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모세는
말씀: 히브리서 11:24-26
요절: 히브리서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이란
말을 들을 때면 아주 갓난 아이 때 석달 동안 친부모와 산 것이 전부인 모세에게 무슨 믿음이 있었을까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분명히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는 모세의 유모가 친 어머니 ‘요게벳’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에서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의무는 아버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도 자녀에게 역시 믿음을 전수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모세의 믿음은 두말할 나위
없이 친 어머니로서 유모 역할을 했던 ‘요게벳’을 통해 심어진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어 그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믿음의 행위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보십시오. 그는 아버지가 그리스인이었지만(행16:1) 외조모와 어머니로 이어지는 믿음을
이어받아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서 각 지역에 장로들을 임명하였고, 바울의 동역자로서 믿음의 전투를
함께 수행했습니다. 디모데후서1:5,
[내가 네 속에 거짓 없는 믿음이 있음을 회상(回想)하노니 이 믿음은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었으며 /이제/ 네 속에도 있는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딤후1:5). 위대한 믿음의 어머니를 통해 그 믿음이
전수된 대표적인 예입니다. 꼭 집에서 애를 무릎에 앉혀서 교육해야만 교육이 아닙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젖을 떼자마자 사무엘을 성전에
갖다 맡겼지만 아들을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했습니다. 한나가 애를 낳기 위해서만 기도했던 것이 아니라 애를 성전에 맡긴 후에도 주야로
기도했을 것이란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모세가 자라난 이집트의 왕궁은 믿음의 성장에 좋은 영적 환경이
아닙니다. 그는 후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회당이나 성전에서 율법을 듣고, 배우고 자란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가 배운 것은 이집트 왕궁에서
이집트 사람의 지혜였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느니라.](행7:22). 이집트는
세상 학문과 철학 뿐 아니라 우상들이 들끓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나이 40이 되었을 때 자신의 인생 행로를 바꾸는 믿음의 선택과
결단을 내렸습니다. 모세가 단순히 객기에서 나온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술에 취해서 한 행동이었든가, 한 순간의 영웅 심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면 성경은 결코 ‘
믿음으로 모세는’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자신의 인생에 미칠 영향, 입게 될 손해, 자신이 겪게 될 고난 등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왕궁에서 파라오의 공주의 딸이라
불리는 것이야 말로 세상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던 권세와 영광을 지니는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는 변방의 약소국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에 있는
제국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보장된 지위와 부와 권세를 버리고 노예 민족으로 살던 히브리 민족이 되겠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미친 짓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현재 누리던 삶의 수준, 지위 보다 높아지려고 하지 아래로 내려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장교에게 한 계급을 내리라고 하면 차라리 군복을 벗으면 벗었지
그렇게는 못한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한단계 지위를 내리고, 급여를 조금이라고 내리면 누구라도 분노하거나 절망합니다. 사람은 낮아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곳 미국에서 자란 한인 2세나 3세들을 보십시오. 자신이 미국인인 것처럼 생각하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 별로 좋아 하지
않습니다. 한국이 미국보다 크고 강한 나라라면 당연히 좋아하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왕자에서 노예 민족 히브리 백성이
되는 것은 낮아짐의 극치요,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나이가 들었을 때 스스로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24-26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히11:24-26).
모세의 선택과 결단의 근거는 오직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살기로 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왕궁에서 지금까지 살아 온 방식대로
살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좀 지혜롭게 왕궁에서 파라오의 딸의 아들로 살면서 히브리인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들은 돈과 권력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방법을 믿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왕자로 살면 그는 무엇을 해도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한 일은
첫째, 거절입니다. 그가 포기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24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24). 그는 자신의 육신의 신분을 거절했습니다. 세상의 지위를 거절했습니다.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했다는 왕자의 지위와 신분을 거절한 것입니다. 장차 이어 받을 수 있는 왕좌를 포기한 것입니다. 이 때 모세의 나이가
40이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정확히 사십이 되매 그의 마음에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들더니] (행7:23).
