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말씀: 마5:43-48
요절: 마5:44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누구나 성경 한 구절 정도는 다 읊어 댈
줄 아는데 그 대표적인 말씀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사랑을 노래합니다. 모든 대중 가요의 대부분은 사랑이란
노랫말이 들어갑니다. 거의 모든 소설의 테마는 사랑입니다. 모든 영화, 연극의 주제 역시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 가지
가르침이 있다면 단연 ‘사랑’입니다. 사랑이야 말로 우리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성경을 대표하는 가르침입니다. 구약의 많고 많은 율법을 단 한 줄, 단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도
사랑이요, 둘째 되는 계명도 사랑입니다(신6:5, 레19:18). 이는 신약에 와서 선포된 가르침이 아니라 모세가 처음 율법을 받은 그 때로부터
항상 그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명령이 크니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둘째 /명령/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달려 있느니라.] (마22:36~40).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사랑이다. 구약은 행위이고, 신약은 믿음이다.”라는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거나 믿는 이들이 있다면 이는 성경을 크게 오해하고
헛되이 믿는 것입니다. 구약은 원수를 갚는 것이고 신약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교리가 달라졌다고 믿는다면 이 역시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핵심도 사랑이고, 신약의 핵심도 사랑입니다. 이는 결코 바뀐 적이 없습니다. 변한 것도 없고, 더 해진
것도 없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①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고
했습니다. 율법은 사랑으로 성취되고 완성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율법은 영원히 미완성입니다. 율법은 공의와 거룩함을 요구하지만 그 핵심은 사랑,
긍휼,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저절로 성취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에 관련된 모든 계명이 저절로 성취됩니다.
사랑은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고, 약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을 때 율법은 무너지고, 깨어지고 맙니다. 사랑이 있을 때 율법은 굳게
세워집니다. 성취됩니다. ② 사랑은 사람을 세워줍니다(고전8:1).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고전8:1b). 부모의 사랑으로 자식은 일어섭니다. 선생님의 사랑으로 제자가 세워집니다. 의사의 사랑으로
환자들이 일어납니다. 지도자의 사랑으로 나라가 섭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를 세워줍니다. 미움은 파괴하지만 사랑은 가족과 사회와 민족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들이 굳게 세워집니다. ③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덧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니라.](골3:14). 사랑은 헐렁해서 금방 빠지는 띠가 아닙니다.
약해서 금방 끊어지는 띠가 아닙니다. 사랑은 견고한 띠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묶여진 사랑의 띠는 아무도 끊을 수
없습니다(롬8:38-39).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와 형제, 형제와 자매가 띠로 묶였다면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이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할 때 원수와 내가 하나가 됩니다. 시위대들은 증오의 붉은 띠를 머리에 묶고 데모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띠, 화평의
띠, 사랑의 띠를 허리에 묶습니다. ④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났을 때
세상 죄인들의 모든 죄가 다 제거되었습니다. 사랑하면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미움은 다툼들을 일으키거니와 사랑은 모든 죄를 덮느니라.](잠10:12).
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요일4:16)고 표현될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4:7).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보여 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시고, 부어 주심으로 우리 역시 사랑으로 행하도록 하셨습니다(고전16:14).
⑥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야 말로 최대, 최고, 최선의 전도입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서로 사랑할 때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사랑은 그리스도의 표지입니다.
아무리 정통 보수 근본주의 신학에 정통하다고 해도 그가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마다 하나님을
알지만 미워하는 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4:7). 사랑은 이론이나 신학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정신이나 사상이나 어떤 이상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음이니] (롬5:5). 성령님은 어떻게 부어졌습니까?
[또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딛3:6).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부어지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없다면 원수를 사랑하기는 고사하고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나 형제나 친구조차 뜨겁게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는 인생을 살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마지막으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43절입니다. [/그들이/ 말한바,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43).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당시에 유대 사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가르침은
“네 원수를 미워하라”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원수는 결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율법사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한계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수를 사랑하지 않았고, 원수를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율법 역시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웃 역시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잘못 할 경우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식으로 보복하는 것이
율법이라고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옛 사람들이 만한 바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런 가르침이 그 당시의 일반적 성경 해석이었고, 정통 보수라고 주장하는 주류를 관통하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단, 신학, 종파에 따라서 얼마든지 왜곡되이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듣고 배운 율법은 대부분이 장로들의 전통이요,
사람들의 가르침일 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은 원수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거기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기뻐하지 말며 그가 걸려 넘어질 때에 마음으로 즐거워하지
말지니](잠24:17).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이 맞다면 이 말씀이 틀린 말씀이 될 것입니다. 또 한 구절 보겠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빵을 주어 먹게 하고 목마르거든 물을 주어 마시게 할지니](잠25:21). 성경은 결코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수가 주리면 빵을 주고, 목마르면 물을 주라고 하십니다. 구약 성경은 원수를 선대하라, 잘 대해 주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신약 성도들이 해야 할 일로 규정한 것과 동일합니다. 성경과 사람의 가르침이 이렇게 다릅니다.
