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명을 볼 수 없지만 믿습니다. 생명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지만 믿습니다. 계시된 진리에 대한 이해는 자연히 믿음의 발생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오는 것이지 사색하거나 관찰하거나 실험하거나 반복적인 경험에 의해서 생긴 사유의 결과가 아니며 지성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깊은 지적 탐구와 학문적 연구에 의해서 이르는 것이 아니며 철학이나 과학이나 소위 성인들이라 일컫는 사람들의 삶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람들의 깊은 연구에 의해 얻어진 소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하신 선포에 전적으로 기인합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가 그러하듯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진리 역시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에 대해서만 진지하게 귀기울이고, 주님이 비추어 주시는 빛으로 기록된 말씀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무조건 배격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무조건 아니라고 우깁니다. 그들은 결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에만 집착함으로써 논쟁을 벌입니다. 욥은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 관찰하고 아는 것을 줄줄이 열거하였지만 이 한 가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찾는가? 명철(明哲)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사람이 그 값을 알지 못하며 산 자들의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욥28:12-13). 우리는 이 세상의 일도 다 알지 못합니다. 욥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러하거늘 지혜는 과연 어디서 오는가?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욥28:20). 우리는 성경의 모든 진리를 결코 다 알 수 없지만 결코 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교리 역시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삼위일체란 말을 많이 씁니다. 불신자들도 삼위일체(三位一體)야 말로 진리의 핵심 요체란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나오는 용어가 아닙니다. 하지만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신학 용어입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용어이지만 성경이 가르쳐 주는 용어입니다. 삼위일체는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도 많고, 이단도 많습니다. 삼위(三位)를 강조하면 삼신론에 빠지게 되고, 일체(一體)만 강조하면 여호와의 증인이나 예수 유일 주의(Jesus Onlyism)에 빠지게 됩니다. 삼신론이란 고대 바빌론 종교에서 기인한 삼두신(머리가 세 개인 신)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님롯은 바벨론을 건설하고, 죽었는데 그의 어머니이자 구스의 아내요,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Semiramis)는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들을 탐무즈(Tammuz)라 부르며 죽은 남편 님롯을 하늘의 주(The Lord of Heaven), 아들 탐무즈를 메시야(The Pagan Messiah) 그리고 자신은 하늘의 여왕(The Queen of Heaven)이라고 선포하여 최초에 삼두신(三頭神) 종교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성경에는 바알, 탐무즈(Tammuz-겔 8:14)로 그리고 여신 아스다롯(Ashtoreth 삿2:13)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을 카톨릭에서는 성부, 성모, 예수(성자)로 변질시켰습니다. 삼신론은 유럽, 이집트, 인도 등 어느 나라에나 있는 종교 사상입니다. 예를 들어 시리아에서는 니누스(Ninus), 헤라클레스(Hercules), 벨티스(Beltis)를 삼신으로 섬기며, 그리스에서는 제우스(Zeus), 디오니수스(Dionysus), 아프로디테(Aphrodite)를 삼신으로 섬깁니다. 로마에서는 쥬피터(Jupiter), 아티스(Attis), 시벨레(Cybele) 혹은 다이아나(Diana- 헬 아테미 행19:27), 이집트에서는 라(Ra), 오시리스(Osiris) 혹은 호루스(Horus), 이시스(Isis), 인도에서는 비시누(Vishnu), 크리쉬나(Krishna), 이시(Isi) 혹은 디바키(devake), 중국에서는 판구(Panku), 예(Yi), 헹오(Heng-O) 혹은 마트수포(MaTsoopo), 바벨론에서는 벨루스(Belus-바알), 탐무즈(Tammuz), 레아(Rhea) 혹은 이스터(Ishtar)를 삼신으로 섬기고,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오딘(Odin), 발터(Balder), 프리그(Frigg-여기서 여신의 날 금요일 프라이데이(Friday)가 유래하였다.) 혹은 프레이야(Freyia)로 삼두신(三頭神)으로 숭배해 왔습니다.
