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과 피 뿌리는 것
말씀: 히브리서 11:28
요절: 히브리서 11:28 모세가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행한 것들은 모두 표적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행한 열 가지 재앙 또는 열 가지 표적이란 말을 씁니다. 첫째는 지팡이가 뱀이 되는 표적이었고, 둘째는 나일 강의 물이 피로 변하는 것이었고, 셋째는 온 이집트에 개구리가 가득 차는 표적이었습니다. 이 표적들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며, 현대 과학이나 철학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지만 당대의 파라오의 술사들도 흉내를 내고 따라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모세가 행한 권능의 표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며 마음은 완고해 졌습니다. 네 번째 표적은 ‘티끌이 재로 변하는 것’이었는데 이때부터 이집트의 술사들이 흉내를 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뚜렷한 분리가 일어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전혀 일어나지 않고 오직 이집트 사람들에게만 재앙으로 닥쳤습니다. 다섯째는 파리, 여섯째는 재가 티끌이 되어 종기로 변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져 이집트의 들판을 강타하고 가축과 인명의 거대한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여덟째는 메뚜기 재앙이었는데 우박이 내릴 때 미쳐 싹이 나지 않았던 작물들이 메뚜기 재앙으로 끝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아홉 번째 재앙은 ‘어둠’이 임했는데 3일 동안이나 이집트는 깊은 흑암 가운데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다 모세를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권능이요, 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통해 모세가 이런 저런 기적을 행하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믿음과 표적을 연관시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불신을 해결받기 위해서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주님께 끊임없이 표적을 구했습니다(마12:38-39, 16:1). 여러분은 헤롯을 아십니까? 그가 예수님을 보고 크게 반가워했던 기사가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내자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크게 반가워했고, 오랫 동안 보고자 했다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진리를 듣거나 물어 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 크게 반가워하니 이는 그가 그분에 대해 많은 것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 그분께서 행하시는 어떤 기적을 볼까 바랐음이더라.] (눅23:8). 불신자들은 표적, 기적, 능력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본다고 해서 ‘믿음’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표적이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준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고 이집트 백성들까지도 모두 크고 강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표적이 믿음을 준다면 예수님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은 걸출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표적과 믿음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성경의 예를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성경 어디에도 믿음으로 모세는 나일 강을 피로 만들었다는 식의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행하시기 전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린 양을 잡아서 죽여 피를 문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모세가 한 일은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나일 강을 피로 바꾸고, 온 이집트에 우박이 내리고, 빛이 없는 어둠을 만드는 일에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을 잡고 문에 피를 바르는 일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집트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통해 일어나는 권능의 표적들을 지켜보면서 놀라기도 하고, 신기하고,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흥분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파라오와 이집트가 쩔쩔 매는 것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표적을 보는데 믿음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도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일이 터질 때마다 소식을 듣고, 표적들을 보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그들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월절’을 지키고 그 피를 문에 뿌리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그는 유월절(逾越節)과 피 뿌리는 것을 지켰으니](28a). 이 말은 모세가 유월절과 피 뿌리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며, 그 말씀을 믿음으로 지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에 행한 아홉 가지의 표적은 믿지 않는 이집트를 향해 행한 것입니다. 그들이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고, 그들을 심판하면 그만입니다. 반면 ‘유월절과 피 뿌리는 것’은 믿음이 필요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행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행위와 업적과 노력과 지혜와 단결된 힘으로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잇따른 국가적 재앙을 초래한 하나님의 심판에 지친 파라오의 명령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율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교리’를 확증해 주셨고, 그 진리를 생생하게 역사의 현장에서 체험적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것을 지켰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영적, 역사적 의미를 알려 주고 믿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죽음과 피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말해 주고 믿게 했듯이 모세 역시 그러했습니다. 요셉은 죽으면서 자기 형제들에게 [나는 죽으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사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50:24b)고 확신에 찬 장엄한 유언을 남겼지만 이미 세월은 일, 이십년이 아니라 장장 400년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자기 뼈를 이집트에 남겨 두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올라갈지니라.](창50:25)란 외침이 잊혀질만한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찾아 오셨고, 연속적인 아홉 번의 재앙으로 이집트를 벌주고 계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여 내실 것이란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자, 출애굽의 밤 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에 행한 일은 ‘유월절’을 지키고 그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신약의 갈보리 십자가를 가장 구체적으로 잘 예표하는 사건이며, 죽음과 피의 구속이란 위대한 영적 진리를 조명해 주는 일입니다. 모세는 ‘어린 양의 죽음과 피의 속죄’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행위에 있지 않고, ‘어린 양의 죽음과 피’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 양을 준비하고, 유월절 규례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믿음을 통해 ...