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거절하는 믿음

말씀: 히브리서 11:23
요절: 히브리서 11:23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예”“아니오”란 반응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든지 “예”라는 순종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아니오”하는 거절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벨부터 요셉까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예”하며 순종한 사람들이라면 오늘 나오는 모세의 부모인 [아므람][요게벳]은 세상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모세 역시 세상을 거절했던 “아니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곳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Say No to Drug"을 가르칩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No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How to say No"란 책도 있습니다. “Say No to 70”라고 해서 아이들이 반드시 No 라고 해야 할 것들 70가지를 알려 주라는 내용의 책자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성도들이 No라고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씀해 줍니다. 성경은 죄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육신에 대해서, 마귀를 향해서 Say No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예와 아니오]를 정확히 말하지 못합니다. 주님 앞에서 예하고 순종해야 할 순간에는 ‘아니오’ 해 버리고, ‘아니요’라고 해야 할 때는 예라고 해 버립니다. ‘순종하는 믿음’ 만큼 중요한 것은 ‘거절하는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릴 때부터 ‘거절하는 믿음’을 배웠습니다. [그가 버터와 꿀을 먹음으로 악을 거절하며 선을 택할 줄 알게 되리니] (사7:15). 아이들이 크기 전에는 선악을 알지 못하듯이(신1:39), 영적 어린 아이들 역시 선악을 잘 분별하지 못하며, Yes 와 No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부지런히 말씀을 공부해서 지각을 단련해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우리가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 될 때 분명하게 의사 표시를 할 수 있고,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할 수 있습니다.

무지는 불분명한 선택을 낳고 덕분에 책임이 모호해집니다. 죄에 대한 자각이 없어지고, 회개에 대한 필요성도 잘 모르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을 들으러 산에 올라온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해 [오직 너희 의사 표시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 무엇이든지 이것들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느니라.](마5:37)고 했습니다. 우리는 손해가 따르더라도 진리에 대해서는 항상 “예”라고 해야 합니다. 고난과 박해가 있더라도 우리는 분명하게 “예”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면 죄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신사 참배를 거절했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거절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성경 신자들은 철저히 ‘흑백론자들’입니다. 선악의 2분법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생활합니다. 성경 신자들은 절대적 가치관의 소유자들이지 상황 윤리에 따라 상대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주님 앞에서 “예”라고 했던 것들이 환경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보다 손해가 클 것 같아서 “아니오”로 바뀌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육신에 따른 결심은 얼마든지 취소하거나 바꿀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번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단은 예했다가 ‘아니오’ 하거나 ‘아니오’ 했다가 ‘예’할 수 없습니다. 전도서에 솔로몬은 [너는 네 입이 네 육체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지 말며 또한 천사 앞에서, 그것이 실수였노라, 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인하여 분노하사 네 손으로 행한 일을 멸하셔야 하겠느냐?](전5:6) 했습니다. 주님 앞에서 예와 아니오를 번복하거나 취소하거나 실수였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이렇게 작정하였을 때에 내가 경솔히 하였겠느냐? 혹은 내가 계획한 것들을 육신에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고는 아니오, 아니오,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니 너희를 향한 우리의 말은 예 하고는 아니오 함이 아니었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너희 가운데서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는 아니오 하신 분이 아니었으며 그분 안에는 예만 있었느니라.](고후1:17-19). 자,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우리는 예와 아니오란 분명한 선택, 결단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통해 영적 분별력이 없다면 우리는 [예와 아니오]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언제든지 예했다가 아니오 하거나 아니오 했다가 예로 변절되어 버리게 됩니다.

늘 믿음의 본으로 기록된 모세의 아버지인 아므람과 요게벳을 보십시오. 이들은 참으로 힘든 세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죽고 난 후 이집트에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일어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혔고, 그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고된 노예 생활로 흙 이기는 일과 벽돌 굽는 일과 들에서의 온갖 섬기는 일에서 그들의 삶을 괴롭게 하니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섬기게 한 일이 다 엄격하였더라.](출1:14). 이집트의 파라오는 일만 지독하게 시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난 사내아이들은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출애굽기 1:16, [그가 이르되, 너희가 히브리 여인들을 위하여 산파의 직무를 행할 때에 해산대 위의 여인들을 살펴 보아 그것이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릴지니라, 하였으나](출1:16). 이는 참으로 무서운 명령입니다.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의 씨를 완전히 멸해 버리고자 한 것입니다. 지상에서 히브리 민족을 완전히 없애 버리려는 이런 계획은 오늘날 회교 근본주의자, 과격주의자들의 꿈만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어 온 전례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적그리스도 역시 이스라엘을 이 땅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자의 씨’를 멸하고자 이집트의 파라오를 사용해서 ‘살인’을 일삼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그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파라오는 다시 명령을 내렸습니다. 출애굽기 1:22, [파라오가 자기의 온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너희는 아들이 태어나거든 다 강에 던지고 딸은 다 구원하여 살려 주라, 하였더라.](출1:22). 이는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과 같은 그런 학살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이 후에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이런 때는 “수태하지 못하는 자와 해산하지 못한 태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눅23:39)고 할 수 있는 그런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성도들이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전쟁의 때, 고난의 때, 세상이 성도들을 핍박하는 때에 성도들의 삶에 필수 요건은 ‘믿음’입니다. 불같은 시련이 닥칠 때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나 권세나 지위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어려움을 겪고 나서 배우는 깨달음이 “우리에게도 힘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도 정치력이 필요하다” 그런 정도입니다. LA 폭동이 일어난 후 이곳에 사는 한인들이 절실히 배웠다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에게도 정치력이 필요하다”였습니다. 그래서 시민권을 취득하고 투표장에 나가 표를 행사하고, 잡지를 발간해서 여론을 모으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배우는 한 가지 진리는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입니다.

