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강해
말씀: 마6:14-15
요절: 마6:14-15
오늘 말씀은 주기도문의 부록과 같은 말씀입니다. 흔히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9절에서 시작해서 13절에서 “아멘”함으로 끝인 줄로 알지만 14-15절까지가 포함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중에서 유일하게 다시 한 번 재차 말씀하신 것이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해서 첫째, 은밀히 골방에서 기도하라(6). 위선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5). 둘째, 이교도들처럼 헛된 반복을 사용하지 말라(7-8). 셋째,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9-13). 넷째, 기도할 때 너희는 사람들의 범법을 용서하라. 주님은 산상 수훈에서 기도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많은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6:5-16까지가 모두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말씀은 “기도와 용서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반드시 사람들의 범법을 용서해야 하고, 형제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차례 기도와 용서의 상관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무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식대로 기도한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서 보이려고 하는 기도라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은밀히 골방에서 은밀히 보시는 주님 앞에서 기도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라 할지라도 헛된 반복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헛된 반복은 이교도들의 기도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교도들의 기도를 흉내 내는 일은 가증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방법대로 기도할 때 마음 속에 분냄이나 시기나 다툼이나 원수 맺음, 쓴 뿌리, 미움 등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도는 주님 앞에 열납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 특히 형제에 대한 용서는 기도 응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기도는 주님 앞에 드리는 희생물입니다. 기도는 주님께 드려지는 향입니다. 시141:2,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을 올려 드림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들어올림이 저녁 희생물을 /올려 드림/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계5:8, [그분께서 그 책을 취하시매 네 짐승과 스물네 장로가 저마다 하프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들을 가지고 어린양 앞에 엎드리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계5:8). 그런데 이 향은 순수한 향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희생물이나 향재료에 악취가 풍기는 육신의 성품을 다 섞어 버린다면 순수한 향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향에 쓰이는 재료들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30:23-25, [너는 또한 으뜸가는 향료를 취하되 순수한 몰약 오백 세겔과 그 절반 만큼의 향기로운 육계(肉桂) 이백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菖蒲) 이백오십 세겔과 성소의 세겔에 따라 계피 오백 세겔과 올리브 기름 일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기름을 만들되 약제사의 제조법대로 기름 혼합물을 만들지니 이것이 기름부음에 쓸 거룩한 기름이 될 것이니라.] (출30:23~25). 순수한 몰약, 향기로운 육계, 향기로운 창포, 향기로운 계피, 올리브 기름입니다. 모두 향기로운 향을 내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아의 이기심, 탐욕, 정욕, 시기, 쓴 뿌리 등을 그 속에 섞어서 주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그대로 안고 기도하면 주님은 그 기도를 더러운 희생물이요, 악취 나는 향으로 여기십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근거는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신 용서를 받아 들이면 그 크신 용서의 사랑을 이웃은 물론이고 사람들, 원수들에게까지 미치게 해야 합니다.
청지기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주인의 뜻대로 사용합니다. 받은 것을 받지 않는 것처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악한 종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을 감추어 두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 우리가 받은 긍휼, 우리가 받은 용서는 반드시 받은대로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것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받은 것들이요, 우리 안에 풍성히 주어진 것이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우리 안에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딛3:6). 주님은 우리 안에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롬5:5). 주님은 우리를 값없이 용서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명령하실 수 있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무용해지고, 부정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4-15, [너희가 사람들의 범법(犯法)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들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의 범법(犯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마18:35). 우리가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마치 주님이 자신을 용서해 준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아니지만 행위로는 그분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가증한 자가 되고 맙니다(딛1:16).
