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하나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3대 특징은 전능 하나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3대 특징은 전능(omnipotent), 무소 부재(omnipresence), 전지(omniscent)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불가능이나 어려움이 없으시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모든 것을 다 보시고 들으시며,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기에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하나님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행15:18).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다윗과 예레미야는 “다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증거 했고, 사도 요한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했습니다(요일3:20). 주님은 과거의 모든 역사를 아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다가올 미래의 모든 역사를 아십니다. 성경은 주님의 미리 아심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행2:23, 롬8:29, 롬11:2, 벧전1:2).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은 그분의 미리 아심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미리 아심에 근거한 것입니다(행2:23). [그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하여 넘겨졌거늘 너희가 그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행2:23). 성경의 모든 예언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른 미리 기록된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주님은 미리 아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음이니 이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나신 분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이 부분에 대한 오해는 구원 예정론을 낳았습니다. 주님의 미리 아심과 예정은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택하심은 미리 아심에 따른 것이지 예정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미리 아심과 예정은 비슷하지만 결코 같지 않습니다. 주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택하셨지, 미리 택하신 자들을 아신 것이 아닙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 택하심을 받고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에 이른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을지어다.](벧전1:2). 물론 주님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을지 다 아십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주님이 다 아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은 고레스가 태어나기 전에 고레스의 이름을 부르셨고,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에 예레미야를 부르셨으며, 바울 역시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자를 예정하셨지,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원받을 자를 미리 아십니다. [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자녀로 입양하셨으니](엡1:5). [또한 그분 안에서 모든 일을 자신이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상속을 얻었으니](엡1:11). 하나님의 예정은 전적으로 “미리 아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미리 아시기에 예정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미리 알면 우리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예정(미리 계획, 결정) 할 수 있습니다. 미리 알지 못하면 예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예정하십니다. 이는 예정론과 미리 아심에 따른 예정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미리 아심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정을 주님이 아시는 것이요, 예정론은 결정권자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예정으로 인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지어 지는 것입니다. 이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택하신 백성 유대인들을 주님은 미리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하나님께 중보(仲保)하여 이르되,](롬11:2). 주님이 미리 아심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형성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부르셨고, 아셨으며, 택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나의 길과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이는, 오 [주]여, 보소서, 내 혀의 말 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니이다.](시139:2~4). 주님은 나의 생각, 나의 길, 나의 눕는 것, 나의 말 등...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주님은 모르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는 비단 사람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주님 앞에서는 다 벌거벗은 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에 다 아십니다.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피조물이 하나도 없고 오직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그래서 누구도 숨길 수 없고, 주님 앞에 알려지지 않는 것이 없으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태어나서 행할 모든 일들에 대해서 다 아시고, 기록하십니다. [내가 은밀한 중에 만들어지고 땅의 가장 낮은 부분에서 묘하게 꾸밈을 받았을 때에 나의 실체가 주께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나의 실체가 아직 불완전할 때에도 주의 눈이 보셨으며 계속해서 형성되는 나의 모든 지체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사오니 곧 그 지체들 중에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니이다.](시139:15~16). 이것이 주님의 전지(全知)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하늘, 땅, 산, 바다, 땅 속의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일과 모든 물질들, 모든 영적 존재들, 모든 피조물 하나 하나, 모든 비밀들, 모든 역사와 미래적 사건들, 발설되지 않는 느낌들, 모든 신비들, 불가사의, 모든 원인과 결과, 모든 욕망들, 개개인의 운명과 한 가족의 운명과 한 민족과 왕조와 국가의 운명들은 물론이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주님은 어떤 관찰과 실험과 노력과 연구 없이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반면 사람은 어떻습니까? 많이 안다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지상에서 가장 지혜가 출중했던 사람인 솔로몬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적나라하게 말해 줍니다. 이는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이는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잠27:1). [이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그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언제 그 일이 있을지 그에게 말할 자가 누구이랴?](전8:7). 사람들은 예측 가능한 사회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오늘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배에 누가 나올지, 누가 안 나올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기 때를 알지 못합니다. [이는 사람 또한 자기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같이 사람들의 아들들도 재난의 때에 일이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면 올무에 걸리느니라.](전9:12). 우리는 미래 예측 능력이 거의 전무합니다. 자신에게 사고가 날지 미리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어리석은 자는 말도 넘치게 하거니와 사람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나니 그가 있은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그에게 알려 줄 자가 누구이랴? 어리석은 자들의 수고는 그들을 각각 다 지치게 하나니 이는 그가 어떻게 도시로 들어가는 줄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전10:14-15).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서 보험을 들기도 하고, 저축을 하기도 합니다. 인간적 유대 관계를 끈끈하게 맺어 두려고 친구를 사귀고, 친척들과 연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며, 알려 주지도 못합니다.

