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란 질문에 일반적인 대답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입니다. 이 말은 성경적으로 정확한 대답이요,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만 존재하시고, 하늘에만 거하신다”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거하시며 존재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편재성,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심을 너무나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으므로 이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 아래 계시며, 모든 것밖에 계신다. 안에 계시나 갇히지 않으시고, 밖에 계시되 제외되지 않으신다. 위에 계시지만 아득하지 않으시고, 밑에 계시지만 눌리지 않으신다. 완전히 위에서 주재하시고, 완전히 밑에서 지탱하시고, 완전히 안에서 채우시며 계신다”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우주(宇宙)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모든 만물은 주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히1:3).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능력 중 가장 신비한 한 가지는 ‘무소부재’(無所不在)입니다. 하나님의 처소는 저 셋째 하늘이시지만 하나님은 지금 이 곳에도 계시고, 저 바다 깊은 곳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편재성은 우리가 이해하기 매우 힘든 것 가운데 하나이지만 우리가 믿기에는 너무나 쉽습니다. 주님이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서나 주님을 부를 수 있고, 찬양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우상들을 섬기는 종교를 보십시오. 그들은 기도할 수 있는 장소, 향불을 피우고, 제물을 드리도록 정한 장소에 부지런히 가야만 합니다.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의 신은 그곳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는 인도나 중국을 비롯한 동양 종교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범신론(汎神論)과는 전혀 다릅니다.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나무나 돌 안에도 신(神)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나 가축을 비롯한 각종 곤충 안에도 신(神)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면 족하듯이 이 온 우주에 하나님은 한 분으로 족합니다. 태양은 지구에서 약 1억 5000만 km 저 멀리에 있지만 그 빛은 세상 어느 곳에나 비칩니다. 사람이 만든 전구는 방 한 개를 비추는데도 여러 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들이나 산으로, 바다로 나가보십시오. 촛불도, 전등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유일신과 범신론의 차이가 이와 같습니다. 힌두교도들은 나무 앞에 다가가 노크를 하면서 “안에 누가 계십니까? 계십니까?”라고 속삭입니다. 그들은 오직 한 신(神)이 모든 것에 깃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수천, 수만의 다른 신들이 각각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는 각각 다른 신들이 다른 형태로 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존재하시고 채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수천 종의 신들을 섬기던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를 찾게 하려 하심이요, 혹시라도 {주}를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은 우리 각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아니하나니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기 때문이라. 이러므로 너희의 시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도 이르되, 우리 또한 그분의 자손이라, 하였느니라.](행17:27~28). 하나님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가까이 계신 분이시며 우리 곁에 계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으며, 지금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공중의 새들이 주님이 주시는 음식을 먹고 있으며, 들의 꽃들이 주님이 입히시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의 증거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나간 때에는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자기 길을 가게 하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하여 증거를 남겨 두지 아니하신 것은 아니니 곧 선한 일을 행하시고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주시며 결실의 계절을 주사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 주셨느니라, 하고](행14:16-17). 하늘의 비, 결실의 계절 가을, 먹는 음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거기에도 계시고, 여기에도 계십니다. 이 믿음은 너무나 경이롭고도 놀라운 것입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확연하게 변화시켜 줍니다. 이는 성경이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니라.](히11:6)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어디에나 존재하시며, 거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색에서, 추론에서, 이성적 결론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며 과학적 증거나 철학자들의 의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성경을 통해 주신 권위의 말씀이 모든 것의 근거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이 어떻게 하늘과 동시에 땅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저절로 풀립니다.

시편 기자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주님의 편재성에 대해 너무 놀라운 지식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나를 앞뒤로 에워싸시고 주의 손을 내 위에 얹으셨나이다. 이런 지식이 내게 너무 놀라우며 높아서 내가 능히 거기에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내가 주의 눈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아침의 날개들을 취하여 바다 맨 끝 지역들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어둠이 반드시 나를 덮으리라, 할지라도 밤조차 나를 두르는 빛이 되리로다. 참으로 어둠이 주를 떠나 숨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빛을 내나니 주께는 어둠과 빛이 다 같으니이다.](시139:5~12). 주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눈앞을 떠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가...할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있는 그곳에 주님이 거기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저는 독자들에게 이 말씀을 이해시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실을 선포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포는 우리의 지각을 초월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다윗조차도 “이런 지식이 내게 너무 놀라우며 높아서 내가 능히 거기에 미치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가장 많은 계시를 받았던 사도 바울은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성령이 주시는 확신으로 인해 이 사실은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 받아 들입니다.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이 놀라운 지식은 슬픔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의 깊은 위로가 되며, 모든 기도에 대한 응답의 확신이 되며, 변화무쌍한 세상사에서 흔들리지 않는 힘의 근원이 됩니다.

