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악에게 맞서지(resist) 말라

말씀: 마5:38-42
요절: 마5:39


세상의 인간관계는 주고받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준만큼 받으려고 하고, 준 것 이상으로 받으려 합니다. 이유 없이, 대가없이 주는 이는 잘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받았을 때는 잊어버리거나 받은 만큼만 갚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것이 득(得)이 아니라 손해나 손실일 때는 반드시 몇 배로 되갚아 주고자 하는 욕망이 본능 속에 꿈틀거립니다. 은혜는 받는 만큼 보답하지 못해도 모욕이나 수치나 원한 등은 기꺼이 몇 갑절로 되갚아 주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육신의 본성입니다. 정확하게 똑같이 되갚아서는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피해자일 때는 공의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가해자일 때는 긍휼과 은혜를 요구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일 보복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악에게 맞서지/저항하지, 대적(KJV)/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죄악, 불법을 묵과하거나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주]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라.](시97:10a)고 하셨습니다. 악에게 맞서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악에 대해서 무감각하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곧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곧 악을 미워하는 것이니라.](잠8:13a). 악을 미워할 줄 모르는 진리를 기뻐할 줄 모릅니다. 악을 미워하지 않는 이는 주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그리하면 [주] 만군의 하나님께서 혹시라도 요셉의 남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암5:15)고 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선포되는 본문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고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의를 사랑하고, 진리를 기뻐하고 악을 미워하십시오. 우리는 이성 뿐 아니라 분명한 감정적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예부터 들어왔던 율법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 주시고, 바른 믿음을 갖도록 돕고 계십니다.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바른 믿음이 없습니다. 바른 믿음이 없이는 바른 적용이나 열매가 없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한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8). 이것은 당시의 보편적인 가르침이었고, 성경 해석이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이것은 당시 민법이요, 형법이었습니다. 요즘 관점에서 보면 좀 살벌한 법이긴 하지만 이 말씀은 모세 오경에 세 번 나옵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보복의 법이 일반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의 한 면만 보았을 뿐 결코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일단 세 가지 경우에 어떤 것인지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임신한 여자를 다치게 하여 그 영향이 아이에게 미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다른 손해가 있으면 네가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매는 매로 갚을지니라.] (출21:23~25). 그런데 이 말씀은 문맥적으로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임신한 여자를 다치게 해서 그 아이가 죽은 경우에는 살인죄를 적용하고, 아이가 눈이나 발이나 다른데 이상을 입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형벌로 지불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아, 영아를 성인과 동일한 인격체요, 동일한 법적 권리를 보장해 주고 있는 법입니다. 이는 오늘날 어떤 민주 국가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법입니다. 하나님은 아이들의 생명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의 권리를 중요시해서 마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처럼 낙태를 공공연히 시키는 것은 엄연한 살인이요, 살해입니다. 어떤 신문에서 보았는데 한국 여성들이 세계 1위를 차지하는 것 가운데 몇 가지를 보면 '성형수술'과 '제왕절개', '흡연', '이혼율', '낙태율' 등에서 세계 최고"라고 말합니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지만 낙태율은 세계 1위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보다 병원에서 낙태로 죽어가는 생명이 훨씬 많습니다. 생명 윤리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낙태를 살인으로 보지 않는 가증한 일이 현재 소위 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의 윤리 의식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의 실체가 아직 불완전할 때에도 주의 눈이 보셨으며 계속해서 형성되는 나의 모든 지체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사오니 곧 그 지체들 중에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니이다.] (시139:16)라고 합니다. 배 속에 있는 아이들을 죽이는 일은 엄연히 살인이며, 율법에 따르면 아이를 죽이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할 일입니다. 많은 크리스천 여성들이 믿음과 실제 결혼, 이혼, 재혼, 임신, 낙태, 자녀 교육 등의 실제 문제에서 성경적 가르침이 전혀 삶에 참고 사항 정도도 안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이웃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는 상처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니라. 그가 남에게 상해를 입힌 대로 그에게 그와 같이 행할 것이며] (레24:19~20). 이 율법은 유대 사회의 형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이 말씀을 가르쳤고, 유대 사회에는 긍휼, 용서, 사랑 보다는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식의 보복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율법의 한 쪽 면만 강조하다 보니 정작 율법에서 가장 중대한 가르침이 외면되고 무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웃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주]니라.](레19:18).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듣고 배운 이들은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원망하지 말며...” 와 같은 말씀이 마음 속에 자리 잡지 않습니다. “원수를 갚으라”가 율법입니까? “너는 원수를 갚지 말라”가 율법입니까? 둘 다 율법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이 직접 원수를 갚거나 보복을 하거나 형을 집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세우신 왕이나 총독이나 행정관들이 법을 집행하라는 것입니다. 