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이렇게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들이 뒤로 돌이켜 하나님을 시험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제한하였도다.](시78:41). 불신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좁은 사고의 틀 속에 가두어 제한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고의 제한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믿음은 유연한 사고와 발상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며, 모든 깨달음에서 그 폭을 넓혀 줍니다. 성경은 이것을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반면 불신과 의심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어떤 한계와 범위 내에 가두어 둡니다. 주님은 결코 메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한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능력의 한계가 없으십니다. 지혜와 명철의 한계가 없으십니다. 공간과 시간의 한계가 없으십니다. 긍휼과 사랑의 한계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 내에서 삽니다. 매우 제한적인 우리로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깨닫나니"(히11:3).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경을 아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에 대해서도 정확히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소위 과학이라 일컫는 것들은 주님이 만드신 것들에 대한 관찰과 실험, 경험과 반복으로 인해 일련의 현상들을 나름대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실험과 관찰이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데, 이런 것들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주님이 행하신 표적과 이적을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이스라엘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제한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불신에 기인한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이 뒤로 돌이켜 하나님을 시험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제한하였도다.](시78:41). 이는 타락하고 불신에 빠진 성도들이 자주 범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시기 위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사용하셔서 “...와 같은”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십니다. “...같고, ...같은”이란 식의 무수한 표현들은 이 세상에 없는 저 하늘의 존재들을 표현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환상 가운데 주님을 본 다니엘이나 에스겔이나 요한은 하나같이 이런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희고 눈같이 희며 그분의 두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두 발은 용광로에서 달구어낸 정제(精製)된 놋 같으며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양날 달린 날카로운 칼이 나오고 그분의 용모(容貌)는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더라.](계1:14~16). “...같다”란 말 외에는 달리 우리가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달리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지식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들과 같다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그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존재로 혼동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을 “..와 같은” 피조물의 어떤 형상으로 격하시키거나 대체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피조물의 신분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리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탈바꿈시키려 하거나, 우리가 개념지을 수 있는 어떤 존재로 만들어 버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 속에 나름대로 하나의 관념이나 이상을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 개념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한 광대하시며, 무궁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어떤 어휘로 탈바꿈하여 우리의 이해 범주 내에 존재하는 존재로 묶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적어도 우리가 그분을 필요로 할 때에 어디에서나 손이 미치는 범위 내에 가두어 두려고 하며, 통제 영역 내에 계시도록 제한하려고 합니다.
욥의 친구 소발은 참으로 지혜로운 한 마디 말을 했는데, 그는 무한(無限)하신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조사한다고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겠느냐? 네가 전능자를 완전히 찾아낼 수 있겠느냐? 그 일은 하늘 만큼이나 높으니 네가 무엇을 하겠느냐? 또 지옥보다도 깊으니 네가 무엇을 알겠느냐? 그 한계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11:7~9). 주님은 한계가 없으시며, 우리의 이성을 아무리 확장하고, 개발해도 주님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주를 보고 무한 광대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주를 두루마리처럼 말아 버리십니다(사34:4). 우주선이 수 십억 년, 수 천억 년에 걸쳐서 날아도 다함이 없는 무한 광대한 우주를 주님은 단지 자신이 앉을 의자라고 말씀합니다(사66:1). 사람들은 바다를 보고 망망대해(茫茫大海)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다를 한 통의 물이라고 하십니다. 미 대륙을 횡단해 본 사람이나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 땅이 너무 크고 넓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구가 자신의 발 받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왕좌요, 땅은 나의 발받침이라. 너희가 나를 위하여 지을 집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에 있느냐?](사66:1). 하늘에 넓게 퍼져 있는 구름들이 주님에게는 발의 티끌이라고 하셨습니다. [... [주]는 회오리바람과 폭풍우 속에 자신의 길을 두시며 구름들은 그분 발의 티끌이로다.](나1:3b). 사람들에게 온 세상의 하늘에 넓게 퍼진 구름들이 얼마나 광대합니까? 그것이 주님에게는 발의 티끌이라면 주님이 얼마나 크시고, 무한 광대하신지 미루어 짐작할 뿐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끝없는 우주일지라도 주님의 눈에 그것은 아주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주에 있는 별들을 다 세십니다. 사람들은 별의 수효를 셀 수 없지만 주님은 다 세십니다. 친히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하늘의 별의 수효를 세는 것은 해변의 모래 알을 세는 것이나 산에 있는 나무 잎의 개수를 세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은 수효를 세실 뿐 아니라 각각의 그 이름을 부르십니다. 주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그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그분의 명철(明哲)은 무한하시도다.](시147:4~5).