그는 40세에 자기 형제들을 돌아 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로서 살며, 왕위를 물려받거나 정치 권력자로서 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정체성, 신분, 사역 등에 대해서 이미 들었고, 알았고, 믿고 있었음을 반증해 줍니다.
모세는 당시 이집트의 노예들로 살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형제라는 것을 알았고, 그들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분이 비천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 때 혼란을 느낍니다.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히브리 노예 백성들이 자기 형제들이요, 자신이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말씀에 따른 정확한 지식입니다.
[그는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그들을 건지려 하심을 깨달을 줄로 그가 생각하였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더라.] (행7:25).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선택받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을 이미 알고 믿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도 이 사실을
알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사역이 무엇이지 알고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형제들을 돌보고자 했지만 백성들은 그가 누구인지, 그의 사역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신분과
사역을 알고 이스라엘을 구속하려고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요1:11).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의 믿음은 세상이 주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는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 볼 때 가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것들을 거절하고 세상이 주는 것들을 쫓아갑니다. 그래서 선택해야 할 것들을 버리고, 거절해야 할 것들을 선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눅7:30)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죄를 지적할 때,
“너희가 그분을 넘겨주고 빌라도의
눈앞에서 그분을 거절하였으니”(행3:13)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대신 살인자 빌라도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신 분 곧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달라고 구하여](행3:14). 이것이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죄인들의 선택의 능력입니다.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살인자 바라바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불신자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기도하며 구하는 것 가운데도 대부분은 구하지 말아야 할 것들입니다. 기복 신앙, 표적 등은 성도들이 거절해야 할
것들입니다. 의, 경건, 거룩함 등을 구해야 할 때 성공, 축복, 부(돈), 명예, 행복 등을 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들과
거절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선택의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5절입니다.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25). 믿음으로 모세가 행한 두 번째 포기(거절)는 죄의 쾌락들입니다. 그는 파라오의
궁전에서 안락한
삶을 포기했습니다. 육신의 안락이란 곧 죄의 쾌락입니다. 보통
왕자들이 왕궁에서 누릴 수 있는 음주, 가무, 연회 등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화려한 것입니다. 산해진미에 궁녀들을 동원해 온갖 쾌락들을
즐기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사람들은 꿈에도 그런 생활을 해 보는 것이 소원이고, 그런 곳에 한 번이라도 참석해 보는 것이라고 하지만 모세는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집트 왕궁의 왕자 대신 히브리 노예를 선택한 것입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한 일은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미친 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에게도 이 선택은 탁월한 선택이 아니라 ‘미친 짓’입니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합니다.
인생의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도달 목표가 전혀 다릅니다. 저는 믿음의 사람들이 좋은 직장을 버리고 선교사나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모세와 직접 비교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동일한 믿음의 영으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는 일은 깊은 감동과 더불어 도전을 줍니다. 복음을 들고 생의
전부를 낯선 타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택하는 이들을 봅니다. 이들은 모세의 마음 속에 있던 동일한 믿음,
동일한 영을 지닌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목하십시오. 모세가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을 포기했다고 해서 그의 인생에 즐거움이 없고, 기쁨이 없고, 평안과 안식이 없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도들이 세상의 sports,
screen, 각종 entertainment을 즐기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삶의 낙이 없습니까? 성도들은 죄의 쾌락이 주는 어떤 기쁨이나
즐거움 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을 영구적으로 누리고 삽니다. 코메디 프로그램이나 만화나 영화나 만담을 통해서 몇 분 동안 낄낄 웃는다고 그
속에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성도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죄의 쾌락이 결코 주지 않는 기쁨, 즐거움, 평안 등이
성도들 안에 있습니다. 성도들은 죄의 쾌락대신 주의 즐거움, 주의 기쁨으로 마음이 가득 채움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고난이
있다면 ‘고행, 금욕’과 같은 허무나 죽을 맛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기쁨이 솟아나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베드로는 이런 기쁨을
[넘치는 기쁨](벧전4:13),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니”(벧전1:8)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는 갖가지 오락이 넘칩니다. 음악, 스포츠, 영화,
게임, 마술, 다양한 놀이 시설들이 사람들에게 쾌락을 제공해 준다고 유혹합니다. 음식점에서는 좀 더 맛있는 음식을, 유흥 업소에서는 좀 더
자극적인 무엇을 제공합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세대의 특징은 이런 쾌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잠시 뿐인 죄의 쾌락’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딤후3:4b).