치리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집행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네게 선을 베푸는 자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네가 악한 일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헛되이 칼을 차고 다니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보복하는 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를 집행하기 때문이라.] (롬13:4). [총독들에게는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께서 보내신 자들에게 하듯 하라.](벧전2:4). 이스라엘에는 재판관들이 있었고, 장로들이 있었고, 통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지 개인이 개인을 상대로 원수를 갚거나 보복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모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란 한 조상 즉 한 아버지를 둔 형제들이요 믿음의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가장 비통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일은 형제들이 서로 싸우고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 간에 우애가 없고, 친함이 없을 때 부모는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서로에게 위해를 가할 때 아버지는 견딜 수 없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 이삭을 희롱한 이스마엘, 에서를 속인 야곱, 야곱을 죽이려 한 에서, 암논을 죽인 압살롬 등 성경에는 이웃도 아닌 피붙이 형제들 간에 행한 다툼과 살인이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삶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이고, 우리가 매일 신문에서 듣고 보는 소식입니다. 이 땅에서 믿음의 형제들, 영적 가족들은 형제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서로 싸우고 다투고 물고 뜯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를 슬프시게 하는 일입니다. 원수 갚는 일은 모두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하고, 대적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확한 의미이며, 우리가 삶에서 적용해야 할 부분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은 심판하시는 주님께서 친히 행하실 일입니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셋째, 거짓 증인 거짓으로 대적하여 증언할 때 재판관은 그가 거짓 증언한 이유와 목적을 알아내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도록 했습니다. 거짓 증언을 통해 한 사람을 사회에서 매장하고, 남은 인생을 감옥이나 매질이나 유배나 사형 등의 형벌을 받도록 했다면 그 거짓 증언을 한 사람에게 동일한 형벌을 주라는 것입니다. [만일 거짓 증인이 일어나서 어떤 사람이 잘못했다고 그 사람을 대적하여 증언하면 그 분쟁하는 두 사람이 [주] 앞에 함께 나아가서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관 앞에 설 것이요, 재판관은 부지런히 조사할지니, 보라, 그 증인이 거짓 증인이요, 자기 형제를 대적하여 거짓으로 증언하였거든 너희는 그가 자기 형제에게 행하려고 생각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거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그 뒤로는 너희 가운데서 이런 악을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리라. 네 눈이 불쌍히 보지 말라. 오직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을지니라.] (신19:16~21). 이 세 가지 경우에 주님은 “눈에는 눈, 이는 이, 손은 손, 발은 발로 갚을지니라”는 강력하고 엄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율법대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이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모든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대로라면 악을 생각하는 우리 머리는 머리로 갚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것입니다. 율법대로라면 우리 손과 발은 손과 발로 갚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힌 것입니다. 율법대로라면 우리 몸은 찢겨야 하고, 창에 찔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채찍에 맞음으로 온 몸이 상하고 찢기셨습니다. 옆구리는 창에 찔리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모두 갚으셨습니다. 죄의 삯을 남김없이 다 지불하셨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청구하는 모든 죄의 삯에는 Paid. Done. Finished란 피로 된 붉은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39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에게 맞서지(resist)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39). 주님은 유대인들이 들어왔던 율법을 말씀해 주시고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새롭게 말씀을 주십니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율법의 의도와 목적에서 벗어난 해석과 믿음을 바르게 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웃이나 형제들에게 당한 원한, 억울함, 피해, 손해 등을 직접 그대로 앙갚음하는 것이 율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나 왕들이 율법대로 판결해서 공의롭게 집행하라는 것이지 직접 보복하라는 뜻은 더욱 아닙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에게 맞서지 말라” 하셨습니다. 악을 갚으시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보복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원수라 할지라도 잘 대해 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행정관, 총독을 둔 것은 악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악에게 맞서지 말라”는 것은 언제나 패배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악에게 맞서지 말라는 말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라](롬12:27).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을 죽이러 쫓아 다니는 사울 왕을 향해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조차도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네게 악으로 보답하되 너는 내게 선으로 보답하니 너는 나보다 더 의롭도다.](삼상24:17)라고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은 여러 차례 사울을 대적할 결정적인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망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이나 다른 원수들을 향해서는 사자같이 담대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 앞에서는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무저항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핍박과 죽임 등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폭력 무저항을 특징으로 합니다. 