“하나님의 현존하는 실재”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소산물이 아닙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종교적, 철학적 교리에 따른 마음의 내적 투시나 무아지경에서 오는 체험이 아니며, 어떤 초월적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얻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내가 인지하는 모든 곳에는 이미 존재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가르쳐 주셨고, 이미 거기에 계시다고 선언하심으로 인해 현존하는 하나님에 대해 내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객관적인 실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 내가 보는 사물이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바로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시며, 그 안에 존재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서(믿음의 결과) 얻어지는 경험은 환상이 아니고 본질적 실체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시14:1, 53:1).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만 여기 계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마귀들과 동류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뿐만 아니라 ‘내가 있는 그곳에 주님이 거기에도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이요, 참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주님은 보상해 주십니다(히11:6).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지식은 매우 소중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현존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살아있는 신앙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너무나 멀리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 자신과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아득히 보이지 않는 셋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실제적인 임재 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시며 여러분이 있는 그 모든 곳에 함께 하십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 속에 계시고 또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엡4:6).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곁에 계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며, 모든 밖에도 계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주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욥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보라, 그분께서 내 곁을 지나가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분께서 계속 나아가셔도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는도다](욥9:11).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빛이 없으면 눈이 볼 수 없듯이 말씀이 없으면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빛이 있어도 눈이 감겨 있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듯이 주님의 말씀이 임해도 영이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이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고전2:13). 주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엡1:17)을 통해 조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손길이 나를 두르고, 나에게 강력하게 임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1:17). 이런 대표적인 사람이 파라오입니다. 파라오는 하나님의 손길이 온 이집트를 강타하고 있음을 목격하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하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도 가게 하지 아니하리라, 하매](출5:2). 파라오에게는 빛이 임했지만 빛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없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임재가 늘 함께 있지만 전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욥과 같이 답답한 심경을 고백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제 사람들은 주를 알지 못합니까? 믿음이 전수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 세대도 다 자기 조상들에게로 합쳐지고 그들 뒤에 다른 세대가 일어났으나 이들은 [주]를 알지 못하며 또한 [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도 알지 못하였더라.](삿2:10). 여호수아와 동시대의 장로들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를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믿음이 전수되지 못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는 단지 세대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믿음이 자녀에게 전수되지 못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을 보십시오. [이때에 엘리의 아들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더니 그들이 [주]를 알지 아니하였더라.](삼상2:12). 그들은 성전에서 살았습니다. 평생 아버지가 집전하는 예배 의식을 보고 들으며 자랐지만 그들은 주를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부모 따라 교회 다닌다고 주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예배의 모임에 분명히 함께 하시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일이 생기면 주여, 어디 계시나이까?라며 탄식하는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욥처럼 고상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 어디에서 그분을 만날지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할진대 그분의 자리에라도 나아가리라.](욥23:3).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혹시나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해서 기도원을 가기도 하고, 부흥회를 가 보기도 합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그곳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을까 생각해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나는 가까운 데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렘23:23). 주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주님을 찾기 위해 이리 저리 돌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까? 대부분의 경우는 말씀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무엘이 주를 알지 못한 이유를 말씀의 계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때에 사무엘은 아직 [주]를 알지 못하고 [주]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계시되지 아니하였더라.](삼상3:7). 주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말씀으로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로 지금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이 공간에는 수많은 라디오 전파와 T.V 전파, 통신 기기들이 뿜어대는 주파수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라디오나 T.V 수상기가 있으면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셀룰러 폰을 통해서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은 어디에나 편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가 보고, 느끼고, 체험하도록 구체적으로 계시해 주는 수단입니다.