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사두개인들이 주님 앞으로 나와서 성경 난제를 하나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한 질문이 아니라 주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에서 질문했습니다. [그 날에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어](23).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천사나 영이나 부활이 없다고 믿는 자유주의, 인본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입니다. 이들은 정치적 영향력이 커서 산헤드린 공회를 거의 장악하고 있었으며, 재정적으로 매우 부유한 귀족들이 많았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바리새인들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모두 누룩이라고 표현하시며 주의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시매](마16:6).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위선, 형식주의, 율법주의였다면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성경에 대한 불신, 인본주의였습니다. 이들은 영적 존재, 영적 실체, 사후 세계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같이 말하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뉘니 이는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나 영도 없다 하되 바리새인들은 둘 다 있다 시인하기 때문이라.](행23:7,8).
바울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했습니다. [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15:36).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두개인들은 “너 어리석은 자여”란 책망을 들어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지만 사두개인들처럼 몸의 부활, 문자적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생활어로 하면 “바보들”이란 말입니다. 바보들의 질문은 늘 바보스럽기 마련인데, 주님 앞에 한 도발적인 질문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24절입니다.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는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의 동생이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자기 형에게 씨를 일으켜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24). 이 구절은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형사 취수제에 관련된 법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에 권위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근거해서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이 물음을 보면 이들이 왜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고, 믿는지 그들의 머리 속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형제가 함께 거하는데 그 중 한 명이 죽고 아이가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남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녀에게로 들어가 그녀를 아내로 취해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녀에게 행할 것이요,](신25:5). 이들은 부활이 있다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란 가설적인 질문에 답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고민이자 몸의 문자적 부활이 없다고 믿는 근거를 들어 보십시오. [이제 우리 가운데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자식이 없으므로 그 아내를 동생에게 남겼고 둘째와 셋째도 마찬가지였고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맨 나중에는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 여자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는 그 여자가 그 일곱 사람 중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하니](25-28). 만약 부활이 있다면 부활해서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가? 란 질문입니다. 그들은 이 질문에 도무지 답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지극히 영적이고 성경적인 질문을 성경을 배제한 채 답을 얻으려 하다 결국 성경적 진리를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사두개인들이 바로 그런 꼴입니다. 영적 이해력이 둔한 사두개인들은 이 질문에 영원히 답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영성이 없고, 영적 깨달음이 전혀 없는 법인지라 한 참을 헤맨 후에는 결론은 ‘불신’으로 끝나 버립니다. 아니면 영적 해석, 비유적 해석으로 믿어 버립니다.
주님은 이들의 불신에 가득 찬 부활의 질문에 대해 답변해 주시기 전에 먼저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하고 있느니라.](29). 주님은 먼저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고”.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에 상당히 정통해 있다고 믿었지만 그들은 성경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쁘다거나 종교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알지 못했던 것은 교육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이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공부하는 책입니다. 부활은 성경을 믿음으로만 이해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묻혔던 돌무덤에 와서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도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여러 증인들의 보고를 받았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 기록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가 반드시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나야 하리라, 하신 성경 기록을 아직 알지 못하였음이더라.](요20:9).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서 알지 못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 진리는 아무리 많이 보고, 많이 들어도 믿지 않는 이상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설령 많이 안다고 해도 그것이 성경 기록이 아닌 세상 지식을 통해 안 것이라면 결코 성경 기록을 알지 못하며,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만 납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10:17). 부활 신앙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아는 만큼 내 안에 형성되고, 자라나며, 강해지는 것입니다. 부활절 계란을 아무리 삶아 먹고, 부활절 칸타타를 공연하고, 성가를 합창하고, 부활절 성극을 공연한다고 부활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신문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체험한다고 십자가에 묶여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한 사람의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LA의 한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길을 걷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것이 부활 신앙을 돋우어 준다고 믿는다면 그는 참으로 사두개인만큼이나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고”란 말씀은 모든 불신의 원인이 성경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때로 무식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예리하고도 날카로운 질문인줄로 착각하며 질문하는 바보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알지 못할 때는 늘 어리석은 질문을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하면서도 그것을 모릅니다. 사두개인들은 무식한 질문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혼비백산할 줄로 생각하며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고”라고 하시며 그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소위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의 질문을 쏟아내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지적처럼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나는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불신과 패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성도들이 모르기를 원치 않았던 몇 가지는 이렇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된다는 것이라.](롬11:25).
둘째, 영적 침례에 대해서 [또한 형제들아, 나는 /이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곧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모두 바다를 지나가며](고전10:1).