지켰으니”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요14:23)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정해 주신 명절이나 절기, 어떤 날을 지켰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모세의 믿음은 ‘어린 양의 죽음과 피를 통한 구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대속의 죽음’이 필요하며,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일은 권능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 일은 돈이나 학문적 지식이나 종교적 체험이나 하늘의 권능이나 세상의 권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목축업’으로 생계를 꾸리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을 잡아 피를 흘려서 그 피를 문에 바르는 일은 별로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식구가 적거나 양이 없으면 이웃집과 함께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이었습니다.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고, 믿으면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일은 이전의 재앙 즉 표적과는 달리 ‘믿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하고 죽음이 따릅니다. 다른 표적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아도 그들에게 직접적인 손해나 피해가 임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믿음의 여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월절을 지키는 것과 피를 뿌리는 일은 ‘믿음으로 하지 않을 때’ 그들의 가족과 당사자에게 곧 바로 죽음의 재앙이 일어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을 3월 10일에 양을 준비해서 3월 14일 저녁에 그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에 뿌리고,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습니다. 날로 먹거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반드시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은 것이 있으면 불로 태워야 합니다(출12:5~10). 이런 일은 이전에 해 본 일도 없거니와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절기나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이런 일을 행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이것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 그들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과연 이 일이 온 이집트에 임할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 줄 능력이 있는지 등은 믿음으로 행했을 때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주를 향해 단을 쌓거나 희생물을 드리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양을 잡아 희생을 드리는 것을 가증이 여겼기에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땅에서 그런 일을 했다가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출8:26). 모세는 40년간 이집트에서 자랐고, 그들의 풍속과 종교와 미신 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실행하라고 온 이스라엘에게 가르쳤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가증이 생각하는 그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집집마다 양을 잡고 그 피를 흘려서 문에 뿌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힌두교를 숭상하는 인도에서 어떤 무리들이 집집마다 소를 잡아서 먹고, 그 피를 문에 뿌린다면 그 집은 아마 박살이 나고 말 것입니다. 중동의 회교 국가들에서 어떤 무리들이 돼지를 잡아서 그 고기를 먹고, 그 피를 집의 대문에 위 아래, 좌우로 칠해 놓는다면 그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이곳 미국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어서 ‘개’를 잡아먹는 것을 아주 가증이 여깁니다. 개고기를 먹는 일은 아주 가증한 일이고, 야만인들이 하는 일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가 이곳에서 개를 잡아먹고 그 피를 집에 뿌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곧 바로 경찰서에 잡혀 갈 것이고, 정신 감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일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양을 잡아먹고, 양의 피를 뿌리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주님이 주신 말씀을 받아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일을 하도록 가르치고 명령했는데, 이는 이집트를 자극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집트를 떠나거나 버릴 각오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 밤에 어린 양을 잡아먹고, 피를 뿌리면 그 다음 날은 이집트를 떠나거나 이집트 사람들에게 맞아 죽거나 이집트 사람들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간단한 일 같지만 믿음이 필요한 일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그런 믿음입니다. 여기서 살 것이냐? 떠날 것이냐? 갈림길에 선 선택과 결단의 행위입니다. 이집트에 살고자 하면 그 밤에 하나님께 죽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살고자 하는 자들은 이집트인들에게 죽거나 쫓겨납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밤에 있던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거나 이집트를 떠날 마음이 없었던 이들은 ‘양을 잡고, 피를 뿌리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이 두려워서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이들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영적 중간 지대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세상을 버리고,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세상을 택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죽습니다. 모세는 이집트를 버렸고, 유월절을 지킨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이집트를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b)고 했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고전5:7)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피를 믿는 이들이라면 이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28절입니다. [믿음을 통해 그는 유월절(逾越節)과 피 뿌리는 것을 지켰으니 이것은 처음 난 것들을 파멸시킨 자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28).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왜 이런 명령을 하셨습니까? 첫째, 온 땅에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온 땅에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처음 난 것을 다 치십니다. 또 이집트의 모든 신에게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 임할 때 하나님은 “산으로 피하라, 지하로 숨으라, 어느 성에 모두 모여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산성이나 지하 요새나 철통같은 경비가 있는 왕궁이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높은 산에 있는 바위나 동굴 사이에 숨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숨어 있든 다 찾아내시고, 다 심판하십니다. 주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하는 길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대로 ‘양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내가 그 밤에 이집트 땅을 두루 지나가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또 이집트의 모든 신에게 심판을 집행할 것임이라. 나는 [주]라.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거하는 집 위에 있어 너희를 위하여 표가 되게 할지니라.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12:12~13). 둘째, 표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린 양의 피는 ‘그 피가 ...