14:13-14). 루시퍼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 했습니다. 탐욕과 교만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한계를 넘으려는 것입니다. 만약 정부가 정해 놓은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면 백성을 압제하는 것이 됩니다(눅3:13). 마찬가지로 정해진 권한 이상을 사용하면 독재자나 폭군, 부패한 관리가 됩니다. 무엇이나 정해 진 것 이상은 죄가 되지 덕이 되지 않습니다. 정해진 기준에 부족한 것도 문제가 되지만 정도를 넘어서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음식은 정해진 유통 기간이 넘으면 먹을 수 없습니다. 제품은 유효 기간이 넘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처소를 떠났던 천사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또한 자기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으며](유6). 그들은 인간들이 보기에 초월자들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메뚜기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비기며 스스로 높였던 루시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서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너는 끌려가 지옥으로 곧 그 구덩이의 옆면으로 내려가리로다.](사14:14-15). 사탄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초월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초월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권세아래, 그분의 허락하신 뜻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초월자이십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마귀는 놀라운 존재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습니다. 갖가지 능력과 표적, 놀라운 이적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경배를 받습니다.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초월자 마귀를 어떻게 다루십니까? 주님은 욥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네가 낚시바늘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늘어뜨린 줄로 그의 혀를 끌어낼 수 있겠느냐? 네가 그의 코에 낚시바늘을 걸 수 있겠느냐? 가시로 그의 턱을 꿸 수 있겠느냐?](욥기41:1-2). 사람은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낚시바늘로 리워야단(옛뱀, 용, 사탄이라 불리는 마귀)을 꿸 수 있으며, 늘어뜨린 줄로 그의 혀를 끌어 낼 수 있습니다. 강가의 낚시꾼의 바늘에 꿰인 고기 정도의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낚시군이라면 그는 한 마리의 고기에 불과합니다. [그가 네게 많은 간구를 하겠느냐? 그가 네게 부드러운 말들을 하겠느냐? 그가 너와 언약을 맺겠느냐? 네가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욥41:3-4). 사람은 마귀를 감히 대적하지 못합니다. 천사장 미가엘 조차도 마귀를 욕설로 비난하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유9). 마귀가 욥에게 간구하거나 부드러운 말을 할 일은 천지가 개벽해도 없습니다. 언약을 맺거나 욥의 종이 되는 일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지상에서 주님을 만난 마귀들이 주님 앞에 절절 기며 간구했던 기사들을 우리는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귀를 영원히 종으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마귀는 경배의 대상으로 존경받고, 온 세상이 그를 경배합니다. [사람들이 그 짐승에게 권능을 준 용에게 경배하고 또 그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그와 전쟁을 하겠느냐? 하더라.](계13:4). 그러나 주님의 눈에 마귀는 영원한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비 종교에서 그토록 초월자, 절대자를 간구하고 부르짖지만 막상 그들이 그토록 경배하고 섬겼던 신들이 실상 알고 보면 주님 앞에 꿰인 한 마리 고기에 불과하며,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때 그들은 아마 지옥에서 울며 이를 갈 수 밖에 달리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욥을 그토록 괴롭혔던 마귀의 정체가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거듭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그와 놀기를 새와 놀 듯 하겠느냐? 네가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를 묶겠느냐? 네 벗들이 그를 가지고 잔치를 벌이겠느냐? 그들이 상인들 사이에서 그를 나누겠느냐? 네가 그의 가죽을 쇠꼬챙이로 가득 채울 수 있겠느냐? 그의 머리를 물고기 작살로 가득 채울 수 있겠느냐?](욥41:5-7). 주님은 새 장 속의 참새나 애완용 새처럼 마귀를 다루실 수 있으며, 묶으실 수도 있으시고, 가지고 즐겁게 놀 수 있으시며, 팔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기분이 안 좋으면 쇠꼬챙이로 가죽을 찔러 구이를 해 먹을 수도 있으며, 작살로 사냥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귀의 존재란 그런 정도입니다. 하물며 사람들이 믿고 섬기는 종교 창시자들이나 잡신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는 달리 생각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이 믿는 신들은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작살로 가득 꿰어 버리셨어!!” 이것이 성경이 주는 영적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모든 것을 초월하시며, 능가하시며, 한계가 없으시며,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루시퍼는 자신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높였고, 하나님과 비길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자신은 피조물이지 결코 초월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머리가 아니라 몸의 지체이며, 뿌리가 아니라 가지에 지나지 않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자아 발견은 주님 앞에서, 주님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하게 생각하라.](롬12:3). 