마태복음 6:14-15절 말씀은 ‘보복’을 기초로 하는 율법적인 사고를 완전히 뒤엎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너희는 옛 사람들이 말한 바...것을 들었으나”라고 하심으로써 이들이 전통적으로 듣고 알아 왔던 것들을 지적하시고,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심으로써 율법의 근본 정신과 의미를 새롭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용서와 기도의 관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동안 구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잘못된 해석, 잘못된 이해, 잘못된 적용, 잘못된 믿음으로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기도했고, 기도 문구를 만들어서 ‘헛된 반복’을 사용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식대로 기도할 줄도 몰랐고, 기도할 때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도 몰랐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이후로 유대에는 약 400년 동안 환상도 없었고, 성령의 조명도 없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대언하는 하나님의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계시가 사라지자 유대교는 철저히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교는 구약의 인간 관계를 철저히 ‘보복’의 관계로 이해하고 적용했습니다. 그들은 옛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왔고 들은 대로 믿었습니다. 덕분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율법 해석과 적용이 너무나 당연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용서]에 대해 말씀하실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네 원수를 갚으라”고 들어왔던 유대인들에게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너를 대적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이들에게 상상이 가지 않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는 단지 발상의 전환 정도가 아닙니다. 동일한 성경, 동일한 율법을 두고도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특히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 기도해서는 안된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놀랍기만 합니다. 이는 단지 기도 응답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용서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구를 대적할 것이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犯法)을 용서해 주시리라.](막11:25).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죄를 시인하고 자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용서해 달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나는 누군가를 용서해 주었는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살인하는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쓴 뿌리를 품고 있다면 누군가를 더럽히며 기도하는 것입니다(히12:15). 그러므로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웃과 이웃, 형제와 형제 간에 서로 원수 맺음, 분노, 보복을 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주님께 맡겨야 할 것들입니다. 범법자에 대한 엄격한 법 집행은 왕들과 총독 및 하나님이 세우신 행정 관료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는 신약이나 구약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성도들 중에 “구약과 신약은 다르다!”고 알거나 그렇게 믿는다면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믿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신약의 계명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핵심 계명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명령이 크니이까? 하매](마22:36). 이는 당대의 모든 유대인들의 고민이요, 궁금증이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성경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계명이 무엇인가? 란 논쟁이 늘 있었습니다. 주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구약의 모든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마22:37-38). 성경에서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이와 동일한 계명이 있으니 [둘째 /명령/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달려 있느니라.](마22:39-40)고 하셨습니다. 이는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구약 성경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용서에서 출발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의 첫 번째 표현이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심으로써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십자가의 피를 통해 어떤 죄인의 죄라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의 용서를 받은 성도들은 마음 속에 맺혀진 원수 맺음, 쓴 뿌리, 분냄, 다툼, 시기, 경쟁, 미움 등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심장에서 솟아난 피가 23초 만에 온 몸을 한 바퀴 돌면서 산소를 공급하고, 불순물을 제거하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 영혼의 구석구석까지 모두 스며들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제거합니다. 죄 용서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들이는 순간 우리 속에는 누구의 죄라도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전에는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웃, 형제, 친지, 친구들의 잘못이나 죄를 다 용서해 주고 싶어집니다. 누군가에게 대적할 일이 있으면 가서 용서를 빌고,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내 안에 흐르는 아담의 피는 무자비한 복수를 원합니다. 옛 사람의 본성은 잔인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조건 없는 용서를 원합니다. 새 사람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극한의 순간에 본성이 나온다고 믿습니다. 평소에는 위선이나 가식으로 자신을 가릴 수 있지만 극한의 순간에는 저 밑바닥에 잠재해 있던 본성이 남김없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알 수 있는 곳이 어디 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순간입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으로 인해 고통의 피가 흐르고, 양 손과 양 발에는 대못이 박혀 있습니다. 몸의 체중으로 인해 손과 발에 박힌 못은 신경을 자극합니다. 출혈로 인해 갈증은 끝이 없습니다. 이런 극한의 순간, 바로 그 때에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그분의 본성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눅23:34a). 주님은 범죄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본성이요, 범죄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는 영적 생활의 첫 단계입니다. 용서는 기도 생활의 첫 단계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지만 마음 속에 앙심이나 분노를 품고는 도무지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형제간에 화해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기도해도 기도가 막힐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구를 대적할 것이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犯法)을 용서해 주시리라.](막11:25)고 말씀합니다. 부부 간에도 불화가 있으면 기도가 막힙니다(벧전3:7). 그래서 주님은 아내를 약한 그릇으로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 화해, 사랑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영적 건강과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보복이나 분냄은 육신의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불만족으로 끝이 나고 맙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정당한 보복’이란 말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음으로 영적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씻음 받는 순간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사람들의 범법(犯法)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려니와](14)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형제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오랜 세월 인격 수양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넓은 도량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데 필요한 한 가지는 나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나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거하면 나는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이들을 향해 “{주}여, 이 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행7:60)라고 기도하며 죽은 것은 그 안에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명하신 것은 우리가 초인적인 인내심이나 인격 수련을 통해 성인군자의 반열에 오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을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영적 삶의 유일한 비결이요, 방법은 ‘성령 충만’이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이런 일들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어느 명령 하나 우리 혼자의 힘으로 하라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작은 한 가지 한 가지가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라는 것들입니다. 누구를 용서해 주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용서의 사랑을 받아 들이십시오.
