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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믿음으로 야곱은


말씀: 히브리서 11:21
요절: 히브리서 11:21  

성경에서 일생동안 자신의 지혜와 힘을 의지해서 산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 야곱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으로 야곱은”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믿음으로 살기까지 그의 일생이 얼마나 험난하고 어려웠는지는 자신의 입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내 순례 길의 연수의 날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삶의 햇수의 날이 얼마 못되고 험악하였으며 내 조상들이 순례하던 때에 그들이 누린 삶의 햇수의 날에 미치지 못하나이다, 하고](창47:9). 그의 나이 130세에 파라오 앞에서 한 이 말 속에 자신의 인생 여정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60세에 에서와 야곱이란 쌍둥이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삭이 아들들을 축복할 때 야곱의 나이는 77세였고, 아버지 이삭은 137세 때였습니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을 빼앗아 도망갈 때까지 그의 인생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려 20년이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순례자가 아닌 도망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자식들로 인해서 여간 골머리를 썩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들에게 찢겨 죽었다는 자식들의 거짓 보고를 통해 그는 죽음과 같은 슬픔을 느껴야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복을 상속 받은 후에도 축복된 믿음의 삶은 고사하고 오히려 본격적인 고난의 삶을 걷게 되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생활은 노예와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속임수의 대가였던 야곱도 라반에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노라.](창31:7)고 말합니다.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20년 동안 철저히 속이고 벗겨 먹었던지라 야곱은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야곱은 말하기를,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짐승에게 물려 찢긴 것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내가 손실을 담당하였으며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께서 내 손에서 그것을 요구하셨나이다. 내가 이와 같았으니 곧 낮에는 갈증이 밤에는 서리가 나를 쇠약하게 하고 내 눈에서 잠이 떠났나이다.](창31:38~40)라고 자신이 당한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이것이 에서의 눈을 피해 아버지 집을 떠난 야곱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신이 떠났던 아버지 집 이삭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야곱의 나이 97세에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 오던 중에 천사와 씨름을 하고, 환도 뼈가 부수어지고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믿음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나이 147세에 행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야곱은 요셉과 요셉의 아들들을 두고 축복을 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부분을 “믿음으로 야곱은...”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야곱은 평생 동안 믿음으로 행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야곱의 일생은 험난했고, 육신적이었습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형 에서와 싸우고 다투었습니다. 태에서 나올 때는 형 에서의 뒷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그 이름이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발꿈치”(창25:26)란 뜻이고, 속이는 자 또는 사기꾼(창27:36)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름 그대로 형의 발꿈치를 잡고, 그를 속이는 삶이었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기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빼앗기자,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옳지 아니하니이까?”(창27:36)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였지만 리브가의 배속에서부터 다투고 싸웠던지라 평생 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일찍이 주님으로부터 들은 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동생 ‘야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두 민족이 네 태 속에 있노라. 두 종류의 백성이 네 속 중심에서부터 나누어지리라.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하겠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시니라.](창25:23).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택하심을 받았고, 에서보다 더 강한 민족이 될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특별 계시를 받아 태어난 사람, 주의 택하심을 받아 태어난 사람은 남다른 인격과 힘과 능력과 지혜 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당연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점지를 받고 태어난 사람, 그런 운명의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한 것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인가? 날 때부터 남다른 면이 있다, 차원이 다르다, 외모는 아니더라도 지혜나 능력이 탁월한 것이란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배속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태어난 야곱이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한국에서는 ‘발목을 잡는다’고 하고, 히브리 언어와 문화에서 ‘발꿈치를 잡는다’고 하는데 남의 출세나 성공을 방해하고 가로 채는 ‘나쁜 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리브가는 내심 야곱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삭 역시 60세 얻은 쌍둥이 아들 둘을 키우면서 이들의 성품, 능력, 지혜, 장래성 등 모든 것을 면밀히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여느 가정의 아버지들이 다 그러하듯이 자식들을 눈여겨보지 않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특히 복의 상속자를 택하는데 부주의할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택함을 받은 야곱을 볼 때 그에게 어떤 특별한 영적인 면이나 좋은 성품, 경건함이나 의로움 등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택하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에게 어떤 비범한 지혜나 재능, 능력을 기대해 볼만도 한데 야곱에게 보이는 것은 육신적일 뿐 아니라 죄악된 성품의 소유자였던 까닭입니다. 형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요, 후에는 아버지까지 속이는 자였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려는 자였습니다. 그는 사기꾼에다가 속임수에 능하고 집착과 탐욕이 강한 그런 자식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상속자로 삼고 싶은 아버지는 없을 것입니다.

