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마5:20
요절: 마5:20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바리새인 같다”라고 하면 거의 인격적, 신앙적 모욕에 가깝습니다. 바리새인들이란 말은 어느덧 위선과 외식, 가식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pharisees)은 예수님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유대교의 한 분파였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와 분리된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리새인들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 예수님을 대접했던 시몬,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몸을 빌라도에게 요청해서 자기 무덤에 장사를 지내주었던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신약 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행23:6).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성도들은 바리새인들에 대해 날카롭게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과 강단의 설교로 인해 그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열정과 율법 준수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나는 바리새인이요”란 한 마디는 중세 캐톨릭 시대에 “나는 사제요, 나는 주교요, 나는 추기경이요”라는 말보다 더 권위가 있었습니다. “나는 바리새인이요”란 한 마디면 율법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더 이상 그에게 시비를 걸지 못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이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합니다.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3:5-6). 바리새인들은 어려서 모세 오경을 암송했습니다. 그들은 규칙적인 금식과 하루 세 번의 기도 생활에 철저했습니다. 최소한 사람들의 눈에 보일 어떤 실수나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흠잡힐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은 외적 행위에 대해서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 속의 영적 상태, 양심의 상태, 정신 상태, 신앙 양심이 율법의 행위를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음으로 인해 책망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에서 가장 엄한 종파에 속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그들이 처음부터 나를 알았으니 만일 그들이 증거하고자 한다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종파를 따라 바리새인으로 살았다 할 것이니이다.](행26:5)라고 합니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해 “너희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뜻 생각할 때 일반 유대 평민들을 향해 “너희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것은 친목회나 아마추어 동호회로 구성된 팀에게 “너희가 프로 팀보다 나은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들을 이기지 못하면...”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심한 말입니다.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너희가 전문가들보다 더 뛰어나지 못하면”이라고 말할 때 듣는 사람들은 황당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의 백성들은 바리새인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분리된 삶과 경건, 의와 거룩함에 압도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열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에 관한한 감히 바리새인들과 논쟁이나 토론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지식 면에서나 행위 면에서나 어느 면으로 견주어 보아도 바리새인들 앞에서 명함을 내밀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나 다른 제자들도 차이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누가복음8:10-12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0~12). 성전에 나와서 이렇게 기도하는 바리새인은 결코 거짓으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자신 있게 기도합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남을 착취하지 않고, 불의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며, 자신의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런 삶이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삶을 비난하시거나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리와 창기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도둑이나 사기꾼이나 강도처럼 살아서는 더욱 안 됩니다. 우리는 탐욕을 부려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이 바리새인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보지 않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며 자신을 자랑하고, 의롭게 여기는 것이 문제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 한 분 앞에서 자신을 보면 누구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고, 의롭게 여길 수 없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이 바리새인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보는 대신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자신의 곁에서 기도하는 세리를 보면서 기도했습니다. 때로 성도들도 누구보다 기도를 많이 하고, 누구보다는 교회를 더 열심히 다니고, 누구보다는 성경을 많이 읽고...교회 내에서는 적수가 없다,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는 나만큼 신앙 생활 잘 하는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시기하고 경쟁하고 비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침례인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께 나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거니와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하니](마9:14). 금식이 믿음과 경건, 영성의 척도는 아니지만 이들이 금식을 통해서 절제와 경건의 훈련을 규칙적으로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서 “너희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탐욕이나 위선, 거짓됨,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 보이고자 하는 행동들을 기준으로 “너희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는 종교 행위들, 율법 준수, 기도와 금식 등을 기준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시거나 몹쓸 것들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하는 것은 지키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대로 행하지는 말라. 이는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아니하며] (마23:2~3)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지키라고 명하는 것은 지키고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기도 생활, 십일조 생활(눅11:42), 금식, 율법 준수, 분리된 삶 등은 배워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세리들과 창녀들은 물론이요, 대부분의 민초들이 바리새인들과 종교 생활로 경쟁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아예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 지식으로서도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부터라도 철저한 율법 생활에 돌입하라, 이제부터 모세 오경을 줄줄 외워라,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라, 많이 구제하라, 하루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라.” 등을 강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뛰어난 의, 더 나은 의를 얻는 길을 말씀해 주시고, 그것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이 종교 행위로는 바리새인들을 이길 수 없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들을 당할 수 없지만 그들보다 더 뛰어난 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지 않고도 의를 얻을 수 있도록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의 몸으로 친히 율법을 성취하시고, 자신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으니 곧 율법과 대언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자에게 그리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이는 거기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롬3:21-22). *이제는(now)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으니--예수님이 계시되셨으니, 예수님이 오셨으니. 모세로부터 침례인 요한 때까지는 율법의 의외에 다른 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주님께서 율법을 성취하러 오심으로써 이 땅에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났습니다. 갈라디아서 3:23을 보십시오.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붙잡혀서 나중에 계시될 믿음이 오기까지 갇혀 있었느니라](갈3: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구약입니다. “나중에 계시될 믿음이 오기까지”-신약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는 말씀대로 누구든지 믿는 자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해 율법의 성취자로 오신 자신을 선포하셨고, 자신이 율법의 완성자요, 끝마침이 되신다는 점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4).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 율법의 끝마침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의 죄가 되셨고(고후5:21), 우리의 저주가 되셨고(갈3:13) 동시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의”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넘겨지셨으며 우리의 칭의(稱義)를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느니라.](롬4: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이제 선택은 사람의 몫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기를 선택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의 길을 갈 것인가? 율법으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과 죄인됨을 철저히 자각함으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를 구원해 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을 갈 것인가? 그 선택은 각 사람의 몫입니다. 율법의 의를 추구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죄인들이라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던 세리들이나 창기들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의롭습니까?