교회사 2,000년 동안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악에게 맞서는 대신 빼앗기고, 감옥에 갇히고, 추방당하고, 채찍에 맞고, 기꺼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무도 야만적인 재판에 대해서 저항하지 않았고, 인권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분신자살(焚身自殺)을 하거나 투쟁이나 불복종이나 저항을 외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정치 조직화하거나 이익 집단을 만들거나 기타 등등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악에게 맞서지 말라는 것은 악을 회피하거나 악에 대해 모른 체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저항하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까? 악에게 저항하지 않고 악에게 지지 않는 방법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대적하면 무조건 지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육신의 힘으로 저항하거나 맞서는 것은 악에게 무조건 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체포되시던 밤에 칼을 잡고 악에게 저항했습니다. 자신의 육신의 힘으로 저항했을 때 주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잡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고 하셨습니다. 원수들은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몰려 왔습니다.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그냥 잡혀 가는 것입니다. 때리면 어떻게 합니까? 맞습니다. 죽이면 어떻게 합니까? 죽습니다. 이것은 악에게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 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물리적인,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무기를 들고 공격하는 악을 향해 ‘영적인 전쟁’으로 파악하고 합심해서 기도하고, 금식함으로 이기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써 이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림으로 이기라는 것입니다. 육신이 두들겨 맞지만 영으로는 그들을 압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육신을 메달아 때리던 자들이 지쳐서 더 못 때리고 죽여도 또 죽여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몸을 죽이는 자들을 이기는 법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혼을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주님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마10:28).

악에게 맞서지 말라는 것은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선을 따르고 도리어 축복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5, 베드로전서3:9입니다. [조심하여 아무도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도 선하며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선한 것을 항상 따르라.](살전5:15). [악을 악으로,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축복하라. 이런 일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줄 아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악으로 선을 갚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약 악으로 선을 갚으면 어떻게 됩니까?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의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17:13). 반대로 선으로 악을 갚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축복하는 이들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악을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죽임에는 부활로 대항합니다. 사망에는 생명으로 대항합니다. 육신은 영으로 대항합니다.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불러 대항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바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여인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고문을 당하되 풀려나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또 다른 이들은 심한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참으로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으며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시험을 받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궁핍과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으니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느니라.) 그들이 사막과 산과 땅굴과 동굴에서 떠돌아다녔느니라.] (히11:35~38). 질병, 파산, 이혼, 가족 간의 갈등과 같은 별별 일들로 우리를 공격하는 악들에 대해서 우리는 똑같은 방법으로 저항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대적하고, 그런 때일수록 더욱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기하면서 영적인 승리를 쟁취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궁극 목적은 영혼의 무장해제입니다. 믿음의 파산입니다. 거기에는 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resist) 아니하였노라.] (히12:4). 우리는 죄를 대적하고 세상을 대적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싸우고, 대적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하며,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마귀들과 죄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주의 징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가르침을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아룀이 참으로 합당한 일이니 곧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불법을 행하였을지라도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는 것이라.](욥34:31-32). 죄와 이기려면 죄와 싸울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굳은 의지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정해지지 않는 사람, 의지와 결단이 없는 사람의 기도는 두 마음을 품은 기도요, 흔들리는 기도요, 정함이 없는 기도입니다. 결코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말씀을 듣고, 믿었으면 확실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작은 여우가 포도원을 망치고, 작은 구멍이 둑을 무너뜨리듯이 작은 죄악들이 믿음의 성벽을 허물어뜨립니다.

