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주권과 선택,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가르침은 오랫동안 교회사에 격렬한 논쟁이 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무한하고,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시다는 점에서 주님의 주권 역시 무제한입니다. [그분께 지으심을 받아 그분께서 통치하시는 모든 곳에 있는 주의 모든 만물들아, [주]를 찬송하라. 오 내 혼아, [주]를 찬송하라.](시103:22). 주님이 지으시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주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방관자가 아니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아주 경미한 사건들 하나까지도 다 눈여겨보시고 간섭하고 계십니다. 하늘의 별들의 이름을 다 부르시는 분이시며, 공중의 새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들의 백합화에게는 입을 것을 주시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살펴보고 계시며, 기록하고 계십니다.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을 병에 담으시고,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다 세시고, 표시하시며,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는 사실을 볼 때 주님이 관여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은 정치적 격변기를 따라 어떤 나라는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지만 주님은 세상의 모든 왕국의 흥망성쇠를 친히 주관하고 계십니다. 최초의 세계 제국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에게 주님은 주님의 주권을 가르치시고자 한 가지 꿈을 주셨습니다. [이 일은 순찰자들의 명령에 따른 것이요, /이같이/ 요구한 것은 거룩한 자들의 말에 따른 것이니 그 목적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들의 왕국에서 다스리시고 자기 뜻대로 그 /왕국/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를 그 /왕국/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산 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단4:17). 국민 투표로 당선된 줄 알았던 사람도 사실은 주님이 자신에게 권세를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은 권세를 하루아침에 회수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주권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자유 의지인가? 란 진지한 고민과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주권이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 집 개나 고양이를 묶어 둘 수도 있고 풀어 줄 수도 있고, 먹이를 하루에 두 번만 줄 수도 있고 세 번을 줄 수도 있고 아예 며칠을 굶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권한입니다. 그런 권한을 갖는 정당한 근거는 내가 주인이란 점입니다. 물론 오늘날 동물 보호론자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간이 동물에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점점 줄어들고 제한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래 인간은 동물을 마음대로 잡을 수도 있고, 길들일 수도 있고, 키울 수도 있고, 양식으로 잡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권입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은 주권 국가임을 선포합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는 대한민국의 헌법이 정한 영토, 영해, 영공입니다.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주권 국가임을 선포합니다. 주권이란 자주적으로, 독립적으로 힘과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의 간섭이나 허가를 받지 않고 자율적인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행사하실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성경에 '주권'이란 말은 전혀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르침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주님을 만유의 창조주요,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주권 신앙입니다. 주권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는 가장 진실되고 참된 신앙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이나 자신의 뜻대로, 원하시는 대로, 기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으실 뿐만 아니라 행하실 수 있는 주권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고, 자신의 고난이 주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정당하게 변론을 해서 그 이유를 따지고 싶었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사오며 어떤 생각도 주께 알리지 아니할 수 없음을 내가 아오니』(욥42:2). 이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고백일 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행하실 수 있다는 ‘주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인정, 순복이 바로 주권 신앙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대하셔도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나를 오늘 죽이실 수도 있고, 파산을 선고하실 수도 있습니다. 질병을 주실 수도 있고, 권세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마땅히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오래 참으실 수도 있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성도를 데려 가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이럴 수가”라고 할 만한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우리는 주님께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돈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살 수 없고, 능력이 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권한이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인간의 주권을 점점 줄여 나가는 추세입니다. 자유를 보장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자유는 점점 제한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디서나 마음대로 짐승을 잡을 수 있었고, 어디서나 낚시를 할 수 있었고, 어디서나 나무를 벨 수 있었지만 오늘날은 법을 정해서 제한을 합니다. 법과 사회 규범을 강화할수록 인간의 자유와 주권은 점점 축소됩니다. 능력의 부족, 지혜의 부족으로 인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 많아서 법이 허용한다 해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주권”이란 마음대로 뜻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왕은 왕의 권한이 있습니다. 장관은 장관의 권한이 있습니다. 기업체의 사장은 사장의 권한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교장의 권한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 지위에 맞는 고유 권한이 있습니다. 비록 이들의 권한은 법과 규칙의 테두리 내에서의 권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서로 그 권한을 인정하고, 그 권한에 순종합니다. 그런 권한이 없다면 그는 왕도 사장도 교장도 아닙니다. 그 권한을 사용할 수 없고,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왕권에 도전하면 반역자가 됩니다. 사장에게 도전하면 그는 해고당합니다. 경찰이 세우면 서야 합니다. 우리는 차나 사람을 임의로 세울 권한이 없지만 경찰은 그런 권한이 있습니다. 