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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말씀: 히브리서 11:31
요절: 히브리서 11:31


히브리서 11장에는 몇 명의 여자가 나오는데 모세의 어머니(요게벳),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그리고 창녀 라합입니다. 라합은 가나안 땅에 사는 이방인이요, 가나안 족속이었습니다. 거기다 직업이 ‘창녀’였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기생’이라고 번역했는데 [창녀(harlot)]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가나안 여자 중에서는 절대 자신의 며느리를 얻지 못하도록 할 정도로 음란하고 죄악이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가나안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악했는데 자식을 불에 태워 마귀들에게 희생물을 드리는 도시였습니다. 시편에 보면 [참으로 그들이 자기 아들딸들을 마귀들에게 희생물로 바쳤으며 무죄한 피 곧 자기 아들딸들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희생물을 드려서 그 땅을 피로 오염시켰도다.] (시106:37~38)라고 말합니다. 이런 죄악 된 도시에 사는 명문가의 규수도 아닌 여리고 성의 창녀가 바로 ‘라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그 이름이 명예롭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역사가들에 의해 청사(靑史)에 자신의 이름을 한 줄 남긴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이요, 특권입니다. 아마 고고학자들이라 해도 가나안 족속이나 아모리 족속 가운데 역사에 남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사람이라면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 정도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 학교 학생만 되어도 ‘라합’이란 이름을 압니다. 라합은 어느 유명 인사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며, 그녀는 신약 성경에도 세 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살몬의 남편이자 보아스의 어머니요, 오벳과 이새와 다윗으로 이어지는 유다 왕조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려져 있습니다(마1:5). *다윗의 고조모. 히브리서에는 멸망하는 여리고 성에서 구원받은 믿음의 표본으로 등장하고(히11:31), 야고보서에는 “믿음의 행위로 의롭게 된” 예로 아브라함과 더불어 라합이 나옵니다. [또한 이와 같이 창녀 라합이 사자(使者)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다른 길로 보냈을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2:25). 라합의 믿음이 참된 증거는 그 믿음이 행위로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소돔과 고모라를 능가하는 죄악의 도시 ‘여리고’에서 창녀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믿음에는 국경이 없고, 민족이 없고, 언어가 없고, 성별이 없고, 지우고가 없고, 남녀 노소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는데 학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는데 고매한 인격이나 종교적 훈련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는데 든든한 배경이나 학문적 토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리고의 창녀 라합”이라면 사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달리 설명이나 변명이 필요치 않는 밑바닥 인생이요, 비천한 죄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사람이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신기할 따름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라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주님은 약하고, 천하고, 쓸모없는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느니라.](마21:31b)고 하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라합의 믿음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 모든 믿음은 예외없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납니다. 가나안 족속의 죄는 이미 아브라함의 때에 이미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들은 네 세대 만에 여기로 다시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불법이 아직 충만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하시더니] (창15:16). 이제 아모리 족속의 죄는 충만해졌고, 그들의 불법에 대한 심판이 이스라엘을 통해 집행될 것입니다. 라합은 비록 창녀였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마음이 다른 가나안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으로 녹아 나고 있었습니다. 비록 여리고의 창녀였지만 라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들었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넌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믿음이 없어 광야에서 멸망했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 놀랍기만 합니다. 라합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났습니다(롬10:17). 여호수아 2:8-11절입니다. [두 사람이 눕기 전에 그녀가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그 사람들에게 말하되, [주]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너희로 말미암아 두려움이 우리에게 임하였고 또 이 땅의 모든 거주민이 너희로 인하여 기력을 잃었나니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르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진멸한 일을 우리가 들었노라. 우리가 이 일들에 관하여 들을 때에 곧 마음이 녹았고 또 너희로 인하여 어떤 사람에게도 더 이상 용기가 남아 있지 아니하나니 [주] 너희 하나님 곧 그분께서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 하나님이시니라.] (수2:8~11). 라합의 말을 통해 볼 때 여리고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홍해가 갈라진 일부터 알고 있었고, 하나님을 극히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라합은 “내가 아노라. 우리가 들었노라”고 말합니다. 여리고의 멸망,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멸될 것이란 내용은 창녀 라합만이 아는 일급 군사 기밀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특정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고급 정보’가 아니라 당시에 가나안 모든 족속들이 모두 들어서 이미 다 알고 있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미 40년 이상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듣고 있었고, 그들의 최종 종착지가 아니라 가나안 땅이란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무덤이 이곳에 있고, 요셉의 뼈를 들고 이 땅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가나안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라합은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권능과 행하신 이적들을 들을 때 두려움에 떨며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을 가진 이는 창녀 라합 뿐이었습니다. [...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살후3:2b).

