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말씀: 마5:21-26
요절: 마5:24
주님은 율법이 말하는바 살인, 간음, 거짓 맹세 등에 대한 율법의 말씀에 대해서 “옛 사람들이 말한 바...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하노니”라고 하심으로 구약의 율법들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과 가르침이 아닌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이 사람들의 계명과 장로들의 전통으로 많이 왜곡되이 선포되고 가르쳐졌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70년 간 바빌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대인들은 다시 율법을 지키고자 맹세하였지만 그들 가운데는 히브리말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율법 책이 오늘날처럼 개개인이 쉽게 소지할 수 있는 그런 책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필사하고 보존하는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은 오늘날 공무원들처럼 유대 사회에서 공직 계급에 해당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공식 직무가 아니라 유대교의 분파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세분화하고 주석을 달고 해석을 가미해서 더욱 엄격한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율법의 해석 역시 성령의 조명을 받아 말씀과 말씀을 비교해서 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견과 철학을 가미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탈무드”라 불리는 유대 경전은 실질적으로 모세 오경만큼이나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안식일에 관한 것이나 십계명에 대한 것, 예배에 관한 것, 성전에 대한 것, 구제와 금식, 기도, 맹세 등에 대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계명에 따른 것이요, 장로들의 전통에 따른 것임을 보시고 엄히 책망하시고 율법의 근본 목적과 그에 따른 바른 해석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사실은 율법을 파괴하고,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외식과 위선으로 흐르는 일이 너무나 흔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봅시다. [화 있을진저, 너희 눈먼 안내자들이여! 너희가 이르되,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빚진 자라! 하는도다. 너희 어리석고 눈먼 자들이여, 어느 것이 더 크냐, 금이냐 금을 거룩히 구별하는 /성/전이냐? 또 누구든지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을 두고 맹세하면 책임이 있다 하는도다. 너희 어리석고 눈먼 자들이여, 어느 것이 더 크냐,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히 구별하는 제단이냐? 그런즉 누구든지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성/전과 그 안에 거하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요, 또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음이라.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저것도 행하지 않은 채 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마23:16~23). 바리새인들의 성경 해석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주님께서 조목조목 지적해 주셨고, 그들의 실행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물을 드리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금식을 하고, 기도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실행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율법입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공의, 긍휼, 믿음과 같은 더 중대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성취자로서 바래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가르치고 행하는 율법 준수가 사실은 외식과 위선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긍휼과 공의와 사랑과 같은 율법의 핵심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마23:23). 주님께서 “옛 사람들이 말한 바...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란 말씀은 율법을 폐하거나 바꾸시거나 새롭게 해석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본래 처음부터 율법이 그러하였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주님을 통해서 비로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전해 주던 변개되고 부패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서부터 율법의 근본정신과 목적에 부합하는 바른 해석을 보여 주셨습니다.