어둠이 깊은 시대에도 하나님은 어딘 가에 ‘믿음의 사람’을 통해 은밀히 일하십니다. 이들이 바로 ‘아므람과 요게벳’이었습니다. [아므람의 아내의 이름은 요게벳이니 레위의 딸이요,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레위에게 낳았더라. 그녀가 아론과 모세와 그들의 누이 미리암을 아므람에게 낳았고](민26:59). 출산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한 시대, 좋은 그런 때에 이들은 아론, 미리암, 모세를 낳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출애굽의 핵심 인물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 보여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지속적으로 하십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애들 키우기 어렵다는 이유로 아이를 거의 낳지 않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단지 교육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애를 안 낳거나 적게 낳습니다. 자기 개발을 해야 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출산을 주저하는 시대입니다. 정부의 가족계획에 No라고 하지 못하고 동조해서 아이를 하나, 둘만 낳고 셋 이상을 낳은 사람들을 개, 돼지 보듯 하던 그런 성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교회 역시 정부 정책에 그대로 동조해서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설교를 하지 않고 침묵해 버렸습니다. 이는 성경적 믿음이 성도들 안에 전혀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가 아이를 낳던 시기는 어떤 시대였는지 보십시오. 태어나면 죽거나 잘 살아봐야 이집트의 노예입니다. 그런 와중에 이들은 자녀들을 낳았고 믿음으로 양육했습니다.