야곱이 능력이나 지혜나 성품이나 인격 면에서 형을 압도하는 동생이었다면 “역시 주님이 택하신 자는 다르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혀 거리낌없이 야곱에게 복을 상속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야곱은 좋게 볼래야 볼 수가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호세아는 말하기를, [야곱이 모태에서 자기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았고 또 자기 기운으로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참으로 그가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분께 간구하였도다.](호12:3~4a). *‘자기 형의 발뒤치를 붙잡았고, 자기 기운으로’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이는 야곱의 인격, 성품 등 그의 모든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힘, 자신의 머리로 산 사람이지 결코 성령의 능력, 믿음의 힘으로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결국 아버지 이삭은 택함 받은 야곱이 아니라 장자인 에서에게 복을 상속해 주고자 결단했습니다. 이삭은 육신의 눈이 멀고 영적인 분별력이 결여된 점이 있지만 우리는 차마 야곱에게 복을 상속해 줄 수 없는 그런 아버지 이삭의 마음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로서 간교하고 죄악된 성품을 지닌 야곱, 술수와 꾀가 많고 이기적인 아들 야곱에게 차마 복을 상속해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판단이요, 한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택함을 받는 데는 충분한 인격과 성숙함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을 만한 무엇인가를 타고 태어나거나 그런 자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저런 더러운 인간, 저런 죄악 된 사람을 하나님이 택하실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을 택한 이유는 바로 그가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요,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자, 죄 많은 자, 사기꾼, 약한 자, 어리석은 자, 능력이 없는 자를 택하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불의하신 것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되 에서는 미워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는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음이니 그런즉 그것이 원하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고, 달리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며 오직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 (롬9:13~16). 하나님의 택하심은 사람들의 택함 기준과 너무나 다릅니다.

때로 성도들은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은혜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결함 많은 형제자매들을 접할 때, 허물 많은 목회자들을 볼 때, 죄악 가운데 넘어지는 영적 지도자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저런 사람을 사역자로 부르거나 택했을 리가 없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저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이 아니라 마귀의 일꾼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말씀인 성경,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와 양떼를 저런 사람에게 맡겼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정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자꾸 행위, 업적, 능력, 지혜, 인격 등과 같은 외모를 바탕으로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빠지는 오류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아이들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으되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9:11)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 외모를 근거로 택하시거나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교사, 목회자, 복음 전도자를 부르실 때 외모를 따라 부르셨다면 박사 학위를 많이 가진 자들이나 교수나 학자들을 부르셨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이런 원리에 따라 하나님은 야곱의 타고난 성품과 기질과 상관없이, 그가 형과 아버지에게 행한 죄악과 상관없이 부르신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조차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야곱을 주님은 택하셨고, 부르셨습니다.

