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말씀: 마6:13a
요절: 마6:13a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여섯 번째는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분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시23:1~3). 우리는 주님의 인도함을 따라 살 때 순례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방랑자가 됩니다. 주님께 자신의 길을 맡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너에 대한 판단을 대낮같이 나타내시리로다.] (시37:5~6). 주님은 자신의 길을 맡기는 이들을 안내해 주시지만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이들을 인도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때로 어떤 길은 옳게 보여도 그 끝은 사망의 길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심지어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그 희락(喜樂)의 끝은 근심이니라.](잠14:12~13). 분명히 제대로 왔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달렸는데 돌아보니 한 참이나 헛 길로 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허무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옳아도 그 끝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길은 제 눈에 옳으나 권고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지혜로운 자니라.](잠12:15).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제대로 된 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의 발 자취가 나 있는 길이면 안전합니다. 좁고 험해 보여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면 생명의 길입니다. [의가 그분 앞에 나아가며 그분의 발자취가 있는 길에 우리를 세우리로다.](시85:13). [이는 참으로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1).

13절을 보면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께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고 인도함을 받으면 시험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거나 불순종하거나 아예 구하지 않게 되면 자기 꾀에 빠지게 되고, 마귀의 올무에 빠지게 되고, 세상의 조류에 휩싸이게 됩니다. 주님께서 체포되시던 날을 보십시오.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막14:38)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흘려 듣고 졸았던 제자들은 그 날 밤 모두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지만 주님의 인도함을 받지 않음으로 인해 결국 시험에 빠졌던 성경적인 예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인도함을 맡기되 어디로 어떻게 인도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이시기 때문이오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인도하고 지도하소서.] (시31:3).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나를 지도해 주옵소서. 내게 보여 주시고, 나를 가르쳐 주옵소서 등의 기도는 수시로 하는 기도입니다. 저 역시 이런 기도를 많이 합니다. 성경적인 몇 가지 예를 봅시다.

1. 평탄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오 [주]여,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들로 인하여 나를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27:11). 누구나 그러하지만 험한 길보다는 평탄한 길이 좋습니다.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도 있겠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평탄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어려움과 시련을 딛고 선 화려한 간증들이 많이 있지만 그런 간증의 이면에는 눈물과 고통과 불순종으로 인한 채찍들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평탄한 길이란 쉬운 길입니다. 주님은 길이십니다. 주님을 믿는 일은 쉽습니다. 고행이나 금욕이나 오랜 수련이 필요치 않습니다. 선행을 쌓아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나 학식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믿으면 됩니다. 믿음의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너무나 간단하고 쉽습니다. 종교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러나 길 되신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들의 짐을 내 던져 버리고, 단지 믿음으로 따르게 하십니다. 빈손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도록 인도하십니다. 복음을 어렵게 만들고, 믿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구원 받는 것을 어렵게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뜨거운 체험이 있어야 한다. 신비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 몇 가지는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행함이 없으면 안 된다 등등의 가르침은 모두 거짓 가르침입니다. 믿음의 길은 너무나 평범하고 쉬운 길입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2. 영존하는 길로 인도해 주기를 구하십시오. [또 내 안에 조금이라도 사악한 길이 있나 보시고 나를 영존하는 길로 인도하소서.](시139:4). 어떤 길은 금방 사라집니다. 비가 와도 길의 흔적이 쓸려 버리고, 바람이 불어도 지워져 버립니다. 멀쩡하던 길이 갈라지고, 끊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길 되신 우리 주님은 영존하는 길이십니다. 이 길은 사람들이 폐쇄하려고 애를 쓰고, 그리로 못 가도록 길을 막아서고, 옆으로 더 넓고 큰 길을 만들어 놓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종교가 제시하는 길은 일시적입니다. 과학이 제시하는 길은 일시적입니다. 철학이 제시하는 길은 잠시 뿐입니다. 성령께서는 오직 한 길, 영존하는 길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만 인도합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영존하는 길, 생명의 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3.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내가 의의 길로 인도하며 판단의 행로들 한가운데로 인도하나니](잠8:20). 주님의 길은 의의 길입니다. 죄와 불법이 연관되면 그것은 아무리 목적이 정당하고 대의 명분이 그럴싸해도 주님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4.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마6:13a). 이 기도는 어떤 기도보다 더 중요한 기도입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은 모두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의의 길로 가고자 해도 우리의 육신은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육신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육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험에 빠지지 않게 인도’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1). 주님은 우리의 육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직접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자신이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 같아도 가장 잘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체질(體質)을 아시며 우리가 /다만/ 먼지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로다.](시103:14). 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라. 깨어 기도하라. 이는 그때가 언제인지 너희가 알지 못하며](막13:33). 우리는 때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릅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함을 받아야 하고,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은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이는 하나님은 악으로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니라.](약1:13)고 말씀하는데 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이는 주님이 전혀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단련하시고(try), 조사하시고(search). 입증하시고(prove), 시험하십니다(tempt). 우리 말로는 다 “시험하다”라고 번역된 이 한 마디는 상당한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은 시험(try)은 하시지만 시험(tempt)은 하지 않으신다.”고 말하지만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를 폭로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구약 성도들은 여러 차례 주님을 시험했기 때문에 바울은 권면하기를,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또한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 뱀들에게 멸망을 당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고전10:9)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시험에 빠집니다.

