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구제할 때에
말씀: 마6:1-4
요절: 마6:1-4
주님께서 성도들이 구제나 금식이나 기도를 할 때 한 가지 원칙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은밀하게”입니다. 어느 정도 은밀해야 하면 “남이 모르게, 나도 모르게”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를 정도로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름 중 하나가 ‘은밀’입니다. [[주]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네가 이같이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은밀(隱密)하니라, 하니라.](삿13:18).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밀하게 하라는 일은 은밀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선행과 구제는 성도들이 마땅히 힘써 행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구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하지 않습니다. 이는 의논하고 토론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기도해 보고 결정해야 할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성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은 율법과 구제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다만 구제의 방법을 일러 주셨습니다.
구제의 원칙은 “은밀히,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게”입니다. 이 원칙대로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드러나게 갚아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랑스럽게 행할 때 하나님의 보상이나 칭찬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은 직접 공중의 새 한 마리까지 먹이시며, 들의 백합화까지 입히시는 분이시지만 이 땅에 믿는 성도들을 먹이실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구제와 선행’이란 방법을 주로 사용하십니다. 고난에 처한 이웃 형제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주님께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는 것과 동일합니다. 마태복음 25:34-36절에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이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迎接)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찾아와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내게 왔음이니라.](마25:34~36). 우리가 직접 주님을 먹이고 입힐 수 있는 일이 구제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구제는 ‘선을 행하는 것’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또한 구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물이기도 합니다.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히13:16).
이런 이유로 초대교회 때부터 진실로 성경을 믿는 거듭난 성도들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힘이 넘치도록 자원하여 연보하고 구제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교세 확장을 위해서, 기복적인 소원 때문에 드린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마음에 품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자원하여 드린 것들입니다. 이웃 사랑이 있으면 구제는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창고에 양식이 넘쳐나도 구제는 나오지 않습니다. 율법을 행하기 위해서 구제를 하고, 헌금을 하고, 선행을 하려면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지만 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면 율법의 모든 명령들은 자연스런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립니다. 물질 이전에 마음입니다. 선행 이전에 사랑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3:17). 마음에서 행위가 나옵니다. 요한은 사랑과 구제의 관계에 대해서 말했다면 야고보는 믿음과 구제에 대해서 말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떠나가라.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라.] (약2:15~17). 믿음과 사랑이 있으면 구제는 자발적으로 열매로 맺히는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 근본은 언제나 행위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요, 성경적인 원칙이요, 모세의 율법이며 신약의 계명입니다.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고 쇠약하게 되어 너와 함께 있거든 너는 그를 구제하되 참으로 그가 나그네이거나 머무는 자일지라도 너와 함께 살도록 하고](레25:35). 그런데 구제를 세금을 내듯이, 또는 불우 이웃 돕기 성금을 내듯이, 준조세 성격으로 기부금을 내는 식으로 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하는 이는 방송국이나 신문사를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를 통해 자신이 선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남을 잘 돕는 사람, 너그러운 사람, 의로운 사람, 돈을 벌 줄도 알지만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 등등 사람들로부터 각양 좋은 칭찬과 영광을 얻기 위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관여할 일이 전혀 아닙니다. 어떤 분은 몇 년간 구제 사업을 한 후에 그 지역에서 인기와 명성을 얻고 선거에 나오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는 지혜요, 성공을 위한 처세술입니다. 모든 일이 결국은 다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 중의 하나였던 캘빈은 자신의 인생 강령을 1. for the glory of God 2. in the sight of God 으로 잡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살기로 결단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을 하는 것보다 구제의 선행을 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며, 그것이 ‘내가 택한 금식’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를 놓아 자유로이 가게 함으로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들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며 내쫓긴 가난한 자들을 네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벌거벗은 자를 볼 때에 입히며 네 살붙이를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의미 없는 종교 행사나 종교 의식보다 이웃을 보살피는 구제가 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구약이 율법 시대라고 해서 행위나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의 의식보다 구제를, 희생물보다 긍휼을(호6:6) 더 원하셨습니다. 율법의 외적 행위보다 사랑이 더 중요한 것은 구약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간과한 채 율법의 준수만 강조함으로써 위선자라는 호된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도 보상이 없고, 구제를 한 후에도 책망을 받는다면 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1절입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구제(救濟)하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보상(報償)을 받지 못하느니라.](1). 주님은 구제이든(마6:1) 기도이든(마6:5) 금식이든(마6:16) 그 무엇이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은 다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제는 좋은 것입니다. 