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성벽 주위를 돌매
말씀: 히브리서 11:30
요절: 히브리서 11:30
믿음으로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넌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이 파라오와 이집트를 피한 믿음이라면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것은 정복하고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29절에서
“믿음으로 그들은”할 때 그들과 30절에
“믿음으로 그들은” 할 때 ‘그들은’ 동일 인물이 아닙니다. 40년의 세월이
지나 홍해를 건넜던 사람들이 다 죽고 난 뒤에 그 후대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홍해를 마른 땅을 건너듯 건넜던 출애굽 한 히브리 1세대들은
놀랍게도 순교를 한 것이 아니라
[불신]으로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또 그분께서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들이 자신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오직 믿지 아니한 자들이 아니냐?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믿지 아니하여 능히 들어가지 못한 줄로 아노라.] (히3:18~19). 홍해를 건넌 이들 가운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출애굽의 1 세대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임을 당했고, 아무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상상할 수 없는 큰 이적들을
체험하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해서 믿음이 크고 강하게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표적은 믿음의 성장을 돕지 못합니다. 광야를 통해 그들의 믿음은
연단되고 꾸준히 자라난 것이 아니라 파선나고 말았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은 파라오와 이집트라는 세상과의 단절을 가져다 준
믿음입니다. 광야에서의 불신은 육신의 정욕에 따른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에서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이집트의 추격과 영향권만 벗어나면 모든 것이
끝인 줄 알았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들을 종으로 삼고 매질하며 일을 시키며 괴롭히는 이집트는 없었지만 육신의 정욕은 더
끈질기고, 지독한 것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그들의 원수는 없어졌기에 광야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 감사와 찬양이 넘칠 것 같았지만 끊임없이
불평, 원망, 불신이 솟아 나왔습니다. 결국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40일간 정탐꾼을 보내 그 땅의 백성과 도시들을 탐지한 후에 이들의 ‘불신’은
하나님의 격노를 쏟아 내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으로
“올라가라” 명령 하셨지만 그들은 장막에서
“우리가 어디로 올라가랴?”(신1:28)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 너희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눈앞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너희 앞서 가시는 그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신1:29~30). 그러나 그들은 아낙 자손들이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앞서 가서 싸우시겠다는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순종을 낳듯이 불신은 자동으로 불순종을 낳았고 급기야 ‘반역과 거역’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일에서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였도다.] (신1:32)라고 합니다.
시편 기자는
[참으로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시106:5)라고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불신과 불평에 얼마나 노하셨던지 그들을 모두 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너희가 전에 이것을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시고 그 뒤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유1:5).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믿지 않을 때 단지 얻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모두 멸망당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영생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을 때 영생만 못 얻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벌의 심판’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늘로 갑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을 때는 하늘만 못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혼은 ‘지옥’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믿음으로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않으면 그것만 못(안)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왕이 초청한 혼인 잔치를 거부한 사람들의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모두
자기 일로 인해 왕의 초청을 거부했는데 혼인 잔치에 가지 않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이것을 듣고 노하여 군대들을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태우고] (마22:7).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으면 믿지 않는 것으로 그만이 아니라 지옥의 멸망을
받게 됩니다.
불평과 불신은 광야 백성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주님은 불신의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그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신1:35). 출애굽 1세대를 이끈 모세와 아론, 미리암과 같은 출애굽의 지도자들 역시 다 죽었습니다. 세상을 예표하는
이집트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그 피로 구원받아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며 구름 속에서 침례를 받았던 그들이 왜 믿음으로 살지 못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할 뿐입니다. 모세라는 뛰어난 영적 지도자가 있었고, 하늘에서는 날마다 만나가 내려오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주야로 함께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리고’를 정탐하고 온 후에 완전히 믿음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여리고 성은 단순히 토성(土城)이나 산성(山城)
수준이 아니라 요새 그 자체였습니다. 광야에서는 그나마 여리고 적은 믿음이 있었지만 결국 이들은 철옹성 같은 여리고 성을 보면서 믿음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올라가랴? 우리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강하고 키가 크며 그 도시들은
크고 성곽이 하늘에까지 닿았고 또한 우리가 거기서 아낙 족속의 아들들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에] (신1:28).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지만 ‘여리고 성’은 하나님이 계셔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이 크고 강해지면 여리고
성이 약해집니다. 믿음이 커지면 환경은 작아집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어지면 작은 물소리도 폭포수처럼 들리고, 거대한 파도처럼 보입니다.
