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간음
말씀: 마5:27-32
요절: 마5:28
주님께서 율법의 성취자로서 유대인들이 그동안 들어오던 몇 가지 율법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어려서부터 들어왔고, 너무나 익숙한 그런 계명들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옛 사람들이 말한 바...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신 것은 이들이 율법을 어려서부터 들어왔음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약 1500년 동안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과 더불어 [너는 간음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을 들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주님은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단지 육체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정도가 전부가 아니라 “네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욕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까지도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주님께서 율법이 그러하다고 말씀하셨다면 사람은 누구도 그 율법의 저주와 정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살인자가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 믿음과 같은 것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의 랍비들이나 율법사들은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를 외면한 채 율법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철저히 행위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외적 행위 이전에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오 사악한 자의 사악함을 끝내시고 오직 의로운 자를 굳게 세우소서. 이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마음과 속 중심을 시험하시기 때문이니이다.](시7:9b).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고 각 사람의 길과 각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각 사람에게 베푸느니라.](렘17:10). 주님은 행위를 보시기 이전에 속 중심을 시험하십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릅니다. [...이는 [주]가 보는 것이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삼상16:7b).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의 외적 행위를 준수하는 것이 전부인 줄로 알고 있었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옛 사람들이 말한 바...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십계명을 들었고, 율법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동일한 말씀을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버린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들을 언급하시고, 그런 것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통으로, 사람의 계명으로 왜곡해 버린 것들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음이라.](마23:23a). 공의와 긍휼과 믿음을 중시하면 율법의 외적 행위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살인]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마음 속에 미움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위 이전에 마음의 문제입니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27절입니다. [옛 사람들이 말한바, 너는 간음하지 말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27).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이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이후로 늘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는 간음하지 말라.](출20:14, 신5:18). 그들은 간음한 남자든 여자든 반드시 죽이라는 주님의 계명을 들었습니다. [다른 남자의 아내와 간음하는 남자 곧 자기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가 있을 경우/ 그 간음한 자와 간음한 여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20:10). 그들은 살인과 더불어 간음이 얼마나 큰 죄이며, 무서운 정죄가 뒤따르는지 어릴 때부터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 사회에 간음이 없는 깨끗한 사회, 영적인 사회, 도덕적 기강이 완전히 확립된 사회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유대에는 어느 이방인들 속에 있는 모든 죄란 죄는 다 존재했습니다. 간음이란 행동 이전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증거, 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니](마15:19). 간음은 몸 밖에서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와서 몸의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간음은 육신의 행위들입니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色慾)과](갈5:19).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결코 해결 받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28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淫慾)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 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28). 유대인들은 몸으로 행한 것만 간음으로 여길 때 주님은 마음이 행한 것까지 포함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법은 몸의 행위 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미칩니다.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살인자요, 간음자란 사실을 잘 모릅니다.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행위로 하지 않는 것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부패했고, 자신이 짐승 같은 자인 줄을 모릅니다. 어떤 이는 사람들로부터 신사적이다, 예의바르다, 성인군자다, 양심적이다 등등의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주의 대언자 예레미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 사악한 것, 만물보다 더럽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렘17:9).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패함, 죄성, 사악함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예외로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짐승과 같은 존재임을 압니다. 지혜의 대왕이었던 솔로몬은 이 세상 사람들이 실로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짐승보다 못합니다. 금수(禽獸)만도 못한 인간!, 인면수심(人面獸心) 등은 세월의 풍파를 겪어 본 이들은 누구다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내 마음 속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시리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짐승임을 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3:18). 때로 신문이나 T.V로 들려 오는 흉악한 범죄 소식을 접할 때면 “말세다, 인간 말종이다!” 탄식하지만 그런 일들을 통해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짐승임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 남의 이야기로 생각하지 말고 이 모든 사건들이 자신 안에도 있는 마음 상태요, 나 자신도 전혀 예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이같이 어리석고 무지하므로 주 앞에 짐승 같사오나](시73:2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돌아 보시고, 영을 달아 보시고, 중심을 살펴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와도 감히 다르다고 차이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비교하면서 서로 칭찬하고, 영광을 받고, 자랑합니다. 같은 사람들 앞에서는 부끄러울 것이 없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모두 짐승 같습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 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는 말씀하실 때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무리들이 가슴이 철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웃이나 형제를 미워해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듯이- 그것은 살인이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나이, 인종, 문화, 언어, 민족의 차별이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대적 구분도 없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살아있고 예리한 양날 선 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그들 마음 속으로 파고 들 때 그들은 바로 자신이 살인자요, 간음자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감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접할 때 그들은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율법이 몸의 행위 이전에 마음의 문제까지 다루고 계심을 말씀하심으로 이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율법의 저주와 정죄 아래 있음을 다시한번 절감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거듭 말씀하시는 것은 새로운 교리나 사상이나 가르침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율법의 요구사항이 그러하다는 것을 말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공의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준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사람의 육신은 율법을 행할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없어지거나 약화되거나 바뀌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며 의(義)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 의(義), 믿음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는 길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의가 되시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롬10:4).