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전파가 어디에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빛과 조명을 마음으로 담아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씻음받고, 말씀으로 낳음을 받았다면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의 임재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으며, 믿음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도, 찬양을 부르면서도, 예배를 보면서도 주님의 함께 하심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들은 마치 이렇게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보라, 내가 앞으로 나아가나 그분께서 거기에 계시지 아니하고 뒤로 나아가도 그분을 감지하지 못하며 그분께서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그분을 바라볼 수 없고 오른쪽에 숨으시나 내가 그분을 볼 수 없구나.](욥23:8-9). 시편 기자는 계속해서 “거기에 계시고”를 반복했는데 반해 욥은 계속해서 “거기에 계시지 아니하고”를 연발합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 상태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땅을/ 파고 지옥으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그들을 붙잡을 것이요, 그들이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그들을 끌어내릴 것이며](암9:2). 이는 주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피시고, 자신의 손을 펼치사 죄인들을 잡으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거기에 계십니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바다면 바다, 하늘이면 하늘, 지옥이면 지옥 거기에 계시며 우리를 붙드십니다. 죄인들을 붙드십니다. 그런데 왜 죄인들은 알지 못합니까? 죄가 주님을 아는 빛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세상 신은 영광의 빛을 가립니다(고후4:4). 세상에 있는 음행의 영은 주님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이 자기 행위의 틀을 /바로/ 잡아 자기 하나님께로 돌아서고자 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행음(行淫)의 영이 그들의 한가운데 있어 그들이 [주]를 알지 못하였음이니라.](호5:4). 이런 이유로 세상은 주님이 언제나 우리 곁에 거하시지만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눈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자신의 주위에 불말과 불병거들이 있는 줄을 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눈은 땅에 속한 것도 다 보지 못합니다. 단지 육신적인 것만 보입니다. 영적인 것을 보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안약을 발라서 보아야 합니다(계3:18). 엘리사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게하시의 눈을 열어 보게 해 주셨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여시사 보게 하옵소서, 하니 [주]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보라,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게하시가 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를 두르고 있는 천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주의 천사가 둘러 진을 치고 있습니다. [[주]의 천사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지는도다.](시34:7). 영적 사실들, 영적 실체들에 대해서 전혀 감(感)이 없는 것은 영적 지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눈을 열어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전할 임무를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요, 또 그들로 하여금 죄들의 용서를 받고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 가운데서 상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더이다.](행26:18). 복음이 눈을 열어주는 안약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 줍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를, [너희의 지각(知覺)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엡1:18)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각의 눈이 열려야만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하던 중에 루스(Luz)란 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는 꿈에서 주님을 뵈었는데, 깨고 나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 이르되, [주]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고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28:16-17). 사실 이 세상 그 어디나 주님은 다 계십니다. 야곱은 자신이 가는 그곳, 자신이 있던 그곳에서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보았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가 눕는 그 곳, 일하는 그 곳이 주님이 분명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어디 계시는가? 우리가 있는 그곳에 계십니다. 주님이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20)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에 늘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면 은밀히 들으시고, 남모르게 구제하면 은밀히 그것을 보시며,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금식을 할 때 드러나게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모든 곳에 거하시지만 또한 특별히 거하는 곳이 있습니다.

첫째, 주님은 하늘에 거하십니다. 욥은 말하기를, [또한, 보라, 이제 내 증인은 하늘에 계시고 내 증거는 높은 데 있도다.](욥16:19)라고 했고, 솔로몬은 [/너는/ 하나님 앞에서 네 입을 경솔히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어떤 것도 말하지 말지니 이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기 때문이니라. 그런즉 네 말 수를 적게 할지니라.](전5:2)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후에 봉헌 기도할 때 하늘이 곧 주의 거처라고 말했습니다.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되 하늘 곧 주의 거처에서 들으시고 들으실 때에 용서하여 주옵소서.](왕상8:30). 하늘은 주님이 거하시는 거처입니다. 왕상8:39,43, 49 [주는 하늘 곧 주의 거처에서 들으시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하늘에 계십니다. 에스라는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으므로...](스5:12)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증거했으며, 다니엘 역시 그러했습니다. [오직 은밀한 일들을 계시하시는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시니이다. ...](단2:28).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전하실 때 반복적으로 하신 말씀은 [하늘에 계신 너희/우리 아버지...](마5:16,45,48; 6:1,9; 7:11,21, 10:32,33; 12:50, 16:17, 18:10, 18:14,19, 23:9)였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왕좌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거처(처소)를 정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늘들에 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들에 계시며 무엇이든지 친히 기뻐하시는 일을 다 행하셨나이다.](시115:3), [오 하늘들에 거하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123:1).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는 진리는 영원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시편 103:19에 [[주]께서 자신의 왕좌를 하늘들에 예비하셨으므로 그분의 왕국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도다.](시103:19). 특별히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뵙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대지 말라. 이는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음이라. 그러나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요20:17). 이곳은 바로 셋째 하늘이며,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어 올림을 받은 자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2).