구원받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땅을 광야의 백성들처럼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나 믿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건짐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이겨야 할 것들 앞에서 포기해 버립니다. 약속의 땅은 여리고 너머에 있습니다. 여리고를 정복해서 승리하지 못하면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올라가서 취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순종해서 올라가면 하나님은 이미 앞서 가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문제는 믿음으로 순종해서 나가느냐? 아니냐? 의 문제이지 앞에 있는 적의 수나 크기가 아닙니다. 내가 싸워야 한다면 그런 것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계산해 보아야 하지만 하나님이 싸우시면 이 땅의 군대는 지푸라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만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고,
일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리고 앞에서 그들을 두려워하고 겁을 먹고 낙심했지만 사실 더 겁을 먹고 있는 이들은 ‘여리고 사람들’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소식이 이미 그들 모두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며 슬픔이 블레셋의 거주민들을 사로잡으리니 에돔의
족장들이 놀라고 모압의 용사들이 벌벌 떨며 가나안의 거주민들이 다 녹으리이다. 그들에게 두려움과 무서움이 임하매 주의 크신 팔로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잠잠하리니, 오 [주]여, 주의 백성 곧 주께서 사신 그 백성이 건너기까지 그리하리이다.] (출15:14~16).
겁을 먹은 상대를 제압하는 일은 아주 쉽습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이 임해서 간담이 다 녹아내린 가나안 주민들 앞에서 도리어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믿음은 담대함과 용기를 주지만 불신은 두려움과 절망을 줍니다. 영적 전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죄와 싸워 이기는 것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을 무너뜨리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오늘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 사건에서 ‘승리하는 믿음’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2세대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나아 갈 때 처음 전쟁에서 주신 이 승리는 모든 성도들이 이 땅을 믿음으로 살면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은 모든 영적 사건의 모델이 된다는 점을 유념하십시오.
30절입니다.
[믿음으로 그들이 이레 동안 여리고 성벽
주위를 돌매 성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30).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을 하나 공격하는 일은 많은 희생과 피해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특히
요새화 된 성을 공격할 때는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성 위에서 화살을 날리고, 뜨거운 물과 기름을 쏟아 부을 때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성을 공격하는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쟁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일러 주셨습니다.
이레 동안 여리고 성벽 주위를 도는 것이 전부입니다. 성을 기어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드는 것도 없고, 앞에 같은 크기의 토성을 쌓는 일도 없습니다. 지하 터널을 파든가 트로이의 목마처럼 성안에 잠입할 수 있는 기발한
책략도 없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레 동안 성벽 주위를 돌았습니다. 여호수아 6장을 보십시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도시를 에워싸고 도시 주위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할지니라. 일곱 명의 제사장은 일곱 개의 양 뿔 나팔을 들고 언약궤 앞에서
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너희가 도시를 일곱 번 돌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 뿔 나팔을 길게 불어 너희가 그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온 백성은 큰 소리로 외칠지니라. 그리하면 그 도시의 성벽이 납작하게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각 곧장 자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니라.] (수6:3~5). 이게 전부입니다. 만약 광야에서 불신으로 인해 죽은 출애굽의 1세대들이 여리고 성이 이런 방식으로 쉽게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칼과 창으로 무장한 기병들, 잘 훈련된 보병들과 싸워서 죽이고 죽는 것이
아니라 단 한명의 희생도 없이 여리고 성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무도 겁을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미리 과정과 방법을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세대들에게 설명이나 설득을 통해 이해를 구하지 않으십니다. 미리 전개될 일들을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믿음으로(by faith)란 말은 ‘미리 과정을 다 알고’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해가 되고, 설득이 되고, 승산이 있고, 가능성이 높아야 움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행하지 말고, ‘믿음으로’ 행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알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과정, 방법 등을 미리 보여 주거나 알려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싸우리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면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말씀 외에 다른 어떤 설명이나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면 그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할 때 승리는 선물이요,
탈취물입니다. 믿음으로 행할 때 원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을 때 [여리고]는 하늘에 닿은 거대한 성곽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앞을 가로 막는 홍해가 있습니까? 아니면 여리고 성이 있습니까? 반드시 건너야 하고, 반드시 넘어야 하지만 나에게는 어떤 힘도 능력도 지혜도
없습니다. 사람이 언제 절망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의 도움의 손길을 전혀 찾을 수 없을 때 절망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과 시도조차 허무하게 실패할 때 “끝이다!”하며
절망합니다. 사실 이 때가 믿음의 출발입니다.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기도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죽으면 죽으리라, 망하면 망하리라!”고 결단하며 기사회생을 노렸는데, 정말
죽게 생기고, 정말 망하게 될 때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듯이, 여리고
성 앞에서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13:5b)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는다면 그 믿음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요, 공급책이 되고 남을 것입니다.
다시 30절입니다.
[믿음으로 그들이 이레 동안 여리고
성벽 주위를 돌매 성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30). 여리고 성 주변을 매일 돈 것은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개구멍이라도 찾겠다는
심정으로 성의 약점을 살피기 위해서 돌았던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에
돌았습니다. 이레 동안 성을 도는 데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은
[... 그리하면 그 도시의 성벽이 납작하게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각 곧장 자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수6:5b) 고 말씀하셨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성을 도는 일이 성을 무너져
내리게 하는 일이란 점을 믿었습니다. 성을 도는 일은 믿는 사람들이 할 일이고, 성을 무너뜨리게 하는 일은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성을 무너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울부짖고 금식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신들의 기도와 믿음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시도합니다. 정작 믿음으로 순종해서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는 것을 믿음인 줄 아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홍해를 가르는 일은 주님이 하실 일이고, 잠잠히 기다리다가 홍해를 건너는 일은 성도들이 할 일입니다. 성을 무너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성을 도는 일은 성도들이 할 일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고, 용서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일입니다(요일1:9).
