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하지 말라
말씀: 마5:33-37
요절: 마5:34
오늘은 맹세에 관한 법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곧바로 옛 사람들로부터 지금까지 그들이 들어 왔고, 배웠고,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던 그런 율법에 대해서 전혀 새롭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간음하지 말라]는 너무나 익숙한 그런 말씀들을 통해 율법 속에 담긴 “공의, 믿음, 사랑, 긍휼”과 같은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는 당시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을 통해서 전혀 들어 보지 못한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어떤 율법사들이나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강해 시간이나 ‘십계명 시리즈’를 공부할 때도 그들은 이런 해석이나 설교를 듣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몸으로, 행위로 하는 살인과 간음만이 율법의 전부인 줄로 알았는데 주님께서는 마음의 문제요, 혼의 문제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행위 이전에 언제나 사람의 중심과 마음을 살피시고, 영을 달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너는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이들이 지금까지 왜곡되게 듣고 오해해 왔던 말씀의 바른 의미를 가르쳐 주시고 바른 믿음과 적용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너는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은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이는 [주]가 자신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출20:7).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거짓 맹세, 거짓 서원은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향해서는 거짓 증거 하지 말도록 하셨고, 위로 주님을 향해서는 거짓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대신 여러 가지 편법을 사용했습니다. 하늘, 땅, 예루살렘 등을 넣어서 맹세했던 것입니다. 이런 말은 어느덧 관용어가 되었고, 일상 생활에 뿌리 박힌 그런 어투가 되었습니다. 맹세는 인간이 말로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법이요, 자신의 혼을 구속하는 일입니다. 맹세는 서약, 서원의 법입니다. 맹세는 다툼의 종결입니다. [이는 진실로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큰 자를 두고 맹세하기 때문이니 확증하기 위한 맹세가 그들에게는 모든 다툼을 끝내는 것이니라.](히6:16).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맹세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맹세는 오늘날 우리가 계약서를 쓰는 일만큼이나 일상생활에 광범위하고도 흔하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일례로 아브라함은 여러 차례 맹세를 했습니다. 이삭이나 야곱이나 구약의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생활 가운데서 어떤 일을 약속할 때 주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쭉 읽어 보면 어떤 일에 대해 요즘처럼 서로 계약서를 쓰는 것처럼 맹세로 확증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맹세를 하는 대신 각서나 계약서를 쓰고, 담보물을 맡기거나 공증을 합니다. 말로 하는 맹세보다는 담보물이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보다 돈을 걸고 하는 약속이 더 큰 신뢰를 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준 맹세를 들어도 믿지 못합니다. 하물며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를 믿을 리가 없습니다.
맹세는 약속이나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많은 맹세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성도들을 향해서 약속을 주실 때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습니다(히6:13). 저와 여러분이 읽고 보는 이 성경은 하나님이 친히 맹세하신 맹세의 말씀이요, 맹세로 확증된 언약의 책입니다. 히브리서 6:17, 7:28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불변함을 더욱 풍성히 보여 주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써 확증하셨나니](히6:17). 주님은 맹세로써 확증하셨습니다. 주님의 맹세는 사람들의 말, 정치인들의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행하신 맹세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또 율법은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을 대제사장으로 삼거니와 율법이 있은 뒤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무궁토록 거룩히 구분된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삼기 때문이니라.](히7:28). *맹세의 말씀. 성경은 하나님의 맹세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허언(虛言)이나 식언(食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농담이 없고 과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하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어찌 그 말씀하신 것을 행하시지 아니하리요? 어찌 그 이르신 말씀을 실행하시지 아니하리요?] (민23:19)라고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강력하신 이는 거짓말을 하거나 후회하지 아니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후회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이다.](삼상15:29). 주님은 말씀을 하시면 그 말씀을 실행하시고, 이루십니다. 사정이 바뀌었다, 세월이 너무 흘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어렵게 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유효 기간이 지나면 부패하거나 변질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굳게 세워져 있으며 변하지 않습니다(시119:89).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리라, 하라.](사40:8). [오직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지속되나니 복음으로 너희에게 선포한 말씀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5). 이런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로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됩니다. 주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맹세의 말씀임을 기억하고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구약 성도들은 자신의 불변하는 의지, 강력한 뜻을 전달할 때면 으레 맹세를 했습니다. 