주님은 제한이 없으십니다. 지성에서, 명철에서, 능력에서, 연대에서, 생명에서, 그 어느 것 하나 주님은 한계란 것이 없으십니다. 인간은 늘 한계 상황을 만나며, 그 앞에서 절망하지만 주님은 절망이 없으십니다. 다윗이 고백한 바 [그러므로, 오 [주] 하나님이여, 주는 광대하시오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모든 것대로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니이다.](삼하7:22)고 한 대로 주님은 광대하신 분이십니다. [오 [주]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주의 것이오니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이니이다. 오 [주]여, 왕국도 주의 것이오니 주는 높임을 받으사 모든 것 위에 머리가 되셨나이다.](대상29:11). 우리는 무한 광대하신 하나님을 “무한 광대하시다”란 말 외에 하나님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제한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이며, 불경스런 일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한계를 극복하고, 한계를 점차 무너뜨려, 제한이 전혀 없으신 무한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능력, 무한하신 지혜, 무한하신 긍휼, 무한하신 은혜를 맛보는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입니다. 모세는 온갖 기적을 다 일으키시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실 지라도 광야에서 한 달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 중에서 걷는 남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에게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물고기를 한데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하매](민11:21~22).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주]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아니하는지 보게 되리라, 하시니라.](민11:23)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을 제한하는 일은 불신이요, 의심이요, 신성 모독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기적이 상식이 되는 영적 체험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무기력한 것은 성도들 자신의 무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무능력이요, 무기력입니다. 불신은 전능을 무능으로 만드는 영적 독소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임의로 자신의 상식과 이성과 지식에 맞추어 재인식함으로써 무한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마치 신화의 세계에 등장하는 신들보다 약간 더 능력이 있는 신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지듯이 묻습니다. “믿는다고 다 됩니까? 하나님만 믿는다고 다 된다면 뭐 하려고 일합니까? 믿음은 믿음이고 내 할 일은 다 해야지요.” 맞는 말 같지만 이 말 속에는 강한 불신이 숨어 있으며 무한하신 하나님은 상황과 조건이 맞아야만 일하시는 왜소하고, 제한적인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요, 연약한 지체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어떠함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일 인분의 고기도 만들 수 없지만 주님은 200만 명이 한 달간 질리도록 많이 먹을 고기를 만드시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많고 적음, 기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 부지기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엘리사가 이르되,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일 세아가 일 세겔에 팔리고 보리 이 세아가 일 세겔에 팔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때에 한 귀족 곧 손으로 왕을 부축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하늘에 창들을 내신다 한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보라, 네가 네 눈으로 그것을 보리라. 그러나 너는 그것을 먹지 못하리라, 하니라.](왕하7:1-2). 엘리사와 한 귀족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귀족은 말하기를, “주께서 하늘에 창들을 내신다 한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하며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제한해 버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가능한 하나님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현재 사마리아는 기근으로, 전쟁으로 온 땅에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먼 장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일 이맘때에 있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이 없는 이 땅에 내일이면 먹을 것이 넘쳐 밀 일 세아(7.3리터-약 2갤런)가 일 세겔에 팔린다고 합니다. 지금 나귀 머리 하나가 은 여든 개,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이 은 다섯 개에 팔리는 시점입니다(왕하6:25). 한 귀족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보는 대신 현실의 상황을 보았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현실의 여건에 맞추어서 제한해 버리는 일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나같은 특징입니다. 만약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영적 생활은 능력 부재의 삶이며, 그의 생각은 인본주의와 세상적 근심과 염려가 끊이지 않으며, 멋대로 믿는 신자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누가 주님은 무엇과 같은가? 주님은 누구와 같은가?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주님은 무엇과도 같지 않고, 누구와도 같지 않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무한하신 분이 없고, 완전하신 분이 없고, 전능하신 분이 없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 없고, 무소부재하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누구와도 같지 않으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0::18에,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느냐? 또 그분을 어떤 모습과 비교하겠느냐?](사40:18)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은 무엇과 누구와 비교하거나 같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반복적인 가르침입니다.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누구와 동등하다 하겠느냐? 하시니라](사40:25).