나의 필요를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아뢰는 일은 우리의 일이고, 필요를 공급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빌4:6). 우리의 염려와 모든
일들을 맡기는 것은 우리의 일이고, 우리의 생각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잠16:3).
“믿음으로”란 말을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들의 지혜와 방법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리고 성을 돌지만 그 성이 지진이 나서
무너질지, 성이 저절로 붕괴되어서 무너질지 이론적 설명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들의 생각과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예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현상과 법칙 내에서만 무엇을 생각할 수 있지만 주님은 자연적 법칙을 마음대로 조절하실 수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을
갈라 버리시는 일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 지진이나 불이나 강풍이 아니라 이레 동안 성을 돌고
마지막 날에 함께 고함을 질러 무너뜨리는 일은 사람들의 지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요나를 아시리아로 옮기실 때 고래를
사용하셨고,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죽이는데는 다윗의 물맷돌을 사용하셨으며, 굶주린 오천 명의 청중을 먹이시는 데는 어린 소년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용하셨으며, 광야의 엘리야를 먹이시는 데는 ‘까마귀’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자 굴에 갇힌 다니엘을 구하시고, 불 속에 던져진
히브리 청년들을 구하는데 주님이 사용하신 방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주님은 파라오의 군대와 싸우는 대신 홍해를 열어 피하게
하셨지만 이번에 여리고 성은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원리는 동일합니다.
“믿음으로”
이것이 전부입니다. 성도의 생활 원리는 “믿음으로!”란 한 마디가 전부입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이나 무기 체계로는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를 비롯한 출애굽 2세대들이 가진 놀라운 힘은 무기와 말과 돈의 힘이 아닌 ‘믿음의 힘’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데 필요한 것은 잘 훈련된 2백만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이레 동안 그 성을 돌 수 있는
순종이었습니다. 피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주님의 명령대로 그 성을 이레 동안 돌 때에 여리고 성은 납작하게 무너집니다. 주님이 주신 계시와
조명대로 행할 때 승리는 주어집니다. 이외의 다른 모든 방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힘과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대할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그런 환경에 놓이면 무력감을 느낍니다. 단지 한 가닥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미쳐 버릴 지경에 도달합니다. 성도들은 이런 때에 놓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립니다. 우리 앞에 놓인 이런 환경들, 시험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귀한 승리를 주시고자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사탄의 견고한 요새를 예표하는 성입니다. 성경의
인, 지명 가운데 예표적 진리를 보여 주는 예들이 많이 있는데 예를 들면 이집트는 세상, 파라오는 마귀, 에서와 그 족속인 아말렉은 육신을
예표합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며, 반드시 무너뜨려야 할 견고한 요새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행하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이는 우리의 전쟁 무기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통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라.)] (고후10:3~4).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이레 동안 돌게 하시고, 언약궤와
제사장들을 앞세우신 것은 이런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한 가지 진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들의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홀로 모든 일을 다 행하실 수 있지만 성도들의 믿음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며, 성도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믿음으로 그들이 이레 동안 여리고 성벽 주위를 돌매 성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30)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이 이레 동안 여리고 성벽 주위를 돌았기 때문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일을 ‘성도들의 믿음’ 때문에 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을 때 주님은 자신이 행한 모든 일들을 ‘믿는 자’의 공로로
돌리십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이런 예를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느니라”(마9:22),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9:2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눅7:50). 주님은 자신의 능력과 행위를 모두 믿는 자의 의로 돌려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보여 주는 예입니다. 믿음은 능력이요, 믿음은 풍요한 자산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사건은 ‘영적 전쟁을 승리하는 법’에 대한
모범 교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구원의 대장이십니다. 주님은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5:57). ‘승리를 주시는...’
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승리는 믿음의 결과요, 보상입니다. 승리는 하나님이 믿음에 따른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 주님은 성도들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패배자로 살 것인가? 승리자로 살 것인가?는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고후2:14). 자, 보십시오. 우리를 이기게 하는
것은 우리의 힘과 지혜가 아닙니다. 조직이나 인맥이나 돈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에게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승리를
주십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믿음을 더 크게 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믿음이 자라나기를 간구하십시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를 통해 드러나시는 것이 곧 승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 성품과 인격과 지혜가 드러나는 통로입니다. 믿음은 신격이 우리의
몸을 통해 드러나게 하는 수단입니다. 자, 다 같이 믿음을 위해 기도합시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