21절입니다. [옛 사람들이 말한바, 너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21). 주님은 구약의 율법이 어떻게 선포되었고, 기록되어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에 나오는 율법입니다(출20:13). 이 계명은 신명기에도 나옵니다(신5:17).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라도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들었고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살인자들은 사형에 처하도록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살인한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는 말씀은 쇠 연장을 사람을 죽인 경우(민35:16),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 사람을 쳐서 죽인 경우(민35:17), 나무 무기를 손에 들고 사람을 쳐서 죽인 경우(민35:18), 앙심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서 죽인 경우(민35:21)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정상 참작 없이, 배상이나 속죄 헌물 등을 필요로 하지 않고 반드시 사형에 처하도록 하셨습니다(민35:31). 이 정도 율법 조항은 성경을 한 번도 읽어 보지 않는 유대인들이라도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에 속하는 수준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는 율법 조항이지만 유대 사회에 살인이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이는 율법은 죄를 알게 해 줄 뿐이지 그 자체로서 육신의 죄성을 막아 주거나 양심을 깨끗하게 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해주고, 죄를 더해 줄 뿐 죄를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율법은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어떤 사람도 완전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들었고 암송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살인은 언제나 유대 사회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발은 악을 향해 달려가며 그들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데 빠르고 그들의 생각은 불법의 생각이니라. 황폐와 파멸이 그들의 길에 있으며](사59:7). [그러나 네 눈과 네 마음은 오직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과 학대와 폭력만을 바라며 그것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렘22:17). 주님이 사역하시던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에도 살인은 흔한 범죄였습니다. 그리고 살인은 심판의 위험에 처하는 죄란 사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살인은 마귀의 성품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입니다(요8:43-44). 그래서 오늘날 사형 폐지론자들은 마귀의 영에 사로잡힌 마귀의 자녀들로서 자신들은 누구를 죽이면서 자기는 하나님께서 율법이 정한 저주와 심판을 받고 싶지 않아서 사형 폐지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아무 까닭 없이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 누구든지 자기 형제에게 라가라 말하는 자는 공회의 위험에 처하게 되거니와 누구든지, 너 어리석은 자여, 하고 말하는 자는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22). 주님은 쇠 연장이나 돌이나 나무나 주먹으로 사람의 육신의 생명을 죽인 것만이 살인이 아니란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 까닭 없이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라고 합니다. 킹 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성경에서는 “아무 까닭 없이”란 말을 삭제함으로써 주의 대언자들은 물론이요, 주님까지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침례인 요한이나 사도 바울이나 우리 주님은 화를 내셨지만 결코 “까닭 없이” 화를 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화를 내도 범죄하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살인이란 무엇인가? 살인의 뿌리는 마음 속에 있는 미움입니다. 미움의 극단적 표현이 살인입니다. 형제에 대한 미움, 증오, 혐오감이 몸을 통해서 다양하게 표출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살인이 가장 크고 강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죄를 미워하고, 마귀를 미워하고, 세상을 미워하고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미워해야 할 것들은 사랑하고(자기를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라고 한 이웃과 형제를 미워합니다.
미워해야 할 것을 사랑할 때 자신이 거기에 찔려 죽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사랑할 때 돈이 그 사람을 죽입니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탐욕을 사랑할 때 탐욕이 그를 죽입니다. 창녀를 사랑할 때, 술을 사랑할 때, 세상을 사랑할 때 그것들이 나를 죽입니다. 반면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미워할 때 나는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데 형제를 미워한 가인을 보십시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했기 때문에 동생을 죽인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아벨에 대한 미움이 살인이란 행위로 옮겨진 것입니다. 친 형제, 친 자매 지간에도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미움이 있을 때 언제든지 살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은 자기 형 암논을 미워했습니다(삼하13:22). 그 미움이 곧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보십시오.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죽이고자 모의했다가 르우벤의 만류로 죽이는 대신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우리는 친 형제 지간이라도 미움으로 인하여 살인으로 이른 예를 수없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나는 형제를 위해 죽을 수 있고(요일3:16), 형제를 미워할 때 형제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너는 형제에게 까닭없이 화를 내지 말고, 욕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약의 해석이 아니라 모세 율법에 그대로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다만 그렇게 이해하고 믿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살인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명을 죽여 버리고, 죽인 사람을 또 죽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몸은 지금 이곳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저 멀리 타 지역, 타국에 있는 어떤 사람까지 죽이고 옵니다. 우리는 혼이 범하는 이런 살인에 대해서 죄를 인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 받아야 합니다.
자기 형제에게 까닭 없이 화를 내는 것이나 자기 형제를 일컬어 ‘라가’라 하는 이들은 공회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라가’는 유대 말로 바보, 멍청이, 속이 빈사람,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말은 마음에 있는 대로 나옵니다(눅6:45). 우리 말에도 “등신, 쪼다, 머저리” 등 욕도 다양합니다. 이런 말이 자기 형제를 향해서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어떤 사람은 그냥 마음에 들지 않고, 주는 것도 없으면서 정이 가지 않고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 타락한 육신의 본성에 기인한 것임을 알고 ‘살인’의 전 단계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형제에게 “너,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할 때 그는 지옥불의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이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거하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9,11 요한일서 3:15절을 보겠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요일2:9),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걸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2:11).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가인의 성품이요, 마귀의 성품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향해 가졌던 성품입니다.