기도 역시 쉬지 않고 뜨겁고도 열렬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금식 역시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할 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시에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기도를 해도 길 거리에 서서 길게 기도했습니다. 구제를 할 때도 누가 했는지 이름을 써서 냈는데 이는 오늘날 장로교회 헌금 봉투에 이름 쓰는 것의 원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금식을 할 때는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하곤 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모든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니 곧 성구함의 폭을 넓게 하며 옷단을 큼직하게 하고](마23:5). 공명심은 타락한 육신의 본성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고 싶은 것, 사람들에게 칭찬과 영광을 구하는 일은 누구나 탐하는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명함에 보면 끝도 없이 긴 약력이 적혀 있고, 어떤 분은 “40일 금식 기도 3회”라고 적어 놓은 분도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영성을 그런 행위로 인정받고 보상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어떤 형제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묻지도 않았는데 지금까지 자신이 성경을 몇 회독 했고, 구령을 몇 명했고, 성경을 몇 구절 암송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슨 일을 행했는지 보실 뿐 아니라 그가 무슨 동기로,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이유로 행했는지 먼저 그 속 중심을 보십니다. 주님께서 마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게 하실 때도 있고, 멸시와 수치를 당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한 일이라면 사람들의 칭찬에 쉽게 교만해지고, 사람들이 욕할 때 쉽게 낙담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노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행한 일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구제하는 일은 분명히 주님의 뜻입니다. 구제하는 일은 좋은 일이요,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기와 목적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하는 구제라면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죄이지만(약4:17), 선을 행하면서도 하나님께 아무런 보상이 없는 선행과 구제가 바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구제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이 주시는 보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부와 명예가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음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는 보이는 것은 잠깐 있을 뿐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니라.] (고후4:18). 지금 당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과 명예와 영광보다 저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얻게 될 영광을 소망하고, 그 때 받게 될 보상에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영웅들이 육신의 길, 세상의 길을 버리고 믿음의 길을 택한데는 ‘하나님이 주실 보상’에 대한 관심이 무엇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왜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실 보상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음이라.](히11:26). 모세의 관심은 이집트의 보화가 아니었고, 세상의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보상을 바라보는 믿음이야 말로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그리스도인들은 헛소리꾼이요, 헛된 믿음의 소유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해 싸울 때, “내게 줄 보상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저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에게서 이 수치를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느냐?] (삼상17:26a). 다윗은 싸울 때 자신에게 돌아올 보상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사가 개혁 정책을 수행하려 할 때 하나님은 대언자 오뎃을 보내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스스로를/ 강하게 하며 너희 손이 약해지지 않게 하라. 이는 너희 일에 보상이 있기 때문이니라, 하니라.](대하15:7). 이 말을 들은 아사는 용기를 내어 우상들을 제거하고 주의 제단을 재건했습니다(대하15:8).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실 보상을 바라보고 믿음의 길을 경주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왕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딤후4:7~8).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삶을 산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하늘에서 받게 될 보상입니다.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고문을 당하되 풀려나기를 원치 않는 이도 있습니다(히11:35). 끝까지 달렸는데 보상이 없고, 다 싸워 이겼는데 아무런 보상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왜 달렸던가? 무엇을 위해 싸웠던가? 탄식하지 않을 선수, 후회하지 않을 군사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셨고, 보상을 위해 힘써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보상이 없다면 주님께서 왜 힘써 일하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보상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없는 이들이 그 신앙이 세속적이요, 육신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상에 대한 믿음이 내 안에 자리 잡고, 강하게 될 때 세상을 기꺼이 버리는 순교자적 신앙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다시 1절입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구제(救濟)하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보상(報償)을 받지 못하느니라.](1). 여기서 진실로 중요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란 말씀입니다. 주님은 복음서 곳곳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란 말씀을 자주 하셨지만 동시에 말씀을 듣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정체성, 그들의 영적 신분을 확고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땅에 있는 자를 너희 아버지라 일컫지 말라. 이는 너희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라.](마23:9)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육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조상도 없고, 어미 애비도 없는 종교란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땅에 있는 누구도 영적으로 우리를 낳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육은 육을 낳을 뿐 영을 낳을 수 없습니다. 육에서는 영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로 낳으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약1:18).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벧전1:3). 낳은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께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로 태어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분을 영접한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니라.] (요1:12~1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낳으셨는가?