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하나님을 알자 씨리즈
신실하신 하나님
말씀:




저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주제는 저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코 없습니다. 성도들은 아는 지식이라도 새롭게 정립하고, 다시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목자의 임무 중 하나는 진리의 지식을 가르치고, 성도들에게 새롭게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비록 너희가 이것들을 알고 현재의 진리에 굳게 서 있을지라도 너희로 하여금 항상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는 일에 내가 게으르지 아니하겠노라. 참으로 내가 이 장막(帳幕)에 있는 동안에 너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여 일깨우는 것이 합당한 줄로 생각하노니](벧후1:12-13)고 하며 서신서를 기록했습니다. 유다 역시 동일한 취지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너희가 전에 이것을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시고 그 뒤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유1:5). 우리는 새롭게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기억하고 일깨우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복음 증거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잊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 없이 살아갑니다. 사람이 기억력이 나빠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남의 집 전화 번호나 사람 이름, 날짜 등은 기억력이 나쁘면 잊어버리지만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을 기억력이 나빠서 잊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결코 지성(知性)의 문제나 머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 생생한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잊게 됩니다. [너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명령과 법도와 법규를 지키지 아니함으로써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조심할지어다.](신8:11).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듣기만 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듣기만 하면 잊기 쉽지만 듣고 나서 행해 본 사람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자주 반복해서 행하는 일은 삶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가 거울로 자기의 본래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기 때문이니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보고 떠나가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곧 잊어버리거니와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그 일을 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일에서 복을 받으리라.](약1:22~25). 듣고 행할 때 주님을 잊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법규를 듣고 행하지 않음으로 주 하나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주님을 잊어버립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그분께서는 너를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8:14). 교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교만은 진리의 지식과 믿음을 지우는 지우개입니다. 교만은 저 하늘의 마귀를 지옥으로 끌어내릴 만큼 무거운 추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주님을 잊게 됩니다.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네 능력의 반석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초목들을 심고 낯선 가지들과 함께 그것을 세우며](사17:10). 마음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은 쉽게 잊혀집니다. 중요하지 않는 말들, 중요하지 않는 사건들,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은 금방 잊어 먹습니다. 이 역시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귀하게 생각하고, 두려운 존재요, 사랑의 대상으로 합당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을 때 누구라도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으면 하나님은 잊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에 마음속에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내 아들아, 내 법을 잊지 말고 네 마음으로 하여금 내 명령들을 지키게 할지어다.](잠3:1),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그것을 잊지 말며 내 입의 말들에서 벗어나지 말라.](잠4:5)고 간절히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 우상을 숭배하게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마치 마음의 빈 공간은 결코 비어 있지 않고 다른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듯이, 하나님을 잊을 때 그 자리는 우상이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도 신경 쓰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잊은 백성들에게는 엄중한 심판과 재앙의 저주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반드시 멸망합니다. [네가 만일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걸으며 그들에게 경배하면 내가 이 날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니라.](신8:19).


하나님을 잊었을 때 그들은 원수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들이 [주]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었을 때에 그분께서 그들을 하솔의 군대 대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팔아 넘기셨더니 그들이 너희 조상들과 싸우매](삼상12:9).

하나님을 잊을 때 모든 소망은 다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모든 자의 행로도 다 그와 같으며 위선자의 소망은 사라지리니](욥8:13).


하나님을 잊어버린 민족들은 사악한 민족들과 동격입니다. 종착역도 같습니다. [사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돌아가며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민족들도 그리하리니](시9:17).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은 하나님이 갈기갈기 찢으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아, 이제 너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할지어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갈기갈기 찢으리니 건질 자가 없으리라.](시50:22).