사람은 무슨 재앙이 땅 위에 임할는지 알지 못합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몫을 나누어 줄지니 이는 무슨 재앙이 땅 위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전11:2). 우리는 이 사실은 매일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영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성장의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영(靈)의 길이 어떠하며 아이 밴 여자의 태 속에서 뼈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네가 알지 못하는 것같이 모든 것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들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너는/ 아침에 네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네 손을 금하지 말라. 그 까닭은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은 그 둘 다 똑같이 좋을는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전11:5-6). 우리는 이런 것들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특별 계시가 없는 한 우리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들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알지 못하는 것 투성인데 우리는 지금 감히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각(understanding)을 주시고, 성령을 통해 알게 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령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의 부류는 늘 무엇으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배우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통해, 학습을 통해, 경험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배웁니다. 배움이 있는 사람[learning mind]은 성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배우고, 또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셋만 되어도 그 중에 하나는 스승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겸손하라는 의미도 되지만 그만큼 우리는 배울 것이 많은 부족한 존재란 뜻이기도 합니다. 가장 무식한 부류의 사람들은 열심히 배우지만 정작 배워야 할 것들, 배워야 할 분에게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작 배워야 할 것들은 거의 대부분 성경에 있으며, 우리를 가르치는 진정한 스승은 성령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나를 형성하셨사오니 내게 명철(明哲)을 주사 주의 명령들을 배우게 하소서.](시119:73).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9). 아마 배움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배우지 않습니다. 배움이 필요한 줄을 깨닫고 끊임없이 주를 바라보며, 말씀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크고 비밀한 놀라운 일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배움이 필요한 사람과는 달리 전혀 배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분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주님은 완전한 지혜와 지식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전능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全知)하신 분이십니다. [누가 [주]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분의 모사(謀士)가 되어 그분을 가르쳤느냐? 그분께서 누구와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분께 교훈을 주었으며 의의 길로 그분을 가르쳤으며 그분께 지식을 가르치고 명철(明哲)의 길을 보여 주었느냐?](사40:13~14). 주님은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므로 누구에게, 무엇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전혀 없으시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고민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모사(謀士)가 되었느냐?](롬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대언자 이사야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결코 무엇인가를 배운 적이 없으신 분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욥21:22). 아무도 주님을 가르칠 수 없고, 주님은 누구에게도, 무엇으로부터도 배워야 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무엘은 말하기를, [다시는 그와 같이 심히 교만하게 말하지 말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이는 [주]께서 지식의 하나님이신즉 /사람의/ 행동을 달아 보시기 때문이로다.](삼상2:3) 했습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은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신 분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구름이 균형을 잡는 것과 지식에 있어 완전하신 그분의 놀라운 일들을 그대가 아느냐?](욥37:16). 여러분은 지식에 있어 완전하신 지식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지식의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거기에 귀를 기울일 때 지식을 얻습니다. [네 마음을 훈계에 기울이며 네 귀를 지식의 말씀들에 기울이라.](잠23:12).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호4:1), 구원을 얻게 하는 지식(눅1:37), 진리의 지식(딤전2:4, 딤후3:7)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고 공부하는 가운데 때로 역으로 생각함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 성경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 아니신가?”를 가르쳐 줌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수단으로 부정어(no, not, never)를 많이 사용하십니다. “없으신”, “아니하시는” 등과 같은 표현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변함이 없으시고(말3:6), 거짓이 없으시고(딛1:2), 어둠이 전혀 없으시고(요일1:5),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고(약1:17), 불가능이 없으시고(눅:37)와 같은 식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주님의 전능하심과 전지(全知)하심을 자연스럽게 마음 속에 인식하게 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영존하시는 하나님, [주] 곧 땅 끝들을 창조하신 이는 기진(氣盡)하지 아니하시고 피곤하지 아니하시며 그분의 명철(明哲)은 찾을 길이 없도다.](사40:28). “아니하시고, ...아니하시며...없도다” 란 계속된 부정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강력한 긍정의 인식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공부하는 유익한 공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이와 같이 반대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 때 더 선명한 조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알기 위해 정보를 구하지 않으시며, 알기 위해 연구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는 난해한 것이 없고,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홀로 지혜로우신 분”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곧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이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롬16:27). [이제 영원하신 왕 곧 죽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전1:17). [곧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 구원자께 영광과 존엄과 통치와 권능이 이제와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유1:25).