주님이 공생애 사역동안 줄기차게 외치신 한 마디는 “나를 믿으라”입니다. 주님을 믿을 때 마음으로 살인자든 간음자이든 다 깨끗하게 씻음 받고 용서받습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이 줄기차게 전한 말씀도 이것입니다. 설교의 주제는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으로 결코 의롭게 될 수 없고, 율법으로 결코 완전해 질 수 없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양심은 정결하게 되고, 죄는 용서되고, 영은 살아나고, 혼은 깨끗하게 씻겨 집니다. 우리를 씻기는 것은 말씀의 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십자가의 피입니다.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계1:5). “자신의 피로”란 이 구절은 오직 킹 제임스 성경에서만 있습니다. 여러분의 성경에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란 말씀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피로' 씻기셨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십시오. 음행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공공연히 음행이 벌어졌고, 심지어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없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육신적이고도 타락한 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그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너희 가운데 이 같은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이제는/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김을 받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게 되었느니라.](고전6:11). 여러분이 거듭났던 그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처음 불렀던 그 순간을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을 마음에 영접했을 때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진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일순간에 죄의 짐이 벗겨짓고, 양심이 순수해지고, 혼이 깨끗해지는 그런 놀라운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김을 받고”란 말은 이론이나 신학적 교리가 아니라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내적으로,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신비적 체험이 아닙니다. 감정적 체험이 아닙니다. 주의 영이 들어 와 이루시는 실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란 종교, 예수란 교주, 교회란 조직만을 가졌을 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믿음으로 영접하지 못한 분들은 제가 전하는 말씀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공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의 실제, 믿음의 체험이 자신 안에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해 보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순간에 변화를 경험합니다. 주님을 믿고 고백하는 순간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자유와 평강이 깃드는 체험을 합니다. 마음이 깃털보다 가벼워지고, 눈보다 희게 되는 그런 체험을 합니다.
29-30절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를 실족(失足)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이는 네 지체 중의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네게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만일 네 오른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이는 네 지체 중의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네게 유익하기 때문이니라.](29-30).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죽음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 말씀대로라면 이 세상에 온전한 몸을 가진 이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다행히 눈 하나, 손 하나로 그친다면 좋겠지만 온 몸을 모두 잘라내도 부족한 것이 사람입니다. 어떤 나라에는 도둑질한 자는 손을 잘랐고, 거짓말한 자는 혀를 잘랐습니다. 온 몸이 죽는 것보다는 손이 잘리고, 혀가 잘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나 손으로 인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져야 한다면 당연히 손과 발을 자르고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비유로 하신 것입니까? 문자 그대로 집행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성경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사도들이나 교부들이나 교회사의 어떤 성도들도 이 말씀대로 손을 잘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수도사들 중에 음욕을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들은 있습니다. *몸을 자를 것이 아니라 마음을 잘라야 한다. 구약에서도 물론 이런 법 집행이 된 적이 없습니다. 환란 시대에도 이런 법이 문자 그대로 집행되는 예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천년 왕국에서 집행될 ‘왕국 헌법’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배운 적이 있습니다.