이런 이유로 저는 사도 바울, 베드로, 유다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이 비록 이것들을 알고, 현재의 진리에 굳게 서 있을지라도 항상 이것들을 기억나게 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자]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에 대해서 자세히 공부하고자 합니다. 오늘 첫 시간에 택한 하나님의 성품은 신실함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다양하고 많은 성품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사역자, 주의 종들로서 배워야 할 성품은 단연 신실함(faithfulness)입니다.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으신 분, 언제나 동일하신 분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실 때에만 하나님의 언약이 서 있을 것이며, 주님의 약속이 약속으로 우리의 소망으로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불변하시고 신실하신 분이 아니라면 많은 약속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확신을 가질 때에만 평안 가운데 살 수 있고, 미래의 삶을 확신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신실함은 자신이 한 약속에 대한 충실성으로 드러납니다.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시지 못하신다면 능력이 없는 것도 될 수 있지만 신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무한한 지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한 가지 성품은 다른 모든 성품과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긍휼이란 성품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공의로우시고, 어떤 때는 사랑을 베푸시고, 어떤 때는 이런 성품이 주로 드러나시고 때가 되면 다른 성품으로 기울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므로 모든 순간에 모든 때에 거룩하심과 긍휼이 공존하시며, 공의와 사랑이 함께 하십니다.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한 가지 방향으로 쉽게 너무 기울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른 성품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본질, 본래의 성품에 거슬러 행동하실 수 없으시며, 거룩하심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시고 사랑에 조금도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으시며, 긍휼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시고, 공의를 약화시키지도 않으십니다.


사람은 욕망이나 공포나 연약함, 시련이나 외부의 유혹으로 인해, 내적인 충격이나 동기의 상실, 목표가 바뀌는 계획 수정 등으로 인해 무엇이든지 바뀔 수 있고,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의욕적으로 했던 일들에 대한 흥미의 상실 역시 우리의 신실함을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신실하지 못합니다.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릅니다. 감정의 상태는 하루에 수 백 번, 수 천 번 더 변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바람에 이는 지푸라기보다 더 갈피를 잡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르기를, [대부분의 사람이 저마다 자기의 선함을 외치거늘 누가 신실한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요?](잠20:6)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다녀 보면 신실한 목회자, 신실한 교인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저마다 자신이 신실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시간의 증명(time tested)을 받은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며,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1:17). 주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시오,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12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의복처럼 그것들을 접으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동일하시고 주의 연대(年代)는 끊어지지 아니하리이다, 하시되](히1:12)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고 말합니다. 주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실하심의 핵심입니다.


역사를 통해 교회나 성도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한 가지 속성을 다른 성품들보다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우위에 둠으로써 다른 성품을 배제하거나 아래에 둠으로써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를 강조하는 교회들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란 점을 무시하거나 거의 부인하는 수준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엄청난 강조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원리 원칙 외에 어떤 조그마한 틈도 없는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나 불쌍히 여기심과 같은 주님의 속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맙니다. 반대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연민과 동정, 불쌍히 여기심에 대해서만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공의로움에 대해 약화시키거나 손상을 가하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 자신이 아는 특성들을 강조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다른 성품들에 대해서 고쳐 보려고 생각하거나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를 반박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위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시각과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고 제한하는 그런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부분적으로 자신이 아는 하나님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방식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관념, 왜곡된 지식은 그것을 지니고 있는 성도와 교회를 기울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기울어질 때 그와 함께 교회와 예배의 수준도 기울어지며, 신앙의 순수성은 약화됩니다. 이는 어떤 교회도 성도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성품들을 있는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놀랍고도 경이롭습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주] 네 하나님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신실한 하나님이시니라. 그분께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되](신7:9).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특히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은 시험받는 자, 염려하는 자, 두려워하는 자, 실망하는 자들이 모두 힘을 얻고,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염려와 두려움에 빠진 성도들을 도우실 때 자신의 신실하심을 드러내 보이시고, 그 믿음을 회복해 주심으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새로운 조명을 받고, 그분의 어떠하심을 알아 나갈수록 자신의 문제는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오 [주]여, 주의 긍휼은 하늘들에 있고 주의 신실하심은 구름들에까지 닿았으며](시36: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지식이 새로울수록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약속의 말씀들 역시 신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신실함이 아닙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자신이 약속하신 말씀을 어떤 경우에도 예외 없이 지킨다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시편 89편을 보십시오.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강하신 이가 누구리이까? 주를 둘러싼 주의 신실하심에 견줄 것이 무엇이리이까?](시89:8). 사람들은 하늘과 땅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늘과 땅은 변합니다. 그러나 주의 신실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천년만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도 주를 둘러싼 주의 신실하심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믿고 맡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지키시고, 성취하시는데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단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들의 성취를 보면서 주님의 신실하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수천 년간 변함없이 뜨는 아침해나, 밤에 뜨는 달보다 주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은 더욱더 신실합니다. [달같이, 하늘에 있는 신실한 증인같이 영원히 굳게 세워지리로다, 하셨도다. 셀라.](시89:37).