[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줄지니 이는 그리함으로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을 것임이라.](롬12:20).
원수 갚는 일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다 주님께서 친히 하실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원수갚는 일과 보복하는 일은 내게 속한 것이라.
그들의 발이 정한 때에 미끄러지리니 이는 그들의 재앙의 날이 가깝기 때문이라. 그들에게 닥칠 일들이 속히 일어나리니 이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임이라.](신32:35~36). [오 [주] 하나님이여, 원수갚는 일이 주께 속하였나이다. 오 하나님이여,
원수갚는 일이 주께 속하였사오니 /친히/ 자신을 나타내소서.](시94:1). 하나님은 친히 원수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자신의 몸으로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원수 된 자들, 복음의 원수들이 받아야할 죄의 형벌, 율법의 저주를 온 몸으로 친히 대신 지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해서 받으신 것을 받지 않으시면 그 죄인은 직접 진노와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며](출23:4). 원수라고 해서 이웃과 다르게 대할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왜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들은 것입니까?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잘못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끊임없이 “너희가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고
하시면서 그들의 잘못된 율법 지식, 해석, 적용에 대해 책망하시고 바로 잡아 주시곤 하셨습니다.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가 ‘사랑, 긍휼’에
있음을 계속해서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다 같이 이 점을 유념하면서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44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44).
율법의 수여자요, 완성자이신 주님께서 “원수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친히 주신 율법의 해석이 이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과는 차원이
다른 성경 해석입니다. 율법사들은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주]니라.](레19:18)란 구절을 해석할 때 “원수와 이웃”을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했어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말하기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오니이까? 하니]
(눅10:29b)라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길을 가다 강도 만나 반쯤 죽게 된 어떤 사람을 예로 들어 주셨습니다. 레위인, 제사장은
다친 사람을 보고도 다른 쪽으로 갔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같은 동족이 아니라 말도 하지
않았고, 인간 이하로 멸시했던 때였습니다. 주님은 “내 이웃이 누구이오니이까?” 물었던 율법사에게 [이제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었다고 생각하느냐? 하시니](눅10:36)라고 되 물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민족적 감정에 기초해 원수로 규정한 사마리아인들이 그들의
원수가 아닙니다. 조상 때부터 맺어진 원한 관계로 인해 이웃이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웃과 형제간에 금전 문제로 인해,
여자 문제로, 또는 사소한 몇 가지 문제로 쉽게 원수가 되는 일도 있지만 이는 사람들이 제 멋대로 다툼과 분냄과 증오로 서로 원수를 맺거나
이웃을 원수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이웃, 용서하고 화해해야 할 이웃을 멋대로 원수로 만들어 놓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버리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가 율법인 것처럼 지켜 온 것이 그동안의 유대인들의 삶이요, 유대 사회의 영적
단면이었습니다. 이웃은 어디까지나 이웃입니다. 형제는 언제라도 형제입니다. 원수
같은 이웃, 원수 같은 형제가 있긴 하겠지만 이웃과 형제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들은 이 점을 간과한 채 율법 어디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없다, 원수는 미워하고, 보복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들어왔습니다. 주님은 그 점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욥을 보십시오.
[혹시 나를 미워하는 자가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내가 기뻐하거나 그가 화를 당한 때에 내 자신을 높인 적이 있던가.](욥31:29).
욥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않았고, 그의 멸망이나 화를 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아래 살았던 다윗 역시 그러합니다.
