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말씀: 마6:12
요절: 마6:12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간구를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양식이 필요합니다.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은 말 그대로 매일 필요한 것이지 매주, 매월
한번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이 매일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은 매일 영적 양식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이 매일 먹어야 할 영적 양식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도 별로 주림을 느끼지
못하며 사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암8:11). 매주 한번 설교를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매일 혼자 따로 은밀히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매일 혼자 일정 시간 동안 성경을 읽음으로 생명의 빵을 먹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식탁에서 빵으로 주린
배를 채우듯이, 골방에서 ‘이날 내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함으로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의 영은 생명의 말씀으로 가득 채움 받을 수 있습니다. 충분한 영적 양식의 섭취 없이 건강한 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고,
영적 전쟁을 치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b)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사람이 먹으면 영원히 사는 생명의 빵을 주셨습니다. 이
빵은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빵은 책을 읽음으로, 학문을 연구함으로,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매스미디어나 정보 수집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빵은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얻는 ‘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니 사람이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 (요6:48~51). 이 빵을 먹음으로 인간이 겪는 진정한 기아,
주림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주님이 주신 육신의 빵을 먹었을 때는 그를 잡아다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흥분하고 감격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참 빵, 생명의 빵이 바로 자신이심을 증거 했을 때는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일용할 양식과 더불어 우리가 구해야 할 간구는 용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마6:12).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빚진 자들이란 누구인가?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자들과 무리들로서 빚을 질만한 사람들이지 빌려 줄만한 처지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빚진 자들이라면 하나님께 “우리의 빚을 갚아 주옵소서, 빚을 없애 주소서” 등과 같이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고 구하게 하셨습니다. 빚은 죄와 동의어입니까? 이 부분을 누가복음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옵시며](눅11:4)라고 말합니다. 앞부분은 같은데 뒷부분이 ‘빚’에서 ‘죄’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이웃과 이웃, 형제와
형제,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주인과 종 등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빚과 죄”가 서로 바뀌어 사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빚,
이웃의 허물, 이웃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지만 이웃의 죄를 용서해 줄 수는 없습니다. 빚이란 합당한 값을 치르지 않고 얻은 것들입니다. 값을
치르고 얻은 것이나 선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모두 다 빚입니다. 우리가 진 빚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 갚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치러야 할
모든 대가를 대신 치루셨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같은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의 친구, 나의 형제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없습니다. 나의 내 자식이나 내 부모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설령 내게 지은 죄라
하더라도 내가 그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나를 때렸다고 합시다. 반대로 내가 어떤 사람을
때렸습니다. 지팡이나 막대기나 주먹으로 쳤습니다. 그런데 맞은 사람이 괜찮다고 너그럽게 용서를 해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상해, 폭행이란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용서해 주어도 경찰이 보았다면 그는 재판을 받고 상해, 폭행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누가 나의 집에 들어와
돈을 훔쳤습니다. 나는 손해를 보았지만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절도죄에 대해 재판을 받고 형벌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단지 나와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가 정한 법을 범한 죄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남편이나 나의 아내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용서해 준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고, 그 용서로 인해 죄가 없어진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죄가 깨끗하게 되거나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代贖)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엡1:7). [이 아들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代贖)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깨끗케 할 수 있고, 그 피를
근거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십니다.
킹 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경에서 이 구절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개역, 마6:12)라고 변개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야고보서 5:16과 더불어 사람이 죄를 용서해 준다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뜨겁고 효력 있는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약5:16).
