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 같이
말씀: 히브리서 11:27
요절: 히브리서 11:27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롬4:17)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식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조상으로 삼았느니라.”고 말씀하자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내 사라의 몸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자신의 몸 역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인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조상으로 삼았느니라.”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아브라함의 신앙을 “그가 믿은 하나님은....”(롬4:17)이라고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 를 물으면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가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모세 역시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신앙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 같이”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고, 귀로 들리지 않지만 우리는
마치 느낌 이상의 확신으로 살아야합니다. 바울은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딤전 6:16)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고후5:7)고
단언합니다.
27절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를 버렸으니 이는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냈느니라.](27). 본문은 모세의 믿음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믿음으로
모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2. 믿음으로 모세는 이집트를 버렸다.
3. 믿음으로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냈다.
모세가 처음부터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구원자로
자처했으나 자기 형제들이 자신을 받아 들이지 않고, 자신이 한 일이 탄로가 났을 때 두려움 가운데 도망을 쳤습니다. 출애굽기 2:15에 보면
[이제 파라오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으나 모세는 파라오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 거하며 우물 옆에 앉았더라.](출2:15)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나름대로 자기 형제들을 돌아 볼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처하며 행한 일이지만 이스라엘의 영웅은 고사하고
파라오를 피해 이집트를 떠나야 하는 ‘도망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스데반은 이 사건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이에 모세가 이 말을 /듣고/
급히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가 되고...](행7:29a). 잘 보십시오. 모세의 나이 40세 그는 왕의 진노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려 40년이나 미디안 땅에서 지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보내실 때까지 장인의 양을 돌보는 ‘양치기’에
불과했습니다.
모세가 어느 날 불타는 가시떨기 나무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명을 받아 이집트로 돌아 왔을 때 그는 더 이상 파라오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미디안에서 40년의 목자 생활이 모세를 두려움이 없는 용사로
만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는 늙고, 말은 둔해지고, 파라오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습니다. 모세를 변하게 한 것은 40년이란 오랜
세월이 아닙니다. 광야란 척박한 환경이 그를 ‘강한 야성의 지도자’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밤에 서리와 이슬을 맞는 고된 목자 생활이 그의
성격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장인이나 아내나 자식들이 모세를 딴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모세를 변화시킨 것, 파라오를
두려워하던 그에게 담대함과 용기를 준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출3:12)는 약속을 주심으로 모세는 더 이상 이집트의 파라오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서 학문을 익혔다거나 자신의 사명이나 정체성을 확립했다거나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것처럼 무술을 배웠다거나 ‘초원’을 누비는
기병대를 조직했다는 등의 변화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를 변화시킨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 오시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이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이집트로 돌아 올 때 가진 것은 늙은 노구에 손에 잡은 지팡이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모세가 가는 곳은 어디나, 언제나 함께 계셨습니다. 모세는 이
“보이지 않으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믿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20b)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모세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약속을 굳게 붙들고 ‘보이지 않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삶이란 “보이지 않으시는 이를 보는 것 같이”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이집트로 왔습니다. 사람들은 80세의 늙은
모세와 그의 손에 든 지팡이만 볼 수 있었지만 모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보다 훨씬 강하고 크신 분과 함께 왔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 올 때 다시 이집트의 왕자로 ‘복권’이 된 것이 아닙니다. 파라오의 사면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모세의 신분은
노예 백성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의 형제들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조용히 살겠다고 돌아 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습니다. 당시 이집트에서 ‘히브리 백성’들은 매우 중요한
국가 자산이었습니다. 이들은 종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짐승보다 더 유용한 재산이요, 이집트의 농사, 건축 등 각종 노역의 중요한
노동력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왕이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려 가겠다, 그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나겠다고 하면 그를 대적해 진노할 것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모세를 향해 진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선배의 미움을 받거나 비위를 거슬리는 것도 부담스러워합니다. 직장