때로 우리는 악을 피해야 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구하고 그것을 따를지니](벧전3:11). 이겨야 할 것이 있는 반면 아예 피해야 할 악이 있습니다. 피하면 될 것들을 붙들고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피해야 할 죄는 첫째, 음행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행하는 모든 죄는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느니라.](고전6:18). 구약의 걸출한 믿음의 사람 중에 요셉과 다윗은 이 죄를 다루는데 극명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요셉은 피했습니다. 그는 악을 피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남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도 피해야 할 죄를 피하지 않았을 때는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둘째,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즉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전10:14). 우상이란 금과 돌이나 조각으로 만든 형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세워둔 무형의 것들이 훨씬 더 무섭습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돈이나 명예, 권력, 학위 등은 모두 우상 숭배입니다. 셋째, 속되고 헛된 말장난입니다. [오직 /너는/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을 피하라. 그것들은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함으로 나아가느니라.](딤후2:16),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들 역시 피해야 합니다. [오직 /너는/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들을 피하라. 너도 알거니와 그것들은 다툼을 일으키느니라.](딤후2:23).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와 논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도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와 논쟁과 율법에 관한 다툼들은 피하라. 그 까닭은 이것들이 무익하고 헛되기 때문이니라.](딛3:9). 학자적 자세가 있는 체 하며 말장난하다가 말다툼을 하다가 죄만 짓습니다. 넷째, 피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배운 교리를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롬16:17). 악한 사귐은 선한 행실을 부패케 합니다. 피해야 할 것들을 피함으로써 우리는 분리된 삶, 경건한 삶,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39절 후반부에서부터 40절은 “악에게 맞서지 말라”(resist)는 말씀의 구체적인 예들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빼앗으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십 리를 가며](39b-41). 이 말씀을 들을 때면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실천할 수 있는 문제일까란 생각이 듭니다. 이 구절을 대할 때면 “우리 주님 한 분 외에 누가 이런 삶을 살 수 있는가?” 이런 회의가 들 정도입니다. 우리 주님은 치는 자에게 자기 뺨을 내 주었습니다. [그가 자기를 치는 자에게 제 뺨을 내주어 스스로를 치욕으로 가득 채우나니](애3:30).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어 주고 머리털을 뽑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어 주며 수치와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도다.](사50:6). 뺨을 돌려대는 것은 결코 악에게 저항하지 않는 일이지만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순과 역설의 진리 속에 삽니다. 수치와 모욕을 받는 일이 어떻게 승리의 삶인가? 생각이 들겠지만 십자가의 진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을 돌려 대는 것은 상식적으로, 합법적으로나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그 무엇으로도 옳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상식이나 지식이나 논리로 살면 내면에 아무런 기쁨도 평안도 없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대로 일시적인 수치와 모욕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한 쪽도 내어 줄 때 영적 평안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고난과 치욕을 당하며 싸웁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치욕을 당하였으나 많은 싸움을 싸우며 우리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살전2:2), [영예와 치욕으로 그리하고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으로 그리하였나니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며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다.](고후6:8-10). 이런 것들이 전혀 없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42절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42).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었노니 너희가 마땅히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자들을 도와 주고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노라,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하셨습니다. 일을 해서 약한 자들을 도와 주는 것은 복이 있습니다. 많이 받는 것이 복된 삶이 아니라 많이 줄 수 있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주는 일은 자신에게만 아니라 자신의 후대를 위해 영적 유산을 남겨 주는 일이요, 복을 남겨주는 일입니다. [그가 항상 긍휼을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씨가 복을 받는도다.](시37:26). 자식을 위해서 재산을 남겨 주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그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을 돕고, 선교 현장에 사용해 버리고, 약한 자들, 어려움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흩어 뿌리는 일이 바로 어떤 많은 재산을 남겨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녀들에게 복을 남겨 주는 일입니다. 줄 때는 인색하게 주지 말고 넉넉히 주십시오. 이런 말씀은 신약에서 새롭게 주님이 가르치신 진리가 아니라 모세 오경에 모두 나와 있는 율법입니다. 주님은 지금까지 이들이 잘못 알고, 잘못 적용해 온 말씀들을 바르게 선포해 주시고 계실 뿐입니다.

신자의 삶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원리가 동일합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는 말은 빚보증을 서 주라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소유 안에서 인색함이 없이 베풀고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주는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물이 되고, 주님께 복을 받는 일입니다. 이는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어느 성문 안에서든지 네 형제들 중 가난한 사람이 너희 가운데 거하거든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그 가난한 형제로부터 네 손을 접지 말고 반드시 너는 그에게 네 손을 넓게 펴서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필요를 위해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너는 조심하여 네 악한 마음 속에서 이런 생각을 품지 말지니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하는 해가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가난한 형제를 향해 눈을 악하게 뜨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대적하여 [주]께 부르짖으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니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 마음에 근심하지 말지니 그 까닭은 그것으로 인하여 [주] 네 하나님께서 네 모든 일과 네 손으로 행하는 모든 것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 또 땅에서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에서 네 형제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넓게 펼지니라.](신15:7-11). 우리는 이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품고 그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1.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 우리가 할 일은 원수 갚는 것,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2. 악을 미워하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선으로 갚으라.
3. 죄를 대적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4. 영적 진리는 역설과 모순의 진리이다. 하지만 믿고 순종할 때 열매가 있고, 체험이 있다.
5. 나누어 주는 일에 손을 넓게 펴라.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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