2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에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니 이는 아이가 특이한 것을 그들이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히11:23). *이 부분이 수동태 문장임에 유의하라. 믿음으로 모세는...숨겨졌느니라. 히브리서 11장에서 수동태로 되어 있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일반적 어법으로는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현재 우리말 번역)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믿음으로 모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태어났을 때 숨겨졌습니다. 누군가 믿음으로 모세를 숨겨 석 달 동안 숨겨 주었는데 모세의 부모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파라오가 무섭지 않았다거나 혈육의 정으로 숨긴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숨겼습니다. 믿음으로 숨겼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숨기라고 말씀하셨든지, 계시를 주셨든지, 마음 속에 확신을 주셨든지 그들 속에는 아이를 숨겨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의 계시에 따라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은 믿음으로 모세를 숨겼고, 아이를 죽이라는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부모의 믿음의 행위로 인해 생명을 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부모에게 ‘모세’에 관해 말씀을 주신 것이 있었기에 이들은 믿음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으로 이런 예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 대해 들은 말씀이 있었습니다.이삭은 자녀들, 특히 야곱에 대해서 받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노아는 삼손에 대해서 들은 말씀이 있었고, 사가랴는 침례 요한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었습니다. 태어날 자기 자식들에 대해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질 때 이들은 그 말씀을 믿고, 행동하면 됩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숨은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믿음으로 무엇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숨겨졌다는 것은 믿음의 주체 즉 믿음으로 숨겨준 이들에 의해 행해진 행위, 결과가 모세에게 미쳤음을 말해 줍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놀라운 영적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모세와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무엇을 했다는 능동적 행위의 결과로써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누군가 믿음으로 행하신 분이 계시고, 그 믿음으로 건짐 받고, 구원받고, 씻음 받았다는 식의 수동적 행위입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자기 부모의 믿음으로 숨겨지고, 보호받았듯이 우리는 모두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숨겨지고 보호받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죄를 씻은 것이 아니라 씻음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믿음으로 건짐 받고, 깨끗해지고, 거룩해지고, ... 등등 모두 수동입니다. 이는 나의 믿음으로 무엇을 했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무엇이 된 것입니다. 모세는 그 부모의 뜨겁고도 깊은 믿음의 수혜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수혜자입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믿음을 열매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가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죽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인 믿음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으로 가 보십시오. 모세의 부모인 아므람과 요게벳이 믿음으로 행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그들의 아이를 숨겼습니다(출2:2). 왜 숨겼습니까? 아이를 죽이기 싫어하는 부모의 애끓는 혈육의 정(情)이었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부성애나 모성애보다 강하고 큰 사랑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세를 숨긴 것은 혈육의 정이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이 아이에 대해 받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숨겨서 키운 아이들을 몇 볼 수 있습니다. 모세, 요아스(대하22:11-12), 예수님이 그러합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의 명령을 피해 숨어서 커야 했고, 요아스는 아합의 딸로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였던 아달랴로부터 6년 동안 숨어서 지냈고(대하22:11-12), 예수님은 헤롯의 눈을 피해 숨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이들은 모두 위대한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이들은 갈대로 궤를 만들었습니다(출2:3). 마치 방주를 연상케 하는 궤를 만들어 모세를 거기에 두고 강에 흘려보낸 것은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은 아이를 죽으라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서 보낸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이 아이를 택하시고, 주셨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구원받도록’ 보낸 것입니다. 모세란 이름은 ‘물에서 건짐을 받은’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구원을 받아 영원히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셋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살펴 보았습니다(출2:4)-미리암. 모세의 누이였던 미리암은 갈대 궤를 따라가며 모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보기 위해 살폈습니다. 파라오의 딸에게 구원 받는 것을 보자마자 곧 바로 히브리 유모를 구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모든 환경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넷째, 유모가 되어서 젖을 먹였습니다(출2:7-9).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에게 젖을 먹이며 유모로서 자식을 양육했습니다. 어머니 요게벳은 유모로서 모세의 영적 정체성을 확립해 주었고, 후에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처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모세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 그는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형제들인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하기를 자처했습니다. 이는 그가 어릴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배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민으로서 성도의 의무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가 국가와 법,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서로 상충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란 문제입니다. 거의 모든 성경 신자들은 정교 분리를 선언합니다. 국가와 교회(신앙)의 분리는 미국의 기본 노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 국가는 교회에 간섭하거나 굴복시키려 듭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시민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성경적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의 히브리 산파들이나 모세의 부모는 국법을 어긴 범법자들인가? 아니면 국가의 부당한 법과 권력에 대항해야 하는가? 그런 문제입니다.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법에 복종해야 합니다. 로마서 13:1-2에 [모든 혼들은 위에 있는 권력들에게 복종할지니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권력이 없으며 이미 있는 권력들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력에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거역하는 것이니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정죄를 받으리라.] (롬13:1~2) 말씀합니다. 로마 시대에 로마 황제는 신의 대리자 또는 자칭 신을 자처했지만 그런 중에서도 성도들은 국가의 법에 복종했습니다. 로마를 전복하거나 민주화를 하자고 시위를 하거나 정당을 만드는 따위의 일을 전혀 하지 않았고 모든 권력들에 복종했습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성도들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 존경(벧전2:17)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경하라.] (벧전2:17). *왕을 존경하라. 네로와 같은 폭군도 존경해야 합니다. 민주당의 지지자라도 공화당 출신의 부시를 존경해야 합니다. 잠언에는 [내 아들아, 너는 [주]와 왕을 두려워하고 늘 변하는 자들과 상관하지 말라.](잠24:21)고 말합니다.

성도들의 또 하나의 의무는 세금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서 가장 모범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을 것을 주되 공세 받을 자에게 공세를, 관세 받을 자에게 관세를, 두려워할 자에게 두려움을, 존경할 자에게 존경을 주라.](롬13:7).

세상 권력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게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하고, 우상이나 국가 종교를 강요하거나 전통이란 이름으로 미신을 조장하고 믿게 하는 따위의 일을 할 때 교회와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마10:23). 이는 초대 교회 때부터 가장 일반적으로 애용했던 방법입니다. 박해를 피해 산으로 들로, 계곡으로 숨어 들어가 생활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왔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이 도시에서 핍박하면 다른 도시로 도망하라... ] (마10:23a) 하셨습니다.

2. 주의 명령에 따르고 고난을 받으라. 기독교인들은 불법과 불의에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저항하지 않는데 이것을 ‘비폭력 무저항’이라고 합니다. 사도들은 “...우리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5:29) 외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채찍과 감옥을 피했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때리면 맞고, 감옥에 넣으면 들어갔고, 죽이면 죽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면서도 세상의 법에 불복종했는데 ‘비폭력 무저항’으로 일관했습니다.

3, 필요하면 죽임을 당하라. 계17:6.

부모로서의 믿음에 대해서 얻는 영적 교훈

우리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울 수 있도록 악한 세상으로부터 숨겨라. 어린 아이 때 악으로부터 보호 할 수 있도록 숨기고, 젖을 먹임으로 양육하라. [또 너희 아버지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육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때가 되면 아이들을 세상에 내 보내야 한다. 그 때는 구원자가 되라. 복음 선포자요, 구령자가 되게 하라. * 우리는 안전하고 튼튼한 궤를 만들어야 합니다. 건전한 지역 교회에 속하게 하십시오. 영적인 가정을 일구십시오. 그리고 자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항상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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