주님께서 시험하시는 몇 가지 성경적 예를 보겠습니다.

신명기 8:16절입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것은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tempt) 마침내 네게 선을 행하려 하심이었느니라.](신8:16). 주님이 광야에서 백성들을 시험하셨던 것은 그들로 선을 행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시험을 통해 육신을 무너뜨리고, 자기 의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악함을 드러냄으로써 이 모든 일이 주의 은혜요 긍휼에 기인한 것이지 자신들의 의나 선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 시험하셨습니다. 때로 우리를 인생의 광야에 두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이 좋아서,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좋아서, 아니면 포기하지 않는 노력파여서, 운이 좋아서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십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완악한 사람들일수록 이런 시험을 많이 받게 됩니다.

신명기 13:3입니다. [너는 그 대언자나 그 꿈꾸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이는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가 너희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시기 때문이니라.](신13:3).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거짓을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서 시험하십니다. 진리를 사랑하는지 표적이나 이적이나 자기 유익이 될만한 것들을 사랑하는지 시험을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순금인지 합금인지는 불에 녹여 보면 알 수 있듯이 마음은 시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알려 하십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맞습니다. 틀림없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기 회사나 집보다 더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해서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알려 하사 시험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탐욕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들이 [주]를 두려워하여 이와 같이 자기들 중에서 가장 천한 자들을 취해 산당들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니 이들이 그 산당들에서 그들을 위하여 희생물을 드리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주]도 두려워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민족들을 사로잡아 왔든지 그 민족들의 풍속대로 자기 신들도 섬겼더라.] (왕하17:32~33).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신다면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해서 자신의 갈라진 마음을 보게 됩니다.

사사기 2:22입니다. [이것은 그 민족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자기 조상들처럼 [주]의 길을 지키고 그 길로 걷나 걷지 아니하나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삿2:22). 하나님은 주의 길을 지키고 그 길로 걷나 걷지 아니하나 시험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출애굽의 세대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이스라엘은 과연 조상들이 가졌던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 것인지 그렇지 않는지 주님께서 시험하셨습니다. 조상들처럼 믿음을 지키면 그들은 여호수아가 승리했던 것처럼 승리할 것입니다. 한 번의 시험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고 영적 체험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단지 이론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로 믿음으로 전쟁을 치러 보아야 그들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 막대기들, 인생 채찍을 들어 우리를 치시는 것은 우리 안에 이전처럼 주님만 믿는 믿음이 있는가? 주님을 통해 영적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싸움이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혈과 육에 대항하는 싸움이 아니라 영적 악에 대적하는 싸움을 싸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사기 3:1, 4절을 보십시오. [이제 [주]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많은 자들을 시험하려 하시며 4 이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시험하였으니 이것은 그들이 [주]께서 모세의 손으로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하신 [주]의 명령들에 귀를 기울이려 하는지 /그분께서/ 알고자 하심이었더라.](삿3:1,4). 주님은 이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주님은 신실한 성도라 할지라도 시험하십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믿음의 성도였습니다. 기도함으로 적을 물리치고, 기도로 자신의 생명을 15년 간이나 연장받았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시험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바빌론의 통치자들이 사신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어 그 땅에서 생긴 이적(異蹟)에 관하여 묻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고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친히 그를 시험하셨더라.](대하32:31). 그 결과 히스기야는 마음이 교만해져서 이기지 못하고 시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대언자 이사야를 찾지도 않았고, 주께 묻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시험이 임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자기에게 행하신 은혜대로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 위에 진노가 임하게 되었더라.](대하32:25). 은혜를 입은 성도가 마음이 교만해질 때 주님은 그를 시험하십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우리는 늘 자신을 낮추고, 더욱 낮춤으로써 주님의 더 많은 은혜를 입어야 할 것입니다(약4:7).

