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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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기도


말씀: 마6:5-8

요절: 마6:5-8


영적 생활의 비밀은 ‘은밀한 기도’ 즉 골방의 기도에 있다고
말합니다. 골방의 은밀한 기도에 따라 그 날 하루의 영적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공통적으로 쏟아낸 간증입니다.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나는 아침에 일어나 세 시간씩 기도하지 않고 살았던 날은 온전히 마귀의 손에 있었던 날이요, 패배한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말하기를, "나는 너무나도 일이 많기 때문에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지 않고는 살아나갈 수가 없다." 그는 또 자신의 기도 생활에 대해
언급하기를, "기도를 잘하는 사람은 연구를 잘한다."고 했습니다. 기도야 말로 성경 연구의 힘이요, 지혜란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하며, 하루에 두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바침으로 그의 확신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인디언 선교에 일생을 헌신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는 자신의 일기에 온통 기도와 금식과 묵상에 대한
기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의 일기 몇 줄을 발췌해 보면 "나는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나의 시골집에 홀로 있기를 즐겨한다." "나는 이 날을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금식하는 날로 따로 정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와서 명상과
기도와 금식을 하였을 때……."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고 난 후 친구였던 죠나단 에드워즈에게 이 일기를
남겼습니다. 이들이 골방에서 은밀히 하나님께 드린 개인 기도의 시간만큼 이들은 승리의 삶을 살았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의
최전방에서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그들의 삶의 변두리에 덧붙은 습성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이며 그들의 가장 생산적인 시기의 가장
진지하고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기도는 내가 오늘 해야 할 일 중의 그 어떤 일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며, 반드시 해야 할 일이란 점입니다. 이 점을 인식하고 실천하지 못한 이들은 결코 영적 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영적 지혜를 얻을
수 없으며,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마귀는 각 사람의 은밀한 기도 생활을 방해함으로써 영적 무장해제를 합니다. 이런 마귀의 간계를 깨닫고 나는
오늘 충분히 기도하였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낮에 뜨거운 더위를 이기는 힘은 밤과 새벽에 맞은 이슬이 충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밤과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다윗은 밤에 기도했고, 새벽이 동트기 전에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내가 아침이 밝기 전에 먼저
부르짖고 주의 말씀에 소망을 두었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밤의 경점(更點)보다 앞서 갔나이다.]

(시119:147~148). 이는 그의 은밀한 개인적 기도 생활과 말씀 묵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 [주]여, 아침에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위를 바라보리이다.]
(시5:3). [그러하오나, 오 [주]여,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보다 앞서 가리이다.]
(시88:13). 그의 이런 기도 생활이 일생동안 승리의 삶을 살게 해 주었음은
달리 논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은밀히 주님을 찾고 만나는 이들에게 주님은 만나
주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사랑하나니 일찍 나를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나리라.] (잠8:17).


