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욥의 증언에 따르면 사악한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의 증언에 따르면 사악한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능자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그분을 섬겨야 하리이까? 우리가 그분께 기도한들 무슨 유익을 얻겠나이까? 하는구나.](욥21:15). 주가 누구이기에... 전능자가 무엇이기에...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주님의 증거를 배척하는 완악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 한 분이 전능하시다면 하나님 한 분 외에 어떤 다른 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속성이 전능하심입니다. 전능(Almighty, Omnipotent)이란 ‘하나님의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맨 먼저 계시한 이름이 ‘전능자’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에게 주님은 자신을 전능자로 계시하셨으며, 창세기에는 전능자란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주님이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자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출6:3)고 하셨습니다. 전능자란 단순히 능력이 강하다, 많다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전능(Almighty)한 하나님, 전능자라고 계시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믿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전능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시며, 하나님이시라면 전능(全能)하셔야만 합니다.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말도 공허한 말장난일 뿐입니다. 전능하지 못하면 전지(全知)할 수 없으며, 전능하지 못하면 주님의 풍성한 긍휼은 값싼 연민에 불과하며, 주님의 약속은 성취를 기대할 수 없으며, 주님의 두려우심은 닭 우는 소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친히 자신을 ‘전능자’라고 부르시는데 ‘전능자’란 말이 무려 56번이나 나옵니다. 우리는 전능(全能)의 범위와 무한 광대함을 실로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이루신 일들에 대한 성경 기록들을 통해 어렴풋이 그 능력의 일부를 맛보고, 마음 속에 가늠할 뿐입니다. 욥기에 이르기를, [네가 조사한다고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겠느냐? 네가 전능자를 완전히 찾아낼 수 있겠느냐?](욥11:7)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 능력, 권세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을 때 전혀 이성과 모순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발견한다면 신앙인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겪고 있는 무(無)자 돌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무(無)자 돌림이 무엇인지 압니까? 무지(無智), 무능력(無能力), 무(無) 일 푼인 사람은 사회에서 무용(無用)한 사람이다!란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힘(power)를 갈구합니다. 우리말에 힘 력(力)자 만큼 애용되는 단어가 없습니다. 체력, 정신력, 학력, 경제력(금력), 권력에다 정력(精力)까지 추구합니다. 힘, 힘...그러나 진정한 힘의 근원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는 나의 힘이시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 되시는도다. 그분께서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분께 처소를 예비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분을 높이리로다.](출15:2). 다윗 역시 [오 나의 힘이 되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신뢰할 나의 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니이다.](시18:1-2)라고 우리의 힘의 근원을 밝혀 두었습니다. 시편 28:7, [[주]는 나의 힘이요,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그분을 신뢰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분을 찬양하리로다.](시28:7).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힘을 주시며, 힘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힘이십니다. 주님을 힘으로 삼는 사람들은 다른 어떤 힘이 없어도 결코 무능력하거나 무기력하거나 무용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힘, 권능, 능력은 다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시편 62:11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고 내가 두 번 들은 것이 이것이니 곧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는 것이라.](시62:11)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면 됩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시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첫 페이지에서부터 이 사실을 반복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니...그대로 되니라]는 구절들을 반복적으로 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말로 비를 내릴 수 없고, 말로 무엇을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재료를 다 주어도 말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을 수 있으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르기를, [우리 {주}는 위대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그분의 명철(明哲)은 무한하시도다.](시147:5)고 찬양했는데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믿음이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많이 말씀해 주셨고, 역사를 통해 보여 주셨으며 우리가 깊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서 전능자란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은 욥기입니다. 무려 31번이나 전능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전능자에 대해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갖는데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으며, 큰 시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욥은 친구들 앞에서 당당하게 전능자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손으로 너희를 가르치겠고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숨기지 아니하리라.](욥27:11).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조명과 지식이 있는 듯이 보입니다. 자신도 자신을 그렇게 알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이 아는 전능자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깊고 놀라운 것이었지만 온전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소원은 친구들의 충고가 아니라 전능자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응답이었습니다. [오 누가 내 말을 들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라, 내 소원은 전능자께서 내게 응답하시는 것이요, 내 대적(對敵)이 이미 책을 썼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라.](욥31:35).