주님은 홀로 지혜로우신 분이시기에 주님의 지혜를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주님의 지혜를 무효화하거나 주님을 대적할 수 있는 계략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욥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지혜와 권능이 그분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분께 있나니](욥12:13), [권능과 지혜가 그분께 있고 속는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분께 속하였으므로](욥12:16). 지혜, 권능, 명철이 다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주님은 뜻대로 그것을 나누어주실 수 있습니다. 힘이 필요하시면 주님께 구하십시오. 주님이 힘이시며,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힘이며,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힘이 됩니다. 지혜가 필요하면 주님께 구하십시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무엇이든지 필요를 주님께 아뢰십시오. 모든 근원은 다 주님이십니다.

가장 지혜로운 대언자 중의 하나였던 다니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다니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지니 이는 지혜와 능력이 그분께 속하였음이로다.](단2:20). 전지(全知)하신 주님을 믿고 고백할 때 우리는 정직하고, 진실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 앞에 설명하려 하고, 설득하려 하고, 부정하려고 하고, 숨기려 하고, 변명하려고 합니다. 때로 성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힘들다고 불평하듯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한 수 가르치려 드는 웃지 못할 촌극을 자주 벌입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완전한 마음과 자원하는 생각으로 그분을 섬길지어다. 이는 [주]께서 마음을 다 살피시고 생각으로 상상하는 바를 다 아시기 때문이니 네가 만일 그분을 찾으면 만날 것이로되 네가 만일 그분을 버리면 그분께서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28:9). 주님은 우리의 생각, 마음, 의도를 다 아십니다. 이 사실은 죄인들에게는 공포와 전율이 됩니다. 숨겨둔 은밀한 죄, 아직 버리지 않는 어떤 죄에 대해서 주님은 철두철미하게 다 아시고 계시다는 사실이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의 죄를 숨기려고 자신들의 몸을 숨겼듯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나 시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불법들을 주 앞에 두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들을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나니](시90:8). 사람이 깊이 숨긴 죄는 주님 앞에, 주의 얼굴 빛 가운데 있으며, 주님은 그것을 쳐다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는 내 눈이 그들의 모든 길 위에 있으므로 그들이 내 얼굴로부터 숨지 못하며 그들의 불법이 내 눈에서 숨겨지지 못하기 때문이라.](렘16:17).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이는 원수들의 비난과 소문과 헛된 증거들에 대해 주님이 결코 오해하거나 판단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행한 일들의 숨은 의도까지 다 아시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받는 모든 질시와 오해로부터 참된 자유를 맛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신다! 주님은 정확하게 아신다!는 한 가지 사실이 우리에게 진리를 행할 용기와 힘을 줍니다. 주님은 나를 아시는데 결코 사람들의 증거나 증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요,](요2:24). 사람들은 나를 오해할 수 있고, 편견과 선입견으로 근거없이 비난할 수 있고, 자신의 판단 착오로, 때로는 정보 부족이나 잘못된 정보로 인해 나를 욕하고 돌아설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두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특별히 무엇을 어떻게 아시는가?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얻기 원합니다.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힘과 위로와 큰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솔직하게 고백할 때 용서하시며, 새 힘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먼지일 뿐임을 아십니다.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체질(體質)을 아시며 우리가 /다만/ 먼지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로다.](시103:14).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강한 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가장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죄성, 반역적인 기질을 잘 아십니다. [참으로 네가 듣지도 못하였고 참으로 알지도 못하였으며 참으로 네 귀가 그때부터 열리지도 아니하였나니 이는 네가 크게 반역하여 모태에서부터 범죄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사48:8~9).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예비하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특별히 자신의 양떼들을 아시며, 자녀들을 잘 아십니다. 주님은 제가 아침에 머리를 감을 때 머리 가락이 몇 개나 빠졌는지, 오늘은 몇 올이 있는지 다 아십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마10:30).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음속에 지금 무슨 문제로 고민하는지 다 살펴보시고 계십니다. 건강이 좋지 않는 분들은 혈압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어제는 몇 시간을 잤으며, 얼마나 뒤척였는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오늘 교회에 오는 동안 몇 걸음을 걸었는지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분께서 내 길들을 보시며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욥31:4). [이는 사람의 길들이 [주]의 눈앞에 있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그의 모든 걸음을 곰곰이 살피시느니라.](잠5:21). 저는 왜 주님이 저의 걸음을 다 세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모든 걸음을 곰곰이 살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 세시며, 마치 아기들이 처음 걸음마를 배우며 발을 뛸 때 오늘은 몇 발자국을 걸었는지 세는 어머니처럼, 걷는 발을 보면 웃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살피십니다. 그래서 미끄러질 때 일으키시고, 딴 길로 갈 때 돌이키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이미 무엇을 기도하실지 다 아십니다. [그때에는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할 것이요, 그들이 말하는 도중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65:24).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다 아시는데, 부르기 전에 이미 응답하십니다. 여러분은 아내나 자녀들의 필요를 구해 놓고 필요하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준비해 둔 것을 내 놓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가 구할 필요들을 미리 준비해 두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할 때 그때서야 분주하게 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하기도 이미 다 아시고, 예전에 이미 다 준비해 놓으시고 필요한 때에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주님을 알 때 힘과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저는 다른 어떤 위로도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미리 다 아십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마6:32). 주님은 “너에게 그것이 필요한 줄 몰랐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옷이 필요한 줄 아시며, 먹을 것이 필요한 줄 아십니다. 아신다는 말씀은 그냥 ‘안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아뢰라....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6,19).