반면 예수 유일 주의자란 아버지의 이름도 예수이고, 성령의 이름도 예수이며, 침례를 받을 때는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다만 세 가지 양식(형태)로 나타나셨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쉽게 예를 드는 것 중에 하나는 “물은 평상시에는 액체 상태의 물로 존재하지만 어떤 조건에서는 고체상태의 얼음으로 또 어떤 때에는 기체상태의 수증기로 존재한다. 즉, 물이라는 같은 본질이 때에 따라 세 가지 다른 양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한 인격, 세 이름"이며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단지 한 인격체가 세 가지 계시의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존재하셨고, 그분이 자신을 땅에 계시하고자 하셨을 때는 예수, 곧 아들로 드러내셨으며, 이제 그 아들(the Son)이 하늘에 올라가 계신 고로 하나님은 자신을 성령님으로 계시하시는 것이 양태론, 예수 유일 주의자들의 핵심 주장입니다. 이 두 주장은 다 이단(異端)이며,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을 성경에 맞춘 결과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해 바른 믿음과 바른 이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부 하나님 한 분만을 인정합니다. 그들이 소위 전도라고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에 온 힘을 쏟습니다. 반면 예수 유일 주의자들은 예수님 한 분만을 인정합니다. 오늘날 오순절 교회들이나 은사주의 교회들은 성령 하나님만 외칩니다. 우리는 어느 하나 결코 뺄 수 없으며, 어느 하나 더 강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십니다. 이 사실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신명기 6:4에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주]시니](신6:4)라고 선포합니다. 스가랴 14:9에 [또 [주]께서 온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오직/ 한 [주]만 계시며 그분의 이름도 하나만 있으리라.](슥14:9)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이요, 유일신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다른 이가 없습니다. 범신론(汎神論)과 다신론(多神論)은 인간들의 상상의 소산물이며, 마귀의 작품이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가 아닙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無神論)자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신(神)이 되고 싶거나 자아를 숭배하는 자들이며, 성경에 따르면 바보들입니다(시14:1, 50:1).
신명기 4:35,39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네게 보여 주신 것은 너로 하여금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그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4:35), [그런즉 이 날 너는 위로 하늘에서와 밑으로 땅에서 오직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그것을 마음 속으로 깊이 생각하고](신4:39). 400년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그들은 이집트인들이 섬기는 수많은 신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나일강을 숭배하는 물(水)신, 파라오로 상징되는 태양 신 라(Ra), 오시리스, 이시스 3인방에 달 신, 이슬의 여신, 비의 여신, 천둥· 번개의 신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신들의 세계에서 살다 나왔습니다. 이제 들어가게 되는 가나안 역시 우상 숭배의 본 고장이라 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40년 여행 동안 가르치신 내용이 바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가 만연했던 이스라엘을 향해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주님이 강력하게 설파하셨던 진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란 사실입니다. 이사야 45장은 온통 이 진리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나는 [주]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으며 나 외에는 하나님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내가 네게 띠를 띠어 주었으니 이것은 해 뜨는 곳과 서쪽에서부터 온 사람들로 하여금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라. 나는 [주]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5-6).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이 무너질 때 그들은 급격하게 타락했고,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사람은 한 분 하나님 외에 더 많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우상들은 마음밖에 있게 되고, 많은 우상을 사랑하면 한 분 하나님이 마음밖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우상이 들어 올 수 없고, 우상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굳게 붙들고 저 주인을 업신여길 것임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눅16:13). 맘몬은 재물의 신(神)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분향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분향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사람은 결코 다른 어떤 신에게도 경배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들의 고향이요, 그리스 신화로 본고장인 아테네의 마르스 언덕에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그때에 바울이 마르스의 언덕 한가운데 서서 이르되,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일에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 이는 내가 지나다니며 너희가 경배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제단을 발견하였음이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분을 내가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리라.](행17:22~23). 이들에겐 얼마나 많은 신들이 있었던지 그 이름을 다 적을 수 없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란 제단도 있습니다. 마치 국립 묘지에 무명(無名) 용사의 비석(碑石)과도 같습니다. 이들이 만약 하나님을 믿게 되면 많은 우상들 옆에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께’라고 쓰고 같이 경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제단들 가운데 있는 한 신(神)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우상, 주님과 마귀를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마귀들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으며 {주}의 상과 마귀들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없느니라.](고전10:21).
이스라엘 자손들은 솔로몬의 성전에서 예배도 드리면서 우상도 섬겼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며,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늘들을 창조하신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친히 땅을 조성하고 만들고 견고하게 하였으되 땅을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거하도록 조성하였느니라. 나는 [주]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18). 창조주, 구속자, 심판자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주님이십니다. [너희는 알리며 그들을 가까이 데려와 참으로 그들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게 하라. 이 일을 옛적부터 밝히 알린 자가 누구냐? 그때부터 이 일을 말한 자가 누구냐? 나 [주]가 아니냐?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의로운 하나님이며 구원자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고 너희는 구원을 받을지어다.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기 때문이니라.](사45:21-22). 하나님은 친히 수 차례에 걸쳐 유일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이지 여러 명인지 조사하고 탐구하고 고민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므로 참 하나님과 피조된 하나님으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여호와의 증인들 주장처럼).