자, 말씀을 보십시오. 31절입니다.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믿지 아니한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11:31).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자기 집에 왔을 때 여리고 역시 홍해 저편의 이집트, 요단강 저편의 아모리 족속과 동일한 운명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이 불로 멸망당할 것이란 사실을 듣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더라도 ‘세상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들어 보지 않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불신 지옥’이란 말을 들어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세상을 멸하신다, 지옥에 던지신다.’ 등등의 소식을 듣고도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지 않는 것은 [라합]과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체계적인 성경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믿음의 조상을 둔 것도 아닙니다. 표적을 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듣고 여리고 역시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 아래 있으며, 멸망할 것이란 사실을 믿었고 알았습니다. 참된 믿음은 들음으로 납니다(롬10:17).

때로 어떤 이들은 라합의 애국심, 민족성에 대해 시비를 걸고 배반자처럼 정죄합니다. 어떤 이들은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주고 정탐꾼들을 찾아 나선 여리고 왕에게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세상을 못 박고, 거부하는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육신의 정과 욕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탐꾼들을 고발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이 땅의 멸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그 죄는 더욱 커지고, 무거워집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준 것은 의로운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는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어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륜과 도덕, 가족애와 민족의 이익과 상충된다 할 때 전혀 고민하거나 갈등하지 않습니다. 이미 마음 속에 원칙과 기준이 정립되어 있고, 삶의 우선 순위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말씀을 통해 믿음의 법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법은 하위 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라합이 창녀였기 때문에 민족성이나 애국심이나 이웃 사람들의 멸망에 무심한 것이 아닙니다. 라합은 지금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믿음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발각 났을 경우에는 멸문지화를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라합의 신앙은 ‘모험적’인 것이었습니다. 확신에 찬 믿음이 없이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간첩에게 동조한 죄는 어느 나라나 이적 행위로써 중죄로 다스립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영접합니다.

라합의 믿음은 자신과 가족을 구원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세 가지 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주]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고 말합니다. 라합은 들었고, 알았습니다. “[주] 너희 하나님 곧 그분께서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 하나님이시니라.”(수2:11). 믿음은 우리 하나님을 아는 지적인 면이 필수적입니다. 라합은 “두려워하고 떨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지식과 지혜의 시작입니다. 모든 불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특징은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8)는 말씀대로입니다. 여리고 성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워한 것은 알 수 없는 미래와 전쟁의 소문, 자신들이 여리고 저편의 아모리 족속처럼 진멸 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었지 라합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불신자들 역시 막연한 두려움은 다 있습니다. 자신에게 혹여나 닥칠지 모르는 재앙은 두렵습니다. 점쟁이의 기분 나쁜 예언이나 재미로 본 운세가 좋지 않게 나와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라합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라합은 구원받기를 원했고,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며 그들로부터 성이 무너질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라합의 믿음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모두 포함된 구원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나는 믿노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경을 단지 지적으로만 이해하고 동의하며 지식을 자랑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말씀을 배우는 것은 등한히 하고 마음 속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고 감정적인 몰아지경에 빠지는 체험을 중시하며 그런 것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리적인 지식과 지적인 이해와 더불어 마음속에 자유, 평안, 기쁨, 주를 두려워하고 말씀에 떠는 그런 감정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바른 교리적 지식은 바른 감정적 반응을 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진리에 따른 순종과 의지를 복종하는 바른 선택이 있습니다. 손해와 비난과 심지어 목숨이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지적 선택을 하며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라합의 믿음이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다시 31절입니다.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믿지 아니한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31). 라합이 숨겨 준 정탐꾼들은 여호수아가 파송한 정탐꾼들입니다(수2).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인물입니다. 