이는 매우 중요한 삶의 원칙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정도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진 은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하거나 초인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며 혼자 주님의 계시를 다 받아서 성경을 통달한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되며 나 홀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도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타락하게 되며,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혼자 의인인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즉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으니 대언이면 우리가 믿음의 분량대로 대언하고,](롬12:6).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골고루 은혜를 주시며,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타인의 장점과 은사들을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각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누어 주신 대로, {주}께서 그를 부르신 그대로 행할지니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같이 지시하노라.](고전7:17). [그러나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4:7). 하나님께 받지 않는 것을 받은 것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보살피며, 도와가며 살도록 하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높은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며 높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자기를 낮추어 낮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롬12:18).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이미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갈6:3). 이런 이유로 인해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 종말과 내 날들의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시39:4). 이것은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갖고, 성령을 소유한다 해서 초능력자가 되거나 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할 때 어리석음이 지혜가 되고, 연약함이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아무런 힘도 지혜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뿐이십니다. 주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주의 눈앞에서 천 년이 단지 지나간 어제와 같으며 밤의 한 경점과 같기 때문이니이다.](시90:4). 주님에게 천년의 세월은 밤의 한 경점과 같습니다. 주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시간에 구속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기간 개념은 주님께 적용되지 않으며,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대하여 무지한 자가 되지 말라.](벧후3:8).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실 뿐 아니라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아모리 족속을 넘겨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주]께 아뢰고 또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이르되, 해야, 너는 기브온 위에 멈추어 서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해가 멈추어 서고 달이 멈추어서 마침내 백성이 자기 원수들에게 원수를 갚으니라. 이것이 야셀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냐? 이와 같이 해가 하늘 한가운데 머물러 서고 거의 하루 동안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더라.](수10:12-13).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 주님!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역사 속에서 함께 일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시, 공간 속에서 일하시지만 시, 공간에 구속을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해와 달을 멈추시지만 지상에는 자연 재해나 천재지변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시간은 멈추었지만 여호수아는 여전히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이런 일은 또 한 번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신 일을 행하실 것에 대하여 [주]께로부터 이 표적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그림자가 앞으로 십 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은 뒤로 십 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 도를 내려가는 것은 쉬운 일이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자가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할 것이니이다, 하거늘 대언자 이사야가 [주]께 소리 높여 간구하매 그분께서 아하스의 해시계에서 십 도를 내려갔던 그림자를 뒤로 십 도 물러가게 하셨더라.](왕하20:9-11). 이는 주님의 전능하심과 더불어 초월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하나님이 초월자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상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상상의 범주 내에서 행동하시고, 생각하신다면 그분은 결단코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인간 사고의 범주 이내에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든 기계나 건축물과 같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초월자로서 창조된 모든 세계를 훨씬 능가하시며, 넘어서 존재하시며, 우리의 이해와 사고 그리고 상상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분량만큼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희미하게, 부분적으로 주님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3:12).