상사와 같은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진노를 사는 일은 부담 정도가 아니라 극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합니다. 사회 생활을 해 보시는
분들은 누구나 조금씩은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위 권력층의 눈 밖에 나거나 진노를 산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모세는 ‘태양의 아들이요, 자칭 신’이라고 칭하는 파라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이집트가 히브리인들을 자기 나라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히브리 백성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리(實利) 뿐만 아니라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전제 군주 국가에서 왕의 진노에 기름을 끼얹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맡은
사역자로서 모세를 보십시오. 출애굽기 4:22-23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전하라고 준 말씀, 모세가
파라오를 처음 만나 전한 말씀, 출애굽기 5:1, 3. 이 두 말씀을 비교하면 모세는 여전히 파라오 앞에서 두려움이 있었고,
제대로 사역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모세의 믿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자라났습니다. 그는 왕의 진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버릴 정도로 믿음이 크고, 강하게 자라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 안에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점점 자라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씨앗과 같아서 자라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나고 흥왕하더라.](행12:24).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우리는 말씀을 통해 자라가야 합니다(벧전 2:2).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 자라나야
합니다(엡4:15). 모세가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버렸던 것은 믿음이 자라난 결과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일을 하다보면
믿음은 자라나고 강해지고 커지게 마련입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강한 믿음이 아니더라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믿고 왕의 진노를 견디어 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적은 믿음’, ‘약한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조금씩 순종의 길로 접어 들면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믿고 견딜 때 믿음의 결과들이 나옵니다. 믿음의
열매들이 맺힙니다.
27절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를 버렸으니 이는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냈느니라.](27).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믿음을 가질 때 나타나는 믿음의 결과 중 한 가지는 한 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은 365회나 "Fear Not" (두려워 말라)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마10:31)
이런 말씀은 수없이 많습니다. 믿음이 없는 한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고 말했지만 성경은
‘육신의 약함과 무익함’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풀, 안개, 꽃, 질그릇 등이 사람에게 사용되는 비유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은 두려움 속에서 떨면서 그것을 감추며 사는 것이 전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몸은 죽여도 혼(魂)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할 때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려니와 누구든지 [주]를 신뢰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25).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이 사람을 두려워했을 때 아내 사라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사람들을 두려워함으로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했을 때 이웃 나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도망을 가서 보니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하는 말을 듣자 더 무서웠습니다. [다윗이 이 말을 마음 속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자기
행동을 바꾸고 그들의 수중(手中)에서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휘갈겨 쓰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21:12~13). 어릴 때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요, 전쟁에서 져 본 적이 없는 백전불패의 용사가 한번 두려움에 빠지자 그는 미치광이 흉내를 내며 목숨을 구걸해야 했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 사람의 마음속에는 근심, 불안, 걱정, 염려,
두려움, 불평이 솟아나옵니다. 기침과 콧물이 나오고, 이마의 열이 날 때 우리는 ‘감기 증상’이라고 진단하듯이 우리 마음속에서 두려움이 생길 때
우리는 ‘불신의 증세’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믿음만이 이런 모든 증세들을 진정시키고, 영적 건강을 회복케 해 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빌4:13a),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치욕을 선택했을 때 그에게 닥친 것은
‘파라오의 진노’였습니다. 고대 왕정 국가에서 ‘왕의 말’은 곧 법이요, 왕의 진노는 사망입니다.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使者)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가라앉히느니라.](잠16:14). [왕의 진노는 사자의 울부짖음 같거니와 그의 은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잠19:12). 전제 군주 국가에서 왕의 진노를 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과 패망을 부르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속에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담대함을 줍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복음서에서 그렇게 겁 많고 연약하던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는 완전히 딴 사람들로 변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채찍도, 감옥도, 죽음도 그들을 두렵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고난 당하는 것을 피하거나 무서워하기보다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이들의 변화에는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성령’을 받고, 권능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믿음을 통해 담대함을 지녀야 합니다.
