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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바락의 믿음


말씀: 히브리서 11:31
요절: 히브리서 11:31

아침 시간에 이어 이 시간은 사사 바락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바락은 드보라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네 번째 사사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사사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유다 지파의 옷니엘(삿3:9)인데 구산리사다임에게서 승리를 거두었고, 둘째는 베냐민 지파의 에훗(삿3:15)인데 모압왕 에글론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셋째는 삼갈(삿3:31)인데 블레셋 족속에게서 승리를 거두었고, 넷째는 여자 대언자인 드보라와 납달리 지파의 바락입니다(삿4:4-6).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 대장인 시스라에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섯 번째가 므낫세 지파의 기드온(삿6:11)으로 미디안과 아말렉 족속에게서 승리를 거두었고, 여섯째가 잇사갈 지파의 돌라(삿10:1)이며, 일곱째가 길르앗 사람 야일(삿10:3)이며, 여덟째는 길르앗 사람 입다(삿11:11)입니다. 암몬족속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홉째는 베들레헴의 입산(삿12:8)이고, 열 번째는 스볼론 지파의 엘론(삿12:13), 열한번째는 에브라임 지파의 압돈(삿12:13), 열두 번째는 단 지파의 삼손(삿15:20)인데 블레셋 족속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영화의 소재로도 자주 나왔고,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열두 명 중에서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믿음의 본으로 말하자면 첫째 사사였던 옷니엘이나 둘째 사사인 에훗이 믿음의 본으로 기록되어야 마땅해 보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믿음의 본으로 보기에는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여길 만한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이렇게 네 사람의 이름을 적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바락보다는 드보라가 훨씬 더 믿음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드보라가 아니라 바락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교훈과 본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과 바락은 적을 두려워한 사람들입니다. 삼손과 입다는 인간적으로 심각한 인격적 결함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믿음의 좋은 평판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선명하게 그 이름을 기록해 두십니다. 사람의 기준과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업적과 성취를 봅니다. 하나님은 동기를 보십니다. 사람들은 결과를 중시합니다. 하나님은 과정을 더 중시합니다.

사람들은 땀과 노력과 정성을 중시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한 것인가? 사랑으로 한 것인가? 이것을 중요시합니다. 믿음에서 나지 않는 것은 그 결과가 무엇이든지 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그 무슨 일이든 다 무가치하게 여기십니다. 전 재산을 바치고, 자신의 몸을 불살라 내 줄 정도로 헌신했다 해도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다(nothing)고 말합니다(고전13:3). 그래서 성경은 [너희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고 말합니다.

소심하고 겁 많은 기드온과 바락을 우리는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외 없이 누구나 다 자신의 깊은 내면에 두려움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경에 무려 365회나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도 인간의 연약함과 두려움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조차도 이집트 사람들을 두려워 해 아내를 누이라 했고(창12:13), 후에는 아비멜렉을 두려워해서 다시 같은 죄를 반복했습니다(창20:2). 두려움은 심리적 위축, 거짓말, 변명을 낳고 결국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본으로 나오는 이삭 역시 아비멜렉을 두려워해 아내를 누이라 속였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두려워 했고, 모세는 파라오를 두려워했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정도로 용맹무쌍한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해 미친 짓을 했습니다(삼하21:12). 불의 대언자로 불리며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의 대언자들을 죽인 엘리야는 아합의 왕비였던 이세벨을 두려워해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왕상19:3).

우리 주님 한 분 외에 역사상 두려움을 모른 채 산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여러 차례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제자들 역시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믿음의 분량이 커질수록 두려움은 줄어듭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두려움은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防牌)요’(창15:1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21,26)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바락이 두려움 가운데 있었던 것은 믿음보다 두려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떨어질 때 누구에게든지, 언제 어디서나 찾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세계 최강국의 자부심을 지닌 미국 사람들은 최근 테러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습니다. 저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인기, 명예, 연봉, 실직, 건강, etc.

여러분들은 무엇이 두렵고, 누가 두렵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안에 평안을 주심으로 두려움을 이기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두려워하는 것들을 이기게 하십니다. 마음 속의 두려움을 이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4:18a).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부어진 것을 믿는다면(롬5:5) 우리 안에는 어떤 두려움도 자리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성경은 사람의 연약함을 결코 비난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구조를 아시며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시는도다.](시103:14). 바락은 비록 이스라엘을 재판하는 사사라는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이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택함 받았지만 그는 매우 소심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가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군대 대장)’에게 승리를 거둔 일은 믿음으로 일군 값진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라면 그가 선천적으로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 자일지라도 능히 원수를 물리치는 장수가 되게 하시며, 승리를 주십니다. 문제는 타고난 성격이나 머리의 좋고 나쁨과 같은 지략이나 개개인의 후천적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언제나 믿음이 처음이며 끝입니다(from faith to faith).

