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생각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br />사람은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생각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사람은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개념이 성경에서 멀어지고, 그 본래의 하나님 되심과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과 그에 따른 삶은 급전직하로 떨어져 마침내 배교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격에 대한 잘못된 모든 개념이 우리 마음속에서 제거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확고하게 자리 잡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 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바로 알라’는 주제로 매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마음 속에 하나님을 올바로 알기 위한 중요한 작업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상상 속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너무나 흔합니다.

사람들이 아는 하나님이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일 때 그의 믿음은 불신앙이요, 왜곡된 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니 참으로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분을 더 이상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이 육신을 따라 하나님을 아는 경우가 매우 흔한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육신을 따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람과 같은 줄로 아는 것입니다. [네가 이 일들을 행하였을지라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도 전적으로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시50:21a)란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생활에 적당히 만족하고 적당히 영적이고, 적당히 육신적인 그런 삶을 사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할 때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불과하고,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영적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자족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부분에서 자족하십니다. 이는 외부의 도움이나 필요를 공급받지 않고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존하신 분이시기에 누구의 도움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닌 것처럼 주님은 자족하신 분이시기에 누구나 무엇의 공급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생명(요 5:26)과 영광(행 7:2)과 선(시 119:68)과 복(딤전 6:15, 롬 9:5)을 자기 안에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외부에 나타나게도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있어서나 자신에 대해서나 모든 면에 있어서 자족하시다. 피조물에서(행 17:24­25) 보충을 받아야 하거나, 무슨 영광이 피조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욥 22:2, 23), 모든 피조물 안에서나 피조물을 통해서나, 또는 그것에 대해서, 또는 그 위에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하나님만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신다.” 이는 자족하신 하나님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자족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하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이 충족한 자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족하시지 않으면 자존하실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스스로 완전하지 않고 존재하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무엇인가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결핍을 채움 받아야 합니다. 호흡하는 것은 공기가 필요하고, 모든 유기체는 자양분과 빛과 수분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거의 모든 생명체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얼마의 시간 동안만 ‘필요한 공급’이 중단되면 생물들은 죽어서 소멸되고 맙니다.

모든 피조물은 존재하려면 다른 피조물을 필요로 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어떤 것도 필요치 않으십니다. 사람은 바람과 비를 피하기 위해서 집을 짓고, 그 안에 거주합니다. 옷을 필요로 합니다. 먹을 것을 위해서 땅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우리는 우리 몸 안에 자족한 무엇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 안에 채워지지 않는 어떤 필요를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필요를 공급하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에 의해 무엇을 공급받으셔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시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만드시는 것은 우리가 비를 피하고 추위를 피하려는 목적에서 집을 짓고 옷을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목적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만드실 때 그 이유는 자신의 필요를 공급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기쁨과 선한 목적, 즐거움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모든 것이 충족되시며, 외부의 어떤 도움이나 공급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야 존재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존과 자족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서 자존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자족하신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는 것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사 그 속에 생명이 있게 하셨음이요,](요5:26). 모든 생명은 그것이 아메바와 같은 하등 생물이든 천사나 스랍과 같은 영적 존재이든 하나님에게서 부여 받았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그 자체 안에, 그 자신 안에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은 누구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며, 무엇으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스스로는 무엇이나 누구에 의해 존재함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것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불완전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필요란 것은 피조물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자존하시고, 자족하신 하나님께는 무용한 말입니다.