또 누군가에게 약속을 받을 때도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했습니다. 맹세를 하는 그 자체는 결코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도 율법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금지하신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거짓 맹세”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고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9:12). 거짓 맹세는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요, 주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것(출20:7)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맹세를 해 놓고 보니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막대한 피해가 되는 것을 알고 후회하거나 무르거나 무효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육신의 본성입니다. 급한 마음에 말을 쏟아 내 놓고는 “아, 실수였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맹세를 거짓 맹세라고 말씀하시고 손해가 되더라도 갚으라고 하십니다. 실수였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민수기 30:2에 [사람이 [주]께 서원하거나 자기 혼을 속박(束縛)하기로 서약으로 맹세하거든 자기 말을 깨지 말고 자기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지니라.](민30:2)고 명령하십니다. 맹세의 가치는 자기 말을 깨지 않는데 있습니다. 또 이르기를, [[주] 네 하나님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지니라. 이는 [주] 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실 것임이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신23:21)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 약속한 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1986년 5월에 구원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떤 야간 집회에 참석했는데 초빙 강사로 오신 분이 “성경 읽기”에 대해서 설교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매일 하루 세끼 밥을 먹듯이 매일 성경을 하루 10-15분 이상 읽을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저는 번쩍 손을 들었습니다. 강사는 거기서 만족하지 못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저는 일어났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지 않으면 언제나 그 날에 주님 앞에서 손을 들고 일어났던 기억이 생생하게 나곤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내게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나에게는 죄가 된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입술로, 마음으로 행한 여러 가지 약속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때로 나에게 많은 손해를 주는 일일지라도 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 앞에서 네 입을 경솔히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어떤 것도 말하지 말지니 이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기 때문이니라. 그런즉 네 말 수를 적게 할지니라.](전5:2). 이런 맹세의 규약은 대대로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율법과 전통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규정을 매우 강조하고 백성들에게 준수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맹세는 하되 맹세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핵심 요지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알고 믿는 것은 성경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제 다 같이 맹세에 관한 법에 대해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주님이 말씀을 선포하시는 산으로 올라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33절입니다. [또 옛 사람들이 말한바, 너는 거짓 맹세하지 말고 네가 맹세한 것을 {주}께 이행하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3). 주님은 지난 1500년 동안 유대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들었고, 사람들이 말씀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다 아십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지난 주에 회당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들이 성전에서 무슨 가르침을 받았는지 다 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이 지난주에, 지난달에, 지난해에 교회에서 어떤 말씀을 들었고, 어떻게 믿고 이해하는지 다 아십니다. 대부분의 유대의 랍비들은 성경대로 “너는 거짓 맹세하지 말고, 네가 맹세한 것을 주께 이행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에겐 말씀의 깊이, 말씀의 풍성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회당이나 성전에서 듣는 것은 “너는...하지 말고...하라”는 말씀이 전부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공의, 사랑, 믿음, 긍휼 등이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철저히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들을 가르치고 선포하셨습니다. 살인, 간음, 맹세, 안식일에 대한 규례 등에서 다 그러했습니다. 행위보다는 마음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관한 법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니](마12:7).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라”는 말만 들었지 그 구절이 호세아 6:6에 나오는 말씀인 “긍휼”과 연관되어 선포되는 말씀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는 주의 법에서 나오는 놀라운 것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살아 있는 불같은 율법을 전통과 의식과 사람의 계명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모든 완전한 것들의 마지막을 보았사오나 주의 명령은 심히 넓으니이다.] *I have seen an end of all perfection : but thy commandment is exceeding broad. (시119:96)고 합니다. 이는 시편 기자인 다윗이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사랑함으로써 그 속에서 지혜를 얻고, 명철을 얻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백성들이 늘 들어왔던 동일한 계명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 주고 계십니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담긴 깊은 영적 진리들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말씀을 통해 심히 넓고, 풍부하고, 놀라운 그런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34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결코 맹세하지 말라. 