믿음의 본으로 예시된 바락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남자 망신을 다 시킨다 싶을 정도로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 인물이며, 당대의 여대언자였던 드보라를 절대적으로 의존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서 드보라의 명에 따라 움직였고, 드보라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사사기 4:8, [바락이 드보라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매] (삿4:8).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지만 그에게는 혼자서 순종할 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해주었던 드보라와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드보라가 가지 않으면 혼자는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바락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믿음의 동역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담대함’이 없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동역자입니다. 바락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드보라’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사사기 4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시 여 대언자 드보라를 통해 바락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게데스납달리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말씀하시기를, 가서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중에서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대장 시스라와 그의 병거와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느니라.](삿4:6-7). 드보라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바락을 고민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군사 만 명을 가지고 다볼산으로 가는 것은 승리에 대한 한 가닥 희망보다는 자살 특공대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야빈 왕에게는 철 병거만 900 대가 있었습니다. 야빈 왕에게는 ‘시스라’라는 뛰어난 장수가 있었습니다. 당시로는 철 병거로 무장한 최신 철갑 기병들이었는데 일종의 전차 군단과 같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시스라는 철 병거를 앞세워 20년간이나 이스라엘을 지배하며 괴롭혔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단 한 대도 없는 철 병거입니다. 이스라엘은 20년 동안 내적으로 군대를 양성하고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조용히 힘을 기른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은 있는 대로 다 약탈당했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 중에 이스라엘 전역에서 남자란 남자는 다 모아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자손’ 중에서 만 명을 차출해서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락의 군사적 지휘력이나 용맹함, 이스라엘 장졸들의 힘을 믿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야빈의 군대 대장 시스라와 그의 철병거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까? 주님께서 친히 야빈의 군대 대장 시스라의 그의 병거와 그의 무리를 이끌어 내어 ‘바락’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락의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야빈의 군대 대장 시스라와 그의 병거와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느니라.](삿4:7b). 바락은 이 말씀을 듣고 나갔습니다. 비록 혼자 나가지 못하고 드보라와 함께 나갔지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그 믿음으로 만 명의 군대를 모아 다볼 강으로 나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계산하면 승리란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승리를 얻습니다. 승리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승리는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바락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지만 전쟁은 바락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사기 4:14절을 보십시오.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 날은 주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주신 날이니라. 주께서 너보다 앞서 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니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매](삿4:14). 바락은 순종해서 나갔습니다. 말씀을 믿고 주님이 지시한 대로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갔습니다. 주님이 시스라를 넘겨 주시고, 앞서 간다는 사실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바락의 믿음입니다. 바락은 드보라를 통해 들려 오는 주의 음성을 믿었고, 순종했습니다. 선천적으로 겁이 많고, 자신에게 맡겨진 짐을 감당할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는 중요한 순간에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바락이 믿음으로 순종해서 움직이자 주님께서 친히 싸우셨습니다. 15절, [주께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바락 앞에서 칼날로 쳐서 무찌르시니 이에 시스라가 자기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하니라.](삿4:15). 누가? 주께서. 시스라와 그의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무찌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락은 그냥 산에서 내려왔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바락과 그의 군대가 대승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자신이 싸운 승리를 그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승리는 믿음의 결과요, 보상입니다. 믿고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가 믿는 바 그 믿음의 내용들을 친히 이루시고 보상해 주십니다. 바락이 한 일은 주님께서 싸우신 승리를 쟁취하고, 노략물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바락은 다볼산으로 갔고, 그 산에서 다시 내려 갔습니다. 만 명을 데리고 다볼 산으로 가는 일은 바락이 할 일입니다. ‘다볼산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해서 가는 일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바락이 믿고 행한 일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시스라와 그의 철병거와 군대를 무찌르는 일은 주님이 행하실 일입니다. 성도들이 때로 '믿음으로' 행하는 일에 대해서 오해하는 한 가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다 해야 하는 줄로 압니다. [믿음으로]란 말을 오해하면 남용하게 되고, 오용하게 됩니다. “믿음으로”라는 말은 결코 주님의 능력을 내가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으로”란 말은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고 움직여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비결이 아닙니다. “믿음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초인적인 능력을 부여받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얻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누이는 주님을 믿었지만 나사로를 살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믿을 때 나사로를 살리시는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볼 뿐입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11:40).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믿을 때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주님이 이루신 일들을 보고 찬양합니다. 믿음과 승리 사이에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과 승리 사이에는 주님이 싸우신 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고, 주님은 싸우고, 승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세계의 법칙입니다.

우리 앞서 싸우시는 주님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고, 우리보다 앞서 나가십니다. 주님께서 미리 준비하십니다. 여호와 이레, 임마누엘.

