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금식할 때에
말씀: 마6:16-18
요절: 마6:16-18
오늘 말씀은 “너희가 금식할 때”입니다. 금식할 때 주의 사항 한 가지는 기도와 마찬 가지로 은밀하게입니다. 주님은 금식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몇 일간 하라든가? 언제 하라든가? 식이요법은 어떻게 하라는 등의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금식에 대해서 주님이 주신 한 가지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지 말라’입니다. 주님은 은밀한 기도, 은밀한 구제와 더불어 ‘은밀하게 금식’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당시에 유대인들의 금식이 형식적이고 매우 종교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성을 과시했습니다. 요한과 그의 제자들 역시 자주 금식했습니다(마9:14, 막2:18).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무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금식하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율법 조항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금식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금식에 대한 규례를 찾자면 [이것이 너희에게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너희 혼을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너희 나라 사람이든지 너희 가운데 거하는 타국인이든지 그리할지니라.](레16:29)는 말씀입니다. *“너희 혼을 괴롭게 하고”란 말씀은 성경에서 금식을 가리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금식 절기를 통해서 이들이 이 말씀을 금식으로 이해했고 실행했음은 분명합니다. 유대에는 금식 절기가 있었습니다(행27:9).
요엘읁 장차 유대에 임할 주의 날에 대한 심판을 듣고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요엘1:14, [너희는 금식하는 일을 거룩히 구별하고 엄숙한 집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거주민들을 모아 [주] 너희 하나님의 집으로 들이고 [주]께 부르짖을지어다.](욜1:14). 요엘은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만이 주의 날에 있을 무서운 심판과 재앙으로부터 피할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 왕의 부르심 없이 왕 앞에 나아가야 했을 때 수산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자신을 위하여 금식을 해 주도록 요구했습니다. 에스더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함께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사흘 동안 밤낮으로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내 시녀들과 함께 그렇게 금식한 뒤에 법대로 하지 아니하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매](에4:16). 금식은 절박한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 자신의 의지를 꺾고 긍휼을 얻고자 자신을 낮추는 그런 행동입니다. 자신의 혼을 괴롭게 함으로써 자기 부인과 마음 속 탐욕을 제거하는 일이 금식입니다. 상한 영, 겸손한 영을 지니기 위한 조용한 몸부림이 바로 금식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위기에 처할수록 성도들은 더욱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낮추고, 모든 동작을 멈춘 채 죽음에 이르는 길을 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금식입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주님 앞에 죽은 채로 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사역이란 사실이 역설적입니다.
금식은 기도와 더불어 믿음의 사람들이 자주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두 번이나 40일간 금식했습니다. 엘리야 역시 40일간 금식했습니다. 다니엘은 3주간 금식을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침례를 받으신 후 곧 바로 40일간 금식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안나’라는 여인은 일찍이 과부가 된 후 무려 84년 동안이나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눅2:37). 느헤미야, 다니엘, 에스라를 비롯한 주의 종들은 모두 금식의 대가들이었습니다. 다윗 역시 자주 금식을 했는데 그는 금식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졌을 정도입니다. [내 무릎은 금식하므로 쇠약하며 내 살은 기름기가 없나이다.](시109:24). 사도 바울은 여러 번 금식했다고 말합니다(고후11:27). 이런 성경적 예와 가르침으로 인해 우리는 금식을 동반한 기도를 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16절입니다. [또한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슬픈 표정을 짓지 말라. 이는 그들이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 얼굴을 흉하게 하기 때문이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이미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16). 금식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필요하면 누구라도 금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위선자들은 금식을 할 때 슬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 얼굴을 흉하게 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금식을 하셨기에 얼굴이 그 모양입니까?” 란 소리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금식 중이란 사실과 매우 오랫동안 자주 금식을 하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자신의 영성과 경건의 모습을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행한 것에는 그 어떤 일에도 하나님의 보상이 없습니다. 기도이든 구제이든 금식이든 그 무엇이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고, 칭찬을 얻고, 높임을 받는 순간 하나님께 받을 보상은 사라집니다.