셋째, 영적 은사에 대해서 [형제들아, 이제 나는 영적 은사(恩賜)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2:1).
넷째, 사역자들의 수고에 대해서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친 고난에 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가 힘에 겹도록 너무 눌림을 당하여 심지어 생명까지도 단념하고](고후1:8).
다섯째, 부활에 대해서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살전4:13). 이런 것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성경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결코 주님이 모르기를 원치 않는 것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알지 못했던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예를 들어 봅시다. [(이것은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조상으로 삼았느니라,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하나님의 권능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사두개인들이 결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한 부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켜 세우실 줄로 그가 생각하였으므로 또한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모형으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사두개인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알지 못할 때 성도는 깊은 불신에 빠지게 되고, 기도가 막히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 사두개인들만큼이나 무지한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는 교인들을 무시하는 발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지창조(天地創造)? 맞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이런 기적들을 행하시는 능력을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이해한다고 해도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제대로 알아야 할 하나님의 권능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란 첫째,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권능이란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의 권능을 알지 못하는 사두개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롬1:16). 복음은 믿는 자를 예외 없이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죄인이라도 깨끗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권능인데 복음 이외의 어떤 권능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의 권능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이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방언, 병 고침, 예언, 투시, 입신 등과 같은 사람들이 자랑하는 어떤 은사라도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권능은 십자가의 선포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기 때문이라.](고전1:18). 여러분은 하나님의 권능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이미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이는 십자가의 선포를 통해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고, 영적 부활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선포 외에 어떤 세련되고 교양있는 화술, 언변, 지식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제한하고, 약화시키고, 덧칠하는 오염물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선포 그 자체가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오늘날 복음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외적인 것들을 더하거나 그 본질을 빼서 희석시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선포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혹시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의 권능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십시오. 셋째, 하나님의 권능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고전1:24).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모든 것(all in all)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무엇이나 다 되십니다. 머리가 되시고, 뿌리가 되시며, 의가 되시고, 지혜가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며, 목자가 되시며, 보호자가 되시고, 남편이 되시고, 친구가 되시며, 변호사가 되시고, 교사가 되십니다. 여러분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필요 그 자체가 되십니다. 이보다 더 큰 하나님의 권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권능이십니다.
저는 모든 성도들이 “복음, 십자가의 선포,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권능을 깊이 깨달아 알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은 사두개인들의 알지 못하는 것들에 지적하신 후 부활에 대해 답변을 주셨습니다. [이는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기 때문이니라.](30). 그들이 궁금해 했던 부활 한 후의 결혼 문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습니다. 부활 때에 우리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게 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모두 남성입니다. 성경에 천사가 중성이나 여성 명사로 나오지 않고 모두 man(남자)로 등장합니다. 부활한 성도는 모두 영적인 몸을 입습니다. 이 땅에서 이혼하고 재혼한 그리스도인들이 저 하늘에서 만나 고민할 것은 없습니다.
31절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르시되](31). 주님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대답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주님은 질문에 대답하시기 전에 주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우리는 이런 책망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3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5또는 안식일에 /성/전 안의 제사장들이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12:3,5). 이런 책망은 계속됩니다.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마19:5).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이는 주님의 준엄한 책망입니다. 너희는 창세기를 읽지 못하였느냐?란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 죄악을 무겁게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신문을 읽고 T.V를 보고 인터넷을 검색하는 데는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면서도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한번 씩 웃고 넘겨 버립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란 책망하시는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그분께 이르되, 이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느냐?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렇다. 주께서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을 완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적이 없느냐? 하시더라](마21:16). 이번에 주님은 시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라운 바로다, 한 말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21:42). 역시 시편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윗이 곤궁(困窮)에 처하여 자기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막2:25). 이번에는 사무엘상(삼상21:1)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라운 바로다, 한 이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하시니라.](막12:11). 이 말씀은 시편118:2입니다. 주님은 읽지 못하였느냐?고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서 부활의 믿음과 부활의 소망과 부활의 권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잘못하게 됩니다. 부활은 먼 미래에 내 몸이 죽고 나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현재, 지금 나의 삶 가운데 가져야 할 신앙이며,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 사역을 하면서 부활의 권능을 알고, 소유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습이 되어 어찌하든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하노니 내가 이미 도달했다 함도 아니요, 이미 완전하다 함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나도 붙잡으려고 따라가노라.](빌3:10-12).