하늘을 두고도 하지 말 것은 하늘이 하나님의 왕좌이기 때문이요,](34). 주님은 “그러나(But)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결코[어떤 것에 대고/at all] 맹세하지 말라/But I say unto you, Swear not at all”고 하십니다. 이 구절을 오해하면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과 정면 위배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앞서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라고 선포해 두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성취자로서 “맹세에 대한 법”을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Swear not at all. *not at all을 “결코”란 숙어로 처리하지 말고 단어 그대로 해석하라. “어떤 것에 대고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은 법정에서 법정 선서나 서약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약서에 전혀 사인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필요할 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주의 백성들이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금지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하셨고, 아브라함부터 믿음의 선조들은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맹세하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주의 이름으로 맹세했고, 율법 시대에도 주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교회 시대에도 이런 맹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 되시거니와”(롬1:9, 빌1:8)라며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맹세할 때 핵심은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굳게 붙들고 해야 합니다. 신명기 6:13, 10:20입니다. [[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을 섬기고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신6:13). [너는 [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굳게 붙들고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하라.](신10:20). 이것이 맹세의 바른 자세입니다. 맹세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맹세할 때 공의와 의로 맹세해야 합니다. [또 네가 진실과 공의와 의로 맹세하기를,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할 것이며 민족들은 그분 안에서 자기들을 위해 복을 빌며 그분을 자랑하리라.] (렘4:2). 맹세는 진리의 하나님을 두고 맹세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축복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축복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리니 그 까닭은 이전의 고난들이 잊혀졌고 내 눈에서 숨겨졌기 때문이라.](사65:16). 맹세는 단지 구약의 율법의 유산이 아니고 신약이나 다가올 천년 왕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맹세는 신약에서 폐기된 법이 아닙니다. 그 증거를 봅시다. 이사야 45:32입니다. 우리는 장차 천년 왕국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의 혀로 주님께 맹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의로운 가운데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리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45:23).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은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결코 맹세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까?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 땅을 두고 맹세한다, 자기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예는 허다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나 성경을 두고 맹세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어떤 것에 대고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 역시 다 하나님과 연관된 것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에 해당한다는 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분명히 넣어야만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 맹세해도 주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것이 되고, 땅으로 맹세해도 그러합니다. 예루살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의 생명을 걸든지, 나의 이름을 걸어도 이 역시 하나님과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은 이 점을 간과했지만 주님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계명인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이는 [주]가 자신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출20:7)는 말씀이나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고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9:12)는 율법은 “주의 이름/LORD, JEHOVAH”를 부르지 않으면 해당 사항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넣어서 하는 맹세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고, 주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이 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다 주님의 작품이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사람의 뜻대로, 사람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왕좌이기 때문에 하늘을 두고 맹세할 수 없습니다. “하늘을 두고도 하지 말 것은 하늘이 하나님의 왕좌이기 때문이요”(34b). 땅은 주님의 발받침이기 때문에 맹세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위대한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시이기 때문에 맹세할 수 없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땅을 두고도 하지 말 것은 땅이 그분의 발받침이기 때문이요, 예루살렘을 두고도 하지 말 것은 예루살렘이 위대한 왕의 도시이기 때문이라.](35). 