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왜 영적인 능력을 전혀 소유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상식, 지식의 틀 속에 나름대로 형성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마음 속에 만들어 둔 하나님은 생명도, 능력도, 지혜도 없는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 속에 세워둔 이런 우상은 자신이 먹이고, 생명력을 부여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를 통해 믿음으로 마음 안에 빛으로 임한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지혜를 주시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이 때 우리는 다만 욥기의 엘리후처럼, [보라, 하나님은 위대하시니 우리가 그분을 알지 못하며 그분의 햇수를 헤아릴 수도 없느니라.](욥36:26)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유한한 우리의 이성으로 무한한 주님을 이해할 수 없고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위대하심(크심)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주]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지어다. 그분의 위대하심은 측량할 수 없도다.](시145:3).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긍휼이 크시고(느9:31,시103:11, 시145:8), 주의 친절이 크시고(시117:2), 주의 권능이 크시고(시147:5), 계략이 크시며(렘32:19), 주의 신실함이 크시고(애3:23), 주의 선함이 크시고 주의 아름다움이 크십니다. [그분의 선함이 어찌 그리 크시며 그분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크신가! 곡식이 청년들을, 새 포도즙이 처녀들을 즐겁게 하리로다.](슥9:17). 주님은 증거하시기를, 하나님은 모든 것보다 크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9). 주님은 모든 것보다 크십니다. 당연히 이 우주보다 크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보다 크시며,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보다 크십니다. 주님은 세상에 있는 그(마귀)보다 더 크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요일4:4). 무엇보다 주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십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주님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요일3:20). 주님은 무한히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천체 망원경으로 우주의 크기를 잴 수 없듯이,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크심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큰산에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크심을 묵상할 때, 온 세상은 지극히 작은 먼지처럼 보이며 진정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마음 가운데 자리 잡게 됩니다.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 모든 것보다 크신 하나님, 마귀보다 크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면 나는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생활의 원리이며, 살아있는 믿음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을 두면 그는 무능력자가 되고, 하나님의 지혜에 제한을 두면 그는 무지한 자가 되며,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 제한을 두면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없게 되며, 하나님의 크심에 제한을 두면 하나님을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신들처럼 거짓 신들로 만들게 됩니다. 사람은 젊어서는 힘이 있고, 지혜가 있다가도 늙으면 지혜와 힘이 다 사라지고 맙니다. 사람의 생명은 잠시 잠깐입니다. 사람의 부와 권세와 명예 역시 풀과 같이 시들며, 꽃과 같이 땅에 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동일하시며, 그 권세와 힘과 지혜와 영광과 모든 것이 변하거나 시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하나님만큼이나 무한합니다. [주는 동일하시고 주의 연대는 끝이 없으리이다.](시102:27). 무한하다는 것은 아무리 퍼내어도 조금도 감소하지 않으며, 아무리 더해도 조금도 더해지지 않는 것이며, 훼손되거나 약해지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한에서는 얼마를 빼도 무한이며, 얼마를 더해도 무한입니다. 학창 시절 수학 시간에 여러분은 무한대(∞)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하셔도 능력, 힘, 지혜가 조금도 감소하지 않으시며, 고갈되지 않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영존하시는 하나님, [주] 곧 땅 끝들을 창조하신 이는 기진(氣盡)하지 아니하시고 피곤하지 아니하시며 그분의 명철(明哲)은 찾을 길이 없도다.](사40:28). 이것이 바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속성이요, 특징입니다. 이 하나님으로 인해 성도들은 쓰러졌다가도 일어나며,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나 도리어 살아나는 기적같은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하나님이 우리의 자원이 되시고, 근원이 되시고, 뿌리가 되시고, 머리가 되시고, 본체가 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능력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처해 보아야 합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아 보아야 하며, 환란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은 평안한 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그가 넘어질지라도 완전히 쓰러지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자신의 손으로 그를 붙드시기 때문이로다.](시37:24). 우리의 능력은 주님에게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의지력이나 정신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통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안이 나를 가르치고 다스릴 때 죽음의 고통도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예화) 어떤 감옥에 내일 화형 당하기로 되어 있던 죄수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는데, 밤에 촛불을 켜놓고 마지막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한 형제가 실수로 손가락을 촛불에 뎄는데, 너무 뜨거웠습니다. 이 촛불에 손가락이 살짝 데인 것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내일 장작더미 위에서 어떻게 화형의 고통을 견딜까 걱정을 했습니다. 그 때 한 형제가 “형제여, 두려워 마시오. 촛불에 데인 것은 실수였지만 화형 당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나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불타는 장작더미에서 고통의 신음이 아닌 찬양을 부르며 죽었습니다. 무한하신 주님의 능력이 그들을 붙들었을 때 그들은 육신이 타는 고통보다 더 큰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이 그들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촛불에 데는 고통도 견디기 힘들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온 몸이 타는 불 길도 뜨겁지 않는 법입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이는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사악한 자는 넘어져서 해악에 빠질 것임이니라.](잠24:16)고 했고, 미가는 [오 내 원수야,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쓰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둠 속에 앉을지라도 [주]께서 나를 위하여 빛이 되시리로다.](믹7:8)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연약한 죄인들에게 주시는 능력입니다.