주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참된 기도의 방법, 자세에 대해서
일러 주십니다.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를 하지만 바른 기도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종교 생활을 잘한다는 바리새인들이 위선의 누룩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 퍼뜨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가르침도 가르침이지만 구제, 기도, 금식 등 영적 생활이 모두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위선과 가식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받을 수 없는 것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구제, 기도, 금식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해야 할 것
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드러낸 그 자체가 이미 상을 받은 것이므로 하나님께 받을 보상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이나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지
사람들 앞에 드러내기를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처럼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독교는 서양 종교이므로 한국에 오면 한국식으로
토착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찬송가도 창이나 민요풍으로 바꾸고, 빵이란 말도 떡이나 밥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포도즙은 한국에
없었던 것이므로 ‘곡주’로 바꾸자고 합니다. 성화를 그릴 때는 한복을 입은 예수님, 한복차림의 사도들로 바꾸자고 말합니다. 이런 운동이 잠시나마
얼치기 신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그림을 몇 점이라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교도들의 종교 행위를 모방하거나 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거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때로 이교도들은 너무나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합니다. 불교, 회교, 캐톨릭 등을 보면 구제, 선행, 금식, 자선 등에 열심입니다. 그들의 예배와 기도 생활 역시 놀랍습니다. 묵주나
염주를 돌리며 기도문을 반복해서 외우고 읊조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벽 3-4시면 일어나 몸을 씻고, 새벽 예불을 드리는 불교도들이나
무속인들을 보십시오. 매일 새벽 미사와 저녁 미사를 드리는 캐톨릭을 보십시오. 이교도들의 육신의 행위는 그 열정이 남다릅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행위를 모방하는 대신 철저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교도들처럼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육신적 행위로 열심히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십자가의 피로 씻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교도들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교도들은 길게 오래도록
기도합니다. 같은 말을 헛되이 반복해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불교도들이 불당에서 천배(天杯)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짧은 구절을 온 종일
습관적으로 주문처럼 반복해서 외웁니다. 이는 어느 종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기도해야 자신들의 소원(염원)이 절대자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교도들의 기도 형태, 습관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소개되고 유대 사회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필요를 아뢰고, 듣는 은밀한 대화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 의식이요 관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무리들과 제자들을 향해 기도는
어떻게 드리는 것인가? 바른 자세와 태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5절입니다.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이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이미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
(5).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위선자는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의 눈앞에서
행하지 않고, 사람들의 영광과 칭찬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이에 하나님, 믿음, 사랑, 긍휼 등 영적
요소를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위선은 속에 있는 것과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위선은 회칠한 무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덤 같으므로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이 무덤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눅11:44).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살피시고, 그 중심을 달아 보시는 주님께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위선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입니다. [그동안에 무수한 사람들의 무리가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비로소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먼저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
(눅12:1).
그래서 이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람들을 부풀게 하고, 뜨게 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는 것은 ‘바리새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길게 기도했고,
화려한 미사여구를 쓰며 멋있게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이런 기도가 잘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귀에 들려주는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저는 선교 단체에서 주일에 대표 기도할 때면 미리 기도문을
적어서 목자에게 검사를 맡고, 몇 구절을 수정을 받은 후에 기도실에 들어가서 수십 번 연습해서 기도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목소리는 분명하고도
크게, 힘이 넘치도록 하도록 주문을 받았는데 기도를 통해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졸지에
사람들에게 들려 주기 위한 기도로 둔갑해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도 기도를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초신자들은 기도를 시켜도 “저는 기도할 줄 몰라요.”, “기도를 배우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합니다. 집사나 장로들이 대표 기도를 할 때 화려한
문장을 써가며 허황된 기도를 하기 때문에 처음 듣는 분들은 기도가 마치 회중들을 감동시켜야 하는 문장이나 연설이나 되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대표 기도를 잘 하는 법”이란 책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은밀한 기도를 하지 않는 이들의 기도는 언제나 쓸데없는
수식어가 많이 들어가며 요란하고 화려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로 기도하는 위치가 어디입니까? 그들은 주로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위치에서 기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심, 종교심을 드러내 보이려고 애를 썼고,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을 자랑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저분은 참 많이 기도하는
분이시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 기분이 좋다면 그는 이미 자기 보상을 다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기도할 때 기도하는 마음의 동기와 목적을
다 아십니다. “이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셨던지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의 기도는
길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겉치레로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런즉 너희가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
(마23:14). 악한 일을 한 후에는 겉치레로 길게 기도해 주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은
큰 정죄를 받을 일이요, 저주가 선포되는 일입니다. 행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는 기도를 적게 하라, 짧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몇 시간을
기도해도 좋고, 밤을 새워 기도해도 좋습니다. 다만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 겉치레로 기도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새벽 기도에 나와서 체면 때문에 성도들보다 좀 더 오래 기도를 하느라 고생을 합니다. 피곤해도 일어나지 못하고,
기도하고 일어나려 하다가도 문소리가 나면 다시 무릎을 꿇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란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6절입니다.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6).
주님께서는 기도의 위치, 특정한 기도의 장소를 정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나 모퉁이나 골방이나 기도의 위치는 어디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곳에서 남자들이 진노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2:8). 기도는 장소와
시간에 구애함이 없이 어디서나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고 기도는 언제나 “혼자 은밀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때 우리는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 모이는 일은 성경적인 일이며 성경적인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다시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어 주시리라. 이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니라.]
(마18:19-20)고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한 예는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충분한 본이 되고도 남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행12:5). 모여서
기도한 일입니다.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하는 것이나 교회에 모여서 기도 모임을 갖는 일은 전혀 모순되는 일이 아니고 모두 지극히 성경적인
일입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할 때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행위와 정반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요16:23).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께 구하라.” -기도의 대상을 항상 선명하게
의식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아버지께 구하라’는 말씀대로 순종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낳으셨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분이란 분명한 사실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내가 그분의
아들이란 이 한 가지 사실로 인해 나는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필요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습관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하지 말고
말씀에 기초해서 분명하고도 생생하게 의식함으로 구해야 합니다.