이 때 엘리후가 전능자 하나님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교했는데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엘리후는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전능자에 대한 바른 지식과 조명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전능자의 영감이 사람들에게 명철을 준다.

[그러나 사람 안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영감(靈感)이 사람들에게 명철(明哲)을 주시나니](욥32:8). 이 말씀은 잠시 후에 하나님이 친히 욥에게 물으시는 예상 질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누가 /사람의/ 속 /중심/부에 지혜를 넣어 주었느냐? 누가 마음에게 명철(明哲)을 주었느냐?](욥38:36). 욥은 아무 말도 대답을 못했지만 엘리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능자의 영감이란 바로 하나님의 호흡이 담긴 성경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이는 대언이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아 말하였음이라.](벧후1:21). 전능자의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접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능자의 호흡이 내게 생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영께서 나를 만드시고 전능자의 호흡이 내게 생명을 주었느니라.](욥33:4). 엘리후는 창세기 2:7의 하나님의 호흡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魂)이 되니라.](창2:7). 우리의 영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것이며, 우리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신 것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도 우리의 영을 취해 가시면 우리는 당장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분께서 만일 자신의 마음을 사람 위에 두시고 그의 영과 그의 숨을 자신에게로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같이 멸망하며 사람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리라.](욥34:14~15). 사람은 믿든, 믿지 않든,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성경이 선포한 사실대로 그대로 되어지는 현실 속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자는 결코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명철(明哲)한 자들이여, 당신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법을 행하지 아니하시나니](욥34:10). 전능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능력이 없다면 공의를 집행할 수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경건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불법이나 편법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을 거룩과 공의의 범위 내에서만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당하는 사건 사고, 불행에 대해 하나님께 부당함을 호소하고 항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능자는 결코 악을 행하시지 않고, 불법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반석이시요 그분의 일은 완전하니 이는 그분의 길이 다 공의롭기 때문이라. 그분은 진실하고 불법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의로우시고 진실하시도다.](신32:4). [그런즉 이제 너희는 [주]의 두려우심을 너희 위에 두고 조심하여 행하라. 이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불법도 없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도 없으며 뇌물을 받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하니라.](대하19:17).

전능자는 심판을 굽게 하지 않으신다.

[또한 참으로 하나님은 악하게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심판을 굽게 하지 아니하시느니라.](욥34:12).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으로 시험을 받아도 원망은 하나님께 돌립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당하게, 악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능자는 심판을 굽게 하지 않으십니다. 전능하지 않다면 바른 심판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오류나 실수가 개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어떤 오류나 실수가 개입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심판은 정확무오합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며 이르되, {주} 하나님 전능자여, 주께서 하시는 일들은 크고 놀랍나이다. 성도들의 왕이여, 주의 길들은 의롭고 참되나이다.](계15:3). 주님의 심판은 삼심제가 아닙니다. 전능하시기 때문에 완벽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제단에서 또 다른 /소리/가 나서 이르되, 과연 그러하옵나이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주의 심판들은 참되고 의로우니이다, 하더라.](계16:7).

헛된 기도와 간구를 듣지 않으신다.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그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시느니라.](욥35:13).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지 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헛된 기도와 쓸데없는 요구 사항을 충실히 수행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능력은 우리의 참되고 진실한 기도를 이루시는데 아낌없이 사용되지만 헛된 것, 불의한 것들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신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는 데는 4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때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둘째, 성장의 원칙입니다. 주님은 성도가 자라게 하시는데 자신의 능력을 쓰십니다.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자라서 열매맺게 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주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뿌려진 씨가 자라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작은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고,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십시오. 주님의 전능하심을 보게 됩니다. 셋째, 기도의 원칙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보류하십니다.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기도의 부족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공의와 긍휼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공의를 파괴하는 경우에는 결코 사용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근거로 공의를 충족시킨 성도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전능하신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통한 공의의 충족 없이 긍휼을 입을 수 없고,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맛볼 수 없습니다.대속이 없이 맛볼 수 있는 주의 능력은 오직 심판뿐입니다.