때로 성도들이 오해하는 한 가지는 살인을 저질러야 살인자인 줄로 아는데 살인자이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어떤 상황이 닥치면 살인을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거듭나기 이전에 모든 사람은 다 살인자입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살인자는 누구인가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요일3:15).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니”- 이것이 신약 성경이 정의하는 살인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누구도 죽인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몰라도 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들로 드러났습니다. 죄인들은 모두 예외 없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치는 무리들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나는 1900년대 태생이어서 갈보리의 십자가를 본 적도 없다고 말할지 몰라도 죄 가운데 타고난 본성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합니다. 올빼미가 빛을 싫어하듯이 죄인들은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고 또 빛으로 나아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 행위를 책망 받을까 염려함이요,](요3:20)란 말씀대로입니다. 빛을 미워하는 이들은 모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들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주님이 죽으셨다면 우리는 주님의 살인에 직접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윌리엄 부쓰- 꿈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말렸다. 그런데 망치를 들고 자신을 돌아보는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는 꿈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죄인들 중의 한 명이란 사실을 보고 소스라쳐 일어났다.
23-24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드리려고 예물을 가져오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너를 대적할 일이 있음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23-24). 주님은 형제와의 화해가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일 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선순위를 결정지어 주셨습니다. “네 길로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 *먼저..그 뒤에.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은 “먼저... 그 뒤에”란 순서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을 그 뒤에 해야 할 일보다 덜 중하게 여기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율법 하에서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주님은 그것보다 형제와의 화해가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형제와 불화한 상태의 마음,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 형제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제단 앞으로 나와 드리는 예물을 주님께서 받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일만큼이나 형제들 간에 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 주셨는데 첫째가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신6:5)이고 둘째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였습니다. 이 두 계명은 구약의 모든 계명을 요약하는 것이었고, 가장 크고도 첫째 되는 계명이었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율법사의 질문에 대답해 주신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22:36-40입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명령이 크니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둘째 /명령/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달려 있느니라.] (마22:36~40). 위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 땅에서 이웃 형제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은 자신이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만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거짓말쟁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기를, [누구든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직접 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 우리가 이 명령을 그분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고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요, 둘째는 이웃입니다. 영적인 삶은 이웃과 형제가 없는 홀로 독야청정의 수련이나 고행이 아니라 더불어 공동체로서 사는 삶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면 우리 가족 사이에, 우리 교회 내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이 열매로, 삶으로, 향기로, 빛으로 드러납니다. 선한 행위로, 구제로, 섬김으로 드러납니다. 말과 행위는 부드러워지고(gentle), 온유해지며(meek), 잘못과 실수가 돌출되어 나올 때도 조건 없는 용서와 허물을 감추어 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벧전4: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체육 대회를 하고, 다과회를 하며 육신의 즐거움을 주어도 형제들 간에는 다툼과 분열과 시기와 쓴 뿌리만이 나올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형제란 단지 자신의 직계 가족이나 친가나 외가 8촌 이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누구나 다 형제입니다. 한 마디로 신앙 공동체로서 유대교인들이라면 누구다 형제입니다. 유대인이란 혈연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인데 이들은 형제와 타국인에 대한 태도가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빌려 주면 타국인에게는 이자를 받거나 빨리 갚도록 빚 독촉을 해도 되지만 형제에게는 이자를 받지 않고, 독촉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경제적 문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 그러했습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 속으로 미워하지 말며 어떤 식으로든 네 이웃을 책망하여 죄가 그에게 임하지 못하게 하라.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주]니라.](레19:17-18). 구약의 율법 시대라고 해서 신약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대할 때 말 그대로 형제로서 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모두 한 가족입니다. 형제에 대한 규례는 구약이나 신약이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형제들”에 대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형제들을 사랑하라, 형제들과 짐을 나누어지라. 형제들을 돌아보라. 형제들을 섬기라. 형제와 화해하라, 형제를 용서하라. 심지어 형제에게 피해를 입더라도 세상 법정으로 가지 말고 손해를 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할지니라.](갈6:10).