주님의 지혜와 지식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 높아서 아무도 찾지 못하며,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증언은 계속해서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롬16:27, 딤전1:17, 유1:25)에 대한 찬양의 연속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명철은 놀라운 정도가 아니라 제한이 없으십니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그분의 명철(明哲)은 무한하시도다.](시147:5). 그래서 주님은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고, 어려워서 못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주님에게는 모든 일이 다 쉽습니다. 주님은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마9:5, 막2:9, 눅5:23). 어느 것이 쉽습니까? 둘 다 어렵다 못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둘 다 쉬운 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없이 어려운 문제들이 주님께는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고백하기를, [... {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주의 크신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사오니 주께는 너무 어려워 /할 수 없는/ 일이 없나이다.](렘32:17b)고 했으며, 주님 역시 친히 선포하시기를, [보라, 나는 [주]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너무 어려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32:27)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각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망설임이나 고뇌나 헷갈림이나 시행착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넣어 주시고 말씀해 주심으로써 어느 정도 아는 것을 가능케 하셨으며, 주의 계시와 조명을 통해 조금씩 알아나가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사람들의 상태는 이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영적 신학적 지식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은밀한 일들은 [주] 우리 하나님께 속하거니와 계시된 일들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속하나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신29:29).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성령을 통해, 성경의 말씀을 통해 필요한 만큼 열어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모든 성경 지식, 영적 지식의 목적은 말씀을 믿고 행하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영적 무지는 결국 주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이며, 행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3:19). 우리의 이성이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결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특히 죄인을 향한 주님의 필설(筆舌)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사랑을 이해한다면 이해하는 만큼, 그 정도만큼만 주님의 사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사랑을 지식적으로 안다면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여러분의 지식과 생각 속에 그만큼만 수용하고, 제한적으로 받아 들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을 완전히 뛰어넘기 때문에 감히 상상하거나 생각함으로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놀라움으로 가득 찬 심령으로 찬양과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분노와 진노를 쏟아 부어야 할 대상을 향해 주님은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이론과 지식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요일4:8-9). 사랑은 사랑할 때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염려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이해의 바탕 없이도 불안과 근심, 염려, 걱정, 스트레스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의 기도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를 즉시 다 이해시켜 주시지 않습니다.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언제쯤 문제가 해결될 것인지 이해시켜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없으면 건강한 사람도 건강을 염려하고 불안해하며, 하나님이 없으면 많이 공부하고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도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앞 날에 대해 염려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돈이 많아도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세상으로 인해 여전히 걱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몸이 약하고, 배운게 없고, 돈이 없어도 늘 평안 가운데 복된 삶을 삽니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설명할 수 없어도, 이해할 수 없어도, 설득시켜 줄 수 없어도 충분히 평안한 이유는 주님의 주시는 평강이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시지만 모든 것을 살피십니다. [이는 높고 높으시며 영원히 거하시고 이름이 거룩이신 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고 또한 통회(痛悔)하며 겸손한 영을 지닌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것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들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사57:15). 주님은 높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진정으로 초월자이십니다. 성경은 주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높고 높으시며...이는 더 이상 높이를 말할 수 없는 그런 높음입니다. 이 위에 더 높음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높고 높으신 곳에 영원히 거하시며 이 땅의 낮고 낮은 혼들, 자신을 엎드리고 구부려서 겸손히 낮추는 혼들을 살피십니다. 높고 높으신 하나님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시고, 낮은 자들을 보십니다.

주님은 높고 높은 곳에서 낮은 자를 보시며, 자신을 숨기시면 서도 찾는 자에게 드러내십니다. [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자신을 숨기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여러분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신격은그리스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기 때문이라.](골2:9).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3).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보화를 찾듯이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보화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믿음으로 순종해 보아야 합니다. 순종해서 직접 체득한 지식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은 없습니다. 때로 사람들도 말합니다. 이론을 설명해 준 다음에는 ‘직접 한번 해 봐’라고 합니다. 영적인 지식은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때로 시편 기자의 고백대로 [이런 지식이 내게 너무 놀라우며 높아서 내가 능히 거기에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6)라고 할 수 밖에 없지만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을 봅니다(엡3:10). 또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영적 지식을 소유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Know thy Go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 하나님  (0) 2005.04.16
질서의 하나님  (0) 2005.04.16
자족하신 하나님  (0) 2005.04.15
산자의 하나님  (0) 2005.04.15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0) 2005.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