이 땅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송한 정탐꾼들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인 마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정탐꾼이요, 자신의 왕국을 엎으려는 적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이요, 자신의 왕국을 침략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전역에 제자들을 파송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迎接)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 또 십자가를 목전에 두시고 주님은 제자들이 온 세상에 나갈 것을 말씀하시며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내는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니라.](요13:20)고 하셨습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한 것은 여호수아를 영접한 것이요, 주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창녀 라합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믿는 이들은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믿음의 가족이 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할지니라.](갈6:10)고 합니다. 믿음의 가족은 민족, 인종, 언어를 초월합니다. 믿음의 가족은 피를 나눈 육신의 가족보다 더 깊은 가족입니다. 이런 점에서 라합은 믿음의 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3:2,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는 이로써 알지 못하는 가운데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니라.](히13:2)는 말씀대로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잘 대접했습니다. 정탐꾼들이 처음부터 “우리는 이 땅을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이라고 소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나그네로, 손님처럼 들어와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들의 행적은 금방 탄로가 났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행선지가 드러났습니다(수2:2). 이런 때에 창녀 라합이 그들을 영접하고 보호한 것입니다. 극히 위험한 순간에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들을 영접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가족들,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란 의식이나 감정적 공감이 거의 없습니다. 창녀 라합과는 정반대로 형제들을 평안히 영접하기는 고사하고 언제나 분리하고 대적하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위험한 순간이 된다면 먼저 신고해 버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시 31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믿지 아니한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31). 라합의 믿음과 더불어 여리고에서 멸망한 사람들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들이 왜 망한 것입니까? 여리고의 사람들의 타락, 죄악, 민족성...이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방 민족이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들의 멸망의 원인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지 아니한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을 알고, 심판의 임박성을 알았지만 창녀 라합을 제외한 그 누구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긍휼과 은혜를 구하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멸망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한 것도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고, 여리고 사람들이 멸망한 것도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이 믿음이듯이 멸망하는 유일한 이유는 ‘불신’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을 때 구원받고 믿지 않을 때 멸망당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심판이 임박한 것을 느끼며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이들은 여리고 성이 무너짐과 동시에 모두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은 기적적인 보호와 건짐을 받았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가족을 구원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악한 세대에서 자신의 믿음을 가족들에게 전파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롯이 아내와 딸들과 사위들을 구원하는데 실패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부모나 자식, 형제 자매들을 구원하는데 실패합니다. 믿음은 인력(人力)으로 되지 않는다고 한탄하며 안타까워하지만 가까운 이들을 구원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자신의 믿음을 가족들에게 전했고, 함께 구원받았습니다. 여호수아 2:12-13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청하건대 내가 너희에게 친절을 베풀었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 집에게 친절을 베풀 것을 [주]를 두고 내게 맹세하며 내게 참된 증표를 주고 또 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자매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자를 구원하고 살려 주어 우리의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 내라, 하니] (수2:12~13). 라합은 자신의 안전 뿐 아니라 가족의 안전과 구원을 생각했고 간구했습니다. 여리고가 멸망하는 날 이들은 모두 주홍색 실을 창에 매달아 표를 한 집에서 나가지 않음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가족들, 친지들, 이웃들을 비롯한 친구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합당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믿음의 부족과 더불어 본성적인 애정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그 지역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창녀의 집에 들어가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녀와 그녀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데리고 나오라, 하매 정탐한 청년들이 들어가 라합과 그녀의 부모와 형제와 그녀에게 속한 모든 자를 데리고 나오되 그녀의 친족을 다 데리고 나와서 이스라엘 진영 밖에 두니라.] (수6:22~23). 라합의 믿음은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모든 자의 구원이란 보상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이스라엘 진영 밖에 두었으나 곧바로 ‘이스라엘 안에 거하였더라’(수6:25)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이스라엘과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라합은 유다 지파의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음으로써 이스라엘의 가장 명문 집안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다윗 왕의 고조 할머니가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예수님의 세대에 관한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신약 성경에 세 차례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창녀 라합의 이름은 ‘영예롭게’ 하셨을 뿐 아니라 대대로 믿음의 본으로 삼으셨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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