모세가 이집트를 버렸다는 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을
버렸다’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정죄하고,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바울은 모세가 이집트를 버린 것처럼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상에 동화되거나 세상의 친구가 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과는 서로 못 박아 죽이는 그런 관계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이미 “악한 현 세상”이란 주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미 선고가 떨어졌고 단지 집행만을 남겨 놓은 상태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이집트를 버렸다는 것은 이집트의 발전된 문명, 학문,
종교, 각종 정치 제도 등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음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뛰어난 정치 지도자라면 군대를 조직하고 분쟁이나 전쟁을 일으켜서
영토 분할을 요구하거나 자치를 요구합니다. 이집트의 영토, 이집트 내에 있는 곡물, 각종 천연 자원과 여러 가지 제도 등을 포기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예 이집트를 버리고 그 땅을 완전히 떠나 버린 것입니다. 400 년 동안 집과 터전을
마련 해 두었던 것을 모두 버리고 유월절이 지난 아침 일찍 이집트를 떠나 버렸습니다. 이집트에 있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다.
우리는 장차 이렇게 세상을 떠날 때가 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
하늘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 우리는 세상을 버린 채 하늘로 들림을 받을 것입니다. 롯의 부인과 같이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저 하늘로 들림을 받아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도 세상에 있던 것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세상을 떠나는 일에 아무 미련도 아쉬움도 없습니다. 주님이 늦게 오셔서 우리가 이 땅에서 죽는 순간도 이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만
남겨 둔 채 이 세상을 떠날 때 눈물도 아쉬움도 후회도 있을 것이 없습니다. 모세가 이집트를 버렸듯이 우리는 이 세상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임명을 받았고, 주와 복음을 증거 하도록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믿음으로’(by faith) 이집트를 버린 모세는 믿음으로 세상을 버린 모든 성도들의 본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냈습니다. 본래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b)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모세 역시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3:18,
[모세가 이르되, 간청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하니](출33:18). 그 때 주님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이 오실 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를 뵙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도 “보여 주소서.” 간청한 이가
있습니다. [빌립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니] (요14:8).
빌립의 이런 요청에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나는 것’(롬10:17)입니다. 보는 것이 믿음의 필수 조건이라면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 주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보는 것은 믿음과 상관이 전혀 없기 때문에 보여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신체적 기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강렬한 태양 빛을 똑바로 직시할 수 없습니다. 대 낮에 몇 분 정도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눈이 멀어 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핵이 폭발할 때 그 빛을 똑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나안으로 폭발하는 빛을 보면 눈은 멀어 버립니다. 빛이신 하나님은 이런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빛이십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 보고는 살 자가 없습니다. 설령 본다고 해도 그 실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표적을 구하고, 꿈이나 환상이나 신묘한 빛이나 기타 등등의 어떤 가식적인 현상을 통해 하나님을 보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보고 싶은 소원은 주님을 믿을 때 생깁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면 할수록 속히 주님을 만나고 싶은 재림의 소망으로 충만할 분입니다. 주님을 보고 싶습니까? 이는 주님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파라오의 진노를 견디어 냈고, 40년간 이스라엘의 목자 생활을 견디어 냈습니다. 주님을 시험하고 불평하고 자신을 향해 대적하고
반역하는 이들을 향해 온유함으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믿은 믿음의
능력이요, 신앙 생활의 비결입니다. 우리 역시 모세와 동일한 믿음의 영을 가지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지만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주님은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사랑하는 제자 도마를 향해,
[...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요20:29)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역시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보지 못하나 그분을 믿으며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니](벧후1:8)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보지 못하지만 믿습니다. 보이지 않고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믿습니다. 모세가 그러했듯이 보이지는 않지만 늘 주님의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의식하며, 믿을 때 이 세상의 모든 환란, 어려움을 다 견딜 수
있습니다. 모세가 파라오의 진노를 견디어 낼 수 있었듯이 우리는 세상의 모든 대적들의 공격과 비난과 모욕과 험담과 박해를 능히 견딜 수
있습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One man with God is
majority 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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