주님은 필요를 충족케 하시는 분이시지만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19).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교도들과 같이 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의 필요한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마6:8).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며 마음에 의심하지도 말라. 그 까닭은 이 모든 것이 세상 민족들이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눅12:29-30). 그렇다면 주님은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까? 주님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는 주님이 무엇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무엇을 필요로 한 유일한 예가 있다면 예루살렘 입성에 필요한 나귀 한 마리였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그것들을 필요로 하신다, 하라. 그리하면 그가 즉시 그것들을 보내리라, 하시니](마21:3). 이는 주님께서 이것이 없으시면 예루살렘 입성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상의 모든 자원을 임의대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과 자의적 관계성을 가지시지만 어떤 피조물과 필요적 관계를 맺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지으신 피조물은 주님의 선하신 기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그 피조물이 하나님께 공급할 수 있는 어떤 필요한 것들이나 완전함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주님의 필요를 공급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만드신 것이 없으십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목적은 필요가 아니라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이요, 또 모든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음이니이다, 하더라.](계4:11).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란 말처럼 사람은 필요에 의해 무엇을 만들고, 개발해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필요에 의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쁘시게 하려고 창조하셨습니다. 피조물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의존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피조물에게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으니 이는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더라.](요2:24-25). 주님은 자신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셨을 뿐 자신이 지은 어떤 피조물에게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나 스랍들이나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한 분 하나님만을 의지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지음 받은 것들은 지으신 분에 의해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으신 창조주께서 지음 받은 피조물들에 의해 더욱 완전해 지거나 더 향상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봅시다. 지상의 모든 생물은 태양의 영향을 받지만 태양은 지상의 생물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습니다. 누가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한다고 해서 햇볕이 더 약해지거나 어두워지지 않고, 누가 밝은 안경을 썼다고 해서 햇빛의 강도가 더 세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욱 하나님 다와 지는 것이 아니며, 모두 다 주님을 불신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약해지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완전하심에 덕이 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고 그분의 능력이 감소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어떤 보탬을 주지 못하며, 주님을 의심하는 것이 주님의 어떠하심에 흠결을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이미 충분히 자족하시기 때문에 어떤 자원이 필요치 않으시며, 사람들에게 아첨하거나 비위를 맞추며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기 위해 애를 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드리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꼭 필요한 존재인 줄로 굳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자존감을 촉구하며 하나님 앞에 꼭 필요한 존재, 하나님 앞에 없으면 안되는 존재인 것처럼 부각시키는 설교는 인본주의의 극치일 뿐 성경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죽는다고 자신의 사역이 중단되지 않으며, 광야의 이스라엘이 모두 불신으로 모두 죽어간다고 해서 자신의 뜻과 계획이 변경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늙고, 사라가 늙었다고 해서 약속하신 자식을 주시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고(창18:12-13), 요나가 도망을 친다고 해서 니느웨에 전할 말씀을 증거하지 못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너무나 존귀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쓸모없어서 주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셔서 사용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고전1:26-28). 때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자랑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로 더 위대해 지시지 않으시며, 우리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더 초라해지시거나 더 작아지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본주의 기독교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기독교인지라 하나님은 내가 없으면 곧 눈물을 터뜨리시고, 슬픈 표정을 지으시며, 실신할 것 같은 이미지를 심어 주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본위의 생각을 하는지라 하나님께서는 나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나는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에 허무와 절망을 느끼고, 분통을 터뜨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란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독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이요, 기쁘신 뜻에 의한 것이지 우리의 공로나 나의 존재가 하나님께 꼭 필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 사역이 흔들렸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의 발상이지 결코 성경의 선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그토록 존경하며 칭찬하는 바울은 정작 자신을 일컬어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함이로다.](고전9:27)라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자인 줄 너무나 잘 알았으며 자신의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은혜의 택하심에 따라 부름 받았으며, 죄인 중의 우두머리요,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요,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기 위한 본(sample)에 지나지 않았음을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족하신 분이시기에 그 자족하심에 대해 부정하고 도전하는 인간들의 언행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왜 창조의 맨 마지막에 지으셨을까요?’란 질문이 있습니다. 랍비가 그에 대한 답을 하는데, ‘만약 사람이 처음이나 중간에 지음받았다면 자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답변합니다. 인간은 틈만 나면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이 세상에 꼭 필요하고, 하나님께 꼭 필요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9),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을 자랑하지 말지니 이는 모든 것이 너희 것이기 때문이라.](고전3:21).