우리는 성경이 선포하는 바 그 말씀 외에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롬3:4)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니...](고후1:18a).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시작되는 신약 성경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주님은 서기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모든 명령 중에서 첫째 /명령/은 이것이니,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주}시라. ... 그 서기관이 그분께 이르되, 옳소이다. 선생님이여, 이는 한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 외에 다른 이가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선생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나이다.](막12:29~32).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이 진리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한 분 하나님 외에 누구도 경배의 대상이 아니며,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란 유일신 신앙은 성경의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가르침은 너무나 선명합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하실 분은 한 하나님이시니라.](롬3:30). 사도 바울은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습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 속에 계시고 또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엡4:6). 역사상 순수한 신앙을 소유했던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결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떠난 적이 없으며, 이 신앙에 목숨을 걸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다른 피조물도 하나님이라고 경배하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이나 천체나 신들을 하나님처럼 부르거나 따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라고 부르신 하나님
우리는 이제 다시 성경을 펴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말씀들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진리를 얻기를 원합니다. 창세기 1:26-2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形像)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1:26~27). 우리는 이 구절에서 어떤 이론이나 사상을 배격하고 오직 기록된 그대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한 분 하나님(단수-하나님들이 아님)께서 ‘우리’라고 말씀하셨고, 다시 ‘자신의(단수) 형상’ ...‘하나님의 형상’(단수)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복수형으로 말씀하셨다가 단수형으로 말씀하신 것을 분명히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신데 복수형으로 부르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3:22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 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시고](창3:22). 주님은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심으로 다시 복수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주 하나님은 단수인데 우리는 복수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모순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오류라고 결단코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접할 때 주님께서 진리를 조명해 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믿는 마음이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異意)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에 대해 반론(反論)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지(無智)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 의미를 조명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창세기 11:5-8입니다. [[주]께서 사람들의 자녀들이 세우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시니라. [주]께서 이르시되, 보라, 백성이 하나요, 또 그들이 다 한 언어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이 상상하여 하고자 하는 어떤 일도 금하지 못하리라.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混雜)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 세우기를 그쳤더라.](창11:5~8). 5절에는 분명히 [주]께서 내려 오셨습니다. 7절에는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맨 첫 부분에서 무려 세 번에 걸쳐 한 분 하나님이 “우리”라고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라고 말씀하신 것 역시 ‘한 분’이라고 말씀하신 것만큼이나 동일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또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마28:19).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세 번 침례를 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 침례를 줍니다. 그런데 이름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입니다. 이 셋은 모두 하나님이라 불렸으며, 모두 주라 불립니다. 이 셋은 상호 교환될 수 없는 이름이지만 또 상호 교환되기도 합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라 불리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기도 하고, 그냥 성령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 몸에 대한 주님의 증거를 보면 이 진리는 너무나 확실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고전3:16~17). 우리 몸은 하나님의 전이며,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는 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과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고전6:1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성령이시고, 하나님의 전이 성령님의 전(殿)이라고 불리는 것을 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씀을 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가 이번에는 “내가(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고”라고 말씀하심으로 성령이 하나님이시란 진리를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4:24에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한(a)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주}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두 하나님, 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한 분 하나님, 한 분 주님만을 말하며, 그렇게 믿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이시며, 주란 사실을 믿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그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하지만 말이 됩니다. 1+1+1=3이지만 1x1x1=1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1/3, 성령이 1/3의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1/3의 하나님이시라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가 셋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며, 셋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라 불리는 분이 분명 셋입니다. 그리고 이 셋은 한 분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한 단어로 삼위일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지 않고, 셋으로 합하지 않고 온전히 단일함 가운데 성경의 증거대로 삼위일체로 믿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3위 1체를 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차례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진리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상 숭배자에 불과합니다. 성령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의 몸은 결코 하나님의 전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신비로 인정하지만 결코 혼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화법-- 우리, 자기 계시