왜 세웠느냐고 물으면 그는 경찰이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한 가지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주권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으로 인해 주님을 믿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지만 주님께서 주님이 되시기 때문에 복종하는 일은 더욱 성숙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이 주(主)가 되신다는 한 가지 사실이 모든 이유에 대한 해답이 되고, 결론이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주권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최고의 주권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나 마음대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실 수 있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동적으로 하나님과 대적자가 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자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대적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믿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인식의 기본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줄을 알지어다. 내가 이교도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고 땅에서 높임을 받으리로다.](시46:10). 사람이 자신을 만물의 척도요, 중심으로 놓을 때 하나님의 주권을 짓밟고, 하나님을 입헌 군주국의 상징적인 왕처럼 모셔 두는 정도의 예의만 표시합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 종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전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하실 수 있으신 데 이유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눈치를 보시거나, 허락을 구하거나, 이해와 동의를 구할 필요가 전혀 없으신 데 이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권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계신 분이 없고, 하나님 이후에 오실 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누구에게 상의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만약 전임자가 있다면 그것을 계승해야 하고, 후임자가 있다면 무엇인가를 남겨 두어야 하겠지만 하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시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주] 곧 이스라엘의 구속자(救贖者)인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44:6). 주님은 전능하시므로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으시고, 주님은 전지하시기에 누구에게 조언이나 지혜를 구할 필요가 없으시며, 주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누구에게 부탁을 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통치권, 주관자가 누구신가?에 대한 권위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오늘날, 누가 세상사를 주관하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사탄인가? 인간인가? 아니면 저절로 흘러가는 것입니까?” 신자들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절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만 주님이 어느 정도까지, 얼마만큼 이 세상을 장악하고 다스리는가?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인정하면서도 세상에 만연하는 타락, 악, 범죄, 넘치는 불법으로 인해 주님의 주권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의심합니다. 쉽게 사탄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있고, 인간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인정이 부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낮을 만드신 분이 밤을 만드신 것처럼 주님은 악을 창조하셨으며, 이 세상에 범람하는 악은 주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만들고 재앙(evil)도 창조하나니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사45:7). 주님은 스스로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악을 창조하셨느냐?고 주님께 불평하거나 따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이 하신 일에 대해서 동의나 승인을 구할 이유가 없으십니다. 재가를 받아야 할 이유도 없고, 우리의 이해를 구하셔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만드시건 그것은 주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해 창조되었고, 주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골1:16).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이요, 또 모든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음이니이다, 하더라.](계4:11). 이런 사실을 마음으로부터 깊이 인정하는 것이 주권 신앙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나를 위해 만드셨다면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들은 만들지 말았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나를 위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인권이 강조되고 자아 중심적인 사고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습니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인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물질주의로 점점 정신은 타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성은 실용주의와 합리주의로 교육을 받고, 마음은 쾌락과 물질(돈)과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단련되고, 의지는 인권과 자기 권리를 지키는데 집중합니다.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진정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그분께 돌려드리는 데서부터 죄와 세상을 이기는 경건의 능력이 주어집니다. 이 시대는 인본주의, 자본주의 시대인지라 `인간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하나님을 지나치게 경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신본주의를 지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무궁하시며, 우리의 속 중심까지 다 살피시므로 이 세상에 아무리 작은 일까지도 주님의 주권을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성도들조차 주님은 무엇이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주님의 권한이 좀 제한되었으면 하는 생각할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결말을 밝히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들을 옛적부터 밝히 알리고 이르기를, 나의 계획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일을 모두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 주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일을 다 이루십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들에 계시며 무엇이든지 친히 기뻐하시는 일을 다 행하셨나이다.](시115:3). 이것이 주님의 주권이십니다. 주님은 무엇을 하셔도 상관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도자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는 세상! 이것이 바로 신본(新本) 신앙이요, 주권(主權) 신앙입니다.