전능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전능자로 말하건대 우리가 그분을 찾아낼 수 없나니 그분께서는 권능과 공의와 풍성한 정의가 크게 넘치시므로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아니하시느니라.](욥37:23). 엘리후는 우리가 전능자를 찾아 낼 수 없고 다만 전능자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만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넘겨주셨사오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낼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니라.](마11:27).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셨고, 자신의 영을 주심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엘리후는 전능자 하나님을 잘 알았으며, 욥이 당하는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확증했습니다. 그들은 마귀의 정체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다만 이 고통의 원인이 전능자 하나님이 아니란 것임을 증거했습니다. 이는 욥이 [이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께서 나를 괴롭게 하시기 때문이니](욥23:16)란 말에 대한 반박이요, 잘못을 잡아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회오리 바람 속에서 나타나셔서 대답하셨습니다. [전능자와 다투는 자가 그분을 가르치겠느냐? 하나님을 책망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하시니라.](욥40:2). 욥은 전능자와 다투었으며, 하나님을 책망했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는 이전에 욥이 자기 입술로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아뢰고자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기를 원하노라.](욥13:3)고 한 말에 대해 주님이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막상 주님이 대답하시자 욥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이런 것을 묻고 싶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고 외치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단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욥은 주님을 뵙고 나서야 전능자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지식을 가졌습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사오며 어떤 생각도 주께 알리지 아니할 수 없음을 내가 아오니](욥42:2). 욥은 주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시련과 단련을 통해서 주님의 전능하심을 배우게 되고, 믿게 됩니다.

전능자에 대해 다음으로 많이 언급되는 책은 요한 계시록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를 받으면서 전능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우리 주님의 주권과 전능하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주권과 전능하심은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르되, 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주께 우리가 감사를 드림은 주께서 친히 주의 큰 권능을 취하시고 통치하셨음이니이다.](계11:17). 전능자란 하나님의 유일한 호칭인데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란 사실을 밝혀 주셨습니다. 전능자로서 계시된 우리 주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며,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주} 곧 전능자께서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마침이라, 하시더라.](계1:8). [네 짐승이 저마다 자기 둘레에 여섯 날개를 가졌고 안쪽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이시라, 하고](계4:8). 전능하심은 영원무궁한 통치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깊이 생각하고 상상해도 전능자를 다 알 수 없으며, 전능(全能)이 어느 정도의 능력인지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전능자로 말하건대 우리가 그분을 찾아낼 수 없나니...](욥37:23a)가 솔직한 고백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어려운 문제 앞에서 주님의 전능하심을 부정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식이 없는 자신에게 자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상속의 씨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99세의 나이에 주님께서 자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믿지 못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였을 때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걸어 완전할지니라.](창17:1). 주님께서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라”하고 밝히시면서 친히 말씀을 선포하셨음에도 아브람은 듣는 중에 웃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얼굴을 대고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이르되, 백 세인 사람에게 어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으리요? 구십 세인 사라가 어찌 낳을 수 있으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주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창17:17~18).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소위 자연 법칙, 상식, 이성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전능하신 주님을 제한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과 불신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생각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불신은 자연 법칙의 틀 내에서만 생각합니다. 가끔 예외적인 경우를 기적이라 부르고, 초능력이라 부르며 광분하지만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 법칙, 상식이란 것은 사실 법칙이 아니라 ‘현상’입니다. 100세의 할아버지와 90세의 할머니가 자식을 낳는 다는 일은 상식적으로, 과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불신입니다. 