[나와 화평하게 지내는 자에게 악으로 갚았거든 (참으로 내가 까닭 없이 내 원수 된 자도 건져 내었사오니)](시7:4). 이들은 원수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했고, 그들을 건져내었습니다. 율법은 결코 “원수를 미워하라, 악을 갚으라, 보복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많은 이들이 그런 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잘못 믿었을 뿐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비로소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은 율법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을 통해서 구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바른 눈을 갖게 됩니다. 성령께서 지각의 눈을 열어 주실 때 교단 교리,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대로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삶은 율법을 완성한 삶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육신을 입고
사신 모습은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할 모범이요, 기준입니다. 주님께서 원수들을 대적하고, 미워하고, 죽이셨다면 십자가에서 용서의
기도를 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원수들을 사랑하셨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스런 순간에도 조롱하는 원수들을 향해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눅23:34a). 스데반이나 바울이나 모두 그러했습니다. 순교사화를 읽어보면 믿음의 선배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죽음에
처하는 원수들을 향해 이를 갈거나 저주를 퍼붓거나 욕설을 내 뱉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틴데일은 죽으면서 자신을 화형에
처하는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악을 악으로,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축복하라. 이런 일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줄 아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고 합니다.
45절입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니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해를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45).
이 말씀은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은 행위가 아니라 영적 탄생(거듭남)입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니”란 말씀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선민사상을 가진 이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민족 자체로서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너를 자녀들 가운데 두며
허다한 민족들의 아름다운 유산인 이 기쁨의 땅을 네게 줄 수 있으리요? 하였고 또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내 아버지라 부르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도다.] (렘3:19). [틀림없이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비록 아브라함은 우리를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오 [주]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의 구속자시니 주의 이름이 영원부터 있나이다.](사63:16).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고, ‘원수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영적 제사장으로서의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자녀는 누구나 아버지의 성품을 물려받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배웁니다. 그런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해를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떠오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내려 주시고 계십니다. 선한 자와
악한 자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해를 비추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데 이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행위에
상관없이 이웃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악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신 것은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심이요, 사랑과 긍휼과 은혜의 표현입니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도들을 향해서 가르침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세상이 의롭고 선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8). 원수를
이겨 오고 싶으면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 역사가들이 교회사를 이야기할 때 “순교자들의 피가 떨어졌던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원수들을 사랑한 그 사랑이 승리를 쟁취한 것입니다.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46절입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보상이 있겠느냐? 세리들도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느냐?](46).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교육이나 훈련이나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본성입니다. 가르치지 않아도 다 하는 일입니다. 세리들과 창기는 당시 유대 사회의 공인된 사회악이요, 죄인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멸시하고 죄인들이라고 하는 그들도 너희와 똑같이 한다. 너희가 원수들을 미워하고 너희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일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다. 이는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르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란 말씀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시며 확증하십니다. 주님은 평지에서 한 말씀에서도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랑하느니라.](눅6:42)고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직업과 관계가 없고, 의인과 죄인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녀들이 아버지의 성품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슨 보상이 있겠느냐?” 고 하심으로 보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때
보상이 있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을 축복할 때,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보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은 “하늘에서 너희 보상이 크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47절입니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47). 이 역시 동일한 말씀입니다. 뜻이 잘 맞는 사람끼리만
문안하면 그것은 패거리 문화만 양성할 뿐입니다. 교회는 파당이 되고 맙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믿는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고백하는 믿음의 선한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번역된 성경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행하는 것이 있습니까? 주님은 더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요5:30,
15:5). 나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의지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지식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마음은 선을 행하는데 아무 능력이 없고,
무기력함을 깨닫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러하다는 사실을 잘 아십니다.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15:5b). 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요, 내가 그분의 자녀란 이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주님을 통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은 불가능이 없고, 어려워 못 하실 일이
없습니다.
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48). 불완전한 인간에게 완전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의인과 악인에게 해를
비추시고,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비를 동일하게 내려 주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좋은 이웃이든 원수된 이웃이든 똑 같이 사랑하는 것을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면 그 점에서 하나님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의 기도를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나의 원수 된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해 주면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율법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한 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이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면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 힘, 지혜, 명철을 주님께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일어나 일해 주시고, 나를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들었다고, 안다고 만족해서는 열매가 없습니다. 말씀을 들은 후에는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소원을 주시고, 선을 행할 의지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설교를 듣고 “정말 옳은 말씀이로다, 은혜롭도다”만 외친다고 변화되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
강력하게 역사하고, 성령이 내 마음 속에서 운행하셔야 합니다. 이제 이것을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