어느 누가 주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하라, 하지 말라 말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보라, 그분께서 가져가시면 누가 그분을 막을 수 있겠느냐? 누가 그분께 무엇을 하시나이까 말하겠느냐?](욥9:12). 전도서 기자 역시 동일한 말씀을 했습니다. [왕의 말씀이 있는 곳에 권능이 있나니 누가 왕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전8:4).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래서 누가 왕에게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라고 감히 토를 달 수 없습니다. 성경에 관한 마음의 의문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과 동일하게 두는데서 시작됩니다. 다니엘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분께서는/ 땅의 모든 거주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 안에서든지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이르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4:35). 다니엘은 하나님의 주권이 하늘과 땅 전체임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나 자신의 뜻대로 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5:17) 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아들이실만하고, 완전한 뜻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롬12:2).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성경을 통해 기록해 두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행하시는 일이 자신에게 불리하다 해서 주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주께서 무엇을 하신다 해도 우리는 “주님이 옳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과연 그러하옵나이다. 아버지여, 그리하심이 아버지 보시기에 좋았나이다.](마11:26)라고 고백하신 것처럼 우리는 매사에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해를 구하실 필요가 없고, 미리 동의를 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모두 이해하고 동의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으로 순종해야 할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주님의 주권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침례인 요한과 같은 의인이 헤롯에게 목이 잘려 죽고, 스데반 같은 성령 충만한 전도자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이 주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자녀가 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나거나 불행을 당할 때 “주님, 이것이 주의 뜻이니이까?”하며 울부짖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은 모진 고문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며 죽임을 당하시도록 정해지셨지만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몸을 주님께 산 제물로 내어 드렸다면 불로 태우든지, 칼로 찌르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소관이 아닙니다. 제단 위의 제물은 제사장의 손에 있는 것이지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주권은 헌신의 정도에 비례해서 내 안에 행사됩니다. "I'm nothing"을 선언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all in all)이 되시지만 내가 전부인 사람에게 하나님은 Nothing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 바쳐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다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들을 죽이라고 하십니까? 주님의 주권입니다. 에스겔은 아내를 빼앗겨야 했습니다. 주님은 대언자 에스겔을 위로할 믿음 좋은 아내를 두시지 않고 왜 죽이셨습니까? 주님의 주권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보라, 내가 한 번 쳐서 네 눈이 바라는 것을 네게서 빼앗으리니 너는 애곡하거나 울지 말고 눈물도 흘리지 말며](겔24:16). 에스겔은 이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내의 죽음이었습니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내가 명령받은 대로 아침에 행하니라.](겔24:18). 하나님이 내게 이러실 수가 있는가? 물론 그러실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주님께 대꾸하고, 이유를 대고, 따지려고 할 때 성경은 말합니다. [화 있을진저, 자기를 만드신 이와 다투는 자여! 질그릇 조각은 땅의 질그릇 조각들과 다툴지니 진흙이 자기를 빚는 자에게, 네가 무엇을 만드느냐? 말할 수 있으며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45:9).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할 때 주님은 그에게 화를 선포하십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다툴 수 없습니다. 주님이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한 것에는 이미 이름이 붙어 있으며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도 알려졌나니 그가 자기보다 강하신 이와는 다투지도 못하느니라.](전6:10). 그러나 교만한 사람들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라 오직 인권(人權)만이 강조되고 있으며, 나의 권리를 찾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조차도 하나님께서 나의 권리를 침해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느니, 교회를 안 다니겠다느니, 기도를 안 하겠다느니 망발을 쏟아내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교회에서 주님의 권한이 성도들에게 제한을 받는 실정입니다. 주님의 일과 나의 일이 부딪히면 당연히 나의 일부터 하고 시간 나면 주의 일을 하겠다는 식입니다. 나의 이익과 교회의 이익이 부딪히면 당연히 나의 이익부터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의 정도를 넘어서 주님을 철저히 모독하는 행위이며, 주님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이런 신자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내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십시오. 