상징이나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풀어야 할 말씀이라면 왜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않았습니까? 구약이나 신약이나 환란 시대에 사람들은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습니다. 고라의 반역에 가담한 이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죽은 몸은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갔지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진 예가 없습니다. 지옥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몸이 아니라 혼이 가는 곳입니다. 천년 왕국 때는 지옥에 던지는 대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립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느 시대의 어떤 죄인에게도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는 네 지체 중의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네게 유익하기 때문”에 실족케 하는 지체들을 잘라 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으로 잘라냅니까? 성령의 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칼입니다. 이것은 영적, 은유적 해석이 아니라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해서 푼 정확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우리 안에 행하십니다. 전혀 마취를 하지 않고도 주님은 우리 안에 영적 수술을 단행하시고 겉 사람과 속 사람을 분리해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능히 불의의 병기로 드려지는 우리 지체를 죽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5, 로마서 8:13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무엇으로 죽입니까?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죽입니다.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8:13).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족케하는 지체들을 하나 하나 죽이다 보면 결국 온 몸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눈은 악합니다. 입은 열린 무덤이요, 혀는 거짓을 베풀고,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발은 피 흘리는데 빠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상처를 입으시고, 온 몸의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온 몸이 다 상하셨고, 그 혼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바 “네 눈을 뽑고, 네 팔을 잘라 내라”는 것입니다. 아직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경험이 없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경험도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성경 구절이나 이런 설교를 들을 때면 마음에 전혀 와 닿지를 않을 것입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믿습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지각은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말로는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더 들은 이야기이지만 실제적 체험이나 깨달음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음이라.] (롬6:6-7).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손은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의 손은 불의의 도구였고, 죄를 짓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 손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발은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의 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 악을 생각하는 머리는 가시관으로 덮였습니다. 온 몸은 채찍으로 찢겼습니다. 입과 혀는 말라 버렸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고 내 모든 뼈는 마디에서 어그러졌으며 내 심장은 밀초같이 되어 내장 한가운데서 녹았나이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내 턱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티끌 속에 두셨나니] (시22:14~15). 우리의 몸은 이제 주님께 산 제물로 드려지고, 우리의 지체는 의의 병기로 주님이 사용하시도록 넘겨 줌으로써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31절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지니라, 하였으나](31). 주님은 마음 속으로 행한 간음 외에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합법적인 간음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이혼과 재혼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자들이 교회 내에서 만나 목사님을 주례로 세우고 결혼한 그런 결혼이 쉽게 이혼으로 갈라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앓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신자들이 태연스럽게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형제 자매로 만난 부부 사이가 이혼하는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는 이혼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남자가 아내를 취하여 그녀와 결혼한 뒤에 그녀에게 부정함이 있음을 발견하였으므로 그녀가 그의 눈에 은총을 얻지 못하거든 그는 이혼 증서를 써서 그녀의 손에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24:1).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혼할 명분을 만들어 합법적인 이혼을 했습니다. 본래 이혼은 금지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만들어 주신 분이십니다. 다만 사람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이혼 증서를 주어 이혼하게 함으로써 여자들의 생명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절대로 이혼하지 못하게 하면 그 미움으로 인해 아내를 몰래 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을 시험하여 이르되, 남자가 무슨 이유로든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이 율법에 맞나이까?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처음에 사람을 만드신 이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 아내를 버리라 명령하였나이까? 하니 그분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이 완악하므로 아내를 버리도록 허락하였으나 처음부터 그렇지는 아니하였느니라.] (마19:3~8). 이혼을 허락한 이유는 “너희 마음이 완악하여”입니다. 법으로 인해 더 큰 범죄를 막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혼이란 무엇인가? 간음입니다.
32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의 이유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녀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혼 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니라.](32). 주님은 이혼 사유로는 “음행” 뿐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유로 이혼하는 것은 간음하게 하는 것이며, 이혼 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재혼의 사유는 사별뿐입니다(롬7:4). 크리스천이 이혼을 생각할 때는 첫째, 배우자의 음행입니다. 이것은 합법적인 사유입니다. 둘째, 불신자인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할 경우 이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가 떠나려 하거든 떠나게 둘지니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경우에 얽매일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7:15). 그러나 믿는 신자 쪽에서 불신자 배우자에게 먼저 이혼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고전712-14). 이혼한 경우에는 혼자 살든지 다시 재결합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셋째, 배우자가 주님을 믿지 못하게 하거나 배교를 부추기는 경우입니다. 흔히 욥의 아내를 예로 드는데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신13:6). 신자들인 경우에는 이혼이 가능합니다. 그 외에 성격 차이가 어떻고 등은 전혀 이혼 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율법과 간음”에 대해서 너무나 분명하게 다루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은혜를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몸을 주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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