자,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고 자기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21). 이 장면은 창세기 48장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고 몸은 병들었을 때에 요셉의 아들들을 불러 축복했습니다(창48:20). 아버지 이삭은 눈이 멀어 에서와 야곱을 구분하지 못했지만 야곱은 눈이 멀었어도 요셉의 아들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정확히 구분했습니다. 육신의 눈이 멀고, 몸이 쇠약해졌어도 그의 영적 분별력은 조금도 무디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징계를 통해 믿음이 단련된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때 그가 보여 준 믿음의 행위는 놀랍습니다. 그는 아들 요셉이 오른 손을 장자인 므낫세에게 왼손은 에브라임에게 올려 주기를 원했지만 야곱은 손을 엇갈리게 올려 놓았습니다. 그의 팔은 십자가의 모양이 되었고, 동생을 앞에 두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 역시 장자인 므낫세가 더 많은 복을 상속받기를 원했기에 아버지를 제지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아이가 맏/아들/이니 아버지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매](창48:18). 그러나 야곱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의 아버지가 거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민족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진실로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큰 자가 되고 그의 씨가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창48:19). 남을 속이는 야곱이었으나 그는 이제누구도 속이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속지 않으며, 정확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라고 말하는 야곱을 통해 야곱이 이 일을 ‘믿음으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에는 왜 이렇게 자주 첫째가 아닌 둘째에게 복이 상속되는 것입니까? 아담의 아들도 가인이 아닌 아벨이 택함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아들 역시 장자인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이 택함을 받았고, 이삭 역시 에서가 아닌 야곱이, 야곱 역시 장자 르우벤이 아닌 요셉이 택함을 받았고, 요셉은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이 택함을 받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15:46에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15:46)고 말씀하는 까닭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아니라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육에서 난 자아, 옛 사람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을 수 없고, 영에서 난 새 사람 즉 두 번째 출생을 통해 난 ‘거듭난 자’가 하나님의 상속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구약의 예표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야곱은 이미 이 진리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는 눈이 멀었지만 첫째가 아닌 둘째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법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손을 교차해서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므낫세에게 왼 손을 얹아 당황하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요셉 역시 여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장자에게 모든 것을 계승해 주고 싶었고, 첫째가 많은 복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육신의 복, 세상의 복을 얻기를 원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란 성경적 진리를 알지만 여전히 영적인 복보다는 육신의 복을 갈구합니다. 기복 신앙이란 것은 첫째에게 더 많은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영이 아니라 육에 더 많은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오른 손과 왼 손을 교차해서 십자가의 모양을 만들고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복을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물려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첫 번째 출생을 폐기하고 두 번째 출생을 통해 거듭난 ‘새 사람’에게 모든 것을 물려 줍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고, 육신에 속하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고 영에 속합니다. 우리 주님은 육은 아무 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축복은 영적 출생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장과 풍성한 결실이 뒤를 따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지중해로부터 그 땅의 중심부를 종단하는 요단강까지 확장되었고, 번영과 풍요를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믿음으로 축복한대로 이들에게 넘치도록 응답해 주셨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고 자기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21). 믿음으로 야곱은 자기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했고, 믿음으로 경배했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지팡이 머리에 의지해서 경배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지팡이는 형 에서의 눈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던 때에 가져갔던 지팡이입니다. 살기 위해 외삼촌이 사는 밧단아람으로 떠나면서 야곱이 가진 것은 아버지 이삭이 준 축복과 이 지팡이가 전부였습니다(창32:10). 아브라함에게 장막과 제단이 있었고, 이삭에게는 장막과 우물이 있었다면 야곱에게는 지팡이가 전부였습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보여 주신 모든 긍휼과 모든 진리 중 가장 작은 것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르단을 건넜으나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창32:10). 야곱은 지팡이를 볼 때마다 지팡이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주님이 주신 것이란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의 지팡이는 평생 동안 그와 함께 했던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목자로서 양을 칠 때, 얍복 강가에서 홀로 남았을 때도 그의 손에 늘 함께 있었던 ‘지팡이’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후로 그의 지팡이는 단지 지팡이가 아니라 주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참으로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시23:4). 그가 말년에 지팡이를 의지해 경배할 때 그 지팡이는 주님이 평생토록 인도해 주시고, 안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주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음모를 꾸미거나 꾀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사람을 속이거나 하나님의 의도를 미리 짐작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쟁취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동안 그는 주님의 징계를 받았고 마침내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아들들과 손자들을 축복하며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과거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는 대신 손자들을 축복함으로써 장차 다가올 일들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야곱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는 죽을 때 믿음으로 자녀들을 축복하였고,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그가 지팡이를 의지해서 주님께 경배하는 이 모습이야 말로 인생의 말년에 사람이 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병상에서 의식 불명의 상태로 죽어가는 것이나 어느 날 사고로 순간적으로 죽는 것보다 자녀들을 모두 축복해 준 다음에 주님을 경배하며 죽는 것은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도 좋을 그런 아름다운 모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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