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습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말씀은 씨앗입니다. 영적 생명의 씨앗입니다. 우리의 몸은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나지만 영은 성령을 통해서만 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우리 마음속에 뿌려질 때 성령께서 그 씨앗에서 우리의 영을 낳으시는 것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말한 것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요3:6~8). 이런 영적 지식은 신약 성도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기본 교리이지만 실제 영적 출생의 경험이 없는 분들이 오랫동안 종교 생활만 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였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있었고, 성전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8:41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는 음행을 통해 나지 아니하였고 우리에게는 한 아버지가 계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요8:41b). 그런데 무조건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들을 향해서 주님은 단호하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8:44)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특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배척함으로써 ‘마귀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정작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을 거부함으로써 마귀의 자녀로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분에게서 나신 분을 영접합니다. 반면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거부합니다. 그분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서 난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사도 요한은 병아리 암수 구분하는 감별법보다 더 쉽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감별법을 일러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니 또한 낳으신 그분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분에게서 난 자도 사랑하느니라.](요일5:1).
하늘에 계신 너희 왕,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란 말씀으로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을 인정해 주심으로 이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해야 할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관계성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란 사실이 영적 생활의 근간이요, 기초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닮고, 아버지의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우리는 버림받은 자요, 저주받은 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면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대하십니다.
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구제할 때에 위선자(僞善者)들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처럼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이미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2).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구제의 형태가 잘 나옵니다. 이곳 미국은 기부 문화가 발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기부를 하면 자연스럽게 “누가 이 교회에 얼마를 기부하셨습니다. 누가 얼마를 헌금하셨습니다.” 등을 밝히고 동판이나 이름을 새겨 넣고 기립니다. 남들이 그렇게 해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더라도 그런 것을 위해서 기부하고 헌금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았으면 이미 그 자체로 ‘자기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면 주님을 믿기 어렵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받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요5:44).
3절입니다. [오직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3). 이것이 구제의 원칙입니다. 구제를 하되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구제한 사실을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을 오래 마음에 담고 있으면 그것을 입 밖으로 내게 되고,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하게 됩니다. 구약의 3대 의인 중에 하나라고 일컫는 욥을 보십시오. 그는 매우 의로운 삶을 살았고 늘 구제와 선행에 최선을 다했던 삶을 살았습니다. 욥이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은 데는 이런 구제의 선행이 늘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만일 내가 어떤 사람이 옷이 없이 죽거나 가난한 사람이 덮을 것이 없이 죽는 것을 보았다면 만일 내가 내 양털로 그를 따뜻하게 하지 아니하여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욥31:19~20)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재앙도 달게 받을 뿐 아니라 도리어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팔이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이 뼈에서 떨어져 부러지기를 원하노니] (욥31:22)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낯선 자가 거리에 머물지 아니하였고 내가 나그네에게 문을 열어 주었노라.](욥31:32)고 합니다. 욥의 이런 삶은 그가 평소에 구제와 선행에 얼마나 힘쓰며 의롭게 살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행한 이런 모든 일들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마음속에 깊이 기록해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언제라도 자신이 언제 누구에게 무슨 선한 일을 했고, 얼마를 기부했고, 구제했는지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자기 의가 되고, 자기 의를 주장하고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남에게만 은밀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도 잊어 버려야 합니다.
4절입니다. [너의 구제하는 일을 은밀한 중에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친히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4). 하나님은 드러나게 갚아 주십니다. 언제? 이 땅에서가 아니라 심판 때에, 저 하늘에서입니다. 우리가 은밀하게 행한 일이 언제 드러나는지 보십시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분께서 감추어진 어둠의 일들을 빛으로 밝히시고 마음의 의도들을 드러내시리니 그때에야 비로소 각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리라.] (고전4:5). 물론 이 땅에서 갚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저 하늘에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은 저 하늘의 보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을 살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은밀한 허물, 은밀한 죄를 벗어 버리고 대신 은밀하게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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