주님은 과연 나의 주인으로서, 나에 대해 전권을 행사하시도록 내 몸과 마음을 다 주님께 내어 드렸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지 않는 성도는 결코 성령 충만이나 경건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죽음에 내어준 사람이라면 무엇이나 주님께 내어 드리는 것은 상식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주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도끼가 도끼를 가지고 찍는 자를 향하여 자기를 자랑하겠느냐? 어찌 톱이 톱을 켜는 자를 향하여 자기를 높이겠느냐? 이것은 마치 막대기가 막대기를 드는 자들을 향하여 자기를 움직이려 하며 지팡이가 마치 나무가 아닌 것처럼 자기를 들어올리려 함과 같도다.](사10:15). 주객전도, 본말 전도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자들의 특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경배의 대상이신 주님보다 예배당의 건물이나 장식, 성가대, 프로그램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나 헌금을 드리면서 드림의 주체이신 주님보다 자신의 손이나 액수에 관심이 있는 것이 다 도끼, 톱, 막대, 지팡이와 같은 것입니다.
구약의 위대한 대언자였던 이사야는 주님이 주권자란 사실을 깊이 인정했습니다. 그의 신앙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오 [주]여, 그러나 이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우리의 토기장이시오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64:8). 이사야의 신앙은 주님이 우리의 창조주시며, 아버지시란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단지 진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데서 비롯됩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논하면서 이사야의 고백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아니라,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어진 것이 지으신 분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겠느냐?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 덩어리로 하나는 귀한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한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롬9:20-21).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실 권한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권한이 없겠습니까? 당연히 권한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악함으로 인해 주님의 선함이 악하게 비치는 일이 있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봅시다. 마태복음 20:1-15에는 포도원에 들어간 품꾼들에게 일한 삯을 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간 자들, 세시쯤 들어간 자들, 여섯시쯤 들어간 자들, 아홉시쯤에 들어간 자들, 열한시쯤에 들어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청지기에게 지시하시기를, 나중 온자로부터 먼저 온 자까지 품삯을 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품삯은 모두 한 데나리온으로 동일했습니다. 그 때 먼저 온 자들은 그 주인에 대해서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받은 뒤에 그 집 주인에 대하여 투덜거리며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낮의 열기와 무거운 짐을 견딘 우리와 같게 대우하였나이다, 하거늘](마20:11-12). 이것이 사람들의 가치관입니다. 자신들이 받은 정당한 댓가를 생각하지 않고, 주인이 자신의 재산을 마음대로 쓰는 일에 대해서 불평합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일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도 너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난단 말이냐?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한 것이냐?](마20:11-15). 주님은 자신의 권한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난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주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의 선하심과 주님의 고유 권한에 대해 월권(越權) 행위를 자연스럽게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논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이것입니다. 죽음, 악, 고통, 죄와 같은 불필요해 보이는 것들을 존재하게 하셨는가? 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것들을 막을 수 있으실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죄의 기원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셨고, 허락하셨으며,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기 전까지 제한적으로 활동하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죄, 불법, 죄악에 대해서 충분히 control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의 존재 자체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사탄의 존재, 죄의 존재, 어둠과 악의 권세들이 활동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키거나 제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 긍휼, 은혜,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이 더욱 빛나게 되며 때가 되어 이런 것들을 모조리 제거하심으로 주님의 능력은 더욱 영광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된 또 하나의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대로 한다면 우리의 의지는 무엇이 되는가? 란 논쟁이 생깁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한 것인가? 연극 무대의 광대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그런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코 충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불신의 음성은 오히려 이런 점을 부추김으로 하나님을 배척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이 자유롭게 지성과 이성과 감성, 의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도록 명하시고 계십니다. 