너희를 위하여 표가 되게 할지니라’ 피는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자 주목하십시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피를 보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피는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피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볼 때에...”입니다. “너희가 느낄 때에”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느낌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감정적 느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통한 속죄는 장차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실 십자가의 피, 보배로운 피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피’입니다. 피 아래 있으면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이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지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외모, 재산, 인물 됨됨이를 전혀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주님은 출애굽을 통해 구원과 속죄의 위대한 교리를 완전히 정립해 놓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날까지 기념하고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믿음을 통해 그는 유월절(逾越節)과 피 뿌리는 것을 지켰으니 이것은 처음 난 것들을 파멸시킨 자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28). 모세가 믿음을 통해 유월절을 지킨 것은 놀라운 표적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 이집트 땅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막아 줍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어린 양의 피가 온 이스라엘의 집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주고, 안전하게 지켜 주었듯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대 환란과 지옥의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 (요3:18).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아홉 가지 재앙을 이집트에 내려 보냈지만 파라오의 마음은 점점 완악해졌습니다. 주님은 열 번째 재앙으로 파라오의 마음을 꺾고, 이집트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죽음과 피”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과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를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7,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고전5:7b).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어린 양의 죽음과 피]란 진리를 몸소 보여 주기 위해 주님은 ‘유월절’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후로 이집트는 구약의 전 세대에 걸쳐 유월절을 지켰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기다렸습니다. 침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로 침례를 주면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 그들은 ‘어린 양’이란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 출애굽에 나온 어린 양에 대한 규례를 살펴 봅시다. 첫째, 유월절에 사용될 소재는 어린 양입니다(출12: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요1:29). 유월절 규례를 통해 이스라엘은 대대로 영속적으로 어린 양의 죽음과 피에 대한 속죄를 확고하게 정립하고 그 믿음을 후대에 전수했습니다. 둘째, 어린 양은 양떼들 가운데서 취한 것입니다(출12:5).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시고, 자기 백성들의 하나로 오셨습니다. 천사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성정, 동일한 형체, 동일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히2:14-17). 셋째, 양떼 중에서 취한 어린 양은 온전히 분리되었습니다(출12: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사람들 중에서 취해져 분리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제사장께서는 우리에게 합당한 분이셨으니 그분은 곧 거룩하시고 해가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들로부터 분리되시고 하늘들보다 더 높이되셨느니라.](히7:26). 넷째, 어린 양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출12:5). 우리 주님 역시 ‘점없고 흠없는 어린 양’(벧전1:19)이셨습니다. 다섯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출12:6). 우리 주님 역시 죽임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창세 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13:8)이셨습니다. 주님의 피는 ‘영존하는 언약의 피’입니다. 주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제거하고 깨끗하게 하는 피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피는 죄의 속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여섯째, 어린 양은 죽어서 희생 제물이 되었습니다(출12:27). 주님은 유월절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5:7에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느니라.](고전5:7b)라고 말합니다. 일곱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후에 불에 태워졌습니다(출12:8,9). 우리 주님 역시 죽임을 당하신 후에 지옥의 고통을 맛 보셨고, 실제로 그 혼이 불타는 지옥으로 가셨습니다. 여덟째, 어린 양의 뼈는 꺽이지 않습니다(출12:46).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그 뼈는 하나도 꺾이지 않으셨습니다(요19:33-36). 아홉 번째, 그 어린 양은 온전히 다 먹어야 합니다(출12:8-9). 주님은 자신의 살을 영적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양식과 음료이시기 때문입니다. 밖에 있는 피가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양의 살은 우리 속에 양식으로서 만족을 줍니다. 양의 고기를 먹을 때 허기가 채워지고,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28절입니다. [믿음을 통해 그는 유월절(逾越節)과 피 뿌리는 것을 지켰으니 이것은 처음 난 것들을 파멸시킨 자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28). 여기서 두 가지 요점은 [죽음과 피]입니다. 죽음과 피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죽지 않으시고 피만 흘렸다던가, 죽으시긴 했는데 피는 조금도 흘리지 않고 깨끗하게 죽었다는 등은 속죄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자아를 처리하는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자기 육체의 몸으로’ 우리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드리셨습니다(골1:22).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 양에 대해서 듣고,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대로 어린 양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양, 다른 집에 뿌려진 피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집집마다 각자 혼의 수대로 계산해서 양을 잡아야 하고, 각자의 집에 피를 뿌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남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유월절을 지키고, 어린 양의 피를 뿌린 사람들은 살았습니다(출12:12-13). 피가 없는 이들은 모두 멸하는 자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출12:12-13). 양을 가진 이들은 이웃과 나누어야 했습니다(출12:3). 우리는 복음을 마땅히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양식을 혼자 독차지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 진리를 끝없이 캐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진리의 보화들을 부지런히 캐내시기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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