주님의 무한하심은 그분의 부요하심에서 잘 드러납니다. [모든 성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富饒)함을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하게 하시고](엡3:8). 그리스도의 부요하심, 풍성하심은 무한대입니다. 얼마나 부요하신지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쓰면 쓸수록 더 풍성해집니다. 여러분은 무한하신 주님의 풍성하심, 부요하심에 대해서 아십니까?
주님은 자신을 부르는 자들에게 부요하십니다. [이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 같은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나니](롬10:12). 여러분이 기도로 무엇을 요청해도 주님은 다 들어주실 수 있으며,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다 얻어도 주님의 부요하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저 하늘에는 성도들이 조금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땅으로 내려 보내지 못하고 있는 모든 영적인 복들이 그냥 가득히 쌓여 있습니다. 구하지 않음으로 얻지 못한 것은 죄입니다(약4:2).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부요합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주님은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부요한지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라고 말씀하셨고, 구하는 자들에게 후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약1:5). 한번 쓰면 없어지는 약처럼 중요한 때에 쓰기 위해 주님은 무엇을 아껴 두시고 보관하셔야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합니다. 값없는 선물로 아무리 나누어주어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한입니다.
주님의 부요함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는 원천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다.](고후6: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께서 부요하셨으나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자신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주님은 성도들의 영적 가난을 원치 않으십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에게 생명의 빵을 공급하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는 생수를 무한정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영적 생명이 차고 넘치게 하시며, 기쁨이 흘러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결코 모자라거나 부족한 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부요하심은 무한합니다.
주님의 부요하심은 영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데도 부요하십니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19). 주님이 공급하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산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공급 기준은 “자신의 부요하심”입니다. 주님의 부요하심이 무한하시기에 우리는 모든 필요를 언제든지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요하신 주님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을 다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고자, 얻고자 싸우는 삶이 아니라 나누어 주고자 애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선을 행하게 하며 선한 일들에 부요하고 베풀기를 좋아하고 기꺼이 나누어 주게 하라.](딤전6:18). 이것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공급을 받는 성도의 삶입니다. 마치 전원이 끊어질까 봐 건전지를 사두는 사람들이나 수돗물의 공급이 중단될까봐 식수 통을 따로 준비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주님의 공급이 중단될까봐 따로 예금 통장을 만들어 둘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자원은 무한하시므로 파산도 없으시고, 공급의 단절도 없으시며, 감소나 고갈이 전혀 없습니다.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 아침 여러분은 잠에서 깨어날 수 없거나 숨을 쉬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어도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중단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가난하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가난한 자들에게 주님을 따로 준비하신 부요하심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어 보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지 아니하셨느냐?](약2:5). 이것은 물질적 풍요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부요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만 이 세상 사람들이 믿음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문제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부족한 것은 돈이나 학벌이나 외모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적은 믿음, 연약한 믿음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없어서, 모자라서, 적어서, 한 개 밖에 없기 때문에 훗날을 도모해서 못 주시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부족해서 못 주시는 것도 없으십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충분하시며, 무한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우리에게 넘치도록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성령을 물 붓듯이 넘치게 부어 주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더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마7:11). 여기서 더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더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이 두 구절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쉽게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좋은 것이 성령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성령은 만물을 충만케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해지고, 소망의 충만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렇게 되기를 구했습니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3:19). 하나님이 우리를 가득 가득 채우고도 부족함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으시며,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입니다. 주님은 유한하거나 제한적인 것이 없으십니다. 소위 캘빈주의에서 주장하는 제한 속죄설이란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마귀의 교리입니다. 주님의 피는 제한적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무궁한, 무한한 대속과 은혜와 생명과 의로움을 주는 피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무한하심은 주님의 통치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정권과 화평이 번창하여 끝이 없으며 /그가/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군림(君臨)하여 그 왕국을 정비(整備)하고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시리라. 만군의 [주]의 열심(熱心)이 이것을 이루리라.](사9:7). 주님의 통치권은 이 지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끝없이 우주로, 우주로 팽창될 것입니다. 우리는 천년 왕국 이후에 끝이 없이 번창하는 주님의 정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 제한이 없으시고, 한계가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조명과 인식이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경에 계시된 주님을 알고, 우리의 사고와 인식을 크게 넓히는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