주님은 우리의 생각, 상상들을 다 아십니다.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으니 이는 너희 생각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다 알기 때문이라.](겔11:5). 주님은 우리의 생각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아시기 때문에 결코 그분 앞에 숨기거나 감추려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한 무지(無知)는 하나님을 마치 사람과 같이 여기거나 전적으로 자기와 같은 줄로 아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주님은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자기 계획을 [주]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이여! 그들의 일들은 어둠 속에 있은즉 그들이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나니](사29:15).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상상과 생각을 아시는 주님을 인정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숨겨진 의도까지 낱낱이 다 고백하고 회개할 때 주님은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주님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과 생각이 성경으로부터 너무나 벗어나 있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생생한 인식과 믿음이 마음 속에 생기지 않고, 막연하고 추상적인 죽은 신을 섬기는 듯이 종교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사람의 생각들을 아시며 그것들이 헛된 줄 아시느니라.](시94:11). 주님은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 속에 불법을 생각할 때 주님은 정확히 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입증해 주십니다. [내가 마음 속으로 불법을 중히 여기면 {주}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아시는 주님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주의 말씀을 담아두고, 묵상함으로 생각을 정결케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이렇게 기도합시다. [오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구속자(救贖者)이신 [주]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想)이 주의 눈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하나님은 여러분이 간밤에 무슨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는지, 운전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예배를 드리면서, T.V를 보면서 무슨 상상을 하는지 다 아십니다. 영적인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지만 육신적인 생각은 사망입니다. 주님은 생각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심으로써 중간 성적표를 때때로 제시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다 아십니다. 우리가 꾸미거나, 계획한 은밀한 일은 주님 앞에는 조금도 비밀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 아십니다. 나는 나의 아주 어린 시절에 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한 살 때 무엇을 했는지, 두 살 때는 무엇을 했는지, 세 살 때는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들을 아십니다. 어떤 이는 술 마신 후에 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한 일도 자신이 다 알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다 아십니다. 잠을 자면서 무엇을 했는지도 주님은 다 아십니다. [말하기를, 보라,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어찌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시겠느냐? 또 네 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분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각 사람에게 보응하시지 아니하겠느냐?](잠24:12). 우리는 이런 주님을 생각할 때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아십니다. 일반적으로 “안다”는 말은 친밀한 관계성에 근거해서 쓰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현재 미국의 대통령이 누군지 압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분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몇 번 만나기는 했지만 아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라고 하며 안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주님은 불신자들을 모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7:23).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주님은 아신다고 하십니다. [[주]는 선하시고 고난의 날에 강한 요새가 되시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1:7). 주님에게 욥을 아시느냐?고 물어 본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요셉, 다윗, 바울을 아시느냐?고 물으면 주님은 “내가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들었을 때, “물론 알기는 알지만 요즘은 말(기도)도 없고, 말을 해도 잘 안 듣고, 딴 짓만 해 대고 있어서...”라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아십니다. 사랑은 서로를 깊이 아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고전8:3). 하나님을 잘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 역시 우리를 잘 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되고, 일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연약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연약함을 아셨고, 슬픔을 아셨고, 채찍에 맞는 고통을 아셨고, 죽음이 무엇인지 아셨고, 우리가 당하는 시험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모든 일에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되심이 마땅하니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에서 친히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하여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히2:17~18).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셔서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셔서(빌2:17), 우리가 받은 모든 시험을 받으신 것은 단순히 아는 정도가 아니라 체험을 통해 느끼시는 앎을 겪으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4:15).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주님은 아실 뿐만 아니라 느끼십니다. 고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심으로 고통을 잘 아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는 멸시를 당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사53:3). 생명이신 주님께서 죽음을 아시고, 전능하신 능력의 주님께서 연약함을 아시고, 강하신 주님께서 고통을 아시고, 슬픔을 아신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할뿐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모든 것을 느끼십니다.

우리는 감정도 없고, 인간사에 완전히 초월한 채 관조(觀照)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되 우리의 모든 것을 느끼시고, 아시는 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거듭난 성도가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신앙의 확신과 담대함을 잃게 됩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도 /그리하실 것/임이라.](요일3:20). 우리가 바르게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지식에 이를 때 큰 확신, 담대함과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늘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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