*너희 죄를 서로 고하여(개역; 약5:16). 죄는 사람에게 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짓는 것입니다. 죄란 죄는 다 하나님께 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유대인들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들을 용서받았느니라, 하시니](눅5:20). 그
때 듣고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따져 보며 이르되,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는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들을 용서하겠느냐? 하나] (눅5:21).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란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맞습니다. 다만 이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이 여자가 많은 죄를 용서받았느니라. 이는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음이니라. 오직 용서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느니라, 하시고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들을 용서받았느니라, 하시니](눅7:47-48). 주님의 이 말씀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보십시오. [그분과 함께 음식 앞에 앉은 자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들도
용서하는가? 하더라.] (눅7:49).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누구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없거니와 용서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나에게 범법을 했다고 합시다. 약속을 어기고, 빚을 갚지
않고, 무례하게 굴고, 재산상의 피해나 인격적인 모독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되갚아 욕을 하거나 손해를 갚으라고 요구하거나
법정에 고소를 하거나 그냥 손해를 감수하거나 등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주님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라.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범법(犯法)하거든 그를 꾸짖고 회개하거든 그를 용서하라. 그가 만일 하루에 일곱 번 네게
범법하고 하루에 일곱 번 네게 돌아와 이르기를,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그를 용서하라, 하시니라.](눅17:3-4). 마찬가지로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형제간에는 손해를 당하더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막대한 손해나 손실을 끼친 이들을 향해서
고함이라도 질러야 할 상황이 있습니다. 성질이 날대로 납니다. 그런 때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진노와 분노와 소리
지르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 (엡4:31~32). 용서하라. 문제는 이것입니다. 내가 형제를 용서해 버리면 나는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회복되고, 기쁨과 안식이 찾아옵니다. 악독과 진노 등이 해소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해 주는 것의 근거는 ‘나를
용서하신 주님의 용서’입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마6:12). 주님은 율법에서 빚진 자들에 대한 규정을 두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곁에 있는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 주거든 너는 그에게 빚쟁이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지니라.](출22:25).
[아무도 학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빚진 자에게 그 담보물을 돌려주며 폭력으로 아무도 노략하지 아니하고 굶주린 자에게 자기 빵을 주며 옷으로
벌거벗은 자를 덮어 주고](겔18:7). 이자를 받지 않고, 빚진 자에게 그 담보물을 돌려주라고 합니다. 때로는 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손을 금하지 말고 주어야 하는데 이는 빚의 개념이 아니라 구제로써 행하라는 뜻입니다.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고, 도와주고, 구제 하라는
뜻입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희년이 오면 율법의 규정으로써 모든 빚을 일괄적으로 탕감해 주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이’란 말은 언제나 희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율법에는 50년마다 한 번씩 오는 것이 희년입니다.
종들이나 빚쟁이들은 이 날이 가장 좋습니다. 종에서 해방되고, 빚은 완전히 탕감 받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회당에서 이 땅에 자신의 오심이 바로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율법이 말한 희년은 주님의 오심의 그림자입니다. 주님은 오심으로 인해 ‘상한 자의 치유, 포로 된 자의
자유, 결박된 자에게 놓임’이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회당에서 이 구절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음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구원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짓밟힌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의 받아 주시는 해(年)를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9).
주님의 오심으로 인해 이 땅은 율법 아래서 50년마다 한 번이 아니라 언제나 희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주께서 받아 주시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을 만한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하셨음이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유대인들은 희년에
자신들에게 빚진 자들을 모두 용서해 주었는데 그와 같이 주님께서 우리의 빚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만약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이웃을 약탈하고 착취하고 압제했다면 그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라고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아무 것도 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을 잊어버린 자들은
이웃의 범죄, 이웃의 빚을 용서하려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23-3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왕국은 마치
자기 종들에게서 회계 보고를 받는 어떤 왕과 같으니 그가 계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가 그에게 끌려왔으나 갚을 것이 없으므로 이에
주인이 명령하여 그와 그의 아내와 자녀와 모든 소유를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러므로 그 종이 엎드려 주인에게 경배하며 이르되, 주인이여, 참아
주소서. 내가 다 갚겠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를 풀어 주며 그 빚을 용서해 주었으나 그 종이 나가서 자기 동료 종들
중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 종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그에게
간청하여 이르되, 참아 주게. 내가 다 갚겠네, 하되 그가 허락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가서 그가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거늘 그의 동료
종들이 일어난 일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어난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오 악한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용서해 주었으니 내가 너를 가엽게 여긴 것 같이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겼어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기까지 그를 형벌 주는 자들에게 넘겨주었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의 범법(犯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마18:23~35). 우리는 모두 만 달라트(일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이므로