상식과 과학 지식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절대 믿음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성 모독적인 불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어려운 일이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전능(全能)이란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일이 없으신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란 말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라는 이미 여자로서의 관례도 끝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내년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확실히 네게 돌아오리니, 보라, 네 아내 사라에게 한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매 사라가 그의 뒤에 있는 장막 문에서 이 말을 들었더라.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 많아 연로(年老)하고 또 사라에게는 여인들의 관례(慣例)에 따른 것도 멈추었더라. 그러므로 사라가 속으로 웃으며 이르되, 내가 늙었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즐거움이 있으리요? 하매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정말로 아이를 낳으리요, 하느냐? [주]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겠느냐?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정한 때에 네게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한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14). 주님은 자연 법칙에 전혀 구애받지 않으시며, 우리의 이성과 상식에 구애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주님께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어렵다고 믿는다고 해서 그 문제가 주님께 어려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라는 말씀의 뜻이 너무 심오하거나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믿지 못해서 웃었지만 주님은 사라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일컬어, [(이것은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조상으로 삼았느니라,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고 증언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우리의 생각과 상상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셔서 늙은 할머니에게서 자식을 낳게 하시고,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에게서 아이를 낳게 하시는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으십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면서 한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심어 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느니라.](눅1:37).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죄 가운데 하나는 단연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완전하게 믿지 못하고 반신반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하시니라.](마19:26).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깊이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힘, 능력, 권능, 권세와 같은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내적으로 이 주님을 깊이 묵상할 때 능력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을 끝없이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홀로 전능하시지만 자신이 지은 피조물들을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계시며, 힘을 공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차분히 성경의 맨 첫 페이지부터 읽어 가노라면 반드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압도되고 전율합니다. 창세기 1:1부터 모든 내용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믿음의 조상들, 대언자들과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 방식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데 이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바라 본 반면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 대신 인간이 이루어 놓은 과학과 지식의 탑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자연 법칙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그 누구도 자연 법칙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대신 자연 법칙을 신뢰하고, 인간들이 밝혀 놓은 과학적 지식을 신뢰하는 자들은 우상 숭배자들이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사람들에게서 듣고 배운 지식과 사고에 대해 역설적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며, 과학과 철학이 말하는 주장들과 어긋나는 성경 기록들에 “아멘”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불신의 현격한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예레미야 32:17, [아, {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주의 크신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사오니 주께는 너무 어려워 /할 수 없는/ 일이 없나이다.](렘32:17).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둔 상태에서 예레미야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무엇이라고 화답하셨습니까? [보라, 나는 [주]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너무 어려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32:27). 이것이 주님의 응답입니다. 주님께 어려운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 역시 전혀 없습니다.