몇 몇 고상한 체 하는 죄인들은 지적 쾌락, 정신적 쾌락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모두 다 ‘죄의 쾌락’입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가
땅에서 쾌락 가운데 살며 방탕함에 빠져 살육하는 날에서와 같이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5:5)고 경고합니다. 쾌락은 성도의
마음 속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의 숨을 막아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눅8:14). 저와 여러분이 단호하게 ‘죄의 쾌락’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할 때 죄의 쾌락보다 몇 백배 크고 강한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6절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26).
모세가 믿음으로 포기한 세 번째는 이집트의 보화입니다. 이집트의 보화라는 것은 이집트에서 그가 소유했던 재산들입니다. 국가가
곧 왕의 소유였던 시절의 왕자는 나라의 절반이 자신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재벌이라 불리는 어떤 사람도 모세가 가졌던 유,
무형의 자산과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판단했을 때 이집트의 보화보다는 그리스도의 치욕이 더 큰 재물이란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경제학자들의 자산 평가 방법으로도 내릴 수 없는 가치 판단입니다.
이곳 미국에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는 ‘가치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0만원으로 투자를 시작해서 현재 40조원의 부를 일구어 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리스도의 치욕과
이집트의 보화와 어느 것이 더 큰 재물인지 물어 보십시오. 모세는 그리스도의 치욕이 이집트의 보화보다 훨씬 더 큰 재물로 판단했습니다. 그의
이런 판단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에 근거한 판단은 세상의 지식으로 판단할 때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매우 정확한
판단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판단은 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만약 그대로 왕궁에 살다가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시체는 방부 처리되어서 거대한 피라미드 속에 안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믿음의 삶을 살았을 때
그의 시체는 천사장 미가엘이 하늘로 옮겼습니다(유1:9). 그는 분명히 벧브올 맞은 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묻혔지만 그의 돌무덤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신34:6).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후에 그는 하늘에서 엘리야와 함께 변화산에 영광스럽게 나타나 주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은 삶입니까? 또 다른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파라오의 궁전에 살았다면 사람들이 만든 예술품이나 조각들을 원없이 구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종 건축물들을 지을 수도 있고 이집트의 술사들이 행하는 다양한 마술들을 재미있게 구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의 삶을 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행하는 갖가지 표적들과 이적들을 직접 행했습니다.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행하는 마술의 능력보다
몇 백배, 몇 천배 이상 되는 강력한 이적들이 모세의 손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믿음으로 산 삶이 결코 파라오의 궁전에서 산 삶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세가 파라오로서 이집트에 살았다면 왕의 진미를 다 맛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혀에 맛을 잃어 버릴 정도로 각종 요리를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의 삶을 살 때 이집트의 파라오가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하늘의 만나를 먹고, 반석을 갈라 생수를 마십니다. 만나와 생수를 마시는 삶이 궁중 요리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궁중에서의 모세와 광야에서의 모세를 비교할 때 무엇으로 비교해도 광야의 모세가 훨씬 더 낫다는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꼭 죽고 나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살았다면 나일 강 위에서 보트를 타는 것이 고작이었겠지만 그가 믿음의 삶을 살 때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걸어서
건넜습니다. 이런 영광스런 체험, 능력은 이집트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치욕을 더 큰 보상을 여기고 믿음의 삶을 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롬8:17~18). 믿음의
삶을 살 때 주어지는 보상은 엄청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 모세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26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26). 모세의 눈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있었습니다.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받는 보상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보상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것에
관심이 적거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보상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롯처럼, 데마처럼 현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상에 관심을 둔다면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보상은 구원과 달리 주님을 섬길 때 받는 것입니다.
[너희가 상속의 보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이는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이니라.](골3:24). 보상은 행위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報償)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 행위에 따라 주리라.](계22:12). 주님께서 주실 보상에 관심을
두십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