총 육천만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반면 이웃이 우리에게 진 빚은 백 데나리온입니다. 그렇다면 이 빚을 용서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용서, 자신이 입은 은혜를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용서받은 삶을 살기 때문에 늘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받은 성도가 용서하는데 인색하면 주님이 주신 “용서의 은혜, 감격,
기쁨, 평안” 등 영적인 복들을 상실해 버린 채 육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이웃과 형제에게 하는 모든 행동은 전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가 됩니다. 내가 마음 속으로
누구를 욕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쓴 뿌리를 품는 것은 나의 자유일 것 같아도 주님이 그것을 금하셨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거역한 반역이 되고, 불순종이 되고, 거슬러 대적한 것이 됩니다. 상대방은 아무 문제 삼지 않아도 하나님이 문제를 삼으십니다. 부모들은 자녀가
둘만 되어도 “서로 싸우지 말라. 욕하지 말라. 다투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애들이 다투거나 싸우면 그 둘의 문제라고 내 버려두는 부모가
있습니까? “왜 내가 한 말을 듣지 않았느냐? 왜 부모 말을 우습게 아느냐?”고 혼을 냅니다. 형제끼리 다투고 싸운 죄보다 부모의 말을
업신여기고 불순종한 죄를 더 크게 묻습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사자 간 아무리 양해가 되고, 화해가 되어도 국법을 우습게 알고 범한 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습니다. 우리가 행한 어떤 사소한 죄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죄가 없습니다. 이웃과 형제, 부모와 부부 간에 짓는 죄도 사실 모두
하나님께 짓는 죄입니다. 고객과 점원, 동료 간에 짓는 사소한 모든 죄도 다 하나님께 짓는 죄입니다. 그것이 말이든 행위이든 마음 속으로 품은
생각이라도 그냥 짓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슬러' 짓는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참된 회개의 본으로 기록된
구약의 다윗과 신약의 탕자를 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의 충직한 부하였던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을 했고,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숨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내가 주께만 오직 주께만 범죄하고 주의 눈앞에서 이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로써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시고 판단하실 때에 깨끗하시리이다.](시51:4). 다윗이 어떻게 오직 주께만 범죄했단 말인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다윗이 참 뻔뻔하게도 오직 주님께만 범죄 했다고 말하는데 이런 몰지각한 놈이 있는가? 분노하기도 합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다윗은 여러 사람에게 범죄 했습니다. 요압에게는 살인 교사 명령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죄에 동참하게 했습니다. 죽은 우리야는
물론이고 태어나 일주일 만에 죽은 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내가 주께만 오직 주께만 범죄하고”하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가 단지
사람들에게 한 범죄가 아니라 주께 범죄한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죄는 주께 범죄하는 것이란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죄를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범죄들을 [주]께 고백하리이다, 하고 주께 내 죄를 시인하며 내 불법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불법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시32:5). 충분히 손해 배상을 했다. 법의 대가를 치렀다. 할 만큼
최선을 다했다. 이런 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탕자의 예를 봅시다.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거슬러 아버지 앞에 범죄하였사오니](눅15:18). 탕자는 가산을 탕진하고 방탕한 죄가 ‘하늘을 거슬러
아버지 앞에 범죄’했음을 알았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죄가 아버지에 대해서 뿐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알았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거슬러 아버지의 눈앞에서 범죄하였사오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눅15:21).
우리가 사람들에게 짓는 모든 죄는 탕자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거슬러 ... 앞에서 범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당사자 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여기고 끝내지 마십시오. 누구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지하고 주님께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 때에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습니다. [내가 내 불법을 밝히 드러내고 내 죄로 인하여
슬퍼하리이다.](시38:18). 참된 고백이란 바로 주님 앞에 죄를 쏟아 놓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내 범죄들을 시인하기
때문이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에 대해 죄를 범할 때 기본적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범한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시인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누구든지 죄들을 시인하고 버리는 자는 긍휼을 얻으리라.](잠28:13).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때로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죄를 시인하고
회개했다. 고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며 피해를 당한 형제나 이웃들에게는 사과하지도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용서를 빌 마음도 없이 주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구약 성경에는 속죄제가 있고 속건제[범법 헌물]가
있습니다. 속죄제는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고, 속건제는 하나님 또는 남에 대해 과실로 손해를 입혔을 때 그것을 배상함으로써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레5:15-18; 6:1-26).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사람들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누가 용서를 구하면 당연히 하루에 몇 번이라도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다시 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마6:12). 세상에는 빚쟁이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빚을 지면 빚쟁이의 종이
됩니다. 신문 지상에 보면 빚쟁이들이 빚을 갚지 못하면 사람을 잡아 가는 일도 나오고, 신체 일부 중 하나를 떼어다 파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요즘 이 사회에서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북 왕국의 대언자 엘리사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대언자들의 아들들의 아내들
가운데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내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주]를 두려워한 줄은 당신이 아시나이다. 이제
빚을 준 사람이 이르러 내 두 아들을 취하여 노예로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왕하4:1). 빚을 갚지 못하고 죽어 버리자 빚쟁이들은 죽은
대언자의 두 아들을 노예로 삼고자 했습니다. 예전에 빚을 못 갚을 때 자녀가 매매의 대상이 되는 일은 허다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그나마 다행인데 우리가 빚을 지는 입장이라면 이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곳 미국에 사는 분들은
거의 대부분이 빚을 안고 삽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자는 가난한대로 빚이 있습니다. 법과 제도가 빚을 지고 살도록 하는 사회입니다.