주님께서 이런 이유로 시험을 하신다면 시험을 하지 말아 달라고 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걷는다면 시험은 단련의 시간이 되고, 성장하는 귀한 시간이 됩니다.

- 우리는 자신의 육신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신을 신뢰할 때 시험을 받게 됩니다. 육신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 마귀는 틈을 타고, 주님은 시험 속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고] (막14:38)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란 간구는 육신의 연약함을 깨어 기도함으로 극복하게 인도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 마음 속에 믿음으로 말씀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바위 위에 있는 자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시만 믿다가 시험의 때에 배교하는 자들이요,] (눅8:13). 마음이 부드럽게 갈아 져 있지 않으면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도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이 오면 배교자로 떨어지고 맙니다. 뿌리가 약하면 바람에 흔들립니다. 뿌리가 약하면 강하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속에 거하게 하옵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엡3:17).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골2:7).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란 간구는 말씀이 깊이 마음 속에 뿌리 내리고,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주님만을 신뢰하게 하기 위해 주님은 시험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 속에 평생토록 시험하는 것(사탄의 사자인 가시)이 있었습니다. [내 육체 안에 나를 시험하는 것이 있었으되 너희가 그것을 업신여기지도 아니하고 거부하지도 아니하며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같이 심지어 그리스도 예수님같이 영접하였도다.](갈4:14).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주님은 자신이 강하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시험하는 것을 주시는 것은 더욱 주님만을 의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은 도리어 연약함을 자랑하고 그것을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란 간구는 육신의 연약함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족함을 드러내 주시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란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릴 때 만족과 기쁨이 있게 되며, 시험 거리가 도리어 감사 제목이 됩니다.

- 우리 속에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시험이 옵니다.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9).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인 사람들은 시험에 빠지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특히 급히 부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해악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란 간구는 생활에 탐욕이 없고, 가진 것에 만족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한 마디의 짧은 기도의 가르침에는 깊고 풍부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 잘못된 영적 교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이는 만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두면 예수님처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를 친구로 두면 나 역시 주님과 친밀함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는 친구, 성경을 사랑하는 친구를 사귐으로 우리는 영적 유익을 얻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귐은 누룩과 같이 우리를 부패시킵니다. 내가 참 친구되신 주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악한 사귐을 단호하게 끊어 버려야 합니다. 잘못에 빠진 형제는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을 돌아 보아 시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도 살펴보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갈6:1). 시험에 빠지지 않게 인도해 달라는 기도는 믿음 안에서 영적 교제를 나눌만한 친구들을 사귀도록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험에 빠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불평, 불만으로 시간을 보내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도리어 감사하십시오.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한 채 시험에 들었다면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시험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시험은 옵니다. 믿는 성도들이 시험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시험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란 생각을 하십시오. 시험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닥친 시험은 내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십시오.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은 모두 내게 필요한 것이며, 유익이 될 줄로 믿으십시오. [비록 지금은 필요가 있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잠시 근심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 구원을 크게 기뻐하나니] (벧전1:6).

둘째. 시험을 기뻐하십시오. 시험은 인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 (롬5:3~4)고 했는데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라.] (약1:2~3). 한 가지 시험도 아니고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인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셋째, 시험을 견디면 복됩니다. 생명의 왕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을 받을 것임이라.] (약1:12). 시험을 당하는 것이 나에게 재앙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은 견딜 때 복이 있고, 단련을 받으면 생명의 왕관을 받습니다.

넷째,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으며 하나님은 피할 길을 내십니다.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내가 당하는 어떤 시험도 이 말씀만 기억하고 믿으면 감당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말씀을 잃어버리면 방황하지만 말씀을 기억하면 평안 가운데 시험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시험에는 주님께서 내 놓은 피할 길이 있습니다.

다섯째, 주님은 시험의 시각에 우리를 지키십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이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 (계3:10). 시험에 빠졌을 때 주님은 방관자로서 구경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건지십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들은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또 불의한 자들은 심판의 날까지 예비해 두사 벌하실 줄 아시되](벧후2:9).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란 기도의 핵심은 우리가 자신이 욕심에 이끌리지 않고, 육신이 정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말씀에 이끌림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오직 사람마다 자기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에 시험을 받나니 욕심이 잉태(孕胎)한즉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4~15).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복된 기도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산상수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0) 2007.03.28
악에서 구하옵소서  (0) 2007.03.27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1) 2007.03.23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 2007.03.21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0) 2007.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