화해를 위해서는 먼저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용서가 없는 화해는 없습니다. [너희가 사람들의 범법(犯法)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들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의 범법(犯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마18:35). 용서의 기준은 내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용서의 횟수는 내가 만족할 때까지, 양이 찰 때까지, 분이 풀릴 때까지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용서하신 그 용서가 기준입니다. 어떻게 용서받았습니까? 아무 값없이 용서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렇게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하지도 않고, 잘못했다고 말하지도 않고, 말하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건성으로 들리고,...용서해 주지 못하는 이유와 핑계를 죽 늘어놓습니다.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그렇게 말합니다. 화해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변명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는 용서의 기준이 주님이 아니라 자신이요, 자신의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구를 대적할 것이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犯法)을 용서해 주시리라.](막11:25). 제단에 예물을 드리기 전에는 대적할 일이 있는 형제와 화해하고, 기도하기 전에는 대적할 것이 있는 형제를 용서하라. 이것이 순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한 용서의 기준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엡4:32),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주님은 화해 헌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불화가 있다면 어떻게 화해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으며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화해하게 하는 사역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며 사람들의 범법을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해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느니라.](고후5:18-19). 복음은 화해의 말씀입니다. 화해의 헌물이신 주님이 나를 위해 드려졌고, 화해의 헌물을 제시해야 할 우리들이기에 형제들은 물론이요, 원수라도 용서해 주고 화해해야 합니다. 화해와 화평의 근거는 주님의 피입니다. 육신의 본성인 미움은 나의 육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성령을 통해 부어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화해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빕니다.
25-26절입니다. [네 대적(對敵)과 함께 길에 있을 동안에 속히 그와 합의하라. 이는 언제든지 그 대적이 재판관에게 너를 넘겨주고 재판관이 관원(官員)에게 넘겨주어 감옥에 가둘까 염려함이라.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25-26). 화해를 청하는 쪽에서는 법정의 판결이 아닌 당사자 간에 화해가 최선입니다. 형제들의 문제가 세상 법정으로 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네 대적과 함께 길에 있을 동안에 속히 그와 합의하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성도들에게 “끝까지 법리 논쟁을 벌여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변호사를 고용해서 승소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네 대적과 함께 길에 있을 동안에 속히 그와 합의하라”고 하십니다. 대적은 무리한 요구를 할지 모릅니다. 대적은 위협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손해를 당하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형제가 형제를 고소하며 그것도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하는도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 가운데 전적으로 허물이 있나니 그 까닭은 너희가 서로를 고소하기 때문이라. 차라리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빼앗기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그런데 도리어 너희가 부당한 일을 행하고 속여 빼앗되 그것도 너희 형제들에게 그리하는도다.] (고전6:6~8). 우리는 교회들이 서로 편이 갈려 싸우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 법정에 고소해서 판사들의 판단을 받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는 참으로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갚아야 할 것이 있을 때에 우리는 “길에 있을 동안”, 즉 재판정에 가기 전에 합의해서 해결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은 빚을 지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형제가 아닌 세상 사람들에게 빚을 질 경우에 빚을 다 갚기 전까지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이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음이니](롬13:8).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이곳 미국 생활은 온통 빚으로 시작해서 빚으로 마감하는 삶입니다. 평생을 벌어서 갚아야 하는 그런 제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 빚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갚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죽기 전에, 주님 오시기 전에 은행에 빌린 돈을 다 청산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고, 매월 갚아야 할 돈을 갚지 못해서 경고장을 받거나 법정에 소환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같은 성도가 성도에게 빌려 준 경우에는 이자를 받지 말고, 독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유가 되면 탕감을 해 주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반면 받은 쪽에서는 최선을 다해 갚을 의사를 보여야 할 뿐 아니라 갚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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