이 말씀을 통해서 유대인들은 당시에 만연했던 맹세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모두 드러났습니다. 하늘, 땅, 예루살렘 등을 들먹이며 자연스럽게 했던 맹세가 사실은 다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것이요,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거짓 맹세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살인과 간음에 대한 주님의 명쾌한 해석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을 주신 주님 외에는 누구도 이런 가르침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울 때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무엇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은 의사 표시를 맹세로 하지 말고, 맹세를 할 때 어떤 것에 대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 땅,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교회나 성경이나 그 어떤 피조물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36절입니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 것은 네가 머리털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36). 하늘과 땅, 예루살렘은 주님의 것이라면 자신의 몸, 자신의 혼, 생명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내 생명을 걸고,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등등의 말입니다. 주님은 그것마저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머리를 자신의 것이라고 소유를 주장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자신의 몸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그래서 우리는 어떤 맹세에 자신의 몸을 걸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 수도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 성(姓)을 간다”며 흥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그 역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의 것이란 뜻은 내 마음대로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통제가 가능하고, 나의 소유여야 하지만 실제로 우리 몸은 물론이려니와 나의 마음조차도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체 중에 가장 작은 것이라 할 수 있는 머리털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때로 어떤 이는 성형 수술을 하고, 염색을 하고, 문신을 그리면서 자신의 몸을 원하는 대로 만들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변장이지 변화가 아닙니다. 옷을 바꾸어 입었다고 해서 변화된 것이 아니듯이 화장을 하고 수술을 한다고 변화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맹세에 관한 구약의 규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정확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37절입니다. [오직 너희 의사 표시는 예면 예라 하고 아니오면 아니오라 하라. 이는 무엇이든지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에서 나기 때문이니라.](37). 이 구절을 통해서 앞에서 말한 맹세의 법이 “의사 표시”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해 어떤 것에 대고 맹세함으로써 의사를 표시하지 말고 “예, 아니오”로 의사를 표시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 이상으로, 거기에서 지나는 것은 악에서 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면 “예”라 하고 “아니오”면 “아니오”라 하면 됩니다. 우리는 때로 강조하기 위해서 맹세컨대, 결단코, 절대 등등의 말을 붙입니다. ‘예’와 ‘아니오’만 분명히 하면 됩니다. ‘예’했다가 사정이 생기면 ‘아니오’로 바뀌고, ‘아니오’ 했다가 사정이 생기면 ‘예’로 바뀌는 것이 사람입니다. 기준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입니다. 글쎄요, 아마도 등등의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 것도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사람들, 어떤 일에 연관되기 싫어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옵니다. 복음을 전해 보면 앞에서는 “예”했다가 돌아서면 곧 바로 “아니오”라고 해 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글쎄요”를 연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의사 표시는 맹세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 “아니오”로 하면 족합니다. 거짓 맹세를 하지 않고 주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작정하였을 때에 내가 경솔히 하였겠느냐? 혹은 내가 결심한 것들을 육신에 따라 결심하여 예, 예, 하고는 아니오, 아니오, 하였겠느냐?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니 너희를 향한 우리의 말은 예 하고는 아니오 함이 아니었노라. 이는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너희 가운데서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 하고는 아니오 하신 분이 아니었음이라. 오직 그분 안에는 예만 있었나니](고후1:17-19). 이 가르침은 야고보 사도에 의해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그러나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어떤 맹세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예는 예라 하고 너희의 아니오는 아니오라 하라.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정죄에 빠지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약5:12).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만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어떤 피조물을 대상으로 해서 맹세하는 것도 모두 거짓 맹세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맹세에 관한 법은 이것입니다.
1. 주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 역시 주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것이다.
2. 의사 표시를 할 때 맹세로 표시하지 말라. 베드로는 “예,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간단한 질문에 주님을 저주하며 맹세하며 모른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전혀 맹세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맹세했습니다.
3. 전혀 맹세하지 말라가 아니라 어떤 것에 대고 맹세하는 것은 잘못이다. 맹세할 때는 주를 두려워함으로, 진리 안에서 맹세하라.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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