사람들은 약속을 쉽게 하고도 잘 지키지 않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자신이 지상 천국을 만들 것처럼 많은 것들을 약속합니다. 결혼을 앞둔 청춘 남녀는 서로를 위해 살 것을 굳게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런 약속들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공허한지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실하심은 자신의 약속의 말씀들에 대해서 단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하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어찌 그 말씀하신 것을 행하시지 아니하리요? 어찌 그 이르신 말씀을 실행하시지 아니하리요?](민23:19).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어떤 말씀도 이루지 않으실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일반인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위대한 약속들을 주셨는데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이 약속들은 너무나 크고 위대한 약속들이라 이 약속들만 붙들고도 이 생을 항해하는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첫째,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19). 이 생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약속보다 더 위대한 약속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신 동시에 연약한 우리를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떤 성도라도 능력 있는 일들을 할 수 있으며, 위대한 일을 계획하고 성취할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빌1:6).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시작하셨고,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현재의 나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이미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은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넷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행하든지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하노라.](히13:6). 나의 조력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보다 더 큰 도움은 어디서도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섯째, 넘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우리는 궁핍한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심으로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궁상맞게 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잔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왜 부어 주십니까? 남에게 주라고, 베푸는 삶을 살라고 부어 주십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政使)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능히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할 것임이니라.](롬8:38-39).


일곱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 약속은 우리의 삶의 모든 파편들을 주님께서 모으셔서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여덟째, 모든 시험을 감당합니다. 우리가 능력 있고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시험을 이깁니다.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 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이상 말한 여덟 가지 약속들은 너무나 크고 존귀한 약속들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 약속들을 모두 이루십니다.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딤후2:13). 우리는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면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고, 주님께서 이루시지 않는 것들이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오 [주]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으므로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정하신 계획들은 신실과 진리이니이다.](사25:1).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신실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받아서 표현하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신실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너희는 [주]를 두려워하며 신실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이와 같이 행할지니라.](대하19:9). 우리는 자기 사정에 따라서, 이해 득실에 따라서, 감정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하는 그런 조변석개(朝變夕改)형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릇 하나님의 종들의 공통점은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나 능력이나 힘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라 신실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모세는 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자란 평을 받았습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리하지 아니하나니 그는 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자니라.](민12:7). 다니엘은 너무나 신실하여 아무도 그의 허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총리들과 통치자들이 왕국에 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기회를 찾고자 하였으되 아무 기회도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신실하므로 그에게서 아무 실수나 허물도 찾아볼 수 없었음이더라.](단6:4). 사도 바울은 신실한 자였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음이니](딤전1:12). 이는 대언자들이나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일컬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형제들에게나 낯선 자들에게나 무엇을 행하든지 신실하게 행하니](요삼1:5). 가이오는 신실한 형제였고, 사도 요한은 그에게 쓴 편지는 요한삼서란 성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서신을 쓴 후 실루아노를 통해 보내었는데 그는 신실한 형제였습니다. [내가 너희의 신실한 형제로 여기는 실루아노 편에 간단히 써서 권면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가 이 은혜 안에 서 있느니라.](벧전5:12). 신실한 형제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디모데는 신실한 형제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내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주} 안에서 신실한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나니 내가 모든 곳,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가 너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길들을 기억나게 하리라.](고전4:17). 오네시모 역시 신실한 형제였습니다. [신실하고 사랑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 속한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에서 일어난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골4:9). 오네시모는 본래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도망을 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실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있던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주인에게로 돌아감으로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란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의 양심은 깨끗해지고, 순수하고 정직해야 하며 더불어 갖추어야 할 한 가지 성품은 신실함입니다.