15절입니다. [너희가 사람들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5).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을 다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의 온갖 죄와 신성 모독은 용서받되 성령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사람의 아들을 대적하면 용서받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님을 대적하면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용서받지 못하리라.](마12:31-32). 그렇다면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신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지만 주 예수님과 스데반이 간단하게 예를 들어 설명해 줍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주님을 마귀들의 왕 ‘바알세붑’이라고 할 때 ‘성령 모독죄’라고 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선포되는 복음을 믿지 않을 때 그들의 죄를 성령을 거역한 죄라고 말합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는도다.](행7:51).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주요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죄를 범하는 죄인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둘째, 배교자들입니다. [이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만일 배교(背敎)하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니 그 까닭은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기 때문이라.] (히6:4~6). *fall away. 셋째,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고의로 죄를 지을 경우입니다. [이는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 오직 대적(對敵)들을 삼킬 불 같은 격노와 심판에 대하여 두렵게 기다리는 일만 남아 있기 때문이라.] (히10:26~27). 구원의 복음을 듣고 이해했다고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알면서도 영접하지 않고 부정합니다. *willfully ignorance- 고의적 무지. 이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성적으로, 감정적으로 이미 주님의 존재와 그분에 대해서 알면서 의지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경우에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이미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았다면 위의 세 가지 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넷째,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때 주님은 그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의 범법(犯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마18:35). 이는 혼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용서를 구하는 어떤 제물이나 의식이 필요치 않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께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 때 형제의 범법을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 역시 그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 아들됨(sonship)의 문제가 아니라 교제(fellowship)의 문제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 용서받기 위해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해석은 마태복음 18장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빚을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따르면 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풀어 주고, 그 빚을 용서해 주었다고 말씀합니다(마18:27). 그런데 용서받은 사람은 나가서 자신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았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오 악한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용서해 주었으니 내가 너를 가엽게 여긴 것 같이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겼어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마18:32~33).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근거는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용서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우리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매](마18:21). 그러자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까지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18:22).
우리가 어떻게 용서를 받았는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죄들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1:7, 골로새서 1:14[우리가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代贖)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엡1:7). [이 아들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대속(代贖)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그분의 피를 통하여” 이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자신의 피를 필요로 하셨습니다. 결코 쉽게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결코 가볍게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데 나의 돈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수고(labour)가 필요하다면 용서해 주기 어려울 것입니다. 실로 우리 자신의 성품은 누구를 용서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데 그런 정도의 수고가 아니라 자신의 피를 모두 흘리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골로새서 2:13, [또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고](골2:13).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이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명예가 떨어지고, 이름이 더러워지고, 모욕과 수치가 된다 할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이 내가 바보가 되는 일이요, 심지어 나의 재산상의 피해가 되는 일일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이 단지 말 한마디로 되는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함으로써 나 자신의 생명마저 위험해 진다하더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32, 골3:13입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엡4:32),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여기에 분명히 용서의 기준과 정도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용서의 기준을 정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용서해 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는 선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가? 그 기준이 내 안에 분명히 서 있다면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흉내만 내거나 전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용서의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 역시 우리의 모든 범법과 허물과 죄를 깨끗하게 용서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할 때 이 일이 가능합니다. 스데반이나 바울과 같이 살고 싶다면 그들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일하신 주님이 내 안에서 동일하게 일하도록 전적으로 순종하면 됩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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