우리 주님은 창세기에서 사용하셨던 것과 똑 같은 화법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요14:23). 주님은 “아버지가” 또는 “내가”라고 하시지 않고, “우리가...우리의 거처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복수형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이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주님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동시에 “우리와 같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을 더불어 “우리”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성경을 세밀하게 읽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결코 진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지상 생애 동안 아버지의 모든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셨을 뿐 아니라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것이요, 낮아지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빌2:6).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고후4:4).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이시요, ...](골1:15a),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히1:3a).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에 예수를 볼 때 하나님을 본 것이며,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를 찬양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시오, 아버지와 동등하심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다면 주님을 떠나던가 율법대로 돌을 들어야 마땅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그렇게 반응했습니다. 주님은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시니](요10:30)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가늠자요, 구원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결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구원이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을 때, 주요 그리스도로 믿을 때 구원이 임합니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을 신성 모독으로 받는다면 그들은 유대인들처럼 돌을 들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기서 예수님을 향해 돌을 들어야 합니다. 아니면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에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요10:31).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자칭하며, 신성 모독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요, 신성 모독 때문이니 곧 사람인 네가 스스로 하나님으로 행세하기 때문이니라.](요10:33).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약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셨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그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내가 곧 아버지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자기 선언은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매](요8:58).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내가 있었느니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있느니라”(I am)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란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출3:14). [I AM THAT I AM. I AM] 이 보다 더 확실한 자기 계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분은 I AM(하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I AM이십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조금의 오해도 없이 정확하게 알아들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돌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 그분을 치려 하거늘 예수님께서 몸을 피하사 /성/전에서 나가시되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나가시니라.](요8:59). 예수님은 결코 “오해 마시오. 나는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요”라고 설명하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말 실수를 하거나 표현에 문제가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은 정확히 말씀하셨고, 유대인들은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히브리서 1:8을 보십시오. [이 아들에게는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왕좌는 영원무궁하오며 주의 왕국의 홀(笏)은 의의 홀이니이다.](히1:8). 이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오 하나님이여...”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시편 45:6을 인용한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왕의 왕좌는 영원무궁하오며 왕의 왕국의 홀(笏)은 의로운 홀이니이다.](시45:6). 시편에 기록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시란 사실을 우리는 말씀을 왜곡하지 않는 이상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란 직접적인 구절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3을 보십시오.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느니라.](요1:1~3). 우리는 여기서 “함께”란 말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셨고, 말씀은 창조주이십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1:14).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이것을 경건의 신비라고 말합니다.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지사 영접을 받으셨느니라.](딤전3:16).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Identity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무엇이며 누구란 말입니까? 답이 없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가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아버지 없는 아들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란 말 역시 아들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아들이 없는 아버지는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누구든지 범죄하며 그리스도의 교리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없는 자며 그리스도의 교리 안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자니라.](요이1:9).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이 쓰인 경우가 천사들(창6, 욥1,38), 이스라엘, 그리스도인들, 아담 이렇게 다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only begotten Son)이십니다. 하나님은 몇 차례나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마3:17, 17: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분명하신데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본래 하나님이시란 뜻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종들 사이에서 먹고 자며 같이 지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 종이 “나는 귀족의 아들이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본래 귀족이었고, 지금도 귀족의 신분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나는 귀족의 아들이란 말은 나는 귀족이란 뜻입니다. 듣는 사람은 다 그렇게 알아듣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나중 문제입니다. 말의 의미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신의 아들이라고 하면 내가 사람 모양으로 있지만 나는 본래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민족의 신화나 전설이나 동화에도 ‘신의 아들은 모두 신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지 다른 용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은 아버지가 하나님이고 자신도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어떤 유대인도 그렇게 알아듣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일반 어법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만 그 말을 못 알아듣고 아들이 어떻게 아버지냐고 우겨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입니까? 아닙니까?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일반 어법이며, 관용구로써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5:17-18을 보십시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인하여 더욱더 그분을 죽이고자 하니 그 까닭은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셨기 때문이더라.](요5:17-18). 주님은 분명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광분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셨기 때문이더라]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들’이란 말의 정확한 용법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말을 자연스럽게 정확하게 알아들었습니다. 이 말을 곡해(曲解)하는 사람들은 아마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려는 자들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동격의 선언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저 복된 소망 즉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라.](딛2:13).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발견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곧 우리 구원자의 눈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2:3). 성경을 비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읽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아는데는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믿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말씀에 변개를 가하거나 거룩하지 않는 손으로 말씀에 손을 대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믿거나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믿어야 하며,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기록한 베드로의 증언을 들어봅시다.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께서 너희가 잠시 고난을 받은 뒤에 너희를 완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정착시키시리니](벧전5:10),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우리와 더불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얻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1:1).