주님은 금식의 동기를 보십니다. 금식하는 이유와 목적을 먼저 보십니다. 금식은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입니까? 기도와 마찬가지로 금식의 동기는 주님께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스가랴 7:4-6입니다. [이에 만군의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 땅의 모든 백성들과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가 그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곡하였거니와 그 금식한 것이 조금이라도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너희 자신을 위하여 먹고 너희 자신을 위하여 마신 것이 아니냐?](슥7:4~6). 유대인들은 포로 기간 70년 동안 일 년에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곡했습니다. 이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식은 이미 유대의 중요 절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금식한 것이 조금이라도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금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루살렘과 그 사방의 도시들에 사람들이 거주하며 형통하게 지낼 때에 또 남쪽과 평야에도 사람들이 거주할 때에 [주]가 이전의 대언자들을 통해 외친 그 말씀들을 너희가 들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슥7:7). 이들이 해마다 두 번씩 금식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전의 대언자들을 통해 외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숫 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15:22)고 말합니다. 주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음식을 준비하고자 마음이 분주했던 마르다보다 낫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준비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41-42,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에 관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면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10:41~42). 말씀을 듣는 것은 헌물보다 낫고, 금식보다 낫고, 사람들을 섬기는 것보다 낫습니다. 주님은 금식의 행위를 보시기 전에 그 마음을 보십니다. 금식을 하는 것은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신의 혼을 꺾는 것이며,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금식은 주를 위한 것이지 자신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58:3-4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금식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우리 혼을 괴롭게 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는도다. 보라, 너희의 금식하는 날에 너희가 쾌락을 구하며 너희를 위하여 모든 수고를 강요하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함은 다툼과 논쟁을 위함이요, 사악한 주먹으로 치기 위함이니 너희가 이 날에 하는 것같이 너희 목소리를 높은 곳에 들리게 하려면 금식하지 말지니라.](사58:3-4). 유대인들은 금식을 했으며 그 금식을 통해서 무엇인가 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금식을 주님께서 친히 보시고 복을 내려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는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금식하는 날에 쾌락을 구하며, 너희를 위하여 모든 수고를 강요했다고 말씀합니다. 이들이 금식하는 것은 다툼과 논쟁을 위한 것이요, 사악한 주먹으로 치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금식하는지 정확하게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금식을 통해서 영적 능력을 얻으려고 합니다. 교회의 부흥을 얻고 성도들의 수가 늘어나기를 구합니다. 그래서 40일 금식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할 때마다 금식을 합니다. 때로는 특별한 은사나 능력을 얻기 위해서 금식을 합니다. 병이 났거나 교회에 문제가 있거나 가정에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금식하기도 합니다. 금식의 동기 중 또 한 가지는 자신이 원하는 바 기도 응답을 빠르고 확실하게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금식을 하는데도 일이 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우리가 금식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우리 혼을 괴롭게 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라며 주님께 항의합니다. 주님은 그들이 금식하는 동기가 잘못되었을 때 그 점을 지적해 주시고, 그렇게 하려거든 “금식하지 말지니라” 외치십니다. 자기 의를 위해서 행하는 금식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금식이 아닙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기도가 기도가 아니듯이 그런 금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금식은 성공의 수단이 아닙니다. 금식은 출세의 수단이 아닙니다. 금식은 여러 가지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만능의 열쇠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금식은 무엇인가? [이러한 금식이 내가 택한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 혼을 괴롭게 하는 날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갈대같이 자기 머리를 숙이고 자기 밑에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이겠느냐? 너는 /과연/ 이것을 금식이라 하겠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를 놓아 자유로이 가게 함으로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5-6). 참된 금식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것이 참된 금식입니다. 이웃을 향해 선을 행하는 것이 참된 금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의를 버리고 불법을 행하면서 행하는 금식은 주님께 가증한 것이며, 그런 금식 기도는 주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선포하십니다. 예레미야 14:12입니다.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번제 헌물과 봉헌물을 바칠지라도 내가 그것들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칼과 기근과 역병으로 그들을 진멸하리라, 하시니라.] (렘14:12). 금식하며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고, 헌물을 바쳐도 소용이 없는 것은 그들이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귀를 돌이키는 일은 그의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입니다(잠28:9). 말씀을 버리고, 의를 행치 않으면서 행하는 기도는 금식 기도이든 철야 기도이든 새벽 기도이든 집단으로 모여서 합심 기도를 하든 릴레이 기도를 하든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 어떻게 금식해야 합니까? 주님은 금식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금식할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19-20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신부방 아이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날들이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2:19-20). “신랑을 빼앗기는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지금은 금식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교회는 신랑이 없습니다. 지금 교회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모습입니다. 금식은 구약 시대의 율법이나 규례가 아닙니다. 금식은 신약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규례입니다.