그러나 주님은 하늘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보옵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품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집이오리이까?](왕상8:27).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주님을 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며, 동시에 모든 것밖에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편재성입니다. 주님은 하늘들보다 훨씬 크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주를 만드셨지만 우주에 구속되지 않으시며, 그 범위의 한정을 받지 않으십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왕좌요, 땅은 나의 발받침이라. 너희가 나를 위하여 지을 집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에 있느냐?](사66:1). 하늘이 왕좌란 것은 사람으로 비유하면 앉을 때 엉덩이 부분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땅은 주님의 양발을 놓을 수 있는 그런 장소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시고도 남음이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나는 가까운 데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보지 못하도록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는 자가 누구냐? [주]가 말하노라. 내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지 아니하느냐?](렘23:23-24). 하나님은 온 세상에 공기가 가득하듯이 온 우주, 우주 밖에 우주에까지 자신을 가득 채우십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편재성, 무소부재에 대해서 물으시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 질문과 대답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진리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주]의 눈은 어느 곳에나 계셔서 악한 자와 선한 자를 살피시느니라.](잠15:3). 이는 주님의 눈이 수만 개란 뜻이 아니라 주님이 어디에나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보실 수 있으시고, 동시에 다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내 길들을 보시며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욥31:4). 여러분이 오늘 아침 일어나서 이곳까지 오는데 몇 발자국 걸었는지, 차가 달릴 때 바퀴는 몇 바퀴나 돌았는지 주님은 다 세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주님은 다 들으십니다. [이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니라.](마18:20). 기도 모임 때 그 한 중앙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무엇이라고 기도하든지 다 들으십니다.

주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위에 계시지만 우리 안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지만 모든 사람 안에 거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으십니다.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하나님의 영은 생명을 주시는 영, 즉 살리는 영입니다(요6:63). 하나님의 영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을 먼저 살리시고(엡2:4), 주님의 오실 그 날에 우리의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우리를 거룩한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고전6:19). 덕분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편재성,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더욱 분명한 확신과 조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멀리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온 우주에 충만한 주님의 거하심,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을 모두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하나님이 없는 성전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그냥 멋진 건물일 뿐입니다. 건물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이 거하지 않는 몸은 그냥 육신일 뿐입니다.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늙으면 죽고, 썩어져 흙으로 돌아갈 질그릇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하시면 우리 몸은 살아있는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는 송아지를 잡아서 성전 밖 제단에 피를 뿌리고 돌아가는 유대인들보다 더 비참한 존재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을 향해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렸지만 열납되지 않았던 가인처럼 허황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네게 맡긴 그 선한 것을 지키라.](딤후1:14). 창세기 1:2에서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운행했습니다. 온 우주를 단장하고, 생명을 불어넣으신 그 영이 바로 저와 여러분 안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죽은 자를 살렸던 그 영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1:27). 주님은 자신을 믿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 안에 영원히 내주 하십니다.

무릇 믿음이란 우리가 오감(五感)과 육감(肉感)으로 인지할 수 없는 것들, 이성과 실험과 경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주님이 말씀해 주심으로 우리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때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주님의 무소부재하심, 나의 곁에 계시고, 나의 안에 계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체험해 보지 못한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의 신체와 이성은 그것을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 진리를 보았고, 주님이 선포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체험할 수 있으며,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 체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전혀 허황된 환상이나 체험이 아닙니다. 말씀을 믿을 때 주어지는 느낌이나 체험은 영적 실체와 본질에 다가 선 것이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요, 은사입니다. 설령 그런 체험이나 느낌이 없어도 우리의 마음은 평안과 확신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통해 우리 모두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빕니다. 주님이 이 시간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고, 우리 안에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제별(글) > Know thy Go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능하신 하나님  (0) 2005.04.14
삼위일체의 하나님  (1) 2005.04.14
[하나님을 알라] 영광스러운 하나님  (1) 2005.04.14
거룩하신 하나님  (0) 2005.04.13
신실하신 하나님  (0) 2005.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