도덕적인 선택,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믿음과 불신,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자유를 주심으로 그 자유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결코 무대 위의 줄에 메인 인형들처럼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로운 선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이시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입니다. 철로 위에 안전하게 궤도를 잡고 달리는 열차 안이 평안하고 자유롭지만 덜컹거리고 탈선하고 속도 조절이 되지 않는 열차 안에서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확고한 주권이 우리의 자유와 평안을 보장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단한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이곳 미국의 태평양 해변에서 멀리 극동의 부산항까지 거대한 항해선을 출발시킨다고 해 봅시다.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적지는 정해졌습니다. 이것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배에 탄 승객들은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리 저리 다니고, 독서하고, 먹고, 잠자고, 놀고, 이야기하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긴긴 시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 동안에도 배는 예정된 항구를 향해 계속 나아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의 첫발부터 주님이 계획하신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종착역까지 쉼없이 항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선장이 되셔서 항해를 지휘하시고, 이 항로는 누구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파도가 불고, 태풍이 몰아쳐도 주님은 그것들을 모두 다스리시며 나아가실 것입니다. 승객들 중에 난동을 부리거나 선상 반란을 꾀하는 무리가 있다 해도 역사의 배는 쉼 없이 항해합니다. 주님은 선장으로서 계속해서 상황을 통제하시며, 흐름을 장악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주권입니다. 선장이 배를 잘 통제하면 할수록 그 안의 승객들은 더 평안함과 자유를 누립니다. 선장의 지시를 따르고 순종할수록 항해는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는 이와 같은 관계입니다.
주님의 주권은 분명합니다. 주님이 정하신 항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분을 통해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도록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주권입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며, 책임 역시 각자의 몫입니다.
구원에 관련된 주님의 주권을 이해하지 못하여 질문을 던질 때가 많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뿐 아니라 리브가도 한 사람 곧 우리 조상 이삭으로 말미암아 수태하였더니 (그 자녀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으되 택하심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그때에 /그분께서/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되 에서는 미워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롬9:10-14). 이런 장면을 읽을 때 하나님은 왜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는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에서와 야곱의 성격이나 행동이나 지적 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셨고, 내가 야곱은 사랑하되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주권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1절에 있는 대로 [...택하심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11)란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만약 주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행위에 있다면 기독교는 행위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믿음과 은혜가 아니라 땀과 피의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일견 세상의 진리와 이치와 모순 되어 보이고, 우리의 이성과 어긋나 보이지만 전적으로 옳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믿는 자만 구원해 주시는가? 믿지 않고도 정직하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많지 않는가? 행실이 엉망인 기독교인보다 단정하고 인격이 훌륭한 비 기독교인이 하늘 나라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등에 대한 대답으로 주님은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심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우리 자신의 외모, 혈통, 인격, 학력, 재물, 권세 등에 두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시기 위해서, 자신의 언약의 말씀에 두시기 위해서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의 죄를 대속할 어린 양을 마련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장사 지낸 바 되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누구든지 구원을 얻도록 해 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택하심에 따른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본 후에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을 통해 구원에 관련된 모든 것을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은 갈보리의 십자가를 정점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누구라도 주님께서 정하신 구원 방법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매사에, 매 순간 하나님의 주권을 전폭적으로 신뢰함으로 더욱 평안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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