마리아의 찬양시에도 동일한 고백이 나옵니다. [내 영이 하나님 곧 내 구원자를 기뻐하였나니](눅1:47).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었으며, 누구로 믿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예외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도마의 신앙 고백은 우리의 신앙 고백과 동일합니다. [도마가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요20:28-29). 도마는 분명히 하늘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지만 자신의 눈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모든 제자들이 마찬가지였으며, 주님은 그 고백을 일컬어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라고 그의 고백을 인정하셨습니다. 우리는 도마와 달리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에 복이 있습니다.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은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복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예는 또 있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행7:59). 여기서 스데반은 하나님을 부르며, “주 예수님이여”라고 했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본 후에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다면, 스데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주 예수님이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두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처녀가 수태하여 낳은 아들은 그냥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입니까? 성령의 영감을 받은 마태는 이 구절을 이렇게 정확하게 풀어 주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뜻이라.](마1:23). 처녀에게서 난 것도 기적이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아이가 하나님이란 증거입니다. 이 아이에 대한 예언은 계속됩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여 있고 그의 이름은 기묘라, 모사라, 강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임이라.](사9:6). 이 아이는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라 불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달리 설명을 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믿을 뿐이며, 우리의 사전에 있는 가장 적합한 어휘인 삼위일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성도들의 마음 상태가 하나님 앞에 단순한지, 정직한지, 순수한지를 가늠해 주는 잣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보다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이나, 교만한 자들은 결코 이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탄생에 관련된 예언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박힌 예언 역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확고히 지지합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곡하기를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기를 사람이 자기의 처음 난 자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듯 하리로다.](슥12:10). 하나님은 환란 후에 자기 백성 유대인들에게 은혜의 영과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시는데, 그들은 누구를 봅니까?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는 분명 여호와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이 직접 사람들에게 찔릴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 듯이 십자가에서 못과 창에 찔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스가랴 12:10의 성취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성경 기록이 다시 이르되, 그들이 자기들이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19:37). 이 일은 요한 계시록 1:7에서 성취됩니다. [볼지어다,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나니 모든 눈이 그분을 보겠고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으로 인하여 통곡하리니 참으로 그러하리로다. 아멘.](계1:7). 여기서 재림하시는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대언했는데, 그 대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주] 곧 이스라엘의 구속자(救贖者)인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44:6). [오 야곱아, 내가 부른 자 이스라엘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사48:12). 우리는 하나님이 분명한 자기 계시를 통해 이 분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이 말씀이 무려 4번이나 나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주} 곧 전능자께서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마침이라, 하시더라.](계1:8),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곧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라, 하시더라.](계1:11). [또 내게 이르시되, 다 이루어졌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의 샘에서 값없이 주리라.](계21:6),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22:13). 우리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분이심을 믿는데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동일한 분이란 분명한 말씀의 증거는 무궁무진합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믿음에 불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돋우어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설명과 이해의 범주가 아니라 “계시의 영역”이란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우리의 분명한 태도를 선택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나 곧 나는 [주]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43:11). 하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나는 이집트 땅에서부터 [주] 네 하나님이니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알지 말지니 이는 나 외에 구원자가 없기 때문이니라.](호13:4). 성경에는 여러 구원자란 말은 없습니다. 구원자는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이 구원자에 대한 계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신약 성경의 핵심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성경으로 그대로 두고 볼 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한 분이십니다. 디도서 2:10에, [훔치지 말고 온전히 선하게 충성하는 것을 보이게 하라. 이로써 그들이 모든 일에서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교리를 돋보이게 하리니](딛2:10). [저 복된 소망 즉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라.](딛2:13). 이 진리는 계속 반복됩니다. 디도서 3:4, 3:6을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딛3:4),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딛3:6)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안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안 믿는다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면 그 피는 속죄의 피가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하늘에 증거하시는 세 분이 계시기 때문이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한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5:7). 세 분은 셋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셋은 하나! 이것을 한마디로 “삼위일체”라고 말합니다. 삼위일체는 더 이상 신학 용어가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어디서나 사용하는 말입니다. 셋은 셋이 아니라 하나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믿음 외에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또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로 하여금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신 것과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라.](요일5:20).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 세분이 하나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막연한 시도대신 성경이 선포하는 대로 따라 가면 궁극적으로 삼위 일체에 도달하게 됩니다. 삼위일체는 결코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사상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끝없이 삼위일체를 배격했습니다. 다만 성경의 순수성을 따라 그 빛만 따라가는 사람들이 삼위일체의 진리를 고수했으며, 진리의 시금석으로 삼았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이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겸손히 빛을 구할 뿐입니다. 결코 진리의 성경 위에 앉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셋이 하나" 이것이 성경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는 셋이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외의 어떤 하나님도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자]란 이 시리즈의 공부를 통해 여러분은 성경의 하나님을 마음 속에 깊이 받아 들이고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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