부활 신앙은 현재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날마다 체험되고, 능력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날마다 죽지만 날마다 살아납니다. 부활의 증인이요, 부활의 전파자였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성도는 자아를 죽음에 넘기면 넘길수록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는데 이는 주님이 바로 부활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뚜기는 강하게 넘어뜨릴수록 강하게 일어나듯이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처할수록 부활의 생명은 더욱 강력하게 내 안에 용솟음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고 말씀하셨는데,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려면 날마다 부활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십자가를 졌는데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날 어떻게 십자가를 집니까? 죽은 순간 부활해야 다음날 다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주님이 날마다 부활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먼 장래에 존재하는 소망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삶을 지탱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내 몸에 짊어지는 사람은 주님의 부활 또한 내 몸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삶에 적용되는 부활 신앙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전4:10-11).
성도들이 힘이 없고, 낙심하고, 지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일시적이어야지 장기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일어나며, 언제든지 새롭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죄와 육신적인 기질을 처리하고, 부활의 실재적인 영적 능력과 생명이 우리 안에서 날마다 새 생명으로 행할 힘과 능력을 공급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십자가와 부활은 새의 두 날개처럼, 수레의 두 바퀴처럼, 동전의 양면처럼 상반되는 위치에 있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한 쪽 면이 없는 동전은 동전의 가치가 없고, 한 쪽 바퀴만 있는 수레가 아니듯이 십자가와 부활은 항상 함께 역사합니다.
사도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님을 증거하면서 동시에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이들은 부활의 증인들이었고, 부활을 증거할 때 믿는 자들에게 큰 은혜가 임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니라.](행4:33). 오늘 이 설교가 여러분에게 큰 은혜로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읽지 못하였느냐?” 라고 말씀하신 내용은 다름 아닌 출애굽기였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시니](32). 주님은 모세에게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3:6a)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부활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시면서 그에게 부활 신앙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니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실 때 모세는 무슨 말인지 이미 알아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제를 주의해서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육신의 생명을 다한 옛적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셨느니라(과거)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현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이미 죽고 없다면 주님은 결코 현재형으로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한때 이미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셨던 적이 있다고 밖에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영원히 하나님이시지 “한 때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했던 사두개인들에게 주님은 출애굽기의 예를 들어서 그들에게 부활의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시대에 성도들이 일상의 삶에 가장 필요한 믿음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가능하게 하며, 정상적인 영적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초석입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듣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무리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더라.](33). 정말 놀라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요, 죽음으로부터 일어난 첫 번째 열매이십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이나 복음서에서 죽었다가 일어난 사람들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엘리야는 분명히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 엘리사 역시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 우리 주님은 복음서에서 세 번이나 죽은 자를 일으켰습니다(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 이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점에서 부활한 것은 틀림없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부활은 아닙니다. 이들은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죽음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셨는데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났습니다.1) 이것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과의 진정한 차이입니다.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드러나셨느니라.](롬1:4). 주님은 자력으로 죽음에서 일어나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일어나사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14:9). 주님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일으킴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생명 자체이시며, 부활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이는 승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에녹이나 엘리야는 분명 하늘로 올라갔지만 주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력으로 하늘에 올라 간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스스로 하늘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 올라가십니다.
주님은 생명이시며 부활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주님께서 부활이시기 때문에 죽음에서 자연스럽게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죽어도 주님은 죽음에 그냥 있을 수가 없는데, 이는 주님이 부활이시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워 준 것은 그런 사건들을 통해 주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란 사실을 성경 독자들에게 보여 주고, 믿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대에 영안실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주시지 않습니다. 이미 성경을 통해 부활이심을 증명하셨고, 증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충분합니다.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핵심은 부활 신앙으로 현재의 삶을 어떻게 영위하느냐? 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의 현재적 삶에 미치는 것과 동일하게 주님의 부활은 현재의 우리의 삶에 동일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심을 받은 것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롬6:4). 이는 단순한 영향력이나 종교적 감흥이나 영적 성취감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능이며, 힘이며, 생명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우리 속 사람의 생명이며, 부활의 능력이 죄를 이기는 능력이며, 마귀를 이기는 권세이며, 세상을 거슬러 사는 힘입니다. 부활은 주님께서 우리가 결코 모르기를 원치 않으셨던 영적 진리이며, 성경의 핵심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들이 사두개인들과 같이 부활 신앙이 없어 책망 받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부활로 말미암는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저와 여러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산 자들입니다. 이미 영적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도 날마다 살아나는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환영합니다. 죽음이 올 때마다 승리를 경험하고 생명의 새로움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Know thy Go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월자로서의 하나님 (0) | 2005.04.16 |
---|---|
자족하신 하나님 (0) | 2005.04.15 |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0) | 2005.04.15 |
자존하신 하나님 (0) | 2005.04.15 |
하나님의 주권 (0) | 2005.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