첫째,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사역자를 임명할 때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13:2-3,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 이에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2-3). 주님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구별하셨고, 교회는 그들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사역자들을 세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범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청빙 위원회를 만들고 이력서를 받아서 면접을 한 후에 목자를 초빙합니다. 초빙하는 교회나 파송하는 교회나 모두 초대 교회의 본을 따라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14:23입니다. [그들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자기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맡기고](행14:23). 사역자를 세우는 원칙이 이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길 때 이 본을 따라 행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에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눅6:12-13).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영적 전투를 위해 우리는 금식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7: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 없이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1). 제자들이 마귀 들린 아이 하나를 가운데 두고 그를 고치고자 했으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주님께 말하기를, [내가 그를 주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으나 그들이 고치지 못하더이다, 하니] (마17:16)라고 보고합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부정한 영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내좇으며 온갖 질환과 온갖 질병을 고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마10:1). 그러나 그런 경험이 언제나 발휘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나아와 “어찌하여 우리는 그를 내쫓지 못하였나이까?” (마17:19)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너희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로다”(마17:20)였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와 금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 없이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1). 기도와 금식은 마귀를 이기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어떤 마귀들은 기도와 금식없이는 나가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기도와 금식 없이는 나가지 않는 마귀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9:29에는 동일한 사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런 종류는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만 나가느니라.](막9:29).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와 금식으로만 나가는 어떤 종류의 마귀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셋째, 죄를 회개하고 긍휼을 구할 때 금식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상 7:6, [그들이 미스바에 함께 모여 물을 길어 [주]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며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재판하니라.](삼상7:6).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 미스바에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거기서 금식하며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습니다. 금식을 동반한 죄의 자백과 회개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최상의 방법입니다. 금식이 기도의 만능 열쇠는 아니지만 효과적인 기도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금식하며 자기를 낮출 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 중에서 단연 으뜸인 아합조차도 은혜를 입었습니다. 열왕기상, 21:27-29, [아합이 이 말씀들을 들을 때에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몸에 두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천천히 가니라. 이에 [주]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의 시대에 이르러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왕상21:27~29). 아합은 엘리야를 통해 선포되는 심판의 재앙에 대해 들었을 때 금식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겸손히 행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의 행동을 보시고 심판을 유예해 주셨습니다. 금식은 긍휼과 은혜를 입는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아합이 그러했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렇게 할 때 얼마나 더 큰 은혜를 입을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행한 불법과 죄를 깨달을 때 우리는 금식하며 회개함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는 불법으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처럼 심판 받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거기에 가서 이제 40일 후면 심판이 있을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요나를 잡아 죽이는 대신 그들은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이에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며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옷을 입었으니](욘3:5). 그 때 주님은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요나가 그토록 심판을 받기를 열망했던 니느웨였지만 그들이 말씀을 믿고 금식할 때 그들은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재앙을 받기 전, 재앙을 받는 중에도 금식할 수 있습니다. 재앙을 받은 후에 회복을 위해서 금식할 수도 있습니다. 금식하며 드리는 기도는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얻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태어날 아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이는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죽었습니다. 그 때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이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그가 이르되, 아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내가 말하기를, 혹시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리요? 하였음이거니와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어찌 내가 금식하리요?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12:22-23). 다윗은 자신의 불법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의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은혜를 기대하면서 금식했습니다. 비록 징계를 받는 중이었지만 그는 금식했습니다(삼하12:16).