침례인 요한은 종교적 자부심과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란 이유로 교만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라 말하려 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느니라.](눅3:8). 주님은 그들이 아니라 돌들로도 충분히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는 이들이 자기들만이 아브라함의 자녀란 영적 망상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선언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주님을 환호하지 않으면 그들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환호하게 할 사람들을 만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즉시 소리를 지르리라, 하시니라.](눅19:40). 우리의 존재는 길가의 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역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니면 이 일을 이룰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 주고 있으나 초점은 언제나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오직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은혜를 베푸심에 근거하는 것이지 인간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도 존엄도 없습니다. 성경의 기자들이 인간은 단지 마른 풀, 시드는 꽃, 잠깐 보이다 사라지는 수증기로 묘사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인간을 높일 수 있는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피조된 존재는 감히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신뢰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족하시다는 진리는 우리를 허무하게 하고, 절망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하는 진리입니다. 자족하신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우리의 영적 짐을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전적인 능력의 공급하심에 따라 살게 합니다.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셔서 마치 무엇이 간절히 필요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감격적인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필요치 않으시는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자신의 힘으로 우리를 일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으시는 것은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하여 살아가는 특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일하는 것은 결국 알고 보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신 결과입니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빌1:6). 이 사실을 여러분이 알고 계십니까? [이는 너희 안에서 일하시며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빌2:13). 하나님은 전부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라고 외친 것이 바로 자족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부족을 채우거나, 하나님의 사역에 약간의 보탬이 되었다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다양한 일들을 행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같으시되](고전12:6).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성경의 선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종교는 사람의 땀과 피와 수고를 요구합니다. 뜨거운 정성과 변치 않는 열정을 바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땀과 피의 수고를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밤새도록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는 수고와 온 몸이 찢어지는 채찍의 고통과 머리,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서 쏟아지는 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생명을 바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생명을 드리겠다고 맹세했지만(요13:37), 그가 주님께 드린 것은 거짓과 부인과 저주의 맹세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고 욕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요10:11,15,1718,28).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남김없이 다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고, 하늘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지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족하신 하나님은 도움을 받거나 채움을 입거나, 신세를 지거나 누구의 힘을 빌릴 일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명백한 진리는 주님께서 친히 지으신 우주 만물 모든 것 안에 자신으로 가득 채우신다는 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께 굴복 당할 때에는 아들도 모든 것을 자기 아래 두시는 분께 친히 복종하시리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려 하심이라.](고전15:28). 이것이 성경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곧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1:23).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바바리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시느니라.](골3:11). 하나님은 아무도 필요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주님을 겸손히 의지할 때 주님은 거기에 거하시며, 그 안에서 충만케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케 하고도 남으시며 부족함이 있을 수 없는 분이심에도 아무 것도 아닌 우리에게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의 사랑과 은혜와 영적인 복을 값없이 받으라고, 주시는 것을 받아서 살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고, 필요치 않으시는 주님께서 무한한 자신의 자원을 초라한 죄인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셔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성경에 기록된, 증거된 진리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신 것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버리심으로써 얻고, 죽으심으로써 살며, 주심으로써 받는 역설과 모순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자족하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를 찾으시며, 우리는 주님이 필요한 줄 아시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만 살고, 움직일 때만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시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자족하신 하나님을 만난 성도는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터득하는데, 이는 모든 것이 풍성하신 주님과 뿌리와 가지처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기를 배웠음이라.](빌4:11). 우리는 만족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탐욕적인 삶이 아니라 받는 것보다 복된 주는 삶(행20:35)을 살게 되며, 경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만족함이 있는 경건은 큰 이득이 되나니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딤전6:6-8). 주님 안에 있는 자원이 나의 자원이 된 사람은 내적 자원이 풍성하고, 영적 자원이 끊임없이 공급되기 때문에 물질이나 명성이나 외적인 자원에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자족함이 없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외적인 것들로부터 무엇인가를 안으로 끌어 들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자족하신 하나님, 모든 것이 풍성하신 하나님과 영적, 생명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잠깐 보이다가 사라져 버릴, 썩어져 가는 것들을 자원으로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겠습니까?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히13:5). 이것은 금욕을 명한 것이 아니라 자족의 삶을 명한 것입니다. 자족하신 주를 믿는 자에게는 늘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족하신 하나님의 자원은 무한(無限)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가?

주님께서 복을 주셨으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 네 하나님이 네 손의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었기 때문이요, 또 네가 이 큰 광야를 걸어서 지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니라. [주] 네 하나님이 이 사십 년 동안 너와 함께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에](신2:7). 이 사실을 느헤미야는 후에 가난한 백성들을 향해 가르쳐 주셨습니다(느9:21). 저는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가르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영적인 복으로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복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기 전에 이미 복을 받은 존재란 사실을 알 때 부족이 아니라 자족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양의 모든 문제는 늘 목자의 문제입니다. 초원이 없고, 물이 없고, 이리 떼가 닥치는 일들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양의 몫이 아니라 목자의 몫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시기에 우리는 어떤 문제에서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 [주]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이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로다.](시34:9). 주님을 두려워 할 때 주님은 그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장래 문제, 돈 문제, 건강 문제 등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두려워하느라 정작 두려워해야 마땅한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 외에 다른 것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늘 뭔가 부족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주를 찾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젊은 사자들은 부족하여 굶주릴지라도 [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10). 맹수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들은 사냥 성공률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굶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찾는 자들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는 기도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찾고, 도움을 찾고, 요령과 방법을 찾지만 성도들은 골방에 들어가 하늘의 하나님을 찾을 때 모든 좋은 것을 누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내가 너희를 대신하여 항상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모든 일 곧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풍부하게 되었음이요, 곧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안에 견고하게 되었음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떤 은사(恩賜)에도 부족함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나니 그분께서 또한 너희를 끝까지 견고하게 하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시리라.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고전1:4-9).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일, 모든 말, 모든 지식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풍부하게 하시며, 어떤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영적 능력의 결핍을 호소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그들 안에 이미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자신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들에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만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한 권의 책(성경)을 읽지 않으면 지식과 지혜의 빈곤을 느끼지만 한 권의 책(성경)만 읽은 사람은 지식과 지혜의 빈곤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면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균등의 원리로 인해 우리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균등의 /원리를/ 따르려 한 것이기 때문이니 곧 지금은 너희의 넘치는 것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채우고 또한 그들의 넘치는 것으로 너희의 부족함을 채워 균등하게 하려는 것이라](고후8:14). 하나님은 성도 서로 간에 부족함을 메꾸도록 균등의 원리를 사용하십니다. 이는 분배의 문제이기도 한데 자발적 분배, 섬기고 주는 것을 통해 부족함을 모르게 하십니다. 이는 돈 문제만이 아닙니다. 지체들 간에 서로의 장점, 능력, 은사 등을 균등의 원리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도록 하심으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인내를 이룸으로써 우리는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지금 없는 것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들은 현재 진행 중에 있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이미 주님은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빌1:6).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평과 불만이 아니라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자족하신 하나님을 통해 자족함을 배우고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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