50만 불짜리 집을 사려면 50만 불을 벌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빚을 내어서 미리 사서는 20년이나 30년 동안 총 100만 불에서 150만
불을 갚으라고 합니다. 실로 무서운 세상입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살 때 빌려 준 집을 도로 빼앗아 갑니다.
빚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이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음이니](롬13:8). 어떻게 빚을 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냥 주면 됩니다. 선물로 얻으면 됩니다. 형제들이 서로 필요를 나누어 쓰고, 베풀기를 힘쓰고, 도와주려 할 때 형제들은 빚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은 모든 빚을 사랑의 빚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형제들을 볼 때 우리는 그로 하여금 빚으로
살게 하지 않고, 도움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매 순간 사랑의 빚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자매가 일을 했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완전히 ‘사랑의 빚’으로 살아갑니다. 덕분에 아무 빚도 지지 않았습니다. 형제들 간에 서로 짐을 나누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때 빚을 지는 형제들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빚을 짐으로써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거나 차나 집을 바꾸거나 여러 가지 탐욕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빚을 지지 마십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네 자신의 지혜를 버릴지니라.](잠23:4).
[신실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무죄하지 아니하리라.](잠28:20). [급히 부자가 되려 하는 자는
악한 눈을 가졌나니 그는 궁핍이 자기 위에 임할 줄을 깊이 생각하지도 못하느니라.](잠28:22).
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마6:12).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란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빚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이
빚입니다. [만일 그가 네게 잘못을 했거나 조금이라도 빚을 졌거든 그것을 내 회계장부에 넣으라. 나 바울은 친필로 이것을 썼노니 내가
그것을 갚으리라. 그러나 네가 이 외에 심지어 네 자신을 내게 빚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몬1:18-19).
*네 자신을 빚지고 있는 것. 빌레몬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후원자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바울은 그에게 “네가 이외에
네 자신을 내게 빚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라고 합니다. 빌레몬 자신이 바울에게 빚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생명을 빚진 자입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갚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죄의 종이요, 육신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빚을 다 갚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피로 우리의 몸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행20:28).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빚진 자들입니다.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으니 너희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치르신 값은 결코 셀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값없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 그러나 우리는 결코 육신에 빚진 자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니라.] (롬8:12).
우리는 유대인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참으로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기뻐하였거니와 또한 그들은 저들에게 빚진 자들이니 이는 만일 이방인들이 저들의 영적인 것에 참여하였거든 육신의 것으로 저들을
섬기는 것도 그들의 마땅한 본분이기 때문이라.](롬15:27).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잘 대해 주고, 육신의 것으로 저들을 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을 박해하거나 반 유대 정책에 동조하거나 그런 무리들과 함께 걷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그리스인이나 바바리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빚진 자로서 우리는 은혜에 보답하는
삶이란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나의 것이 없습니다. 다 주님의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대로 [[주]께서 내게 베푸신
모든 은택(恩澤)을 내가 무엇으로 [주]께 보답하리요?](시116:12)라는 심정으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교만해서
자기 뜻대로 살면 주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은혜는 방종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자기에게 행하신 은혜대로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 위에 진노가 임하게 되었더라.](대하32:25). 주님께서 우리의 빚을 다 갚아 주셨고,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음을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은 즉시 우리의 빚을 갚아
주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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