자, 보십시오. 우리 자신이 판단할 필요 없이 성경이 직접 판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7:29-30, 마태복음 21:31-32절을 보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들은 온 백성과 세리들은 요한의 침례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에게서 침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하더라.] (눅7:29~30).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그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인한 회개의 침례를 주었습니다(막1:4).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인 백성들과 세리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보다 더 의롭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첫째 아들이라,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느니라. 이는 요한이 의의 길로 너희에게 왔어도 너희가 그/의 말/을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들과 창녀들은 믿었으며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그 뒤에 회개하여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마21:31~32). 주님은 이미 누가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인가를 판단하셨습니다. 의의 말씀, 의의 길을 믿은 자들이 먼저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 율법의 행위, 종교 행위로 자기 의를 쌓아 나가는 바리새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갑니다.
주님은 평생 동안 율법 준수, 종교 행위에 목숨을 걸다시피 살아온 바리새인들의 의를 훨씬 능가하는 의를 제시해 주시고, 누구든지 값없이 그 의를 얻을 수 있음을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육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니라.](롬3:20). 우리는 아브라함이 율법이 있기도 전에, 무엇을 행하기도 전에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회개와 자백을 통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의롭게 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살고자 애를 쓰고,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이긴 하지만 세상에서 나름대로 법을 지키며, 양심적으로 살아 보려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감동을 받고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죄만 짓고 사는 사람들보다 그런 사람들이 백배, 천배는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의는 사람들이나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사64:6). [오직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 그래서 주님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의가 아닌 ‘믿음에서 난 의’를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의는 육신의 행위에서 나지만 하나님의 의(義)는 종교 생활에서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율법에서 나지 않습니다. 만약 의(義)가 율법에서 난다면 창기들이나 세리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義)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의(義)가 믿음에서 난다면 전혀 상황이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의(義)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음이라.](갈2:21)고 했습니다. 만일 의(義)가 율법에서 난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헛된 죽음이며, 제자들이나 무리들은 누구도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의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사도가 된 것도 미친 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무리들과 제자들을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욱 뛰어난 의를 소유하게 하시는가?
첫째, 주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어 주심으로써 믿는 자들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난 의를 가지게 됩니다(고전1:30).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聖別)과 구속(救贖)이 되셨으니] (고전1:30).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어 버리면 ‘의’에 대해서는 끝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의’이십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의가 되어 주시는 것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쌓아 올린 의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됩니다.
둘째, 주님은 우리의 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지셨습니다. 죄의 삯을 지불하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나 홀로 죽은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은 죽으심입니다. 죄에 대해 죽고, 율법에 대해 죽고, 세상에 대해 죽은 죽음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옛 사람을 처리한 죽음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하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이같이 판단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의 어떤 사람과의 죽음과도 그 성격이나 의미나 동기나 결과가 완전히 다른 죽음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얻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죄에 대해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셋째,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부활입니다(요11:25).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첫 번째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에서 일어난 첫 열매입니다. 이로써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가 누구든지 죽음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의’를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넘겨지셨으며 우리의 칭의(稱義)를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느니라.](롬4:25). 부활하신 주를 믿는 이들은 그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소유하게 됩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게 하시기 위해 ‘의’를 선물로 주십니다. 의(義)는 우리가 행한 행위에 대한 보상,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또 이 선물은 죄 지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심판은 정죄(定罪)에 이르렀으나 많은 범죄로 인한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칭의(稱義)에 이르기 때문이니라.](롬5:16). 이 선물은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나니](롬5:18).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열심히 행해야 의롭게 되는 줄로 알지만 성경은 반대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을 잘 받는 것이 의롭게 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기 전에 주님이 내게 주시는 것, 주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더 많이 생각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베푸신 은혜, 나에게 주신 영적 선물들이 내 마음에 새겨지고 풍성하게 거하고 있다면 영적인 일은 노동이 아니라 열매로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께 많이 바친 사람이 영적으로 잘 산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 많이 받은 사람이 영적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롬4:5). 하나님의 회계 장부에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청구해 갔으며, 얼마나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많이 사용했는가? 주님의 권능, 말씀의 권능을 잘 활용했는가? 를 기록해 두시고 그 사용량이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주님의 은사들, 주님의 능력, 주님의 무엇을 받아서 행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행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이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하려 애를 쓰지도 않습니다. 대신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만 행하려고 합니다. 어느 것이 의롭게 사는 길입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의(義), 믿음의 의(義)는 오직 의(義)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는 너희가 의롭게 되지 못하던 모든 일에서도 믿는 모든 자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 하는 것이라.](행13:39).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성도의 삶에서는 처음도 예수님이요, 끝도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역사에서도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성경에서도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우리의 삶에서도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대속(代贖)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롬3:24).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7). 의롭게 되는 것은 성취나 업적이나 노력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니님의 은혜로 값없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을 내리노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되느니라.](롬3:28).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도다](롬5:1).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주요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는 의롭게 됩니다.
셋째, 그분의 피로,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롬5:9). 의롭게 되는 것은 사람이 흘린 땀과 노력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말미암습니다. 의는 피, 땀 흘려 수고하는 노력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흘려 놓으신 그 피가 나의 죄를 제거하고, 양심을 깨끗하게 하며 나를 의롭게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영으로 [/전에는/ 너희 가운데 이 같은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이제는/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김을 받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게 되었느니라.](고전6:11).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몸으로 행하신 모든 일들, 주님께서 이루신 완성된 사역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전달되고, 실제가 됩니다. 이렇게 의롭게 된 이들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지고 하늘의 왕국에 들어갑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의롭게 되는 길을 말씀해 주시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이 주님을 마음 속에 믿고 영접함으로 의이신 주님을 통해 의롭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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