기도의 또 한 가지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14:13-1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16:24).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게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요,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께 구할 수 있는 기도의 근거는 “내
이름으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만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 받으시고, 들으시는 이름입니다. 로마 교회에서 봉헌한 죽은 성인들의 이름을
아무리 자주 부르고,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고, 성모 마리아를 아무리 외쳐보아도 그런 이름은 하나님 아버지께 들려지는 이름이
아닙니다. 킹 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개역 성경이나 기타 역본들에는 주님께서 “내게 구하라”고 변개해 버렸는데 주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16:23에 더욱 분명합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요16:23). 우리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마음에 영접한 이들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의 마지막 핵심은 ‘성령 안에서’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너희 자신을 세우며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고]
(유1:20). [/성/령
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하여 모든 인내와 간구로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엡6:18). 성령은 기도의
중보자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 주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란 어떻게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감정 속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 어떤 감정을 주입해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사도 요한이나 에스겔이 경험한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의미는 이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롬8:9a).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아버지께,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입니다. 이것이 기도에서 삼위일체입니다.


7-8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헛된 반복을 사용하지 말라-KJV). 이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이교도들과 같이 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의 필요한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7-8). 기도할
때 *헛된 반복을 사용하지 말라. -헛된 반복(Use not vain repetition).
기도는 말의 헛된 반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교도들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묵주를 돌리며
기도하는 캐톨릭 교도들이나 염주를 돌리며 기도하는 불교도들은 물론이고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읊조리는 것이 이교도들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반복을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특히 이런 기도를 많이 합니다.
이들은 짧은 기도문을 많이 만들어 놓고 하루에 한 두 개씩 자신이 원하는 것을 뽑아서 오천 번에서 만 번을 읊조립니다. 예)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5천번 반복. 말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고, 어떤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반복해서 기도문을 읊조립니다. 힌두교도들은 이것을 ‘만트라’라고
합니다. 오순절 교회를 비롯한 은사주의를 추구하는 교회에서 방언을 하는 것도 일종의 이교도들이 하는 ‘만트라’와 같습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의미 없는 말들을 쏟아내면서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몇 시간씩 기도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기도에서 *이교도들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교도들의 기도 방법은 헛된 반복과 길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교도들과 같이 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전에 어떤 교회 성도들과 함께 산 기도를 같이 갔는데 무려 3시간 동안 “예수 구주 내 구주”란 한 가지 문구만 반복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후에 저는 그 교회의 다른 목사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게 뭐가 문제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교도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이 없고,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중언부언(babbling-NIV)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의미 파악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른 성경이 없이는 바른 믿음, 바른 실행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을 사용하지 말라”
는 말씀은 기도가 주문이나 염원의 발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대화라는 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데 했던 말을 금방 다시 하고, 또 반복하면 미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보다
무한히 높으시고 크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이교도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정성과 염원이 하늘에 도달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으시는 말이
없습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나의 길과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이는, 오 [주]여, 보소서, 내 혀의 말 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니이다.]

(시139:2~4). 우리의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이 아버지 앞에 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아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부르기 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때에는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할 것이요, 그들이 말하는 도중에 내가 들을
것이며]
(사65:24).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엡3:20). 그렇다면 헛된 반복을 사용하는 것이야 말로
헛된 기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무지한 무리들의 정성과 염원의 강도,
애절함, 진정성을 살펴보시고 그 강도를 재어 보시며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피와 땀과 고통이 이슬처럼 맺혀 하늘에 사무치도록 올라오는 그런
간절함이 기도의 요건이 아니고 아버지로서 아들의 필요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로서 아들의 형편을 보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관계에서 성립됩니다. 분명한 관계성, 아버지와의 친함, 믿음과 사랑의 관계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바른
관계만 정립되면 기도는 말 그대로 영혼의 대화가 됩니다.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고, 주님께서 드러나게 갚아 주시는 체험들을
누리시는 선한 간증들이 쏟아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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