출애굽기 14:14,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하니라.](출14:14).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싸우지 않고 승리했습니다. 누가 싸웠습니까? 주님께서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지 않으십니다. 믿음과 불신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해 싸우시고 자신들 앞서 가시는 주님을 믿을 때 여리고는 물론이고 어떤 전쟁에서도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없을 때는 언제나 적의 포로가 되었고, 종이 되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고,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패배를 모르는 승리자들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이스라엘은 가나안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말하기를, [[주] 너희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눈앞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너희 앞서 가시는 그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신1:30)고 합니다. 이것은 뭐 그리 새로운 사실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며, 그동안 쭉 그러해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환경이 바뀔 때마다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에는 알 수 없다, 어렵다, 무섭다, 불가능하다 등등의 견해를 쏟아 내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믿지 않을 때는 앞서 나가서 싸우지 않으십니다. 마땅히 하나님과 말씀을 믿어야 할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주님은 앞서 나가 원수와 싸우시는 대신 돌이켜 믿지 않는 자들과 싸우십니다. 믿음의 대장께서 앞을 나가서 싸우시는데 성도들이 뒤로 물러나 불신에 빠질 때 주님은 돌이켜 버리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반역하여 그분의 거룩한 영을 괴롭게 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돌이키사 그들의 원수가 되어 친히 그들과 싸우셨느니라.](사63:10). *fought against. 믿음은 전사이신 하나님이 앞서 싸우시는 것을 보는 것이지만 불신은 나를 향해 칼을 드신 주님과 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사들의 믿음은 죄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는 믿음입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는 물론이요 모든 사사들의 임무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사들의 개개인의 지혜와 능력과 인품과 사람들을 휘어잡는 덕스러운 지도력, 용맹 등에 점수를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뽑아내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겁이 많고, 소심하고, 인격적 결함이 많고, 하층민의 교육 받지 못한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돈 있고, 힘 있고, 똑똑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을 때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재능과 지혜를 전혀 신뢰하지 않으십니다. 영적인 삶을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승리의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은 선천적으로 얻은 무엇도 아니고, 후천적으로 갈고 닦은 무엇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만이 전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앞서 가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철병거로 무장한 야빈의 군대 대장 시스라를 상대로 싸우러 나갈 수 있습니다. 하늘까지 닿은 여리고 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정복하고 차지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거저 얻을 수 있는 승리도 얻지 못합니다. 요셉 자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철병거를 두려워해서 산지로 올라가지 못했습니다(수17:16). 그 때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 이는 비록 가나안 족속이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그들을 쫓아내어야 할 것임이니라](수17:18b). 믿음으로 나가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최강의 신무기로 무장을 했든 수많은 군사들로 진을 치고 있든 개의치 말고 믿음으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주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진리를 믿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기나 군사의 수가 아니라 믿음으로 싸울 때 주님이 승리를 주십니다. 여호수아는 이미 이러한 승리의 영적 법칙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의 용사를 꼽으라면 단연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아이 성의 전투에서 단 한번 패한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토록 전장을 누볐지만 패배를 모르는 불세출의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전쟁 때마다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나가 싸우시는 주님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사사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민족을 구원하듯이 세상에 나가서 교회를 구원한다든가? 따로 기독교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는 세상을 향해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싸워야 하는 그런 임무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이익, 교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말싸움을 하든가 힘으로 싸우는 일을 해서도 안 됩니다. 신약 성도들은 기드온, 바락, 여호수아와 달리 영적 싸움을 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권세들, 정사들, 마귀들을 대적해서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을 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싸움입니다. 원수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 싸움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마귀의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는 그런 싸움을 말합니다. 혈과 육은 이런 전쟁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성령의 권능을 입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속에서 걸으시며,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이 말씀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할 때 그냥 하는 것과 한 마디 기록된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것을 의지해서 하는 것과의 차이는 승리와 패배의 차이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입니다. 앞에 보이는 것이 홍해일지라도, 앞을 가로막는 것이 여리고 성일지라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철병거로 무장한 시스라가 대군을 지휘한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거대한 문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앞서 나가 대신해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싸우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적의 대군을 보는 대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불안에 떠는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그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는 [주]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인하여 안심하니라.](대하32:8). 히스기야가 아시리아 왕 산헤립을 대적해서 싸운 것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의 천사가 직접 칼을 들고 하루 밤에 18만 5천명을 죽임으로써 전쟁은 완전히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바락을 믿음의 헌장에 기록해 두신 것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크나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다 여 대언자 드보라보다는 두려움에 떠는 바락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바락은 적지만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아갔고,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믿음의 동역자에게 기꺼이 동행을 청했습니다. 적고 약한 믿음일지라도 주님은 그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사사들의 믿음은 대부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적은 믿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큰 일들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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