[또한 너희가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요,](골1:7). 에바브로 디도는 신실한 사역자였습니다. 두기고 역시 신실한 사역자였습니다. [두기고가 내 모든 형편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주} 안에서 신실한 사역자요, 동료 종이라.](골4:7).


신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신실하지 않으면 주의 사역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목사, 교사, 선교사뿐만 아니라 집사의 자격 요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실함입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3:11). 맑은 정신을 가지고 모든 일에 신실한 자가 집사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으며, 이렇게 집사의 직분을 잘 수행하면 그는 큰 영광이 있습니다. [이는 집사의 직분을 잘 수행한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지위를 얻으며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에서 큰 담대함을 얻기 때문이니라.](딤전3:13). 신실함이 없는 사람들은 수치를 당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자들에게 사역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의 종은 무릇 신실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성공할 만한 자질, 지식,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점수를 주지만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들에게 점수를 부여하십니다. 주님은 신실한 종들에게 특권을 베푸십니다. 신실한 종에게는 보상이 큽니다. 주님은 적은 것에 신실한 종에게 많은 것을 맡겨 다스리게 하시고 주인의 기쁨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선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것에 신실하였은즉 내가 많은 것을 맡겨 다스리게 하리니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1, 23). 주님은 신실한 자들에게 일을 주십니다. 주님이 사람을 쓰는 원칙은 능력이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쓰실 때 외모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학력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가진 재력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인사 원칙, 기준은 언제나 신실함입니다. 이는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인사 원칙입니다. [지극히 적은 것에 신실한 자는 많은 것에도 신실하고 지극히 적은 것에 불의한 자는 많은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만일 불의한 맘몬에 신실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또한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신실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눅16:11-12). 요약하면 “지극히 적은 것에 신실하라. 불의한 맘몬에도 신실하라. 남의 것에도 신실하라.”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기셨습니다.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함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길지어다. 또한 청지기들에게 요구할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전4:1-2). 하나님은 지혜롭고 신실한 청지기를 찾으십니다. 종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넘쳐나지마 주님이 맡길만한 청지기는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신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재주가 많고, 머리가 잘 돌아가고, 대인 관계가 좋아도 신실함이 없으면 그는 주님이 찾으시는 청지기가 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신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 주인으로부터 그 집 사람들을 넘겨받아 다스리며 제 때에 그들 몫의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


우리는 복음의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주인의 뜻대로 권위를 위임받아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나누어주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챙겨 먹으면 안됩니다. [이는 내가 자원하여 이것을 행하면 보상(報償)을 얻으려니와 자원하여 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청지기직을 내가 맡았기 때문이라.](고전9:17). 복음 전파자는 복음의 청지기이고, 목자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이는 감독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결코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 /그런즉/ 그는 자기 뜻대로 하지 아니하며 쉽게 화내지 아니하며 자기를 술에 내어 주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에 빠지지 아니하며](딛1:7).


여러분 역시 모두 신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맡은 청지기, 복음을 맡은 청지기,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청지기입니다. [각각 은사(恩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그 은사를 써서 섬기라.](벧전4:10). “신실한 청지기, 지혜로운 청지기, 선한 청지기”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로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하나님께서 그 청지기직을 회수해서 다른 신실한 사람을 찾아 맡겨 버리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배운 말씀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전수의 원칙은 “신실한 사람들”을 찾아 맡기는 것입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우리는 신실한 종으로서, 신실한 대사로서, 신실한 증인으로서 신실한 청지기로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역을 계속해야 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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