넷째, 주의 도움을 구할 때 금식이 필요합니다. 역대기하 20:3-4,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몸을 [주]께로 향해 간구하고 온 유다에 두루 금식을 선포하매 유다가 [주]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함께 모이고 유다의 모든 도시에서 나와 [주]를 찾더라.] (대하20:3~4). 모압과 암몬 족속, 세일 산의 족속들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유다로 진격했을 때(대하20:22) 여호사밧은 주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즉시 온 유다에 금식을 선포하고 주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민족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들은 주의 도우심이 필요한 줄 알았고,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주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금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도움이 어디에서 옵니까?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민족적 위기에 빠졌을 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한 예는 에스더에도 나옵니다. 이들의 이런 금식과 기도는 강력한 주님의 응답을 받았고, 원수들을 완전히 정복하고 승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주의 보호를 구할 때 금식합니다. 에스라 8:21, [이때에 내가 아하바 강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괴롭게 하여 우리와 우리의 어린것들과 모든 소유를 위해 바른 길 주실 것을 그분께 구하였으니](스8:21). 에스라는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금과 은을 비롯한 보물들과 많은 물자를 함께 옮겨야 했습니다. 무려 4개월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긴 여행이었습니다(스7:9). 이런 여행에는 호위병이나 군대가 따라야 하지만 에스라는 왕에게 병사와 기병 무리를 요청하기를 부끄러워했습니다(스8:22). 대신 그는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있을 어려움이나 환란, 여러 가지 시험들을 능히 예측할 수 있는 그런 길을 떠나기 전에 주의 보호를 구하는 금식과 기도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보호와 도움을 구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할 때 주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군대가 지켜 주는 것보다 더 안전합니다.
여러분은 금식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17절입니다. [오직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17). 이는 사람들 앞에서 금식하는 표시를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금식을 하는 동안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음으로써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한 분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18절입니다. [그리하면 네가 금식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보이리니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18). 은밀한 금식에는 드러나게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금식은 의무 사항은 아니지만 권고 사항입니다.
금식은 자기 혼을 징계하는 것입니다(시69:10). 우리 주님은 기도와 더불어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는 동안에 자기를 죽음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 주셨느니라.](히5:7). 금식했다는 말은 시편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내 형제들에게는 낯선 자가 되고 내 어머니의 자녀들에게는 외인이 되었사오니 이는 주의 집에 대한 열심(熱心)이 나를 삼키고 주를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를 덮쳤음이니이다. 그때에 내가 울며 금식으로 내 혼을 징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내게 모욕거리가 되었고] (시69:8~10). 주님의 공생애 사역은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울며 금식으로 혼을 징계하는 그런 나날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이라면 주님께서 기도와 금식에 전념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금식은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주님은 장차 임할 주의 날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면서 이제라도 금식하고 슬피 울며 마음을 다해 주께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요엘 2:12, [[주]께서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슬피 울고 애곡하며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시나니 /너희는/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며 [주]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어다.] (욜2:12).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금식을 요구하고 계심을 보십시오.
우리는 오늘 금식해야 하는 다섯 가지 경우를 살펴보았고,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 함께 보았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말씀을 듣지 않고,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채 의식적으로, 종교 행사로, 습관적으로 행하는 금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듣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의를 행하지 않고 불법적인 생활을 하면서 금식하는 것은 주님이 전혀 듣지 않으십니다. 셋째,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하는 금식은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셋은 금식의 주의 사항입니다. 우리가 금식해야 할 다섯 가지 경우는 첫째,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사역자를 임명할 때 둘째, 영적 전투를 위해 셋째, 죄를 회개하고 긍휼을 구할 때 넷째, 주의 도움을 구할 때 다섯째, 주의 보호를 구할 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도와 금식을 하셨고 신약 성도의 본으로 기록된 사도 바울이 여러 차례 자주 금식을 했음을 통해 우리 역시 기도와 더불어 금식을 통해 더욱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