온 우주를 지으시는 일이나, 거의 하룻 동안 해를 세워 두는 일이나(수10:12), 해를 뒤로 돌리는 일이나(왕하20:11)- 이 두 사건은 시간과 공간 중 시간을 콘트롤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신 일입니다. -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게 하거나 반대로 양털은 마르고 땅에만 이슬이 내리게 하는 일이 주님께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삿6:37-40). 주님은 홍해를 가르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셨듯이 저와 여러분의 어떤 문제를 돕는 일에도 조금도 어려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출14:15-22). 어떤 문제에서도 주님이 어렵도다! 힘들도다! 하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이 정말 힘들어 하시며 지치시는 일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것이며, 마음은 없이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사1:4, 렘6:11).

[내 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명절들을 미워하나니 그것들이 내게는 괴로움이니라.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내가 지쳤느니라.](사1:4), [[주]가 말하노라. 네가 나를 버리고 뒤로 물러갔으므로 내가 너를 치려고 내 손을 내밀어 너를 멸하리니 내가 돌이키는 일에도 지쳤느니라.](렘15:6). 주님은 성도들의 불신과 위선에 힘들어하시고 지쳐하시지 그 외에는 어떤 일에 지치거나 힘들어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영존하시는 하나님, [주] 곧 땅 끝들을 창조하신 이는 기진(氣盡)하지 아니하시고 피곤하지 아니하시며 그분의 명철(明哲)은 찾을 길이 없도다.](사40:28). 주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 전능자란 힘이 쇠약해지거나, 새로운 힘을 보충해야 하거나 힘을 재충전해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는 분이심을 말합니다. 주님은 힘을 얻기 위해 무엇을 먹으셔야 할 필요도 없으시고, 운동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빛을 지으시는 일이 우리가 한 마디 말을 하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주님은 단지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니...그대로 되니라]는 구절들을 반복적으로 봅니다. 주님은 빛에게 명령하시면 빛이 생기고, 주님은 구름들에게 말씀하시면 구름들이 비를 냅니다. [구름이 그분의 계획대로 두루 돌아다님은 그분께서 땅에서 세상 표면 위에 떠있는 구름들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다 행하고자 함이라.](욥37:12). 주님이 구름들에게 비를 내리지 말라고 명령하시면 비를 내리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리니 가지를 치거나 땅을 갈지 못하고 다만 찔레와 가시가 올라올 것이며 또 내가 구름들에게 명령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5:6). 사람들은 그게 기상 현상이지 구름이 주의 명령대로 비를 내리고 안 내리는 것이 어디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비가 오랫동안 안 오면 ‘이상 기후’이니 ‘기상 이변’이니 오존층이 어쩌구 저쩌구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철없는 과학자들의 말에 장단을 맞추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신의 죄가 아니면 무엇이 죄란 말입니까?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이는 그분께서 말씀하시매 그것이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그것이 굳게 섰음이라.](시33:9). 주님은 바람, 땅, 구름, 하늘들 뿐만 아니라 물고기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니라.](욥2:10). 이것이 주님의 능력이십니다. 물고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훈련받은 돌고래가 교관을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온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은 주님의 음성에 순종합니다. 우리 주님은 바람을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바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매우 고요하게 되거늘](막4:39). 풍랑이 치던 바다는 고요해졌습니다. 이것이 이상 기온 때문입니까?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풍랑 가운데서도 고요함과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 수양이나 도(道)를 닦아서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함으로 평안과 기쁨을 얻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은 불신의 세대를 향해서 외치셨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왔을 때에 아무도 없었느냐?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느냐? 어찌 내 손이 짧아져서 구속(救贖)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건져 낼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강들이 광야가 되어 강들의 물고기가 악취를 내나니 이는 물이 없으므로 그것이 목말라 죽기 때문이니라.](사50:2). 주님은 전능하셔서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늘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신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신을 주님의 무능력과 무관심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하시는가? 이런 식으로 불평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사59:1). 주님의 능력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을 불구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고 바르게 믿지 않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불구자요, 무능력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200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는 너무 놀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 중에서 걷는 남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에게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물고기를 한데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하매](민11:21~22). 이것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좀처럼 우리는 상식의 범주, 이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예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도 하실 수 없다는 사고 방식이야말로 지독한 불신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모세의 불신을 책망하셨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주]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아니하는지 보게 되리라, 하시니라.](민11:23). 하나님은 하늘에서 빵을 내리시는 일이나 광야에서 고기를 먹이시는 일이나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하시는 일이나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백성들은 40년 동안 걸었지만 옷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았는데, 주께서는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죄를 범하는지 돌아보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하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어찌 그 말씀하신 것을 행하시지 아니하리요? 어찌 그 이르신 말씀을 실행하시지 아니하리요?](민23:19).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다 이루십니다. 주님은 예언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전능하신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뜻을 무엇이든지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사야 46:10, [내가 처음부터 결말을 밝히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들을 옛적부터 밝히 알리고 이르기를, 나의 계획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일을 모두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 미리 말한 대로 결말을 밝히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전능자 하나님이시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일들을 예적부터 밝히 알리시고, 기록해 놓으시며, 태어나지도 않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며,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며, 없는 자를 있는 자같이 부르시는 이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때로 주님이 우리에게 적은 능력밖에 주시지 않는 것 같아도 이는 주님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주의 능력을 주님의 뜻에 맞게 쓰지 못하기 때문에 제한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능력을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약함, 죽음, 질병, 파산과 같은 눈물과 슬픔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Know thy God'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한하신 하나님  (0) 2005.04.15
전지하신 하나님  (0) 2005.04.14
삼위일체의 하나님  (1) 2005.04.14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0) 2005.04.14
[하나님을 알라] 영광스러운 하나님  (1) 2005.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